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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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 어린 아이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에서 5절)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어린이는 인생의 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저물어 가는 시점은 “인생의 열매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어린이 주일은 꽃의 주일이라고 표현을 해봅니다. 어린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크게 두가지로 표현한다면 첫째 사회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 둘째 성경적으로 심령이 깨끗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가 든든히 서갈 때 교회가 부흥 되어 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70년, 80년대 교회는 내면을 보면 교회학교가 급성장하여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줄 압니다.그러나 현 시대는 저출산과 독신주의와 더 나아가서는 어린아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학교가 부흥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라는 것을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희망! 교회학교 어린이를 사랑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장성한 어른으로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함으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본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 믿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아론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였습니다. 애굽에서 400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이 수가 점점 더해가자 애굽에서는 불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출생할 당시에 남자아이가 출산하게 되면 죽이라고 왕이 명령을 내리는 결단을 합니다. 그러나 모세 어머니 요게벳은 지혜와 믿음이 충만하여 왕의 법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 뜻을 지켰던 믿음의 여인이였습니다. 한마디로 순교를 각오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지혜로운 어머니였습니다.    둘째 지혜로운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요게벳은 행동을 합니다. 아기모세를 작은 바구니에 넣어서 크고 넓은 나일강가에 띄워 놓습니다. 아기가 죽을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누군가 아기를 발견하여 키워주지 않는 이상 아이는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살 수 없는 확률이 99% 불가능한 현실이지만 요게벳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분명히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게벳은 나일강가에서 애굽의 공주가 목욕하는 시간대와 장면을 보고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계획하는 지혜와 믿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학교와 자녀들을 향하여 가르치고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믿음과 지혜로운 행동을 보여주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말씀 안에서 순복하는 교회학교와 자녀들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들 가정에 꽃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하늘의 별처럼 부흥되기를 예수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욕심을 버리고 나를 낮추는 자가 되어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으며 계산적이지 않는 착한 성도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광명대한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29
  • [말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김기호   사도행전 28장 1절부터 31절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 장면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마지막까지 전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는데,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죽음의 폭풍을 이겨내고 멜리데섬에 도착한 로마군인들과 선원들의 숫자는 276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람인 바울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죽지 않는 기적을 보고 멜리데섬 사람들 중에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기를 겪는 폭풍을 만났지만 그가 예수님을 의지할 때,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멜리데섬 사람들도 병을 고침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고침 받은 ‘보불리오’는 나중에 멜리데 오늘날의 몰타에 감독에 됩니다. 바울이 죽음의 폭풍을 뚫고 멜리데섬을 거쳐 가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만나는 폭풍과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인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가는 곳이 때로는 감옥과 같이 답답한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감옥과 같은 곳에서 지냈습니다.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꼼짝도 못하는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바울은 감옥에서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있는 가정과 직장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믿는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2006년 1월에 서른 세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 ‘안수현’씨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쓰는 이메일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 안수현” 자신이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7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성남 은혜제일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22
  • [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14
  • [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01
  • [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25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14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코로나 극복을 위해 힘써 기도하자 - 사무엘하 24장 18~25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 사회는 지금 전례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확진자 한 사람을 치료하는데 거의 5천만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여기에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해 수많은 의료인들이 고생과 수고를 다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비용과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는 삼복더위에도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한다. 지하철에서도 거리에서도 마스크는 이제 일상이 돼버렸다.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이렇게 우리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부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다. 다윗왕이 이스라엘의 인수조사를 실시했다.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면에서 본다면 인구조사는 통치의 기본이다. 정확한 인구를 알아야 군인도 뽑고, 세금도 부과할 수 있는 것이다.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했는데,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다. 그런데 영적인 면에서 보자면 다윗왕의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불신하는 조치였다. 다윗은 스스로 이를 깨달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셨다. 결국 전염병이 내려졌고, 죽은 자가 7만이나 되었다. 방역이나 소독의 개념이 없었던 고대시대에 전염병은 많은 사람에게 혹독한 공포의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전염병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무서운 재앙이다. 전염병이 발생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어떻게 했냐는 것이다. 다윗은 선지가 갓이 명한대로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 성경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25절)고 기록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전 세계적 재앙 앞에서 우리는 다윗과 같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기도하기에 힘써야 한다. 먼저 방역의 최전선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는 의료진을 위해 기도하자.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도 전신 방역복을 입고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의 노력에 우리는 정말 감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을 위해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고 응원해야 한다. 병원과 의료체계는 일반은총의 영역이다. 하나님은 국가와 정치시스템을 통해 사회를 통치하게 하신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서 국가와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병원과 의료시스템을 통해서 병을 막고 사회와 개인의 건상을 유지하게 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병에 걸렸을 때 기도하면서 병원에 가 치료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최전선에서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한국교회를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일부 교회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길 위해 기도해야 한다. 어떤 교회처럼 국가의 방역체계에 도전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전도의 문이 닫히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방역에 최선을 다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기도하면서 행동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지는 것이다. 힘을 다해 코로나 극복을 위해 기도하자. /목포서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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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1
  • 영적지도자는 단순해야 한다 - 창세기 14장 1~16절
      삶이 단순해야 한다. 삶에서 가장 단순해야 할 것은 생각이다. 생각이 단순해야 삶이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삶의 시작은 지금이다. 곧 지금을 말하는 오늘 하루다.   생각이 단순해야 한다. 삶이 단순해야 한다. 하루가 단순해야 한다. 무엇보다 단순해야 할 것은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이 단순할 때 하나님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럼 단순한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단순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만을 사랑해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단순함이 답이다. 단순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복잡해지는 순간 세상에 눈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삶이 단순하다.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 왕 등, 네 왕에게 잡혀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카 롯을 구하려 전쟁터로 갔다. 아브라함이 단순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롯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사람은 때론 바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바보가 아니다. 사랑의 마음이 클 뿐이다. 사랑하면 단순해진다. 한 사람만 본다. 사랑할까와 사랑하지 말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래! 사랑하자’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아내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결혼하기로 결정했는데 진짜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 남자에게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나가를 고민했다. 그 때 깨달았다. 복잡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복잡하다는 것은 갈등이 시작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갈등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답 대신 혼란만 가중된다.   삶은 단순해야 한다. 신앙생활도 단순해야 한다. 단순할 때 답을 찾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통일 왕국을 세운 다윗 왕도 단순했다. 자신에게 문제가 발생하자 단순하게 하나님만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만 찾았다. 단순한 사람이 다윗이 한 고백이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편 16편 1절)   지진이 발생하면 단순해진다. 살길만 찾았다. 난생처음 오사카 전철역에서 지진을 경험했다. 그때 사람들 행동은 단순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건물 밖으로 뛰었다. 나도 따라 뛰었다. 살기 위해 단순해졌다.   불이 나도 마찬가지다. 불난 곳에서 피해야 한다. 불이 없는 곳으로 뛰어야 한다. ‘코로나19’로 전염에 취약해졌다. 전염에 강해지려면 단순해야 한다.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한다. 마스크를 쓸까 말까를 고민하면 안 된다.   가장 단순해야 할 사람은 영적 지도자다. 예수님, 아브라함과 바울과 같은 영적 지도자는 단순하다. 그들이 단순한 것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단순함이다.   영적 지도자인 아브라함이 롯을 살리는 것에 단순했다. 예수님도 하나님 사랑하는 것에 단순했다. 십자가의 죽음을 망설임 없이 택했다. 바울도 하나님을 위한 헌신에 단순했다. 하나님을 위해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장 31절)고 했다.   찰스 두히그는 〈1등의 습관〉에서 ‘탁월한 팀들의 공통점’을 이야기한다. 훌륭한 팀을 만드는 것은 팀원이 아니라 ‘규범’이란 것이다. 훌륭한 팀은 규범이 있듯이, 영적 지도자는 지침서가 있어야 한다. 그 지침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 한 분으로 단순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으로 단순해야 한다. 하나님과 연결통로인 말씀으로 단순해야 한다. 단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순하게 사랑하신다. 오늘 하루의 삶, 단순하게 살았는가란 질문에 ‘예!’ 라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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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1
  • 헤세드 : 하나님의 사랑 - 로마서 8장 28절
      8월 15일 0시를 기준으로 전 세계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는 약 1,174만 명, 사망자는 54만 명을 넘었다. 우리나라도 코로나의 재확산이 심상치 않다. 여러 나라에서 이미 예를 갖춘 경건한 장례식은 옛일이 되었다. 생명의 허망함과 덧없음이 무겁게 공기를 짓누른다. 지금은 슬픔과 불안과 상실의 시대이다. 기도만 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명령만 하시면 고통이 간단히 사라질 수 있다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것은[코로나바이러스는] 어느 날... 기적처럼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요행을 바라는 것 같다. 순진한 신앙이다. 하지만 성서의 신앙은 맹목적 확신이 아니다. 막연한 기대도 아니다. 한결같은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께서 모든 고통과 악 속에서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내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이다. 본문 말씀과 같이 하나의 주술로 오해되는 구절도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고 말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은 바울이 처음 한 말이 아니다.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스토아 철학 사상가인 플루타르코스의 말이다. 그가 이 말을 처음 했을 때 그 안에는 기계적 낙관주의가 숨어 있었다. 이 말은 본래 스토아 철학가들이 세상의 악을 설명하려고 고안한 말이다. 즉 세상의 모든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또 개개인의 좋아함이나 싫어함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이성’의 작용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불행이나 악도 결국은 보편적으로 선한 명분에 봉사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운명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바울이 반대했다. 바울은 만물 속에서 역사하면서 선한 결과를 지향하는 존재는 보편적 이성이라는 우주적 원리도 아니고 운명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구절에서 참 주어는 ‘모든 것’(panta)이 아니다. ‘합력하다’(synergei)라는 동사의 주어는 하나님이다. ‘모든 것’은 오히려 목적어이다. 이 구절의 올바른 해석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 속에 역사하여 선을 이루어가신다’이다. 세상 사물과 일들이 이렇게 저렇게 서로 조화를 이루어 요행히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의 섭리와 의지 속에서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오늘 부른 개회 찬송가 66장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독일 개신교인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 중의 하나인 좥다 감사드리세좦는 유럽의 30년 전쟁(1618~1648) 중에 마르틴 린카르트목사가 기도 시로 작사한 것이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워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여기서 말하는 ‘옛날부터 주신 복, 이제와 영원히 선물로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이 바로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 헤세드이다. 이제는 변치 않으시는 주 하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말로 할 수 없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다. 우리의 소망은 다른 구원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 있다.  /이화대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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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1
  • 이 시대 쓰임을 받으라 - 사도행전 3장 1~10절
      21세기는 영성이 강한 자를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하늘의 능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성령 충만하면 말에도, 찬양에도, 기도에도, 사역에도 능력이 나타난다. 오늘 이 시간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큰 능력이 흘러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오늘 우리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을 본다. 그는 40여년을 한 번도 일어나 걸어보지 못했다. 나면서부터 서서 걷지 못하는 사람(사도행전 3장 2~3절)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래서 그는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의 표본이다. 서서 걷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다. 노동력이 없으므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다. 그래서 구걸하고 있다. 그에게서는 희망, 기쁨, 은혜, 사랑, 기적, 같은 단어를 떠올릴 수가 없다. 그는 누구에게도 쓰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사도행전 3장 6~7절). 누가 40여 년간 한 번도 서지 못하는, 누가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쳤는가? 베드로와 요한인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도구였고, 그를 일으켜 세워 뛰고 달리게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만이 문제의 해답이시고, 예수님만이 우리를 쓰임 받는 존재로 바꾸신다. 예수님은 죄가 많아 쓰임 받지 못하던 수가성 여인을 크게 쓰임 받는 전도자로 세우셨고, 이스라엘 백성의 미움의 대상이었던 삭개오를 귀히 쓰임 받는 사람으로 바꾸셨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인 무디는 가난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아 성경을 읽기도 힘들었고, 말도 어눌한 구두 수선공이었다. 그런 그가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크게 쓰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람들에게 짐만 되었던 40년 된 병자를 예수님은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꾸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 베드로와 요한은 어부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쓰임 받는 사람으로 만드셨다.   로렌 커닝 햄 박사는 1971년 국제 전도단의 설립자이다. 그런데 그가 21세기에는 한국을 쓰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한국에 왔다. 한국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한국 기독교 인구가 겨우 250 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였다. 경제적인 어려운 나라가 어떻게 세계 선교를 감당할 수 있을까? 1996년 25년만에 다시 한국에 와서 놀랐다. 경제적인 발전과 일천만 기독교인들은 세계선교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역사의 소망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나 자신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다른 이들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천문학자들은 높은 언덕에 있어도 하늘에 그의 시선이 있다. 항해사는 바다에서 항구에 그의 시선이 있다. 천국을 향해가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우리 믿음의 주인이시요, 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   한 사람이 바뀌면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 사람인 내가 변하면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세상이 변한다. 우리도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심으로써 변화되어 가정, 직장, 사회,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쓰임 받는 사람으로 영광돌리시기 바란다./파주시교회시협의회 회장, 파주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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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4
  • 참사랑이신 예수님 - 요한일서 3장 16절
      무엇이 참 사랑일까?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십자가의 사랑이다. 십자가가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많은 방법 가운데 십자가를 택하셨을까?   본문을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을까?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시작부터 이 문제에 부딪쳤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시고 계실 때, 마귀가 다가와서 돌덩이를 떡덩어리로 만들어 보라고 요청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러자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곳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보이라고 요청했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시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예수님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무례한 일이요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라는 것이다.   인간의 자만심, 과시욕을 자극하는 마귀의 유혹은 광야에서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중에도 계속해서 다가왔다. 사람들은 줄곧 기적을 요구했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한다”(누가복음 11장 29절)라고 책망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이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만세 전부터 계획된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아셨기 때문에 표적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와 사랑으로 구원을 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예수님에게 마지막 시험이 있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마태복음 26장 37~38절을 보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셨다. 얼마나 마음이 힘이 들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을까?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는 문제를 앞에 놓고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잔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아버지의 뜻이 변함없음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무수히 많은 사랑의 증거를 보여 주셨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책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자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목숨을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셨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최고의 묘약은 사랑이다.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신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며,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고 계신다(로마서 5장 5절). 그러므로 성령을 받고,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독자들이 되시기 바란다. /세계로부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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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30
  • 방전된 몸으로 대문 나서지 마라 - 사도행전 1장 1~5절
      눈이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 인생에 눈이 크게 달라질 때가 있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이다. 한 가지 어려움을 만났을 뿐인데, 내 주변 풍경이 전부 빛 잃은 회색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때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힘내라는 말이 와닿지 않는다. 너무 지치면 모든 풍경이 절망이 된다.   그때 필요한 것은 충전이다. 하나님은 지쳐 있는 엘리야에게 다른 이야기를 안 하신다. 충전부터 시켜주신다. 지쳐 쓰러져 잠든 엘리야. 눈 떠보니 숯불에 구운 떡이 있었다. 먹고 또 잠에 든다. 자고 일어나니 또 먹을 것이 있다. 지쳐서 방전된 엘리야. 일단 충전부터 시켜 주신다. 방전된 몸으로 대문을 나서면 안 된다. 일단 충전부터 해야 한다.   방전된 스마트폰을 켜는 방법. 전원 버튼 계속 누르기가 아니다. 충전기 꼽고 내려놓기이다. 충전되어야 켜진다. 의지보다 중요한 것이 충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다. “예루살렘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성령으로 충전하라. 방전된 몸으로 대문 나서지 말고, 골방에 들어 앉아 성령으로 충전하라. 충만하게 살아라”   그래야 사고 나지 않는다. 그래야 주저앉지 않지 않는다. 제자들도 예수님 따르려던 의지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목숨까지 바치겠다며 장담했다. 의지는 대단했다. 그런데 금방 무너져 버렸다.   지속적으로 은혜를 충전하며 가는 사람은 쉽게 주저앉지 않는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어려운 일 찾아올 테니, 미리 영적으로 충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흘려듣는다. 기도하지 않고 잠든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때, 모두 부인하고 도망간다. 예수님 따르겠다는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방전된 영성으로는 내 결심 지키지 못한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어주심을 기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을 부어 줄 테니 사모하면서 기다려라. 더는 방전된 몸으로 신앙생활 하지 마라.   신앙생활 하는 동안 평탄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픔도 있고 갈등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을 만난다. 그때도 주저앉지 말고 전진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는 신앙되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 하님이 부어주실 은혜를 기대 것이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의 삶을 폭탄으로 부르셨다. 불발탄으로 끝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채워짐이 폭발력을 만든다. 우리가 은혜로 충전될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가족들의 삶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지체들의 공통점이 있다. 기도하는 이들이다. 그렇게 사랑의 화약이 채워지고, 은혜의 화약이 채워지게 된다. 그러니 집에서도 사랑이 폭발하고, 은혜가 폭발한다. 내 감정 줄어들고 말씀이 앞서게 된다.   채우는 삶은 믿음의 선순환 삶이다. 주일에 찬양하고 말씀 들으며 은혜로 채운다. 그러면서 한 주간 가정에서 삶의 터전에서 승리한다. 그 맛을 아니까, 또 은혜의 자리로 나온다. 그러면서 점점 삶이 은혜로 채워진다. 폭발력 있는 믿음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주일 예배에 부르신 이유가 있다. 은혜로 충전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더는 방전된 몸으로 살면 안 된다. 더 이상 은혜 없이 살면 안 된다. 한 모금 물 가지고, 한 주일 살겠다고, 고집 피우면 안 된다. /사랑의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0-07-24
  • 믿음은 물음표가 아니라 느낌표다 - 본문 : 사도행전 1장 6~11절
      인생을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해야 한다.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유명한 철학자에게 물었다.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철학자는 대답 대신 질문을 바꾸어 주었다. “어떤 사람이 부자입니까?” 철학자의 대답은 “이 나라에서 제일 부자는 만족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였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부자 되는 방법을 묻는다. 어디에 투자해야 되는 지 묻는다. 얼마나 돈을 많이 가져야 되는지 묻는다. 질문이 잘못됐다. 부자가 무엇인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많이 가져서 부자가 아니라 만족해서 부자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잘 사는 방법을 묻기 전에 잘 사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을 만들기 때문이다. 질문을 잘못하면 평생 질문만 하는 ‘물음표 인생’이 된다. 성도는 물음표 인생이 아니라 답을 알고 있는 느낌표 인생이 되어야 한다.    오늘 말씀 속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한다. “예루살렘은 언제 회복됩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으니 큰일을 하시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질문이 잘못되었다. ‘언제 회복되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회복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진정한 회복은 예루살렘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다. 예루살렘의 회복보다 영혼의 회복이 더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된 제자들은 늘 물음표의 삶이었다. “언제 됩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느낌표 인생이었다. 질문이 아니라 실행하는 삶이었다. 언제 회복되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실천하라고 얘기하신다.    믿음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약 2:17).    위대한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힘을 길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여야 한다. 문명은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때, 그리고 그런 횟수가 많아질 때 진보해왔다.”라고 말했다.    성장하는 인생은 무엇인가를 꾸준히 해나가는 인생이다. 질문만 하는 인생이 아니라 질문이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제자들이 해야 할 실천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었다. 우리 삶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원래 의지가 약하다.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다. 시간이 많은 사람은 없다. 허비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삶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아서 그렇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인생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장 8절)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이 잘 못 됐다. 바르게 사는 삶은 무엇인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다. 질문을 잘못하면 질문만 하는 물음표 인생이 된다. 성도는 물음표 인생이 아니라 실천하는 느낌표 인생이 되어야 한다.    인생은 질문이 중요하다. 그러나 질문하는 이유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대로 살기 위해서다. 그대로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행동하는 인생이 되길 축복한다. /행복한나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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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0-07-14
  • 십자가만 자랑하라 -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당신은 지금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근대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를 설립한 조지 워싱턴의 일화이다. 그가 장군으로 있을 때 정부에서 사절단이 온 적이 있다. 워싱턴을 만난 관리는 그가 국민을 대표할만한 훌륭한 애국자라며 좋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워싱턴은 날카롭게 대답했다. “그런 말은 내게 아무런 기쁨을 주지 않습니다. 한마디만 말하십시오. 당신은 지금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좋은 말로만 차려 놓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몸으로 표시된, 즉 생활로 구체화된 제사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이다.    갈라디아서 6장 말씀을 보면 거짓 교사들은 핍박을 면하고 할례를 받은 자들의 수를 늘리며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고 싶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한 사실이 나온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만 자랑했다.   바울과 같은 신앙을 품기 위해선 사리분별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거짓 교사들이 할례를 강요하고 바울의 가르침을 공격했던 이유는 그리스도 십자가 때문에 초래되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율법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진리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였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안위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천박한 위선일 뿐이었다. 교회에 은밀히 침투한 거짓 교사들과 잘못된 가르침에 속지 않으려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지혜가 있어야 한다.    역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바른 가르침으로 무장한 교인들이 있을 때, 교회 안에 거짓 교사와 거짓 가르침은 설 자리를 잃는다. 바른 교사와 거짓 교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이나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영광은 받으려 하면서 박해는 피하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고 다른 길,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모색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결단코 자기 백성으로 영접하지 않으신다.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는지 점검해 보자. 너무 많은 종교적 행위들에 가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지 못한다면 속히 치우고 덜어낸다.    이를 잘 따르기 위해선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흔적을 마음속에 가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할례의 흔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 곁에 살아계시며 말씀을 전하셨던 예수님의 흔적이다. 바울에게 예수님의 흔적이란 예수님께 충성한 결과로 받은 핍박의 흔적이며, 고난의 상처였다.    우리에게는 어떤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가. 혹시 예수님의 흔적이 아닌 세상의 흔적으로만 가득하지는 않는가. 겉으로 드러나는 혈통이나 할례가 진정한 믿음의 표시가 아니듯, 외적인 직분이나 성취가 믿음의 표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 혼자 고통 받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 받은 징계는 그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것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이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질병과 가난과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선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교회 안의 가정들도 다들 문제를 갖고 어려움도 있고 고민도 있다. 진정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자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무릇 사도 바울과 같이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파주시교회시협의회 회장, 파주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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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0-07-12
  •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 누가복음 17장 11~19절
      코로나바이러스의 재확산이 심상치 않다. 수도권과 충청권이 지금 걱정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그제 전 세계에서는 하루 최다 확진자가 나왔다. ‘조용한 전파’가 특성인 이 바이러스 때문에 혹여 나도 확진자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코로나 19 확진을 받은 한 환자가 음압병실에서 작성한 글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나는 코로나 19 확진자입니다”라는 제목의 이 글은 여섯 살과 백일이 갓 지난 두 아이를 둔 엄마의 글이다. 회사 동료로부터 감염된 남편이 병원으로 이송된 날 새벽, 아무 증상이 없던 자신도 감염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음성이었다.   며칠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자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고난 속에서 느낀 감사에 대해 고백하기 시작했다. “저랑 남편이 양성임에도 우리와 가장 가까이 붙어 지낸 아이들이 음성임에 감사합니다. 긴급 상황에서도 친정엄마가 아이들을 돌봐주실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격리 상태로 입원할 수 있는 병실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새벽 시간에도 감염을 막기 위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빠르게 확인한 보건소 직원분들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인 누가복음 17장 11~19절에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한 한센병 환자 이야기가 나온다. 열 명이 고침을 받았는데 예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한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돌아와 감사한 이 한 사람에게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포하셨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치유는 이 한 사람에게만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마리아 출신 한센병 환자는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즉 감사의 찬송을 드렸다.   그리고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사가 곧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는 선포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감사를 곧 믿음과 동의어로 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를 은밀히 내세우는 거짓 감사가 아니라 나를 겸손히 비우는 진정한 감사는 세상에 속한 것을 거룩하게 만들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장 6절)라고 했다.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살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염려라는 말은 그 어원처럼, 우리의 마음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려는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고 내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바울은 염려를 기도로 바꾸라고 말한다. 염려 대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말한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장 6~7절)라고 확언한다. 또 바울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에베소서 5장 4절)라고 권면한다.   감사는 이 고통스럽고 힘든 코로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다. 감사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충분히, 아니 더 많이 느끼게 한다. 감사는 내 존재를 열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포용이다. 그렇게 감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주권이 여러분에게 머물며 이 고난을 이겨나가는 충만한 한 주가 되시길 바란다. /이화대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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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야곱과 함께 하신 하나님 - 창세기 28장 10~22절
      성경은 신앙과 체험이 담긴 한편의 신앙고백이다. 성경에는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진솔한 고백이 담겨있다. 오늘 말씀에는 야곱의 광야의 어려움 가운데 신앙을 깨닫는 장면이 실려 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장자권리를 사서 멋지게 살아 보고자 했었다.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려고 하였지만, 이 일로 인해 자신의 기대와 다른 큰 위기가 찾아왔다. 창세기 27장 45절 말씀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야곱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야곱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가야만 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러한 처지에는 함께 하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꿈속을 헤매는 야곱을 깨우시고 새로운 삶을 깨닫게 하셨다. 창세기 28장 16절 말씀이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은 자신의 처량한 처지 가운데 꿈 꿀 수 없었던 함께 계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놀라운 삶을 하나님께 요청한다. 창세기 28장 20-22절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여 주시고, 이 여행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을 주셔서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시면 여호와를 저의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내가 기둥처럼 세운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자신의 삶을 지켜주시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셔서 정말 돌아오게 된다면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창세기 35장 9절 말씀을 보면 야곱이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돌아올 때 다시 만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나온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은 야곱이 바라던 삶이 비로소 회복되게 해주셨다. 그 삶의 자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의 자리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돌아오고 싶어 했던 복의 자리에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고백한다. 시편1편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의인의 삶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고 심판이 와도 견딜 수 있다”   하나님은 야곱의 삶에 함께 해주셨다. 하나님은 야곱이 있는 모든 곳에서 그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지켜주셨다. 우리의 삶에도 함께 계신 하나님과 함께 견고히 설 수 있길 기도해 본다. 교회는 삶의 어려움을 견디고 바람을 이겨낼 수 있는 피난처와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 이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의인들의 모임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야곱처럼 자신의 삶을 자리를 행복의 자리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삶이 가능한 것은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을 때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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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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