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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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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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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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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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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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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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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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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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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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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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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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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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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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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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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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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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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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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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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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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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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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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과 상생(로마서 8장 19~22절)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해방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유영모 선생은 “내가 먹는 낱알과 채소가 나를 위해 희생되어 나를 대속한다. 그리스도가 내 양식이라면 나를 위해 대속되는 만물은 죄다 그리스도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서 보다 심오한 차원을 열어 준다. 그리스도는 갈라진 것들을 하나되게 하기 위해 오셨는데 그 그리스도의 하나됨은 이제 그 범위를 만물로 확대한다. 그리스도는 만물과 동일시된다. 그러면 이제 만물이 그리스도이다. 골로새서의 이러한 기독론을 우리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이라고 부른다. 그러기에 아기 예수는 모든 생명을 위해, 만물의 충만함을 위해 오신 만물의 구세주이시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그렇다면 모든 신학은 이제 그 근본이 바뀌어야 한다. 문자 그대로 팬데믹(Pandemic) 세계적 대유행이 되었다. 그동안 흑사병, 스페인 독감 등 역사를 변화시킨 전염병과 질병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한 대륙의 질병, 국지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홍콩독감,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등의 질병이 창궐했다. 그러던 중 코로나 역병은 어쩌면 최초의 전 지구적 전염병으로 세계를 휩쓸고 있다. 해당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 코로나 역병은 그동안 서구사회의 기본을 흔들었다. 그동안 서구 사회는 풍요라는 신을 쫓아왔다. 자기들의 군사력의 우위, 경제력, 의료, 복지, 자본, 도시, 문명 등을 자랑했다. 이런 문화는 제국 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군사주의와 가부장제와 성장 이데올로기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런 문화 안에서 사람들은 생명과 분리된 채, 위계질서를 이룬 사회 안에서 내면적으로 병들어 있다. 코로나 역병은 그 맹점을 통렬하게 드러내며 지금의 세계를 수정하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국가든지 기업이든지 종교든지 이 경고를 경청하고 대비해야 한다. 기독교의 선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급속하게 기독인의 숫자를 늘린 것은 로마에 의해 공인되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그 숫자가 증가했다. 제국의 공인은 기독교의 질적인 타락을 가져왔지만 기독교가 오늘의 세계 종교로 성장하고 우리들에게 까지 전해진 것은 기독교의 제국화에 힘입은 것이다. 코로나 시대는 우리에게 기독교 신학과 조직, 체질 속에 내재된 제국의 요소들을 걸러낼 필요를 알려준다. 교회의 경우, 대교회주의가 유행했다. 특히 한국에서 대교회의 익명의 숲 안에 머무르는 교인들이 다수였다. 하지만 한국의 대형교회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낮선 교인이 올 수도 없고 오면 싫어한다. 등록교인 아니면 입장 불가하고 입장하더라도 익명으론 안 된다. 작은 교회들은 오히려 좋은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온라인시대에 걸 맞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교회도 유투브로 강남향린 성서학당을 개설하고 예배를 생중계한다. 이제 예배 현장에 몇 명이 앉아 있느냐는 별로 의미가 없다. 내용, 컨텐츠의 질이 소중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단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통의 면역체계를 구성하며 지구의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 서로의 상생을 강화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인데, 여기서 우리는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오고 지금 이미 함께 공생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모든 자연과 생태계를 포함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강남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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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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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과 상생(로마서 8장 19~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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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역병 이후 더욱 절실한 공생과 상생의 세계(로마서 8;19-22)
-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로마서 8:19-22)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해방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유영모 선생은 “내가 먹는 낱알과 채소가 나를 위해 희생되어 나를 대속한다. 그리스도가 내 양식이라면 나를 위해 대속되는 만물은 죄다 그리스도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서 보다 심오한 차원을 열어 준다. 그리스도는 갈라진 것들을 하나되게 하기 위해 오셨는데 그 그리스도의 하나됨은 이제 그 범위를 만물로 확대한다. 그리스도는 만물과 동일시된다. 그러면 이제 만물이 그리스도이다. 골로새서의 이러한 기독론을 우리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이라고 부른다. 그러기에 아기 예수는 모든 생명을 위해, 만물의 충만함을 위해 오신 만물의 구세주이시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그렇다면 모든 신학은 이제 그 근본이 바뀌어야 한다. 신학은 신(神)만을 이야기 할 수 없고 모든 생명과 만물, 우주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빼어 놓고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인권도 생명권과 분리해서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지구상에 수많은 생명의 종이 있지만 이 생명의 구성은 동일하다. 단순한 종에서 복잡한 종까지, 단세포 생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식물에서 동물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생명의 구성은 동일한 생명의 염기들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이중 나선구조로 되어 있는 DNA는 아데닌, 티민, 시토신, 구아닌의 4종류의 염기로 구성되어 있다. RNA에서 아데닌과 결합하는 우라실까지 합하면 모든 생명은 다섯가지 염기의 기본 물질로 구성되었다. 이것이 모든 생명의 기본요소이다. 이 염기들이 각각 다른 조합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생명체로 나타난다. 지금까지 밝혀진 150만종의 생물과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까지 합해 약 천만종에 이르는 생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은 모두 이들 염기들의 구성체들이다. 떡갈나무와 우리는 먼친척이다. 나비, 늑대, 버섯, 상어와 유전명령이 같다. 이것은 종이 분화되기 이전에 오랫동안 원시바다에서 발달한 생명 복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세포 핵 안에 DNA는 모든 생명이 읽을 수 있는 나선구조의 분자 구성체이고 각각의 사다리의 가로대를 이루는 4종류의 유전을 결정하는 염기들은 DNA를 이룬다. 이것은 생명이 성장하고, 환경을 감지하고, 움직이고, 소화하고, 번식하는 각각의 방법을 결정한다. 그 안에 자신들이 발전하고 생성해온 모든 기억, 생명의 역사를 간직하고 그 기록대로 새로운 세포들을 복제한다. 인간과 침팬지는 99.4%의 유전자가 동일하며 인간과 초파리에 나타나는 질병이 70%정도가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생명의 구성뿐만이 아니라 그 형성과정도 동일한 프로세스를 거친다. 인간의 생명도 지구 생명체의 모든 진화과정을 거쳐서 존재한다. 인간도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최초의 수정란은 단세포생물이다. 그것은 세포분열을 통해 다세포가 되고 각 기관이 생겨난다. 뱃속의 아기는 어머니의 양수 안에서 어류의 생태계를 거쳐 출생한다. 짧은 기간이지만 생명이 진화해온 수 십 억년의 과정을 압축하여 경험한다. 성서가 모든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명 안에서 그들을 충만하게 하신다는 고백과 같이 과학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하나임을 밝혀준다. 문자 그대로 팬데믹(Pandemic) 세계적 대유행이 되었다. 그동안 흑사병, 스페인 독감 등 역사를 변화시킨 전염병과 질병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한 대륙의 질병, 국지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홍콩독감,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등의 질병이 창궐했다. 그러던 중 코로나 역병은 어쩌면 최초의 전 지구적 전염병으로 세계를 휩쓸고 있다. 해당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 코로나 역병은 그동안 서구사회의 기본을 흔들었다. 그동안 서구 사회는 풍요라는 신을 쫓아왔다. 자기들의 군사력의 우위, 경제력, 의료, 복지, 자본, 도시, 문명 등을 자랑했다. 이런 문화는 제국 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군사주의와 가부장제와 성장 이데올로기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런 문화 안에서 사람들은 생명과 분리된 채, 위계질서를 이룬 사회 안에서 내면적으로 병들어 있다. 코로나 역병은 그 맹점을 통렬하게 드러내며 지금의 세계를 수정하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국가든지 기업이든지 종교든지 이 경고를 경청하고 대비해야 한다. 기독교의 선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급속하게 기독인의 숫자를 늘린 것은 로마에 의해 공인되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그 숫자가 증가했다. 제국의 공인은 기독교의 질적인 타락을 가져왔지만 기독교가 오늘의 세계 종교로 성장하고 우리들에게 까지 전해진 것은 기독교의 제국화에 힘입은 것이다. 코로나 시대는 우리에게 기독교 신학과 조직, 체질 속에 내재된 제국의 요소들을 걸러낼 필요를 알려준다. 교회의 경우, 대교회주의가 유행했다. 특히 한국에서 대교회의 익명의 숲 안에 머무르는 교인들이 다수였다. 하지만 한국의 대형교회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낮선 교인이 올 수도 없고 오면 싫어한다. 등록교인 아니면 입장 불가하고 입장하더라도 익명으론 안 된다. 작은 교회들은 오히려 좋은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온라인시대에 걸 맞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교회도 유투브로 강남향린 성서학당을 개설하고 예배를 생중계한다. 이제 예배 현장에 몇 명이 앉아 있느냐는 별로 의미가 없다. 내용, 컨텐츠의 질이 소중한 시대가 되었다. 본래 바이러스는 지구에 생명이 탄생하면서부터 함께 했으며 가장 기본적인 생명체 중에 하나이다. 지구 생태계의 질서가 유지되는 기본에는 바이러스가 존재한다. 우리 몸 안에도 바이러스들이 존재한다. 약 1만종의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살고 있으며 무려 100조개의 바이러스들과 우리는 몸을 숙주로 공생한다. 지금 지구상에는 160만종의 바이러스들이 밝혀졌는데 이는 존재하는 바이러스들의 1%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나라는 생명체의 주체가 나인지 우리 안에 바이러스가 주인인지 모를 일이다. 바이러스, 세균, 기생충도 모두 인간과 공생관계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오래 살기위해 숙주인 우리 몸의 병을 고치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한다. 오로지 내가 내 몸의 주체가 아닌 셈이다. 사람에게 생기는 신종 감염병의 75% 이상이 인수(人獸)공통 감염병이고, 이 인수공통 감염병의 대부분은 숙주가 야생동물이거나 가축들인 만큼 인간뿐 아니라 전체 생태계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런 개념을 '원 헬스(One Health)'라고 부른다. '원 헬스'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자연환경까지 하나로 연결된 만큼, 생태계 전반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에서 접근을 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인간에게만 이롭거나 동물에만 이로운 것, 혹은 자연에만 이로운 것이 아닌 모두에게 이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개념이다. 여기에 세계화로 국제사회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이므로 '원 헬스'뿐 아니라, '원 월드(One World)'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최근 50년간 신종 감염병이 급격히 증가한 이유는 병원체 자체가 진화하는 원인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간과 환경 간 상호작용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즉, 인구증가, 도시화, 여행, 교역의 증가, 빈부격차, 전쟁, 경제발달과 토지개발에 따른 생태환경의 파괴 등이 이러한 변화를 야기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인구 증가에 따라 새로운 지리적 공간으로 사회적 영역이 확장되고, 해외여행 등으로 인간은 병원체의 숙주인 동물종과 접촉할 기회가 증가하였다. 이렇게 사람으로 전이된 병원체는 인구밀도 및 인구이동 증가라는 사회적 변화와 결합하여 신종 감염병이 확산되는 요인이 되었다. 우리가 한 종의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침입을 당한다 하더라도 다른 생명체에게는 이미 그것을 극복할 면역 체계가 익숙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공동의 면역체계를 증진시키는 일은 결국 인간의 생명 유지를 위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지금 자연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그만큼 바이러스들이 적절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는 자연이라고 하고 창조의 질서라고 부른다. 이승무 박사(순환경제 연구소장)는 “산업 사회에서 원하지 않는 물질의 배출은 생물권에서 다양하고 예측할 수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새로운 미생물이 나타날 것이다”고 경고한다. 기존의 미생물, 즉 박테리아, 곰팡이 및 바이러스는 현재의 생명체가 균형을 이루는 조건을 만들어 왔다. 이것은 자연의 생명 유지 시스템의 살아있는 기초의 힘이며 그것을 적절하게 제어하는 시스템 역시 자연 속에 있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을 때, 창조의 질서라고 부르는 잔연의 균형이 급격하게 무너져 어떤 상황에 이르게 될지 모른다는 경고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단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통의 면역체계를 구성하며 지구의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 서로의 상생을 강화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인데, 여기서 우리는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오고 지금 이미 함께 공생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모든 자연과 생태계를 포함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이런 공생의 질서는 신학과 교회에서도 변화를 요구한다. 인간 중심의 신학은 전체 생명권을 중심으로, 나아가서 전체 물질세계까지 아우르는 신학으로 재편되어야 하며 교회의 조직과 선교의 목적 자체도 인간 중심의 시스템에서 모든 만물의 공생과 상생을 최우선하는 신학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해 2020년도는 대면 예배 보다 비대면 예배가 더 많았다. 목회자의 가장 큰 걱정은 교우들의 마음이 멀어질까봐 염려이며, 교회가 운영될까도 염려이다. 그러나 이런 염려도 내려놓으려 한다. 나 자신이 목회를 하고, 교회를 운영하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고 교회의 주인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이끌어 가실 줄로 믿는다. 목사가 목회의 주체가 아니고 교우들 각자가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 각자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우리를 이끄실 것이기 때문이다. /강남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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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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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역병 이후 더욱 절실한 공생과 상생의 세계(로마서 8;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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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와 우연이 있는 인생(전도서 9장 11절)
- 전도서 9장 11절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시기’는 성경에 ‘에트’라고 하며, 이는 ‘어두움의 시간’을 말한다. ‘우연’은 성경에 ‘페가’라고 하며, 이는 ‘충돌’을 말한다. 인생에 있어서 어둠 속에서의 충돌을 말씀한 것인데, 둘 다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서 사람은 누구도 자기가 이것을 주관치 못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전도서 9장 12절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데 이 세상은 사람의 힘보다 월등한 ‘큰 임금’이 있어서 이 죄인 된 세상에 매우 견고한 ‘흉벽’을 쌓아 놓은 것을 말씀하셨다. 전도서 9장 14절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라고 기록됐다. ‘흉벽’이란, 성경에 ‘마쪼드’라 하며 이는 ‘짐승’을 잡기 위해 펼쳐 놓은 ‘그물’이란 것과, 전쟁에서 사용하는 군수용의 뜻도 있어서 그 견고함이 매우 강하다. 그 누구도 이 흉벽에 잡히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 이때에 성읍의 한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이 성읍을 구했으나, 이 사람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 전도서 9장 15절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라고 기록됐는데 이 멸망당할 성읍을 구한 가난한 지혜자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고 자기의 공의를 베푸시사 우리를 자녀삼아 그 멸망의 흉벽과 상관없게 해 주신 것이다. 2021년 올해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분들이 이 불행한 흉벽에서 자유하고, 시기와 우연이, 어둠 속에서의 충돌이 없는 행복한 인생을 사는 이들이 많기를 바란다. 전도서 9장 16절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절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참된 지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동안 사람들 사이를 거니시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시어 많은 이들에게 변화를 이끌어내셨지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같이 사회적인 입지가 공고한 이들에겐 변화가 미미한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 예수의 말씀은 빈자의 지혜로 들릴 수밖에 없었으며 그렇기에 스스로 참된 지혜자의 말을 듣지 못한 채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호통을 치는 우매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세상적 가치로 말씀을 판단하지 않고 참된 지혜를 전하는 지혜자로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마태복음 16장 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요한복음 8장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대한예수교오순절성회 총회장·만수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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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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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와 우연이 있는 인생(전도서 9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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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에서 탈출하라 (요한복음 2장 13~17절)
- 심리학 용어 중에 ‘지식의 저주’가 있다. 지식의 저주란, 내가 알고 있는 바를 전하면 상대방도 100% 이해할 거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태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심리학 박사인 엘리자베스 뉴튼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의 저주는 누구도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불행하게도 모든 이가 가지고 있다.” ‘지식의 저주’는 한마디로 익숙함에서 온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익숙한 것이 남에게도 익숙할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낯섦과 익숙함이 교차한다. 낯섦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함으로 변한다. 낯설었던 것이 익숙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도자기 만드는 것을 처음배우는 사람에게 도자기를 빚고 굽는 모든 것은 낯설다. 시간이 지나 도자기 만드는 실력이 늘어서 처음 가졌던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맛은 어떤 맛일까? 어머니의 손맛 아닐까? 그런데 과연 어머니가 해준 것이 제일 맛날까? 물론 음식을 정말 잘하시는 어머니셨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손맛이 최고의 맛으로 느끼는 것은 익숙함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해준 음식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편안함을 준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 하지만 익숙함은 우리를 나태하게 만든다. 안일주의에 빠지게 한다. 안주하게 한다.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을 잊어버린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가 없어서 채찍을 들고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양과 소를 다 성전에서 쫓아내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과 상을 엎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치셨다. 예수님은 잘못된 줄 알면서도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익숙함에서 탈출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변화하기 위해서다. 성장하기 위해서다. 익숙함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 성장할 수 없다. 부산 수영로교회 이규현목사는 〈그대 느려도 좋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겨운 나를 만나고 쉽지 않다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나를 새롭게 하려면 나를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익숙한 나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밀어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을 두려워하는 나를 이겨야 한다. 새로운 세포가 생성되지 않는 생명은 이미 죽은 것과 같다” 이규현목사는 나를 새롭게 하려면 나를 낯설게 만들라고 한다. 익숙한 나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밀어내라고 한다. 익숙함과 결별을 두려워하는 나를 이겨야 한다고 말한다. 변화되기를 원하는가? 성장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익숙함과 결별해야 한다. 익숙함에서 탈출해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익숙함에서 탈출해야 한다. 신앙에는 됐다가 있어서는 안 된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그냥 탈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에다 믿음이 더해져야 한다. 데일 카네기는 이런 말을 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내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가만 들고 있으면 바람개비는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바람개비를 잡고 달리면 그 속에 바람이 일어나 바람개비는 돌아가게 된다. 익숙함을 탈출하는 것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을 써야 한다. 가만히 있는 다고 익숙함을 탈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개비를 잡고 달려가는 용기를 내야 한다. 믿음의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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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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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에서 탈출하라 (요한복음 2장 13~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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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이 아니라 ‘있음’에 주목하라(사도행전 3장 1~10절)
- 이 세상에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이에 반해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도 사람이 있다. 사람이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비교의식 때문이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부모나 형제나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결국 열등감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에 주목하면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에게 있는 것을 주목하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자오스린의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 보면 이런 글귀가 있다. “왜 항상 행복하지 않을까? 우리가 바라는 것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행복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오스린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정곡을 찌르고 있다. 자오스린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남보다 행복해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베드로와 요한은 정해진 기도시간인 제 구시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다. 이들은 본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지체장애인은 한 푼 얻을까하여 구걸했다. 베드로는 지체장애인에게 자신을 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사도행전 3장 6절) 베드로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것을 생각했다. 주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생각했다.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은 없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의 이름’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가장 큰 능력이다. 세상 사람들은 은금이 능력이라고 말한다. 권력이 능력이라고 말한다. 지식이 능력이라고 말한다. 세상이 말하는 능력으로는 한 번도 걸어 보지 못한 장애인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장애인을 일으켜 세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내게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생각할 때 많다. 하나님 앞에 없는 것을 핑계 되며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는 온갖 핑계를 다 되면서 응할 수 없다고 한다. 보낼만한 자라를 보내라고 한다.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애굽기 4장 2절)고 물으신다. 모세의 손에는 양을 치던 지팡이가 있었다.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신다.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니 뱀이 되었다. 모세가 다시 뱀의 꼬리를 잡았을 때 뱀은 지팡이로 변했다. 모세는 자신의 ‘없음’을 핑계 삼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있는 것을 사용하였다.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들린 것은 양을 치는 지팡이였다. 코로나 19로 인해 온 세계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가운데 우리는 ‘없음’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없는 것 빼고 다 가진 사람이다. 있는 것 빼고 다 없는 사람이다. 어디를 주목하느냐는 우리의 몫이다. ‘없음’에 주목하면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다. 좌절하게 된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건강이 약한데 건강에만 집착하면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주목해야 한다. ‘있음’에 주목하면 만족할 수 있다. 감사할 수 있다. ‘없음’이 아니라 ‘있음’에 주목하기를 축복한다./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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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이 아니라 ‘있음’에 주목하라(사도행전 3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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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 - 디도서 1장 12~16절
-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악한 사람들은 마치 디도서에 기록된 그레데인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레데인 선지자는 자기 동족에 대해서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로 살고 있고, 악한 짐승처럼 잔인하게 살고 있으며, 성실하게 일하기보다는 자기 배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레데인들의 삶의 모습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이 시대 악한 사람들의 삶 가운데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지금 세상은 악한 거짓말쟁이들이 뿌리는 가짜뉴스로 인해서 혼란 가운데 있다. 거짓말쟁이는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상대에게 그것을 사실로 알도록 왜곡하는 사람이다. 오늘 스마트폰 영상시대가 도래하면서 누구라도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쉽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기회가 공공의 선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활용되면 참 좋을 텐데, 자신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얻기 위한 악의적인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어 문제이다. 우리는 진짜뉴스와 가짜뉴스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가짜뉴스인데도 진짜처럼 미화되고, 진짜뉴스인데도 가짜처럼 왜곡하기 때문이다. 진짜뉴스를 가려내려는 진실함의 열정보다 자신의 이익과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가 기준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가짜뉴스가 진짜뉴스를 가짜뉴스라고 주장하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삶의 최선이라 여기는 사람들로 인해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고난의 심연 가운데 있다. 밀림의 야수들은 자기보다 약한 동물들을 잡아먹고 생존하지만,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를 않는다. 배가 고프면 잡아먹고, 배가 부르면 더 잡겠다는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야수들은 나중에 배가 고플 것을 대비해서 미리 잡아놓는 법이 없다. 그런데 약육강식의 경쟁에 익숙한 사람들은 먹고사는 충분한 환경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비축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으니 악한 짐승보다 더 잔인한 셈이다. 바울은 그레데인들의 실상을 증언한 그레데인 선지자의 말이 참되다고 말하면서, 디도에게 악한 사람들을 엄히 꾸짖으라고 충고하고 있다. 만일 디도가 그레데인처럼 악하게 살고 있었다면, 바울이 디도에게 악한 사람들을 꾸짖으라고 했을까? 디도의 악이 악한 사람들의 악과 별 차이가 없었다면, 아니 디도의 악이 오히려 더 컸다고 하면, 바울은 디도를 먼저 꾸짖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디도는 분명 악한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디도에게 악한 사람들을 단단히 꾸짖으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과연 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의 말씀으로 받으려면, 우리는 분명 세상의 악한 사람들과 차별화된 삶을 살고 있어야 할 텐데, 그리 자신 없는 것이 우리의 부끄러움이다. 저는 이 말씀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대한다.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인정에 머물지 않는다. 믿음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때문에 모든 인간은 서로 형제자매라는 것, 때문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형제자매인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책임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이때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분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연세의료원 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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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 - 디도서 1장 12~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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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자 - 창세기 37장 1~11절
-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냉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 일세 악을 선케 만들고 모든 소망 채우는 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 오래 참았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위해 저희들 오래 참고 있었네”(찬송가 373장) 세상 모든 사람들은 너나없이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그 대상이 누구든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와 자부심의 근거와 존재 의미를 느끼게 되며 자랑스럽고 보람된 삶을 살게 된다.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교인들입니다. 죄인으로 목적도 정함도 없이 정처 없이 살다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는 하루살이 같고 벌레 같은 우리를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천국의 후사가 되게 하셨으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을 어디서 찾아보겠는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받을 수 있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들 이어야 하느냐 하면…… 믿음의 선진 요셉의 생애를 통해 은혜되기를 소원한다. 첫째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어야 한다. 야곱의 아들로 태어난 요셉은 어려서부터 형들의 시기와 질투의 희생물이 되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서 13년 동안이나 주인에게 충성하고 주인의 신뢰를 얻어 집안 전체의 살림을 도맡아 관리하는 가정 총무가 되었다. 그러던 중 주인마님의 유혹을 받았으나 뿌리치고 오히려 억울하게 성폭행범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사랑하셔서 고난 가운데서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돌보셨다. 이처럼 요셉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그가 고난 속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난을 당할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지켰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인들도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말씀에 근거한 믿음을 끝까지 굳건히 지켜나가면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로마서 4장 5절, 히브리서 11장 5절). 둘째 믿음으로 행함의 사람이어야 한다. 요셉은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그의 말씀대로 살기에 힘썼던 사람이었다. 그는 육체의 정욕과 물질의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강한 유혹을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결코 범죄 하지 않겠다는 굳센 믿음으로 죄에 빠지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의롭게 사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요셉의 믿음을 행함으로 지키는 것을 보시고 그를 사랑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교인들도 말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신명기 6장 2절, 야고보서 2장 25~26절). 셋째 믿음으로 복음전파의 사람이어야 한다. 요셉은 믿음과 행함을 통해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항상 그와 함께하심을 나타냈다. 요셉은 옥에 갇힌 죄수들에게나 심지어 지엄한 바로 왕 앞에서도 권능의 하나님을 전하고자 하는 요셉을 사랑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땅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어지는 기회를 살려 복음을 전하는 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로마서 10장 15절, 고린도전서 9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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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자 - 창세기 37장 1~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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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희망의 시작이다 - 고린도후서 1장 8~11절
-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마침내 아들이 사막 한가운데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아들아! 힘을 내거라. 머지않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다시금 길을 갔다. 이게 웬일인가? 사막 한가운데 무덤이 있는 게 아닌가? 그걸 보자 아들은 절망 가운데 주저앉았다. “보세요, 아버지! 이 사람도 우리처럼 가다가 죽은 거예요. 가다 죽으나 여기서 앉아 죽으나 마찬가지예요.”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을 이렇게 격려했다. “아들아, 여기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동네가 멀지 않았다는 증거란다. 힘을 내거라” 결국 아버지 말씀대로 마을이 나타났고, 거기서 안식을 취하게 되었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사막의 무덤’과 같은 혹독한 시련을 만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사막의 무덤’ 가운데서 아버지처럼 희망을 발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들처럼 절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막의 무덤’을 만날 때 절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절망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도 할 때가 있다. 코로나19라는 상황이 많은 사람들을 절망 가운데 몰아넣고 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가운데 큰 어려움을 만났을 때 절망을 하는 것일까?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려운 상황이 계속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은 무수한 끝에서 시작을 반복하는 여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끝은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또 다른 출발점이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끝이라고 하시기 전 까지는 아직 끝이 아니다. 우리의 끝은 또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희망의 시작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린도후서 1장 8~9절)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바울에게 왜 하나님은 이런 환난을 주시는 것일까? 왜 이런 절망을 주시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희망 시작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절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무능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계 앞에 절망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절망은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한다. 자신의 무능함이 증명되었다면 그 무능함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출발한다. 하나님의 향한 믿음의 출발이 희망의 시작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절망은 희망의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사람도 있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사람들은 절망 속에 희망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포자기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 믿는다고 할지라도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절망이 절망으로 끝날 수도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고 했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바로 절망이다. 사단은 끊임없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절망하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 시작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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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희망의 시작이다 - 고린도후서 1장 8~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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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극복을 위해 힘써 기도하자 - 사무엘하 24장 18~25절
-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 사회는 지금 전례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확진자 한 사람을 치료하는데 거의 5천만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여기에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해 수많은 의료인들이 고생과 수고를 다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비용과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는 삼복더위에도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한다. 지하철에서도 거리에서도 마스크는 이제 일상이 돼버렸다.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이렇게 우리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부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다. 다윗왕이 이스라엘의 인수조사를 실시했다.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면에서 본다면 인구조사는 통치의 기본이다. 정확한 인구를 알아야 군인도 뽑고, 세금도 부과할 수 있는 것이다.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했는데,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다. 그런데 영적인 면에서 보자면 다윗왕의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불신하는 조치였다. 다윗은 스스로 이를 깨달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셨다. 결국 전염병이 내려졌고, 죽은 자가 7만이나 되었다. 방역이나 소독의 개념이 없었던 고대시대에 전염병은 많은 사람에게 혹독한 공포의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전염병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무서운 재앙이다. 전염병이 발생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어떻게 했냐는 것이다. 다윗은 선지가 갓이 명한대로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 성경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25절)고 기록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전 세계적 재앙 앞에서 우리는 다윗과 같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기도하기에 힘써야 한다. 먼저 방역의 최전선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는 의료진을 위해 기도하자.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도 전신 방역복을 입고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의 노력에 우리는 정말 감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을 위해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고 응원해야 한다. 병원과 의료체계는 일반은총의 영역이다. 하나님은 국가와 정치시스템을 통해 사회를 통치하게 하신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서 국가와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병원과 의료시스템을 통해서 병을 막고 사회와 개인의 건상을 유지하게 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병에 걸렸을 때 기도하면서 병원에 가 치료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최전선에서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한국교회를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일부 교회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길 위해 기도해야 한다. 어떤 교회처럼 국가의 방역체계에 도전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전도의 문이 닫히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방역에 최선을 다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기도하면서 행동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지는 것이다. 힘을 다해 코로나 극복을 위해 기도하자. /목포서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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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극복을 위해 힘써 기도하자 - 사무엘하 24장 18~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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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지도자는 단순해야 한다 - 창세기 14장 1~16절
- 삶이 단순해야 한다. 삶에서 가장 단순해야 할 것은 생각이다. 생각이 단순해야 삶이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삶의 시작은 지금이다. 곧 지금을 말하는 오늘 하루다. 생각이 단순해야 한다. 삶이 단순해야 한다. 하루가 단순해야 한다. 무엇보다 단순해야 할 것은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이 단순할 때 하나님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럼 단순한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단순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만을 사랑해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단순함이 답이다. 단순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복잡해지는 순간 세상에 눈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삶이 단순하다.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 왕 등, 네 왕에게 잡혀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카 롯을 구하려 전쟁터로 갔다. 아브라함이 단순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롯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사람은 때론 바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바보가 아니다. 사랑의 마음이 클 뿐이다. 사랑하면 단순해진다. 한 사람만 본다. 사랑할까와 사랑하지 말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래! 사랑하자’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아내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결혼하기로 결정했는데 진짜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 남자에게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나가를 고민했다. 그 때 깨달았다. 복잡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복잡하다는 것은 갈등이 시작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갈등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답 대신 혼란만 가중된다. 삶은 단순해야 한다. 신앙생활도 단순해야 한다. 단순할 때 답을 찾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통일 왕국을 세운 다윗 왕도 단순했다. 자신에게 문제가 발생하자 단순하게 하나님만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만 찾았다. 단순한 사람이 다윗이 한 고백이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편 16편 1절) 지진이 발생하면 단순해진다. 살길만 찾았다. 난생처음 오사카 전철역에서 지진을 경험했다. 그때 사람들 행동은 단순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건물 밖으로 뛰었다. 나도 따라 뛰었다. 살기 위해 단순해졌다. 불이 나도 마찬가지다. 불난 곳에서 피해야 한다. 불이 없는 곳으로 뛰어야 한다. ‘코로나19’로 전염에 취약해졌다. 전염에 강해지려면 단순해야 한다.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한다. 마스크를 쓸까 말까를 고민하면 안 된다. 가장 단순해야 할 사람은 영적 지도자다. 예수님, 아브라함과 바울과 같은 영적 지도자는 단순하다. 그들이 단순한 것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단순함이다. 영적 지도자인 아브라함이 롯을 살리는 것에 단순했다. 예수님도 하나님 사랑하는 것에 단순했다. 십자가의 죽음을 망설임 없이 택했다. 바울도 하나님을 위한 헌신에 단순했다. 하나님을 위해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장 31절)고 했다. 찰스 두히그는 〈1등의 습관〉에서 ‘탁월한 팀들의 공통점’을 이야기한다. 훌륭한 팀을 만드는 것은 팀원이 아니라 ‘규범’이란 것이다. 훌륭한 팀은 규범이 있듯이, 영적 지도자는 지침서가 있어야 한다. 그 지침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 한 분으로 단순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으로 단순해야 한다. 하나님과 연결통로인 말씀으로 단순해야 한다. 단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순하게 사랑하신다. 오늘 하루의 삶, 단순하게 살았는가란 질문에 ‘예!’ 라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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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지도자는 단순해야 한다 - 창세기 14장 1~1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