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8(수)

교회/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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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콤한 소통(사도행전 5장 38절에서 42절)
       오늘 사도행전 이야기는 오순절 성령강림 후 사도들의 변화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 전에는 두려워하고 절망하면서 다락방에 스스로 유폐되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강림 후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우리의 구세주라고 목소리 높여 선포하기 시작했고, 앉은뱅이나 눈이 먼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소리를 높여서 사회의 권력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분개해서 제자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중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원로답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여러 번 보아왔듯이 제자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하나님께서 곧 없어지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좀 두고 보자. 이렇게 제자들을 해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말렸습니다. 그 대신 제자들을 채찍질한 다음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투옥되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채찍 맞고 걸어 나오는 제자들이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고통 속에서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기독교인들만의 특별한 모습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편해졌을 때 망합니다. 신앙은 마침내 부활이요 승리지만 그전에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생략한 부활·행복·생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고난을 생략하면 기독교는 망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 가는 것이 전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일만 되면 일을 시키거나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해서 그것을 뚫고 교회 나오는 것은 매주 전쟁이었습니다. 때로는 빗자루로 얻어맞고 여성들은 머리도 막 잘리면서도 교회에 갔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신앙이 진짜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교회 가는 것 때문에 아무런 고난이 없습니다. 다 편합니다. 교회에 와도 목회자가 쓴소리하기 어렵습니다, 교회 안 나올까 봐. 결국, 희생이나 헌신 없이 달콤한 열매만 추구하게 되면 그 신앙도 죽고 교회도 죽습니다. 우리 교회가 움직여지고 선교 공동체로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많은 성도의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정상적입니다. 너무 합리적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복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시간과 건강과 노동과 물질을 드리면 나는 당장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몸이 아프고 다른 일도 하지 못하고 돈 쓸 곳이 여러 군데인데 못 쓰니 고통입니다. 근데 그 고통을 기뻐하게 된다는 것은 거룩한 중독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어떤 고통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전통입니다. 이걸 다시 찾아야 합니다. 달콤한 고통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주민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2-05
  • [금주의말씀] 교회에서 찾을 영광
       신학교 재학 시절, 캠퍼스 안에 기숙하고 있던 학생들과 ‘뉴욕 곰탕집’에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신학교로 돌아오면서, 차 안의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드셨어요?” 모두들 잘 먹었다고 하는데 한 학생만 “아니요!”라고 답을 합니다. “왜?” 되물었더니, “짜장면이 맛이 없어요” “아니, 곰탕집에 갔으면, 곰탕을 먹어야지, 짜장면을 먹고 맛이 없다고?”하며 모두 웃었던 일이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썼던 C.S 루이스는 크리스천으로 회심을 한 후에도 오랫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교회에 대한 역할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동물원에 가는 것만큼이나 교회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의식에서 시작 된 것으로 신경이 무척 쓰이는 ‘같이하기’ 행사였다”고 하며, 교회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개인적인 탐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에 임재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크리스천의 삶이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인간으로서,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여, 어디에 속할 필요가 있다.”   파스칼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신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교회 안에 분명한 표징을 두었다.” 그러면, 교회에만 있는 그 무엇, 교회에서 찾아야 할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를 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2c-3절 말씀처럼,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변형’(transfigured)의 뜻은 ‘안으로부터 나오는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문화와 사회의 상황과 각자의 생활 속에 바쁘게 살면서, 예수님도 그 모든 영향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마음과 시간과 공간을 구별하여 모인 교회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4-6절 말씀처럼, 성경 속의 인물·사건·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체험합니다. 7절에서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은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영광된 체험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어디입니까? 변화 산 자체가 특별하고, 유명한 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변화 산입니다. 어느 교회이든지, 하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의 영광 된 교회입니다.   또한 2절에 ‘따로’, ‘높은’, ‘올라가셨더니’의 단어처럼, 우리는 예배의 시간과 장소를 특별히 구별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 중에, 나를 따로 구별하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또 8절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현실에 충실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광된 변화 산과 교회에서, 생활 현실로 돌아와 충실 하십시오. 내 생활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소명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맛을 보았으면, 그 힘으로 내 삶이 영광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세상에서, 일상생활에서 그 영광의 능력을 발휘하시길 축원합니다./목사·새빛다문화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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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4-01-30
  • [설교] 기도
    김국현목사    우리는 보통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제일 쉬운 일은 숨 쉬는 것입니다. 숨 쉬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워서 떡 먹기보다 더 쉬운 것이 누워서 숨쉬기입니다. 교회가 생명력이 있다면 살아있는 기도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성도들이 소유한 능력의 원천이며, 동시에 건강의 척도입니다. 성도는 어마어마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거머쥐신 분의 능력을 청구해 쓰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능력을 주시는데, 그 연결선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아무리 잠재적인 능력이 많다 하더라도 참 무력해 보입니다.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없으면 참 무력해 보입니다. 반면 몇 명 모이지 않는 교회라 할지라도 살아있는 기도가 있으면 역사를 움직이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기도의 능력을 가르쳐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2~14).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들은 나의 일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니 더 큰 일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면” 시행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장막 안에 금향단이 있습니다. 이 금향단에 성도의 기도가 담겨져 하나님 앞에 올라갑니다.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주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위해 기도하고 이 기도의 응답으로 이 땅 위에 종말의 증거을 보이십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도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행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땅 위에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행해집니다. 이것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알리는 사인입니다.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주님도 다시 오십니다. 기도에 이렇게 엄청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악한 마귀는 잘 압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기도를 못하게 만듭니다. 바쁘게 만들고, 이유를 만들고, 어떨 때는 핍박을 통하여 하여튼 기도만은 못하게 하려고 획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난관을 뚫고 나아가서 기도하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그분이 주시는 사랑을 받는 아주 단순한 일입니다. 기도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기도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커다란 착각이며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우리의 영혼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주리고 목마르십니까? 우리의 삶이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렘 2:13)와 같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럴 때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말씀하신 주님의 초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주께로 나아가십시오. 갈급한 심령으로 주 앞에 나아와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 홍천 풍성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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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4-01-25
  • 너희 광야가 숲이 되리라 (이사야 32장 15절)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곳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곳에는 반드시 부활과 회복과 성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닿게 될 때, 어떤 쓸모 없는 땅도 기름진 땅으로 변하게 되며, 그 기름진 땅에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서 그 주변 전체가 숲을 이루어 가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금년 우리 교회의 주제 "너희 광야가 숲이 되리라!" (From Deserts To Forests!)는 말씀은 하나님의 역사와 복음의 능력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장차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변화를 일으키실 것인지 예언하시고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만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생명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광야와 같이 죽었던 세포가 살아나게 되었고, 죽었고 메말랐던 심령에 생명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마음 밭에 말씀의 씨앗이 심기기 시작했고, 그 마음 밭이 생명의 밭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어부였던 베드로 안에 생명이 임하니까 베드로를 통해 평생 일어서지 못하던 자가 일어서게 되었고, 하루에 수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거부했던 사도바울이라 할지라도 그 심령에 생명이 임하니까, 그가 가는 지역마다 영혼들이 돌아오고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결과 광야 같은 우리의 심령이 변하여 하나님을 모신 아름다운 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의 숲이 되어 우리 주변을 하나님의 숲으로 만드는 생명의 사역을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2024년 금년 한 해가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의 심령과 가정마다 광야에서 아름다운 밭으로, 아름다운 밭에서 울창한 숲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성령을 사모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생명이 역사하여 숲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년 주제 성구인 이사야 32장 15절은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역사는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광야가 변하여 아름다운 밭이요 숲이 되는 역사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바로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심령과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광야 같은 심령에서 아름다운 받이 되도록, 그리고 시대를 섬기는 숲이 되도록 계속해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금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저는 금년 한 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과 사업장마다 광야가 변하여 밭이 되고, 밭이 변하여 숲이 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떠나갔던 자녀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기업이요 기름진 땅으로 회복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교회에 맡겨 주신 모든 사역과 사업의 영역에서 광야가 변하여 숲이 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복하며, 모든 부서의 환경마다 광야에서 아름다운 밭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에 남겨 주신 교회 캠퍼스와 주차장과 드림키즈 땅과 연수원과 교회묘지가 광야에서 아름다운 밭으로, 아름다운 밭에서 시대를 섬기는 숲으로 개간하고 변화시키는 역사가 시작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 주변의 모든 지역 사회와 지역을 살아가는 모든 영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숲으로 변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대전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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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4-01-16
  • 깨뜨리자(마태복음 26장 6절~10절)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 26:6~13)   2024년을 바라보며 우리는 새 행정을 맞아 구역이 바뀌고 구역장과 구역원이 바뀌어 좀 생소하기도 하고 맘에 안드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로 삼고 달려갈 곳은 천국이기에 천국을 소유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복받기를 갈망하고 삽니다.     우리의 진정한 복은 천국을 소유한 자가 최고의 축복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배다니 시몬의 집에서 천국복음을 전하실 때 순수한 믿음의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 천국을 보았기에 노동자 1년 치 임금인 향유를 단 한 방울의 낙오도 허용치 않고 탈탈 털어 예수님께 전부 쏟아 부었습니다. 제자들은 분개하며 여인을 핍박하였으나 예수님은 “내 장례를 위하여 특별히 행한 것이니라”하시고 여인을 향해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기억하리라” 여인이 제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향기를 가득 채움같이 나를 깨뜨려서 사랑과 감사와 희생의 향기를 가득채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깨뜨려야 할까요?    첫째 약한 믿음입니다. 자라지 않는 신앙은 성장하지 않는 믿음이며 바로 ‘의심’입니다. 교회, 목사, 성도에 대한 불평과 의심이 있으면 절대 믿음은 자라지 않습니다. 왜 나는 믿음이 안 자라고 늘 퇴보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 때 스스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입술에는 감사가 있는가? 혹여 불평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 모습이 있다면 반드시 깨뜨려야 합니다    둘째 물욕입니다. 물질은 우리에게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에 너무 과하게 욕심을 내다보면 예수보다 물질을 쫓아가게 되고 예배생활을 뒤로하고 돈을 벌려 나가게 되고 끝내는 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은 물질만 사랑하다가 네 영혼을 데려가면 이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눅12:20) 우리는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관리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 가족, 성도,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물질관으로 사용하는 관리자로 깨어지길 소망합니다.    셋째 교만입니다. 자신이 최고라고 하며, 내가 아니면 안됩니다.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장이라 했습니다. 이렇듯 말씀처럼 교만은 망함의 선봉이기에 깨져야 하며 교만에서 내려와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성들을 깨뜨리고 신실한 믿음의 청지기들이 됩시다    나의 약한 믿음과 물욕과 교만이 예수님 이름으로 깨짐으로 새롭게 거듭나서 아름다운 향기를 주님께 드리며 빛된 삶을 사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대한교회 목사·예장 백석측 부흥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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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4-01-09
  • 믿음의 걸음을 내딛자 (창12:1~5)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한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3:1)라는 말씀은 한 해를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있으면 새롭게 맞이해야 하는 때도 있기에 새로운 한 해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고 이전에 놓치고 있던 것들을 다시 붙잡고 다시 출발하라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에서 주신 새로운 한 해가 축복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소망하고 기도하는 것들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인지에 대해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본문을 통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믿음의 걸음을 내딛으며 살기 시작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 각자가 믿음의 걸음을 내딛기로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첫째:감동을 따라가라(1)  믿음의 걸음을 내딛는 자가 되려면 첫째 현실이 아닌 내일의 소망을 위한 감동을 따라가야 한다. 믿음의 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은 세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절)고 명령하신다.   세상은 어떻게 하면 안락하고, 편안하고, 익숙한 것에 거하며 살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믿음의 걸음은 늘 새로우며, 매번 낯설기도 하고, 한치 앞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길을 선택하며 가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에 주저하지 않고 반응하며 따라갔던 이들이다. 이 감동을 따라 사는 것을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 여기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리라”(눅9:62)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눈에 보이는 익숙하고, 안전한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따라 믿음의 길을 걸어가길 축원한다.  둘째:약속을 따라가라(2~3)  믿음의 걸음을 내딛는 자가 되려면 둘째 확신이나 경험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가야 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찾아오기 전까지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주목하지 않는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였을 때가 75세(4절)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아브람이 자신이 살았던 삶의 방식을, 경험을 통해서 깨달아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을 한 순간에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임하였고, 자신의 가지고 있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의 말씀만 붙들고 사는 것도 버거운데 이 세상 것들도 붙들고 살려고 하니 얼마나 고단한 인생인가?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네게 유익하던 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3:7~8)이라 고백한다. 내 욕심, 경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가자.  셋째:확신으로 따라가라(4~5)  믿음의 걸음을 내딛는 자가 되려면 셋째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분명한 확신으로 따라가야 한다.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4a)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현재의 상황이나 앞으로 되어 질 일들에 대해서 계산을 다 마치고 나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5절)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는 말씀이 떠오른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나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신데, 내가 만약 나의 걸음을 온전히 맡길 수 있다면 나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에 들어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시는 확신 안에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길 축원한다.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진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는 요단강이 우기라는 자연의 강한 힘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그 강을 건너는 방법은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서 건너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언덕까지 범람하던 물이 멈추고 백성들은 그 강을 건너가게 된다(수3:14~16).   믿음의 한 걸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역사를 체험하게 한다.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을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걸음을 내딛어 복의 근원이 되었던 아브라함처럼, 올 한해 각자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믿음의 걸음을 내 딛음으로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경험하는 은혜의 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1-08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금주의 말씀] 대강절을 맞이 하며
    ▲ 서충원목사 오늘 본문은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육신의 차원과 말씀의 차원, 피조물의 차원과 창조주의 차원은 혼동될 수 없다. 그러나 육신은 말씀 없이 나타날 수 없고 말씀 없이는 어떤 피조물도 존재할 수 없다. 창조주의 말씀은 모든 육체를 넘어서면서 모든 육체의 근원이시며 목적이다.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은 창조주의 영광을 반영하고 그것을 가리킨다. 보이는 피조물을 넘어 창조주 하나님을 보고 그를 알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제 말씀이 육체가 되셔서 영원한 영광을 계시함으로 육체도 이전의 육체가 아니게 된다. 말씀의 영광을 담은 육체,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다. 질그릇은 보배일 수 없고 보배의 영광을 지시하는 육체 자체를 보배와 동일시하는 것은 큰 착각이지만, 질그릇 육체를 떠나 그 보배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는다. 육체는 말씀의 영광을 담는 그릇이다. 육체는 그 안에 담긴 말씀의 영광을 보게 함으로 우리에게 이전에 주지 못한 기쁨을 준다. 우리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넘어 말씀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지향한다. 그러나 육체를 부정함 없이 오히려 육체를 매개로 하여 그 육체의 근원과 목적을 지향하고 육체 안에서 초월적 영광을 감지한다. 땅은 하늘을 지시하고 하늘의 영광을 더 깊이 알게 되면서 이 땅은 생명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제 성육신하신 아들 안에서 우리는 하늘과 땅이 입맞추고 말씀과 육체가 동화되는 계시적 현실 앞에 선다. 성육신의 비전은 교회의 비전이다. 이것이 대강절의 참된 비전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듯, 우리 안의 영적인 생명이 육체에 빛나게 되는 비전이다. 육체를 넘어서 저 하늘의 계시를 보고 사나 육체 안에 그 계시적 경험이 반사된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동료인간과 동료 피조물과의 만남의 새 근원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은 이웃사랑의 능력이 된다. 말씀은 육체가 썩어질 것임을 보여주는 거울이면서 그래서 육체의 죽음을 촉진하면서 나아가 말씀이 모든 만물의 새 창조의 능력임을 알게 한다. 이제 더는 썩어질 육체로 살지 않고 썩지 아니할 영원한 생명으로 육체를 죽음에서 건져낸다. 이제 육체 안에 사나 말씀의 능력 한 가운데서 육체의 한계를 돌파한다. 물론 여전히 육체는 육체이고 질그릇은 질그릇이지만 이제는 말씀의 능력을 담은 육체이고 보배를 드러내는 질그릇이다. 다른 이들과 동일한 한계 안에 살지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보이는 육체의 슬픔과 절망을 넘어 살게 한다. 우리는 성육신의 은혜를 입어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경험하고 있다. 이제 말씀을 육체가 되게 하라! 말씀이 여기에 계시되게 하라. 제자들의 공동체는 말씀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공동체이다. 성육신으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졌듯이 지금 교회 안에서 제자들의 죽음과 삶 안에서 하늘의 생명이 죽음의 그늘 아래 사는 이 땅에 비치고 있다. 단지 썩어질 육체를 넘어선 말씀의 능력 안에 들어간 새로운 육체, 그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육체가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경험된다. 교회는 계시적 공동체이며 세상을 비추는 빛이다. 나사렛 예수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듯 약하고 허물 많은 교회가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영광을 실제 삶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와 보라!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지 않은가? 여기에 어둠을 비추는 빛이 빛나고 있지 않은가? 현실이 절망인가? 주의 아름다움을 아는 제자들 안에 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빛이 있지 않은가? /샬롬영광누리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2-07
  • [금주의말씀] 항상 감사할 은혜
    ▲ 함정호목사 중생구원은 사죄 공로의 태를 통해서 주신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말씀대로 영원히 사망케 하는 독이요 지옥에 갈 밑천이다. “사죄”란 죄를 멸해서 무죄한 자가 되게 한 은혜다. 이는 인간의 대표이시며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대신 죽으셔서 죄의 값인 사망을 지불해 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없이 해주셨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사죄의 은혜는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서 구해주신 은혜요 죄와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능력의 은혜이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산자를 위하여 살게 하심이라’(고후 5:15) 이 중생구원은 칭의 공로의 태를 통해서 주신다. 무죄한 예수님은 “대형”으로 사죄를 “대행”으로 칭의의 은혜를 입혀 의로운 자 되게 하셨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에서 잉태하실 때부터 다 이루었다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성부의 뜻을 한 번도 어기지 않으시고 온전한 순종으로 의롭게 사셨는데 일생에 의롭게 사신 “의행”의 이력을 우리가 산 것처럼 우리에게 입혀 의롭게 하셨으니 이것이 칭의 구원이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로마서는 말한다. ‘칭의’는 하나님의 부요존귀, 권세, 영광의 은혜를 받는 자격이요. 이 칭의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받음으로 이 순종의 줄은 하나님의 만복이 오는 줄이다. 칭의를 입은 자는 그 자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 중생구원은 화친 공로의 태를 통해서 주신다. 첫 아담의 죄, 불의로 하나님과 원수되어 생명이신 하나님과 끊어져 사망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대형, 대행, 대화로서 친히 제물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으니 이것이 화친의 구원 은혜이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써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니라’ 하나님과 화친한 자되면 하나님은 내 안에 나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 된다. 화친 자로 살려면 사죄, 칭의, 화친 은혜로 자기 몸이 온전히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주님의 것으로 살아야 한다. 이같이 중생은 주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구속의 태에 진리와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새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 구원의 은혜는 중생시키는 역사를 통해주신다. 중생은 ‘다시 나다, 거듭나다’라는 말인데 부모를 통해 허용창조를 통해 낳은 육의 사람이 주님의 구속, 피의 은혜를 입혀 진리와 성령으로 신령한 사람으로 두 번째 낳은 것이다. 첫 아담은 범죄로 생명이신 하나님과 끊어져 죽던 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 중생이다(엡 2:1~10). 하나님의 영생하는 새 생명을 받아 영생할 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백성으로 하나님의 후사로, 온전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 중생구원은 만인이 다 받을 수 있는 구원이 아니요, 인간에 의해서 받는 구원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들에 한해서, 하나님의 단독적인 역사, 절대 주권적인 역사, 무조건적인 은혜의 역사로 받는다. ‘중생’은 일생중단 일회적이며, 모든 택자들에게 격차가 없이 주시는  구원이다. 중생은 신령한 사람이 출생한 것임으로 이 영의 사람이 자라 온전해가는 성화 구원의 기초이다. 이 중생은 성부 하나님의 예택 창조와 성자 하나님의 사죄, 칭의, 화친, 은혜와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로 되었다. 중생은 온전하신 성 삼위 하나님의 주신 것임으로 절대 온전한 구원이다.   /영화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1-27
  • [금주의 말씀] 종속적 동역자
    ▲ 박만배목사   세상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움직여지지만 동시에 종속적 동역자인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일꾼들을 불러 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불러 훈련시키시고 연단시켜서 자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다. 주의 일을 힘에 겹게 지치도록 하다가 탈진하고 원하는 만큼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실망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도 헤아릴 수없이 경험하며 낙심, 원망할 때도 있었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서 우리를 교훈하시고 보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새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였다. 두 번째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첫 번째 명령과 그 이후에 있었던 요나의 경험을 염두에 둔 것이다. 즉 요나가 첫 번째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실패했으나 하나님이 다시 요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아담’에게도 하나님이 다시 찾으셨다. 행위언약에서 실패하고 숨어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시어서 가죽옷을 입혀주시고 패자부활전? 두 번째 기회를 주신 하나님…?   피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이방구원의 계획이 요나의 불순종으로 지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요나 한 개인에 대한 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했지만 하나님은 기필코 ‘베드로’를 예수님을 통해 다시 찾아오시고 새 힘을 주시고 훈련시켜서 초대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큰 일군으로 데 크게 사용하셨다. 불완전한 인생이 삶의 현장에서 쓰러지고 넘어지고 하는 것은 다반사가 아닌가? 일곱 번 넘어지면 8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을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이다(욘 3:1~4) 요나는 이미 풍랑(1:11~16)과 물고기 뱃속에서(1:17~ 2:10) 하나님의 능력을 크게 경험하였다. 자연을 통한 재앙은 요나로 하여금 자신이 절대로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이 아니고는 결코 살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욘 2:9)을 철저하게 실감하고 인정하게 하였다. 지금 시대가 상황이 분위기가 현상이 도덕적, 영적 수준이 앗수르의 니느웨성의 2,800여 년 전의 시대상황과 부도덕과 윤리, 우상숭배, 황금만능, 자신이 신의 자리에서 영광 받으려는 최악의 위기의 때가 아닌가? 영적 타락의 도가 넘은 죄악이 관영한 노아시대, 롯의 때가 아닌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전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주저앉아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가? 요나의 생각으로는 될 것 같지 않은 니느웨성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살아나는 기적은 2,800여 년 전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들이다. 악독하기 그지없던 니느웨 백성들과 왕, 그리고 짐승까지도 금식하며 회개하는 역사를 하나님은 하시지 않았는가? 일어나 선포하라! 다시 한번 첫사랑의 뜨거웠던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내 힘과 방법으로만 주의 일을 하려고 했던 나를 주님 앞에 엎드리어 회개하고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영적 감각의 민감함을 회복하고 주님의 능력 앞에 마음 깊은 순종의 사명자가 되자!   나는 주님이 힘을 주시기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일어나 걸으라 내(主)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으라 내 너를 도우리… 주님은 그대를 주님의 종속적 파트너로 선택하셨다.  /합동개혁 총회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1-21
  • [금주의 말씀]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
    ▲ 조동호목사   출애굽기 31장 14~15절과 35장 2절에는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간주하고 있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와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다.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가 또 다른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로 간주되고 있어서 충격적이다. 오늘날에는 엽기적 살인자조차도 사형에 처해서는 안 된다는 사형제 폐지론이 지배적이어서 613개 토라계명들 가운데 사형시켜야 할 만큼 큰 죄로 간주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를 사형에 처하라는 계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또 토라에서 안식일을 더럽히거나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를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로 다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대교인들에게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오늘날 유대교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하라”는 계명대로 안식일을 ‘기억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는 계명대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인데, 특히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여 창조의 일을 중단하고 노예와 유배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제2, 제3으로 이어지는 해방, 곧 이스라엘의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이로써 우리는 적어도 유대교인들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이유가 사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에는 상사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고, 만일 불복종할 시에는 사살시킬 수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전시법은 부대원들의 생존뿐 아니라 국가의 존망이 걸린 비상사태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시와 같은 비상사태에 자주 처해있었다. 그 원형이 출애굽 사건이며 이들의 땅과 나라를 얻기 위한 투쟁이 멈춘 적이 없다. 이처럼 모세오경은 백성이 한 사람처럼 단결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생존을 위한 투쟁이 극심했던 상황들에서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은 유대인들에게 3천 년이 넘게 지속되어 왔다.   이러한 투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선포 이후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토에 돌아온 유대인들이 겪었던 이방인들의 핍박과 경제적 어려움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바벨론(페르시아)탈출 세대가 고토에서 겪었던 어려움은 이집트탈출 세대가 광야에서 겪었던 어려움에 뒤지지 않았고, 그로부터 2,500년 후에도 상황은 동일했다.    전시법과 같은 토라 모세오경과 613개의 계명들은, 비록 오늘날에는 유대인들조차도 죽은 법으로 여기는 것들이 수백여 개나 되지만, 유대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게 된 원동력이다.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수천 년에 걸쳐 험하게 살아온 만큼 칭송과 아울러 멸시와 천대를 받기도 한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믿음과 신념이 강했고, 확신과 희망이 강했으며, 싸움닭처럼 거칠게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은 영원성의 상징이다… 유대인은 예언의 말씀을 아주 오랫동안 보존하고 그것을 인류에게 전달한 민족이다. 이 같은 민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칭송을 받는가 하면, 10억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한다. 최근 매일 평균 17건의 반유대주의 행위들이 보도되었다고 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거나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빛과생명그리스도의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1-15
  • [금주의 말씀] 더 큰 계명
    ▲ 임종훈목사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 없느니라”   오늘날 우리는 확실히 이웃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다. 너와 내가 단절된 가운데 피차 낯익은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금세기 기독교를 변증하는 최대의 철학자인 프란시스 쉐이퍼박사는 죄를 ‘분리’ 또는 ‘소외’로 보면서, 현대의 위기를 강변했다. 원초적인 분리로서 곧 하나님과 나와의 분리된 현실이고, 사회학적인 분리로 나와 너의 분열 또는 소외이며, 심리적인 분리로서 곧 나와 나의 분리이며, 마지막으로 생태학적인 분리로서 인간과 자연과의 소외현상이다. 베델성서 구약 편을 공부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의도는 가장 우선순위가 하나님과의 조화요 둘째는 타인과의 조화요 세 번째는 자기 자신과의 조화요 그리고 마지막은 자연과의 조화를 이야기했다. 하나님의 뜻은 분리되고 소외된 우리가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임은 분명하다.   어쩌면 오늘의 기독교인을 포함한 모든 현대인들이 영적 질병에 걸려, 앓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도나도 진정한 만남과 대화의 장을 갖지 못하고,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또는 소외지대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오해와 불신과 더 나아가서는 미움과 저주의 독버섯이 서식하고 있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네 사람 중 하나라고 하는데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산업화한 오늘의 도시 속에서 이웃 사랑의 아름다운 도리는 어디로 갔는가? 진정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하고,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 할 기독교인의 기본적 사명이 단지 설교와 기도 속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 봄볕보다 더 온유한 사랑으로 얼어붙은 이 사회를 녹여야 하겠건만 그 사랑이 식어가고 냉랭해져 가니 참으로 쓸쓸한 사회요 비정한 이웃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일찍이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 없느니라”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랑을 사도 요한도 강조하여 말하기를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고 했다.   주님은 또 사랑할 이웃을 묻는 율법학자에게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답하시면서 오히려 반문하셨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 곧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 자(눅 10:33~34)라고 답했을 때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이다. 이웃의 구심점이 내가 아니라, 강도 만난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내가 중심이 되었다. 내가 봉사하고 내가 도와주고 모든 것이 나를 중심하여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주체는 강도 만난 자이다. 다만 나는 가서 도와주어야 할 객체에 불과하다.   그렇다. 무엇보다도 귀한 것은 우리의 이웃에게 내가 우선 이웃이 되는 삶이다.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의 문제를 내가 어찌 해결해 줄 수 있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주거나 그들의 문제로 성급히 해결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우선 ‘그들 이방인’이 아닌 ‘이웃’으로 함께 있도록 한다면 길은 열릴 것이다.  /소명루터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1-08
  • [금주의 말씀] 효를 실천하는 가정
    ▲ 한요한목사   기독교는 어느 종교보다 효를 강조하고 있다. 유교에서 공자를 통하여 효를 가르치고 있지만 기독교는 공자가 오기 전 이미 1,000년 전에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고 제5계명을 통하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계실 때에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오셨고 또한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선포하셨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부모이신 마리아를 십자가상에서도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시며 네 어머니시다고 하셨다. 우리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육신의 부모님을 통하여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또한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효는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을 논함에 있어 부부의 윤리와 함께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 생존의 기본 조직인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간의 질서를 세워 나갈 때 순종을 강조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아버지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순종의 본을 보이셨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다. 우리 성도들도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할 때에 가정에 질서가 세워지고 복된 가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부모에게 자식이 순종하되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부모에게 순종하기 전 먼저 주께 대한 순종이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즉 부모에 대한 자녀들이 맹목적적인 순종이 아니고 불신앙에서부터 오는 하나님 말씀에 반대하는 순종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 안에서 해야 한다. 말씀 안에서 해야 약속있는 복의 계명이 된다.   누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려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성경에서 불효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효는 하나님 아버지를 대적하는 것이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모공경은 단순히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께 효 하는 길은 첫째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또한 존경하고 높이는 것이다. 부모의 마음을 심려를 끼치지 않게 해야 한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성경은 보이는 부모조차 공경하지 못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부모에 대한 효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자녀로서의 당연한 도리이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이다. 가정은 지상낙원과도 같고 천국의 모형이기도 하다. 성도의 가정은 하나님 아버지를 잘 섬기고, 부모님을 공경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세워지는 복된 가정이 되는 것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은 사랑으로 하나 되고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데서 시작된다.   또한 효를 실천하는 가정은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자녀는 내 소유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잘 양육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한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내 욕심으로 내 고집으로 내 감정대로 하기 때문이다.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인격체이므로 부모는 자신의 욕망이나 대리만족을 위하여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된다.  /원주 효문화원 원장·원주충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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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8-10-31
  • [금주의 말씀] 생사화복이 있습니다
    ▲ 장항희목사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살고 죽고 행복하고 불행한 것 즉, 생사화복을 주었다고 했다. 본문이 기록된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말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하다가 광야생활 40년이 다 끝날 무렵에 모세가 유언을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나간 역사를 다시 재론하는 내용이다.  1. 선택을 잘 해야 한다.   성경을 보면 양면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양과 염소, 사랑과 미움, 복과 저주, 천국과 지옥 등등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우리는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다.   1) 생명의 길을 선택하면 복을 누린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잠10:16), 의인의 길, 곧 의롭게 사는 삶 속에는 생명이 있다.  2) 사망의 길을 선택하면 화를 받는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 죽음이 오게 되고(창2:17), 말씀을 청종치 않으면 칼에 망하게 된다. 3) 성경은 선택의 중요성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을 택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자손의 축복, 물질의 거부가 되었고, 롯은 소돔 고모라를 택해서 멸망을 받았다. 2. 생명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1)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며(신6:5),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2) 모든 길로 행하는 것이다. 모든 길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의 길로 행하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다.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해야 하고(신4:1),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한다. 3. 생명의 길을 택한 사람에게는 어떤 약속이 있나? 1) 생존의 축복을 약속하셨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창2:7),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출 12:29-30) 인간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2) 번성의 복을 약속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번성할 것을 약속하셨다.(창15: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3) 가서 얻을 땅에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축복의 땅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 을 주셨다.  4. 사망과 화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사망과 화를 받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기 때문이고(창 2:17) 둘째, 하나님 말씀을 청종치 않기 때문이며 셋째,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떤 길을 택하고 살아가야 하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의 진리를 따라 순종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면 화를 당한다. 이제부터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사에 의욕적이고, 긍정적이며, 소망적으로, 적극적 사고를 갖고 영적인 생각으로 꽉 차게 살아가면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생명과 복을 누리기를 축원 드린다.  /경기도총연합회 총회장. 든든한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0-23
  • [금주의 말씀] 거룩한나라
    ▲ 박진석목사   본문은 베드로 사도가 로마 정부하에서 점차로 핍박과 억압의 강도가 높아져 가고 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주신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즉 성도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을 다루고 있다. 사람에게는 정체성이 중요하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러한 정체성이 확고할 때 담대함과 자신감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특별히 좀 이해하기 힘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거룩한 나라”라는 정의이다. 동양철학에서도 인간을 소우주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은 다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일인국가이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한 뒤로는 두 종류의 사람과 나라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원수, 거룩한 나라와 거룩하지 않은 나라이다.   그런데 주님은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성경을 보면 복음에 대해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는다.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 복음, 천국 복음, 화평의 복음, 은혜의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영원한 복음 등이 그것이다. 특별히 이 가운데에서 주목해 볼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기 직전에 전파되어야 할 복음을 “천국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하셨다. 다 동일한 복음을 말하지만 “천국 복음”에서는 나라적 측면이 더 강조되는 것이다.   본질상 성도의 기도와 관심과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핵심이 바로 마태복음 6장 10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성도의 기도는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구하지 않아도 다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완전히 마귀에게 세뇌를 당해 가장 중요한 기도의 영역에 있어서조차 믿지 않는 자들이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본질적으로 나의 욕심의 나라와 나의 뜻을 먼저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방인들의 기도와 성도의 기도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계시록 21장 4절에 “그 나라는 눈물 흘리는 일이나 곡하는 일이 없고 아픈 것도 죽는 것도 없는 나라”라고 한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의 고백이 저절로 나오는 나라이다. 이 문제 많고 죄 많은 세상 나라에서 예고편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맛보며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회개할 것밖에 없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회개는 천국의 능력을 충분히 맛보지 못한 것에 대한 더 깊은 차원의 회개여야 한다. 생명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여야 한다. 이런 회개가 깊어지고 사무칠수록 나는 죽고 예수 부활의 생명의 능력이 거룩한 나라, 천국 된 나의 삶에 실제로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시대와 나라에도 적용해보길 바란다. 여러 가지 많은 갈등과 문제들을 안고 나아가고 있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뜻대로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지 않으려는 우리들이 먼저 가슴을 찢는 회개를 해야 하지 않을까?   현재 이 한반도의 상황은 남과 북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국내외적인 논의가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어쩌면 이때야말로 교회와 성도들은 더더욱 깨어 하나님의 온전하고도 선한 뜻이 남과 북, 우리 민족 모두에게 성취될 수 있도록 평화와 통일을 위해 치열한 영적 전쟁을 감당해야 할 때가 아닐까? 하나님이 보우하사 거룩한 나라 대한민국 만세! /포항 기쁨의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0-18
  • [금주의 말씀] 흙에 깃든 숨
    ▲ 강기성목사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장 7절)   인생의 본질은 흙이다. 그 어떤 화려한 인생이라도 겉모습을 걷어 내고 나면 흙만 남는다. 아무리 예쁘고 잘 생기고 건강하고 유명했어도 살과 뼈가 다 타고 나면 티끌만 남는다.   사람(아담)이라는 말의 뜻이 땅(아다마)의 흙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땅에 속한 존재이다. 원래 먼지요 티끌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그 땅속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주께서 정하신 삶의 숙명이다(시편 90:3).     그러나 또한 인생은 흙일 수만은 없다. 흙은 흙일진대, 그보다는 나은 어떤 다른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인생이 너무나도 덧없고 한없이 가련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무엇인가 인간과는 다른 기원 즉 신적인 요소를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땅의 흙으로만은 설명이 되지 않는 하늘에 속한 인생의 또 다른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는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속됐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속에 그려진 인간의 자화상은 흙 속에 떨어진 신의 눈물이나 핏방울로 그 존재의 이원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매뉴얼이 원래 그렇게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경건한 셋이나 셈의 후손들로부터 귀동냥으로 들었을지도 모른다.    성경은 인간의 DNA에는 흙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흡(숨)이 함께 들어 있다고 가르친다(창 2:7). 흙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인간의 인간 됨의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숨이 불어 넣어지기 전에는 사람은 그저 진흙덩이었다. 숨이 들어가 비로소 몸에 피가 돌듯이 생명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생명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생명은 흙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생이 인종과 신분을 불문하고, 신체상의 그 어떤 우열에도 상관없이 동등하고 공평한 것은 인간에게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생명이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밖에서 즉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치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떠한 성과물도 결국에는 땅의 티끌이요 먼지에 불과하다. 생명은 인간에게서 시작되지 않는다. 생명의 숨은 흙의 바깥으로부터 흙 안으로 불어 넣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데 그토록 자명한 사실을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잠시 들여다본다. 호흡이 그치고, 숨이 그를 떠날 때에서야 비로소 인생이 결국 한 줌 먼지였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지혜자들은 숨이 나를 떠나기 전,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내게서 어두워지기 전에 내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가치가 창조주 되신 하나님에게 있음을 발견하라고 그토록 가르쳤던 것이다(전도서 12:1-2).     인생은 질그릇이다. 흙으로 만든 그릇이다. 무엇인가를 담아내지 않고 흙인 채로만 있어서는, 흙으로만 있다가 흙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존재이다. 내 인생 그릇에 무엇을 담아내겠는가? 만일 내 삶에 하나님의 숨결을 담아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뿜어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흙에 깃든 숨을 찾아보자. 그것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유일한 힘이다(고린도후서 4:7). /예동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0-11
  • [금주의 말씀] 바른 소리 곧은 소리
    ▲ 신현옥목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이 활을 당김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아니하느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수고하거늘 네 처소는 속임수 가운데 있도다” (예레미야 9:3-6)   하나님께서는 진실과 정직보다는 간교한 속임수와 거짓말이 난무하는 세태를 고발하신다. 혈액 순환이 잘 이뤄지지 않으면 산소와 영양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온몸이 쇠약해지듯, 진실과 정의가 잠잠한 사회는 힘이 없다. 속임수와 거짓말, 비방과 독설이 난무하는 사회는 혼돈과 불신·분열이 있을 뿐이다. 개인이나 사회의 에너지가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분출되는 게 아니라 그저 소모될 뿐이다.   바른말, 곧은 말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비방과 독설이 난무하는 때에 옳은 말, 진실한 말이 필요한 것이다. 불신은 사회를 혼란과 분열로 이끌어가고 붕괴시킨다. 서로 의심하고 불신하게 만들어 연합과 일치를 방해한다. 옳고 그름, 참과 거짓 사이를 모호하게 만들어 혼돈과 암흑으로 몰아간다.   진실한 말이 주인 노릇하는 맑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이 책임과 사명을 다하기 위한 싸움은 불가피하다. 진리와 정의 편에 선다는 것은 생사를 넘어선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의와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만이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는 자요, 용기가 있는 자다.   지금이야말로 믿음의 지조와 절개가 요구되는 때이다. 주님과 복음의 진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지 않고는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없다, 옳은 일에는 ‘예’ 하고 옳지 않을 일에는 ‘아니오’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비방과 거짓이 판치는 현실 속에서 바른말, 곧은 말을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오직 너희 말은 ‘예’는 ‘예’로, ‘아니요’는 ‘아니오’라 하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마태복음 5:37)고 하셨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난무하는 세상에서 ‘예’라고 할 경우에 ‘예’하고, ‘아니요’할 경우에 ‘아니오’하라는 것이다.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말라 하셨고(디모데전서 3: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말을 하라고 하셨다(디도서 2:8). 또한,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고 했듯이(전도서 3:7), 침묵해야 할 때에 침묵하고 말해야 할 때에 바른말, 곧은 말을 해야 한다.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바른말, 진실한 말을 하라고 우리를 불러 세우셨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아니요’하며 반대하더라도 ‘예’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용기요 정의이다. 모든 사람들이 불의에 대해 묵인하더라도 ‘아니오’하는 것이 정의의 편에 서는 것이다. 속고 속이는 거짓말과 기회주의자들의 아첨하는 말들이 온통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때에 진리의 검을 들어야 한다.   바른 소리, 올곧은 소리를 외치는 ‘광야의 외침’은 계속 되어야 한다. 비록 세례 요한처럼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하여 잠잠하느뇨?”(시편 58:1) 하신다. 또한, “너희가 한 말에 따라서 의롭다 함을 받기도 하고 정죄함을 받기도 하리라”(마태복음 12:37)고 하신다.  /시온세계선교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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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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