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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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 어린 아이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에서 5절)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어린이는 인생의 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저물어 가는 시점은 “인생의 열매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어린이 주일은 꽃의 주일이라고 표현을 해봅니다. 어린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크게 두가지로 표현한다면 첫째 사회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 둘째 성경적으로 심령이 깨끗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가 든든히 서갈 때 교회가 부흥 되어 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70년, 80년대 교회는 내면을 보면 교회학교가 급성장하여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줄 압니다.그러나 현 시대는 저출산과 독신주의와 더 나아가서는 어린아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학교가 부흥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라는 것을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희망! 교회학교 어린이를 사랑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장성한 어른으로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함으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본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 믿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아론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였습니다. 애굽에서 400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이 수가 점점 더해가자 애굽에서는 불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출생할 당시에 남자아이가 출산하게 되면 죽이라고 왕이 명령을 내리는 결단을 합니다. 그러나 모세 어머니 요게벳은 지혜와 믿음이 충만하여 왕의 법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 뜻을 지켰던 믿음의 여인이였습니다. 한마디로 순교를 각오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지혜로운 어머니였습니다.    둘째 지혜로운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요게벳은 행동을 합니다. 아기모세를 작은 바구니에 넣어서 크고 넓은 나일강가에 띄워 놓습니다. 아기가 죽을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누군가 아기를 발견하여 키워주지 않는 이상 아이는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살 수 없는 확률이 99% 불가능한 현실이지만 요게벳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분명히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게벳은 나일강가에서 애굽의 공주가 목욕하는 시간대와 장면을 보고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계획하는 지혜와 믿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학교와 자녀들을 향하여 가르치고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믿음과 지혜로운 행동을 보여주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말씀 안에서 순복하는 교회학교와 자녀들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들 가정에 꽃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하늘의 별처럼 부흥되기를 예수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욕심을 버리고 나를 낮추는 자가 되어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으며 계산적이지 않는 착한 성도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광명대한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29
  • [말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김기호   사도행전 28장 1절부터 31절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 장면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마지막까지 전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는데,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죽음의 폭풍을 이겨내고 멜리데섬에 도착한 로마군인들과 선원들의 숫자는 276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람인 바울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죽지 않는 기적을 보고 멜리데섬 사람들 중에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기를 겪는 폭풍을 만났지만 그가 예수님을 의지할 때,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멜리데섬 사람들도 병을 고침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고침 받은 ‘보불리오’는 나중에 멜리데 오늘날의 몰타에 감독에 됩니다. 바울이 죽음의 폭풍을 뚫고 멜리데섬을 거쳐 가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만나는 폭풍과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인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가는 곳이 때로는 감옥과 같이 답답한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감옥과 같은 곳에서 지냈습니다.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꼼짝도 못하는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바울은 감옥에서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있는 가정과 직장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믿는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2006년 1월에 서른 세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 ‘안수현’씨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쓰는 이메일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 안수현” 자신이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7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성남 은혜제일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22
  • [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14
  • [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01
  • [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25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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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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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종속적 동역자
    ▲ 박만배목사   세상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움직여지지만 동시에 종속적 동역자인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일꾼들을 불러 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불러 훈련시키시고 연단시켜서 자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다. 주의 일을 힘에 겹게 지치도록 하다가 탈진하고 원하는 만큼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실망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도 헤아릴 수없이 경험하며 낙심, 원망할 때도 있었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서 우리를 교훈하시고 보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새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였다. 두 번째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첫 번째 명령과 그 이후에 있었던 요나의 경험을 염두에 둔 것이다. 즉 요나가 첫 번째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실패했으나 하나님이 다시 요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아담’에게도 하나님이 다시 찾으셨다. 행위언약에서 실패하고 숨어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시어서 가죽옷을 입혀주시고 패자부활전? 두 번째 기회를 주신 하나님…?   피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이방구원의 계획이 요나의 불순종으로 지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요나 한 개인에 대한 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했지만 하나님은 기필코 ‘베드로’를 예수님을 통해 다시 찾아오시고 새 힘을 주시고 훈련시켜서 초대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큰 일군으로 데 크게 사용하셨다. 불완전한 인생이 삶의 현장에서 쓰러지고 넘어지고 하는 것은 다반사가 아닌가? 일곱 번 넘어지면 8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을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이다(욘 3:1~4) 요나는 이미 풍랑(1:11~16)과 물고기 뱃속에서(1:17~ 2:10) 하나님의 능력을 크게 경험하였다. 자연을 통한 재앙은 요나로 하여금 자신이 절대로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이 아니고는 결코 살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욘 2:9)을 철저하게 실감하고 인정하게 하였다. 지금 시대가 상황이 분위기가 현상이 도덕적, 영적 수준이 앗수르의 니느웨성의 2,800여 년 전의 시대상황과 부도덕과 윤리, 우상숭배, 황금만능, 자신이 신의 자리에서 영광 받으려는 최악의 위기의 때가 아닌가? 영적 타락의 도가 넘은 죄악이 관영한 노아시대, 롯의 때가 아닌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전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주저앉아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가? 요나의 생각으로는 될 것 같지 않은 니느웨성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살아나는 기적은 2,800여 년 전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들이다. 악독하기 그지없던 니느웨 백성들과 왕, 그리고 짐승까지도 금식하며 회개하는 역사를 하나님은 하시지 않았는가? 일어나 선포하라! 다시 한번 첫사랑의 뜨거웠던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내 힘과 방법으로만 주의 일을 하려고 했던 나를 주님 앞에 엎드리어 회개하고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영적 감각의 민감함을 회복하고 주님의 능력 앞에 마음 깊은 순종의 사명자가 되자!   나는 주님이 힘을 주시기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일어나 걸으라 내(主)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으라 내 너를 도우리… 주님은 그대를 주님의 종속적 파트너로 선택하셨다.  /합동개혁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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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8-11-21
  • [금주의 말씀]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
    ▲ 조동호목사   출애굽기 31장 14~15절과 35장 2절에는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간주하고 있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와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다.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가 또 다른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로 간주되고 있어서 충격적이다. 오늘날에는 엽기적 살인자조차도 사형에 처해서는 안 된다는 사형제 폐지론이 지배적이어서 613개 토라계명들 가운데 사형시켜야 할 만큼 큰 죄로 간주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를 사형에 처하라는 계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또 토라에서 안식일을 더럽히거나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를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로 다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대교인들에게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오늘날 유대교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하라”는 계명대로 안식일을 ‘기억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는 계명대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인데, 특히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여 창조의 일을 중단하고 노예와 유배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제2, 제3으로 이어지는 해방, 곧 이스라엘의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이로써 우리는 적어도 유대교인들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이유가 사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에는 상사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고, 만일 불복종할 시에는 사살시킬 수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전시법은 부대원들의 생존뿐 아니라 국가의 존망이 걸린 비상사태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시와 같은 비상사태에 자주 처해있었다. 그 원형이 출애굽 사건이며 이들의 땅과 나라를 얻기 위한 투쟁이 멈춘 적이 없다. 이처럼 모세오경은 백성이 한 사람처럼 단결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생존을 위한 투쟁이 극심했던 상황들에서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은 유대인들에게 3천 년이 넘게 지속되어 왔다.   이러한 투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선포 이후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토에 돌아온 유대인들이 겪었던 이방인들의 핍박과 경제적 어려움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바벨론(페르시아)탈출 세대가 고토에서 겪었던 어려움은 이집트탈출 세대가 광야에서 겪었던 어려움에 뒤지지 않았고, 그로부터 2,500년 후에도 상황은 동일했다.    전시법과 같은 토라 모세오경과 613개의 계명들은, 비록 오늘날에는 유대인들조차도 죽은 법으로 여기는 것들이 수백여 개나 되지만, 유대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게 된 원동력이다.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수천 년에 걸쳐 험하게 살아온 만큼 칭송과 아울러 멸시와 천대를 받기도 한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믿음과 신념이 강했고, 확신과 희망이 강했으며, 싸움닭처럼 거칠게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은 영원성의 상징이다… 유대인은 예언의 말씀을 아주 오랫동안 보존하고 그것을 인류에게 전달한 민족이다. 이 같은 민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칭송을 받는가 하면, 10억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한다. 최근 매일 평균 17건의 반유대주의 행위들이 보도되었다고 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거나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빛과생명그리스도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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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8-11-15
  • [금주의 말씀] 더 큰 계명
    ▲ 임종훈목사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 없느니라”   오늘날 우리는 확실히 이웃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다. 너와 내가 단절된 가운데 피차 낯익은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금세기 기독교를 변증하는 최대의 철학자인 프란시스 쉐이퍼박사는 죄를 ‘분리’ 또는 ‘소외’로 보면서, 현대의 위기를 강변했다. 원초적인 분리로서 곧 하나님과 나와의 분리된 현실이고, 사회학적인 분리로 나와 너의 분열 또는 소외이며, 심리적인 분리로서 곧 나와 나의 분리이며, 마지막으로 생태학적인 분리로서 인간과 자연과의 소외현상이다. 베델성서 구약 편을 공부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의도는 가장 우선순위가 하나님과의 조화요 둘째는 타인과의 조화요 세 번째는 자기 자신과의 조화요 그리고 마지막은 자연과의 조화를 이야기했다. 하나님의 뜻은 분리되고 소외된 우리가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임은 분명하다.   어쩌면 오늘의 기독교인을 포함한 모든 현대인들이 영적 질병에 걸려, 앓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도나도 진정한 만남과 대화의 장을 갖지 못하고,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또는 소외지대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오해와 불신과 더 나아가서는 미움과 저주의 독버섯이 서식하고 있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네 사람 중 하나라고 하는데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산업화한 오늘의 도시 속에서 이웃 사랑의 아름다운 도리는 어디로 갔는가? 진정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하고,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 할 기독교인의 기본적 사명이 단지 설교와 기도 속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 봄볕보다 더 온유한 사랑으로 얼어붙은 이 사회를 녹여야 하겠건만 그 사랑이 식어가고 냉랭해져 가니 참으로 쓸쓸한 사회요 비정한 이웃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일찍이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 없느니라”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랑을 사도 요한도 강조하여 말하기를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고 했다.   주님은 또 사랑할 이웃을 묻는 율법학자에게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답하시면서 오히려 반문하셨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 곧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 자(눅 10:33~34)라고 답했을 때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이다. 이웃의 구심점이 내가 아니라, 강도 만난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내가 중심이 되었다. 내가 봉사하고 내가 도와주고 모든 것이 나를 중심하여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주체는 강도 만난 자이다. 다만 나는 가서 도와주어야 할 객체에 불과하다.   그렇다. 무엇보다도 귀한 것은 우리의 이웃에게 내가 우선 이웃이 되는 삶이다.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의 문제를 내가 어찌 해결해 줄 수 있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주거나 그들의 문제로 성급히 해결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우선 ‘그들 이방인’이 아닌 ‘이웃’으로 함께 있도록 한다면 길은 열릴 것이다.  /소명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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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8-11-08
  • [금주의 말씀] 효를 실천하는 가정
    ▲ 한요한목사   기독교는 어느 종교보다 효를 강조하고 있다. 유교에서 공자를 통하여 효를 가르치고 있지만 기독교는 공자가 오기 전 이미 1,000년 전에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고 제5계명을 통하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계실 때에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오셨고 또한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선포하셨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부모이신 마리아를 십자가상에서도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시며 네 어머니시다고 하셨다. 우리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육신의 부모님을 통하여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또한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효는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을 논함에 있어 부부의 윤리와 함께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 생존의 기본 조직인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간의 질서를 세워 나갈 때 순종을 강조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아버지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순종의 본을 보이셨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다. 우리 성도들도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할 때에 가정에 질서가 세워지고 복된 가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부모에게 자식이 순종하되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부모에게 순종하기 전 먼저 주께 대한 순종이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즉 부모에 대한 자녀들이 맹목적적인 순종이 아니고 불신앙에서부터 오는 하나님 말씀에 반대하는 순종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 안에서 해야 한다. 말씀 안에서 해야 약속있는 복의 계명이 된다.   누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려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성경에서 불효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효는 하나님 아버지를 대적하는 것이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모공경은 단순히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께 효 하는 길은 첫째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또한 존경하고 높이는 것이다. 부모의 마음을 심려를 끼치지 않게 해야 한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성경은 보이는 부모조차 공경하지 못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부모에 대한 효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자녀로서의 당연한 도리이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이다. 가정은 지상낙원과도 같고 천국의 모형이기도 하다. 성도의 가정은 하나님 아버지를 잘 섬기고, 부모님을 공경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세워지는 복된 가정이 되는 것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은 사랑으로 하나 되고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데서 시작된다.   또한 효를 실천하는 가정은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자녀는 내 소유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잘 양육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한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내 욕심으로 내 고집으로 내 감정대로 하기 때문이다.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인격체이므로 부모는 자신의 욕망이나 대리만족을 위하여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된다.  /원주 효문화원 원장·원주충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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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8-10-31
  • [금주의 말씀] 생사화복이 있습니다
    ▲ 장항희목사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살고 죽고 행복하고 불행한 것 즉, 생사화복을 주었다고 했다. 본문이 기록된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말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하다가 광야생활 40년이 다 끝날 무렵에 모세가 유언을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나간 역사를 다시 재론하는 내용이다.  1. 선택을 잘 해야 한다.   성경을 보면 양면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양과 염소, 사랑과 미움, 복과 저주, 천국과 지옥 등등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우리는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다.   1) 생명의 길을 선택하면 복을 누린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잠10:16), 의인의 길, 곧 의롭게 사는 삶 속에는 생명이 있다.  2) 사망의 길을 선택하면 화를 받는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 죽음이 오게 되고(창2:17), 말씀을 청종치 않으면 칼에 망하게 된다. 3) 성경은 선택의 중요성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을 택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자손의 축복, 물질의 거부가 되었고, 롯은 소돔 고모라를 택해서 멸망을 받았다. 2. 생명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1)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며(신6:5),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2) 모든 길로 행하는 것이다. 모든 길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의 길로 행하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다.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해야 하고(신4:1),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한다. 3. 생명의 길을 택한 사람에게는 어떤 약속이 있나? 1) 생존의 축복을 약속하셨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창2:7),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출 12:29-30) 인간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2) 번성의 복을 약속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번성할 것을 약속하셨다.(창15: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3) 가서 얻을 땅에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축복의 땅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 을 주셨다.  4. 사망과 화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사망과 화를 받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기 때문이고(창 2:17) 둘째, 하나님 말씀을 청종치 않기 때문이며 셋째,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떤 길을 택하고 살아가야 하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의 진리를 따라 순종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면 화를 당한다. 이제부터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사에 의욕적이고, 긍정적이며, 소망적으로, 적극적 사고를 갖고 영적인 생각으로 꽉 차게 살아가면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생명과 복을 누리기를 축원 드린다.  /경기도총연합회 총회장. 든든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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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23
  • [금주의 말씀] 거룩한나라
    ▲ 박진석목사   본문은 베드로 사도가 로마 정부하에서 점차로 핍박과 억압의 강도가 높아져 가고 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주신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즉 성도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을 다루고 있다. 사람에게는 정체성이 중요하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러한 정체성이 확고할 때 담대함과 자신감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특별히 좀 이해하기 힘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거룩한 나라”라는 정의이다. 동양철학에서도 인간을 소우주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은 다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일인국가이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한 뒤로는 두 종류의 사람과 나라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원수, 거룩한 나라와 거룩하지 않은 나라이다.   그런데 주님은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성경을 보면 복음에 대해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는다.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 복음, 천국 복음, 화평의 복음, 은혜의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영원한 복음 등이 그것이다. 특별히 이 가운데에서 주목해 볼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기 직전에 전파되어야 할 복음을 “천국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하셨다. 다 동일한 복음을 말하지만 “천국 복음”에서는 나라적 측면이 더 강조되는 것이다.   본질상 성도의 기도와 관심과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핵심이 바로 마태복음 6장 10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성도의 기도는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구하지 않아도 다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완전히 마귀에게 세뇌를 당해 가장 중요한 기도의 영역에 있어서조차 믿지 않는 자들이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본질적으로 나의 욕심의 나라와 나의 뜻을 먼저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방인들의 기도와 성도의 기도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계시록 21장 4절에 “그 나라는 눈물 흘리는 일이나 곡하는 일이 없고 아픈 것도 죽는 것도 없는 나라”라고 한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의 고백이 저절로 나오는 나라이다. 이 문제 많고 죄 많은 세상 나라에서 예고편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맛보며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회개할 것밖에 없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회개는 천국의 능력을 충분히 맛보지 못한 것에 대한 더 깊은 차원의 회개여야 한다. 생명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여야 한다. 이런 회개가 깊어지고 사무칠수록 나는 죽고 예수 부활의 생명의 능력이 거룩한 나라, 천국 된 나의 삶에 실제로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시대와 나라에도 적용해보길 바란다. 여러 가지 많은 갈등과 문제들을 안고 나아가고 있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뜻대로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지 않으려는 우리들이 먼저 가슴을 찢는 회개를 해야 하지 않을까?   현재 이 한반도의 상황은 남과 북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국내외적인 논의가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어쩌면 이때야말로 교회와 성도들은 더더욱 깨어 하나님의 온전하고도 선한 뜻이 남과 북, 우리 민족 모두에게 성취될 수 있도록 평화와 통일을 위해 치열한 영적 전쟁을 감당해야 할 때가 아닐까? 하나님이 보우하사 거룩한 나라 대한민국 만세! /포항 기쁨의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0-18
  • [금주의 말씀] 흙에 깃든 숨
    ▲ 강기성목사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장 7절)   인생의 본질은 흙이다. 그 어떤 화려한 인생이라도 겉모습을 걷어 내고 나면 흙만 남는다. 아무리 예쁘고 잘 생기고 건강하고 유명했어도 살과 뼈가 다 타고 나면 티끌만 남는다.   사람(아담)이라는 말의 뜻이 땅(아다마)의 흙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땅에 속한 존재이다. 원래 먼지요 티끌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그 땅속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주께서 정하신 삶의 숙명이다(시편 90:3).     그러나 또한 인생은 흙일 수만은 없다. 흙은 흙일진대, 그보다는 나은 어떤 다른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인생이 너무나도 덧없고 한없이 가련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무엇인가 인간과는 다른 기원 즉 신적인 요소를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땅의 흙으로만은 설명이 되지 않는 하늘에 속한 인생의 또 다른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는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속됐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속에 그려진 인간의 자화상은 흙 속에 떨어진 신의 눈물이나 핏방울로 그 존재의 이원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매뉴얼이 원래 그렇게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경건한 셋이나 셈의 후손들로부터 귀동냥으로 들었을지도 모른다.    성경은 인간의 DNA에는 흙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흡(숨)이 함께 들어 있다고 가르친다(창 2:7). 흙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인간의 인간 됨의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숨이 불어 넣어지기 전에는 사람은 그저 진흙덩이었다. 숨이 들어가 비로소 몸에 피가 돌듯이 생명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생명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생명은 흙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생이 인종과 신분을 불문하고, 신체상의 그 어떤 우열에도 상관없이 동등하고 공평한 것은 인간에게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생명이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밖에서 즉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치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떠한 성과물도 결국에는 땅의 티끌이요 먼지에 불과하다. 생명은 인간에게서 시작되지 않는다. 생명의 숨은 흙의 바깥으로부터 흙 안으로 불어 넣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데 그토록 자명한 사실을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잠시 들여다본다. 호흡이 그치고, 숨이 그를 떠날 때에서야 비로소 인생이 결국 한 줌 먼지였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지혜자들은 숨이 나를 떠나기 전,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내게서 어두워지기 전에 내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가치가 창조주 되신 하나님에게 있음을 발견하라고 그토록 가르쳤던 것이다(전도서 12:1-2).     인생은 질그릇이다. 흙으로 만든 그릇이다. 무엇인가를 담아내지 않고 흙인 채로만 있어서는, 흙으로만 있다가 흙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존재이다. 내 인생 그릇에 무엇을 담아내겠는가? 만일 내 삶에 하나님의 숨결을 담아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뿜어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흙에 깃든 숨을 찾아보자. 그것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유일한 힘이다(고린도후서 4:7). /예동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0-11
  • [금주의 말씀] 바른 소리 곧은 소리
    ▲ 신현옥목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이 활을 당김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아니하느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수고하거늘 네 처소는 속임수 가운데 있도다” (예레미야 9:3-6)   하나님께서는 진실과 정직보다는 간교한 속임수와 거짓말이 난무하는 세태를 고발하신다. 혈액 순환이 잘 이뤄지지 않으면 산소와 영양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온몸이 쇠약해지듯, 진실과 정의가 잠잠한 사회는 힘이 없다. 속임수와 거짓말, 비방과 독설이 난무하는 사회는 혼돈과 불신·분열이 있을 뿐이다. 개인이나 사회의 에너지가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분출되는 게 아니라 그저 소모될 뿐이다.   바른말, 곧은 말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비방과 독설이 난무하는 때에 옳은 말, 진실한 말이 필요한 것이다. 불신은 사회를 혼란과 분열로 이끌어가고 붕괴시킨다. 서로 의심하고 불신하게 만들어 연합과 일치를 방해한다. 옳고 그름, 참과 거짓 사이를 모호하게 만들어 혼돈과 암흑으로 몰아간다.   진실한 말이 주인 노릇하는 맑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이 책임과 사명을 다하기 위한 싸움은 불가피하다. 진리와 정의 편에 선다는 것은 생사를 넘어선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의와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만이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는 자요, 용기가 있는 자다.   지금이야말로 믿음의 지조와 절개가 요구되는 때이다. 주님과 복음의 진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지 않고는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없다, 옳은 일에는 ‘예’ 하고 옳지 않을 일에는 ‘아니오’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비방과 거짓이 판치는 현실 속에서 바른말, 곧은 말을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오직 너희 말은 ‘예’는 ‘예’로, ‘아니요’는 ‘아니오’라 하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마태복음 5:37)고 하셨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난무하는 세상에서 ‘예’라고 할 경우에 ‘예’하고, ‘아니요’할 경우에 ‘아니오’하라는 것이다.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말라 하셨고(디모데전서 3: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말을 하라고 하셨다(디도서 2:8). 또한,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고 했듯이(전도서 3:7), 침묵해야 할 때에 침묵하고 말해야 할 때에 바른말, 곧은 말을 해야 한다.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바른말, 진실한 말을 하라고 우리를 불러 세우셨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아니요’하며 반대하더라도 ‘예’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용기요 정의이다. 모든 사람들이 불의에 대해 묵인하더라도 ‘아니오’하는 것이 정의의 편에 서는 것이다. 속고 속이는 거짓말과 기회주의자들의 아첨하는 말들이 온통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때에 진리의 검을 들어야 한다.   바른 소리, 올곧은 소리를 외치는 ‘광야의 외침’은 계속 되어야 한다. 비록 세례 요한처럼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하여 잠잠하느뇨?”(시편 58:1) 하신다. 또한, “너희가 한 말에 따라서 의롭다 함을 받기도 하고 정죄함을 받기도 하리라”(마태복음 12:37)고 하신다.  /시온세계선교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0-02
  • 감사할 때 주시는 은혜
    ▲ 함정호목사   골로새 교회를 향해 쓴 바울의 편지 가운데서 감사하라고 강조하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감사하는 사람이 마음의 평강을 얻는다. 본문 15절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한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에서 성도의 삶에 대해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강을 마음에 받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전부터 자존 홀로 계시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만케 하신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을 행하기에 온전한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영원한 존귀 영광자 만드시겠다는 단일 목적을 정하시고”(딤후3:16-17).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창조와 재창조의 구속을 통한 중생과 성화와 영화로운 구원의 은혜를 입하시기 위하여 노심초사 보존 섭리 하시는 은혜를 우리는 항상 감사해야 한다.   중생의 은혜를 감사함을 항상 잊지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든 모든 현실에서 성화와 구원의 은혜를 입어 영화롭게 된다. 죄사함의 은혜를 감사하면 죄악을 진멸하는 능력을 부어주시어 진멸케 하시고 무죄한자로 살게 하는 은혜를 주신다. 칭의의 은혜를 감사 할 때 믿음의 사람. 성전이 된 사람. 교회가 되게 하는 은혜를 주시고 믿음으로 사는 능력으로 충만케 하고 하신다(엡1:23). 화친의 은혜를 항상 감사하면 화친의 능력으로 항상 충만케 하여 하나님과 항상 화평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며 모든 만물과 화평하는 복된자가 되어 사랑 받는자가 된다(고후5:17-20).   성령과 구원의 말씀 주신 은혜를 항상 감사하며 살 때 성령님이 더욱 내게 임하시고 항상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모든 일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전화위복이 되게 하신다(롬8:23-28).   또한 성부와 성자의 무한사랑과 희생으로 만들어 놓으신 중생과 성화와 영화로운 구원의 은혜를 입혀 완료 하는 일을 하신다. 말씀을 들으며 주신 은혜를 감사할 때 영안을 열어 주시고 영의 귀를 열어 주시어 주시는 말씀 깨달아 알게 하시고, 인정하게 하시고 확신하는 믿음주시고 확신한대로 행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으로 충만케 하여 그대로 행하게 하여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즉, 전도하게 하신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 감사할 수 없다. 사랑한다면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오해와 불신이 생기게 되지만 사랑하게 되면 용서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어떻게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것이 감사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수도 없는 감사가 있어야 한다. 15절에서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라” 그리고 17절을 보면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감사할 만한 세상으로 만들어 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큰 은혜를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영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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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8-07-18
  • 세가지 시험
    ▲ 이기용목사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님께 이끌려 광야로 나가셨는데, 광야로 가신 목적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의 당시 상황은 40일 금식 기도를 하신 이후이기에 매우 주리신 상태였다. 마귀는 예수님이 굶주리신 상태를 알고는 그 약함을 통해 예수님을 시험했다.   첫 번째 마귀의 시험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을 사용하여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을 사용하여 육신의 필요를 채우라는 의미다. 마귀는 삶의 우선순위가 ‘떡’이라고 유혹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을 사용하라고 유혹했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가능한 일이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돌로 떡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런 유혹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는 태도는 유혹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아무리 급하고 다급해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레마’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말씀을 따르는 것이 결국 생명의 길이다.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다가 세우고는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곳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다. 마귀는 교묘히 자신의 정체와 악함을 숨긴 채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림으로써 한순간에 증명해보이도록 유혹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예수님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실 것이라고 왜곡하며 유혹하기까지 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마귀의 두 번째 유혹은 허영적 명예심의 영역이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보란 듯이 뛰어내리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명하여 보호해 주실 것이고 이로 인해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더욱 증명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명예가 더 높아진다는 논리이다. 진정으로 높아짐은 섬김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지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어떤 행위와 업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뛰어내리는 유혹을 물리치고 겸손히 섬김의 자리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를 더욱 존귀하게 높이실 것이다.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은 예수님께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면서 마귀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유혹이었다.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3절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마귀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쳤다.   사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과대망상에 빠져 있다. 마귀는 인생들에게 세상의 영광과 영예를 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서 돌이켜서 세상의 이익과 영광을 추구하도록 유혹한다. 세상의 것에 관한 이익과 영예를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소홀히 하게 하여 세상 신을 섬기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이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되도록 해야한다. 천하만국의 영광보다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단호하게 선택한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의 공통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마귀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항상 무장하여 마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하겠다. /신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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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8-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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