• 최종편집 2025-03-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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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슴]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14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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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5-01-20
  • [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1-14
  • [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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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4-12-17
  • [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1-22
  • 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1-21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치유의 십자가 - 마가복음 15장 21~39절
      십자가의 의미가 퇴색해가고 십자가가 조롱받는 이 시대에 우리는 힘써 십자가를 전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노래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하며 살자. 십자가는 상징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생명이고 영적 실체이다. 신앙생활의 비법이고 왕도이다. 그러나 오늘 무엇보다도 치유하시는 십자가를 전하고자 한다. 십자가는 치유하는 은혜이다. 주님께서 민수기 21장에 나타나는 놋뱀의 사건, 그 이미지를 사용하셔서 처음으로 직접 자신이 십자가에 달릴 것을 말씀하시는 대목이다. 십자가는 어떤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고 능력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이 스스로 상처를 입으신 치료자이다. 주님은 우리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인생의 고통을 친히 당하시고 맛보신 분이다. 그래서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다. 주님이 당하신 모진 고통과 아픔은 조목조목 우리의 치유와 연결된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아신다. 그렇다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무엇인가.   먼저는 육체적인 고통을 겪으셨다. 주님께서 채찍질 당하실 때 그의 온 살점은 찢어지고 뜯겼으며 가시관은 머리 피부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고통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사형 틀이었기 때문이다. 고통당하실 이유가 없는 그분이, 죄도 없는 주님이 말이다. 바로 나 때문에, 내 죄 때문에. 우리가 치유 받게 하기 위해서 그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므로 담대히 선언한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치유함을 얻는다.    둘째로는 정신적인 고통을 겪으셨다. 이 고통은 엄청난 내적인 고통이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오히려 구체적으로 말한다. 공생에 사역 속에서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에서 주님은 수없이 조롱받고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멸시의 눈초리 모욕과 수치심,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까지 조롱하는 마음의 상처를 너무나 심하게 받으셨다. 주님도 맘이 아프셨다. 죽을 만큼 아프셨고 쓰리셨다. 그런데도 십자가에 오르신 이유는 못나고 망가지고 병들고 상처받은 채로 정신적 공황과 무너짐 속에 아프게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이 시간 누구든지 마음이 아픈 사람은, 십자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치유되고 회복될 줄 믿는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고통을 겪으셨다.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는데 이 외침은 시편 22편 1절 말씀을 그대로 되뇌신 것이다. 왜 주님은 운명 직전의 그 결정적인 순간에 이 시편의 말씀을 생각하시고 그 고통스러운 입술을 열어 외치셨을까. 바로 그때 주님은 영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고 아버지가 자기를 외면하시는 것 같은 고통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그러신 것이 아니신가 싶다. 내 인생에서 내 사업에서 내 자식들에게서 떠나셨는가. 진정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세상으로부터도 내팽개쳐진 것 같은 상한 감정, 두려움이 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영적인 고통이 올 때, 신앙의 회의가 생길 때, 마음이 메말라서 쩍쩍 갈라질 때, 그냥 그 자리에 머무르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들기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믿음이 회복되고 예배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찬송이 터질 것이고 눈물이 회복될 것이다. 병이 치료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그 모진 고통들을 다 당하시고 그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치유의 십자가이다.  /하늘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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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9-09-06
  • [금주의 말씀] 맡겨야 할 근심, 해야 할 근심
    ▲ 이재영목사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에 이렇게 정의했다. “하고 싶은 일을 조금 못하고 입고 싶은 옷을 가끔 못 입는 정도의 재산에, 한 사람한테는 이기고 두 사람한테는 지는 정도의 체력, 반만이 손뼉을 치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현대인들 가운데 플라톤이 정의한 행복에 공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행복이 무엇이겠는가? 행복은 무엇인가를 완전하게 갖추어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은 실제로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다. 세잎 클로버의 꽃도 ‘행복’이다. 많은 사람이 행운을 찾기 위해 일상의 행복을 짓밟는 경우가 많다. 결국 행운을 잡으려고 하는 것도 행복하기 위한 것인데, 이미 주어진 행복을 밟아 버리고 행운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불행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근심이다. 근심이 가득한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사람이 하는 근심은 다 똑같은 근심이 아니다. 맡겨야 할 근심이 있고 해야 할 근심이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바울이 말씀하는 첫 번째 근심은 세상 근심이다. 세상 근심은 육신적인 근심을 말한다. 세상 근심은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파괴하는 쓰레기와 같은 것이다. 생활하다 보면 쓰레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쓰레기는 버려야 한다. 아무리 욕심쟁이, 구두쇠라도 쓰레기는 내다 버린다. 만약 쓰레기를 집에 그냥 두면 온 집안에 악취가 진동하게 된다. 우리가 계속 마음속에 근심이 있으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잠언 17장 22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 곧 세상 근심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육체까지 병들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세상 근심은 우리가 해야 할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야 할 근심이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근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근심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두 번째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세상 근심은 하나님께 맡겨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머리 싸매고 해야 한다.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생명을 다해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어떤 근심을 말씀하는 것인가? 그것은“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생기는 거룩한 근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더 잘 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교회를 잘 섬기고 부흥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께 더더욱 헌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이런 근심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세상근심은 우리를 죽이는 근심이기에 기도로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를 살리는 근심이기에 의도적으로 해야 한다.  /대구 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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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9-08-29
  • [금주의 말씀] 기도해야 하는 이유
    기도는 말과 함께 시작되는 것 같지만 사실 감정이나 본능과 함께 시작된다. 본능은 살고 싶고, 먹고 싶고, 잘되고 싶은 거다. 목사인 나 자신도 기도하면서 ‘내 신앙은 왜 이렇게 유아적인가 왜 나는 이렇게 부족한 것이 많아서 요구가 많은가?’ 종종 스스로를 책망하게 된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죽음에 사로잡힌 상태일 수 있다. 본능적인 욕구마저 없어진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드러내고 개방하고 자기의 현재를 모습을 인정하고 여는 것이다. ‘나 이런 문제 있어! 기도해줘!’ 때로 중보기도를 부탁할 때는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야 할 때도 있다.  오늘 말씀 1절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라고 한다.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먼저 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묶여 있는 그 문제에서, 눌려있던 어둠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라는 말씀이 조금은 부담스럽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용사로서 또는 믿음의 장수로 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장수하면 우리는 마치 총 맞은 동료가 쓰러져서 신음할 때 총탄을 뚫고 동료를 부둥켜안고 총탄을 헤쳐 나올 수 있는 특수요원을 연상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리더가 된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이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영적 전투는 항상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특수요원을 만들기 전에 먼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를 원하신다. 게릴라를 훈련시킬 때 왁자지껄한 시장에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인적이 없는 산에도 풀어놓는다. 그러면 뱀 잡아먹고 나무뿌리 캐 먹고 살아남아야 한다. 산속에서는 훈련을 포기하거나 다른 사람이 구해주길 바랄 수는 없다. 내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이것은 환자그룹에서 의사그룹으로 태어나는 과정이다. 이런 연단을 통과하기 위해 기도는 필수다. 이렇게 기도는 생존본능으로 시작되지만, 이 연단은 내가 먼저 일어나는 훈련이다. 빛을 발하며 남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일어나야 하는 과업이 먼저 성취되야 한다.    기도가 지속된다면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자기를 살피게 된다. 기도를 통해 어둠에 눌려 패잔병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다윗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며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시42:4)라고 자신을 탓하며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기도를 했다. 기도는 입고 있는 누더기를 벗겨 내는 것이다. 기도는 내가 축복의 자녀임을 알게 해 준다. 기도하면서 숨겨져 있는 것들이 드러난다. 숨겨져 있는 좋은 것, 나쁜 것들이 드러난다. 기도는 드러냄이다. 기도할 때 현재의 내가 누구인가를 말한다. 기도할 때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표현되어 나온다. 기도할 때 자신의 긍정적인 것 뿐 아니라 자신의 부정적인 것도 본다. 기도할 때 현실을 인정하게 된다. 기도할 때 나에 대한 하나님의 지지와 인도를 경험한다. 기도할 때 내가 떠밀리기보다 이끌려 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어떻게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없을까 궁금해 한다. 그러나 기도해 보면 기도가 정말 신앙생활하기 가장 편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이사야 60:2) 어둠이 땅을 덮었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렸다. 세상이 너무 어둡다.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거대한 계획 보다는 내가 먼저 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어둠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음하고 있는 것은 아니가?  신음하는 그 자리에서 나부터 일어나야 한다. 내가 일어나면 내 주위가 살아난다. 나부터 일어나야 한다.  /양지평안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8-12
  • [금주의 말씀] 호미와 낫의 기호학
    ▲ 허태수목사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에 식물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식물을 가꾸기 위해 땡볕에서 호미를 든다. 또한 우리는 식물을 위해 낫을 든다. 모든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식물을 가꾸기 위해 우리는 낫을 들고 덤불을 벤다. 우리는 호미와 낫이 주는 ‘이형동질’의 기호학을 문화의 디엔에이로 축적하며 살아왔다. 일찍이 문맹자를 놓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했다. 낫은 곧 인간의 ‘질화’이다. 단순한 공산품이거나 혹은 사물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었던 것이다. 낫이 날카로운 칼날을 지니고 있지만 사람을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없는 것은 그 모양이 ㄱ자처럼 구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낫을 잘못 휘두르다가는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이나 정강이를 찍는다. 생김새만 안으로 구부러진 게 아니라 그 칼날 역시 안쪽으로 나 있어서 남을 공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그러나 유목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는 서구사회의 농기구는 날이 밖으로 서 있고 그 모양새도 일자다. 창처럼 꼿꼿하다. 그러므로 서구의 농기구들은 금세 무기로 전환할 수 있는 공격 형태를 하고 있다. 유목이란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쟁기를 금방 무기화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서양의 낫은 죽음의 신이 들고 다니는 상징물이자 사람의 목을 베는 흉기였다. 옛 소련의 깃발에 새겨진 낫과 망치처럼 생활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민중들의 혁명수단인 무기로서의 공격성을 보이는 거다. 그러나 우리네 호미와 낫은 무기로서의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는 데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즉 칼이나 창의 끝을 구부리고 밖으로 선 날을 안으로 세울 때 비로소 농부의 연장, 낫과 호미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이 농기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보라! 서양 사람들은 보통 칼을 쓰듯이 안에서 밖으로 내미는 데 비해서 우리는 거꾸로 밖에서 안으로 감아 잡아당기지 않는가. 낫을 안으로 구부리고 그 날 끝을 덜 밀면 곧 호미의 모양이 된다. 자기 가슴으로 향해 있는 칼날, 이 철학적이고 기호학적인 것이 바로 낫이며 호미다. 그래서 호미질을 세게 하면 자신의 발을 찍게 된다. 안으로 구부러져 있는 호미의 생김새는 지평선으로 확산해가는 도발적 힘이 아니라 안으로, 뿌리로, 자기 자신으로 끝없이 응집해 들어오는 힘이다. 낫은 호미의 반대어가 아니다. 살생의 모든 무기가 곡식의 생명과 인간의 목숨을 공궤하는 도구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기호다. 설령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래도, 그 낫이 파랗게 날이 서 있어도, 남을 해치기보다는 자신에게 더 위험한, 그래서 남에게 사용하는 병장기가 아니라 나와 너의 목숨을 도모하는 상생의 도구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식물, 곧 모든 생명을 보듬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인간적 능력들과 힘을 다른 생명을 위해 사용해야만 한다. 제 생명 보존하기 위해 감사히 대해야 마땅한 다른 생명들을 파괴하는데 우리의 ‘낫’을 휘두른다면 그 칼날은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는 엄중하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보시기에 참 아름답다 하신 그 다른 생명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겸허히 자연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중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우리가 귀한 자녀이듯 하늘의 날고 기는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소중한 피조물들이기 때문이다. 각성하고 회개함으로 교회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길 기도한다. /춘천 성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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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9-08-11
  • [금주의 말씀] 우리 신앙의 현주소는?
      이 세상의 문화를 주도하는 강력한 두 사조가 있다. 기독교사상이 바탕인 헤브라이즘이라는 신본주의와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근간으로 하는 헬레니즘이라는 인본주의, 곧 구속사와 세속사라는 상충 되는 흐름이다. 그리고 인간 안에도 가인과 아벨로 대별되는 두 혈통이 존재한다. 인류 최초의 문명은 에덴동산의 발원지 중 하나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이 문명을 주도한 혈통이 가인의 후예들인데 그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높은 성을 구축한다. 대조적인 삶을 보여준 아벨의 혈통을 이은 셋의 후예들이 있다. 성경은 누가 누구를 낳고 얼마를 살다가 죽었다는 기록뿐이지만, 이들 안에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믿음의 씨앗이 심겨 있었고 때가 되니 그 씨가 발아 되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세기 4장 26절)는 싹으로 나온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이름을 불러 말을 건다”란 뜻인데 오늘날로 말하면 공적 신앙고백을 하면서 찬양과 기도가 곁들여진 형식을 갖춘 예배를 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아담이 그토록 고대했던 여자의 후손은 민족적으로는 유대인으로, 혈통적으로는 셋 계통으로, 사상적으로는 헤브라이즘을 통해 세속화로부터 그들을 보존하신 후 마침내 성령잉태로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구원을 완성하셨다. 구원과 함께 심판을 단행하심으로(창세기 6장 7절) 사랑과 공의도 보여주셨다. 이 홍수심판의 위기에 대해 창세기 6장 1~2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원인분석을 했다. 셋의 후예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가인의 후손들과 혼합되어 타락함으로 홍수심판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노아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 당시도 그렇고 오늘날의 위기 역시 타락한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타락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성경적이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도 진리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사사기 21장 25절) 살려는데 있다.  믿는 자들이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망각하고 방기하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된다.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해야 하며 빛은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을 밝혀야 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착한 행실로 건덕을 이루며 영광을 돌려야 한다. 현재 우리가 처한 정치, 경제, 외교적 위기도 의인 열 명이 없어서이다. 세상과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로마서 8장 19절)고 했다. ‘나타나기’가 영어성경엔 ‘manifestation’인데 이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해 완전히 회복 된 의인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신령한 성도(로마서 8장 14절)들의 출현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2~28절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고,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회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예고한다. 당초 하나님의 섭리가 복원되는 카이로스의 때로서 이런 자격조건에 가장 부합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일본의 경제도발과 열강의 각축장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고 해방시켜줄 또 다른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담이 기다렸던 여자의 후손, 모든 피조물들이 고대했던 메시아, 신구약 성경의 중심 주제, 인류 역사의 분기점인 B.C와 A.D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영화롭게 섬길 의인 열 명이 필요하다.  /예향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8-05
  • [금주의 말씀]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50만분의 1이라고 한다. 850만 명 중에 한 사람밖에 당첨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경마나 다른 카지노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 구조를 알면서도 사람들이 사행사업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미래가 불안전하니 한 번 대박을 터트려 인생 한번 바꾸어 보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탕주의요 요행 심리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쉽게 살아가려고 한다. 쉽게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한다.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냥 되는 것은 없다. 쉽게 이룬 것은 쉽게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한탕주의와 요행 심리는 세상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런 요행 심리를 가지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번 기도 잘해서 대박을 터트리려고 한다. 한번 헌금 잘해서, 한번 예배 잘 드리고 대박을 터트리려고 한다. 이런 심리는 신앙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일본 나라현에 가면 호류사라는 절이 있다. 이 호류사는 천 년 된 소나무로 지어졌다. 이 절을 1,400여 년 동안 대대로 지켜온 ‘궁목수’ 가문이 있다. 일본에서는 천 년 이상 갈 수 있는 절이나 궁궐을 짓는 목수를 ‘궁목수’라고 한다. 니시오카 가문이 바로 궁목수 가문이다. 이 가문에서는 후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천 년 이상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으려면 천 년 된 노송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나무로 건물을 짓는다면 모름지기 천 년은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궁목수로서 그 나무에게 면목이 서는 일이다” 이는 나무의 자연적 생명으로서의 수명과 목재로 사용된 뒤부터의 생명 연수가 같다는 뜻이다. 곧 견딤의 시간이 쓰임의 기간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천년을 견딘 나무니까 천 년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견딤은 인생이라는 나무의 강도를 나타내는 인생의 나이테이다. 견딤은 인생이라는 나무를 더욱 단단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과정이다. 소설가 박완서선생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에 남편을 병으로 잃고 넉 달 뒤에는 스물여섯 살 사랑하는 아들을 사고로 또 잃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한번은 잡지사 기자가 박완서 선생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다. “선생님, 그러한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것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가 고통에 대해 저항할수록 고통스러워진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만큼 쓰임 받는 것이다. 욥은 견딘 만큼 쓰임 받은 인물이다. 그는 온전한 사람이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이런 욥에게 갑작스러운 고난이 닥쳤다. 자녀들도 재산도 다 잃어버렸다. 건강도 잃어버렸다. 그의 아내마저 고통받는 욥을 보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까지 말했다. 그의 친구들도 욥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욥을 비난했다. 그 무엇보다 욥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장 10절) 욥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과정이 하나님께서 연단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욥은 이 연단의 과정을 잘 견디어 놓게 더 귀하게 쓰임 받는 인물이 되었다. 모세도 요셉도 다윗도 견딤을 통해서 쓰임 받았던 인물들이다.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 쓰임 받고 싶은가? 견뎌라.  /대구 아름다운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7-25
  • [금주의 말씀] 믿는다면 도전하라
    ▲ 김현수목사   우리 집에는 머리카락을 소중히 기르는 딸이 있다. 딸의 꿈은 공주다. 공주 중에서도 ‘라푼젤’이 되는 것이다. 라푼젤은 디즈니 만화영화에 나오는 머리카락이 긴 공주다. 그러니 머리카락을 더 소중히 여긴다. 머리를 오래 기르자 머리끝이 갈라지기 시작해 잘라야 할 때가 되었다. 아내가 딸에게 잘 설명하고 얼마나 자를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딸이 대답했다. “엄마가 정해주세요” 그래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머리카락이기에 나중에 후회가 안 되게 다시 물었다. 그러자 딸이 대답했다. “나는 엄마를 믿어요” 이 대화 속에서 딸이 많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녀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때는 두려움을 잘 극복할 때다. 딸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이제 그 두려움을 극복했다. 두려움을 극복했던 방법은 믿음이었다. 엄마에 대한 믿음이 두려움을 이기게 했다.  우리에게도 두려움이 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저하고 선택하려고 하지 않는다. 두려움의 끝은 뻔한 결말이다. 그러나 믿음은 뻔한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 믿음은 도전하는 인생으로 사는 것이다. 아브람은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그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편안한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뻔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편안한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전하지 않는다. 편안한 것만 찾아서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뻔한 결말만이 있을 뿐이다. 2014년 미국에서 택시 업체들이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소송의 대상은 ‘우버’라는 라이드 셰어링 서비스였다. 100년 넘게 변화가 없던 택시 업계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택시를 타기보다 우버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우버를 사용하는 이유는 편안함보다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용자에게 우버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우리가 도전해야 하는 이유는 도전할 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믿음이 좋아지면 삶이 편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믿음이 좋은 삶이 아니라 편안한 삶일 뿐이다. 믿음은 편안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 그가 편안한 삶을 원했다면 뻔한 결말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믿음을 가지고 도전했다. 그 도전 때문에 아브람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도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도전할 때 하나님을 경험한다. 도전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를 통해 믿음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맹모삼천’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바르게 교육하기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말이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도전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예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은 환경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지금 있는 환경이 나의 미래를 만든다. 예배의 자리에 있는 사람과 세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75년 동안 자녀 없이 희망이라고는 없었던 아브람을 찾아가셨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도전할 수 있는 길을 주셨다. 소망 없던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그 믿음으로 도전하는 인생이 되게 하셨다. 두려움은 뻔한 결말을 맞이하지만 믿음은 도전하는 인생으로 살게 한다. 뻔한 인생이 아니라 믿음으로 도전하는 인생이 되길 축복한다. /행복한나무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7-19
  • [금주의 말씀]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우리가 살려면 악을 미워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살기 위하여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외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그분의 언약과 계명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악은 인류 최초의 조상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생겨났다. 그 결과 온 인류가 아담 안에서 함께 그 죄악에 오염되고 말았으니 그 죗값으로 사망이 온 인류를 지배하게 됐다. 이처럼 악은 궁극적으로 사망을 가져오는 것이니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악을 미워하여 멀리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 모든 교인은 값없는 하나님의 구속, 구원의 은혜로 인해 과거 죄악의 종노릇을 하던 자리에서 건짐을 받아 영생의 자리로 옮김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다시금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악을 구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음에도 다시금 죄악을 가까이한다면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베드로후서 2장 22절)과 마찬가지의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려면 선을 구해야 한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라”고 외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이란 착하고 올바른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이 선이라고 말한다(시편 106편 1절).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좇아 사는 것을 가리켜 또한 선이라고 말한다(로마서 12장 9절).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자신의 창조주 되시며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허탄한 우상과 더러운 악령인 귀신을 숭배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사탄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려 든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요한계시록 21장 8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 날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심판하사 사망 가운데 처하도록 하실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을 구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살려면 공의를 세워야 한다. 아모스는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공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듯 인간 또한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장 5~6절)고 했다. 따라서 ‘성문에서 공의를 세우라’는 말은 모든 사람들이 보아 명백히 알 수 있도록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는가? 그 어느 때고 제대로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했던 적이 없었으니 그들의 역사는 하나님께 매를 맞고 신음하는 수치로 얼룩졌다. 한편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셨다. 그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진대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진정으로 살길을 얻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공의로운 분이시니(사사기 24장 16절) 그분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바를 좇아 행함으로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24절) 세상에 흘려보내자. 하나님을 찾으면 살길이 열릴 것이다.  /나돌섬선교회 대표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7-10
  • [금주의 말씀]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자
    ▲ 이영희목사   사람이 살면서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진리 안에서 사는 자이다.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요한3서 1장 3절). 그렇다면 진리 안에서 삶이란 무엇일까? 첫째는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므로 부르시고 이제부터 영원한 장막 천국에서까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사는 것이란 또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삶을 말한다. 이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 같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사십일 금식을 마치시고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도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신앙과 기도의 생활은 짝퉁 신앙이요 혼적인 신앙이다. 분명한 것은 성경 속에 범죄하며 타락의 삶을 살았던 자들의 공통점은 진리이신 말씀을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는 여호와께 돌아가자 말씀으로 돌아가자라고 했다. 요즘에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 아닌 인본주의적인 설교를 하며 사람 중심의 기복주의적인 설교자를 가끔 보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그분과 함께하며 안식된 삶을 살아야 한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했다.  둘째는 성령을 받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는 것이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이다. 성령이 진리다. 분명한 것은 성령을 받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으며 성령을 받지 않고는 참믿음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성령은 우리의 믿음을 확증시키며 진리를 생각나게 하며 가르치며 진리 안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진리이신 성령을 받아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느냐 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쉬지 말고 기도 생활하는 것이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삶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문화가 발달하면 할수록 점점 기도하는 소리가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 부흥의 시작이 기도로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교회는 기도의 붐을 일으켜야 한다. 많은 이들은 하나님 나라 건설보다 자신이 살고 죽을 나라 건설를 세우고자 기도하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내 욕심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구하며 성령을 감독자로 삼고 살아야 한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신앙이다. 우리 모두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독교인이 되자.  /생명나무제자훈련원 원장, 주영광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7-02
  • [금주의 말씀] 기다리는 사람들
    ▲ 홍한석목사  예배를 영어로 ‘서비스’라고 한다. 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주인으로 오시는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주님은 어찌 보면 예배의 소비자이시다. 주님은 그러므로 교회가 자신을 위한 곳이라는 놀라운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찾아가듯이 주님은 진정한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 그곳에 임재하셔서 그 예배를 음미하시기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곳이어야 한다고 결정하고 늘 주님의 요구를 등한시한다. 교회는 그리고 예배의 자리는 나를 위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곳이다. 본질에 부합하게 100% 주님을 위한 곳이 될 때 비로소 예배하는 그곳도, 예배하는 자도 진실로 유익한 축복의 장소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에 우리의 할 일은 그분이 오시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준비하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공적 예배는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임에 와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우리의 예배 가운데에 주님께서 임재하셨는가의 문제이다. 양보다는 질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예배하는가보다는 얼마나 모였는가에 관심을 가진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의 증언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오백여 명의 형제들이 모여 있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 성령세례와 땅끝 선교를 분부하시면서 올라가실 때 오백여 명의 형제들은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천사들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다. 누가복음 24장 말미에 누가도 예수님의 승천 사건을 증언한다. 그런데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남아있는 자들에게 한 가지 또 다른 명령을 하신다. “내가 성령을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성령세례가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오백여 형제가 들은 것이 분명하고, 주님은 그들이 보시는 앞에서 영광 중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바람처럼 불처럼 부으실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120명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디로 간 것인가. 나머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다릴 수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비록 주님의 놀라운 승천 사건을 목도하고 이 성에 머물라는 생생한 명령을 들었지만,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며, 보내실 성령을 사모하며 기다리지 못한 것이다. 영적인 사건의 중요성은 기다림의 시간을 얼마나 투자했는가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빠른 찬양, 느린 찬양, 틀에 박힌 기도, 진부한 설교, 헌금과 잠깐의 기도를 투자하고서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우리들. 우리는 수술할 날짜를 잡듯이 부흥이나 기적의 스케줄을 잡고 내 시간표대로 움직이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빛들의 아버지시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위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그분은 결코 사람의 일정표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한다는 것은 이런 주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삶의 축복과 부흥은, 기적조차도 우리 위에 있는 세계와 관련되어 있고 나는 그저 지금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예배한다. 예배는 우리 위에 있는 세계와의 연결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임재와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며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이 예배자의 모습이다. 기다리는 우리에게 주님은 찾아오시고 기름 부으신다. /하늘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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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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