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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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김기호   사도행전 28장 1절부터 31절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 장면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마지막까지 전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는데,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죽음의 폭풍을 이겨내고 멜리데섬에 도착한 로마군인들과 선원들의 숫자는 276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람인 바울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죽지 않는 기적을 보고 멜리데섬 사람들 중에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기를 겪는 폭풍을 만났지만 그가 예수님을 의지할 때,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멜리데섬 사람들도 병을 고침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고침 받은 ‘보불리오’는 나중에 멜리데 오늘날의 몰타에 감독에 됩니다. 바울이 죽음의 폭풍을 뚫고 멜리데섬을 거쳐 가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만나는 폭풍과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인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가는 곳이 때로는 감옥과 같이 답답한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감옥과 같은 곳에서 지냈습니다.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꼼짝도 못하는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바울은 감옥에서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있는 가정과 직장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믿는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2006년 1월에 서른 세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 ‘안수현’씨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쓰는 이메일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 안수현” 자신이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7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성남 은혜제일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22
  • [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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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5-04-14
  • [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01
  • [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25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14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1-20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금주의 말씀] 성만찬의 의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빵은 내 살이다. 이 잔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유월절 전통을 수렴하여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셨다. ‘유대교 예식’과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성찬식은 구약성서와 유대인들의 생활 전통을 통해서 고유한 성찬식을 거행하셨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항상 ‘먹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사를 통해서 허기를 면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끼리의 일치를, 모르는 사람과의 친교를, 그리고 정치적 유대와 원수와 화해를 가져왔는데 이러한 식사의 개념은 인생의 문제를 넘어서 종교적인 의미를 강조하면서 육체적 양식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식사를 통해서 종교적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평화’, ‘화해’, ‘계약’, ‘일치’, ‘친교’ 등의 의미를 강조하신 것이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범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다’와 ‘잊다’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기억’은 구원을 의미하고 또한 ‘기억’은 인간이 그 계약(약속)을 통해서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억’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되새기게 하는 것으로서, ‘현재화’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 시대의 식탁 관습은 ‘최후의 만찬’을 이해하는데 필수이다. 주후 1세기경 유대인들의 식사는 ‘최후의 만찬’ 예식과 유사한 점을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제사 후의 함께 먹는 식사, 가족들의 식사, 유월절과 오순절에 축제의 식사, 또는 에세네, 쿰란, 바리새파 등 여러 단체들의 식사에서 초대교회의 성찬 양식에 가까운 외적 배경과 식사 이론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쿰란 공동체의 공동식사의 관습이 디다케를 보면 쿰란에서는 빵과 술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외관으로 보아서 비슷하기 때문에 K.G.쿤은 최후만찬에 마태와 마가의 보도가 쿰란의 관습을 반영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또한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빵과 잔에 대한 축복의 순서는 쿰란의 영향을 받아 초대 교회에서 행해지던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쿰란 공동체에서 ‘감사의 제사’나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성찬의 제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행위에 대한 감사와 고백을 통하여서 쿰란 공동체의 식사 형태와  초대교회의 성찬 예식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과 의미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나 있으며 쿰란 공동체의 식사가 최후의 만찬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고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성례전에서 내가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는 특권을 받았다. 또한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기로 새롭게 다짐을 하게 되며, 감사와 감격의 삶 속에서 우리의 잠자는 신앙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다시 깨어나게 된다. 성례전에 믿음으로 참여함으로써 영적인 풍성한 은혜를 입게 되고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축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식에 참여하는 우리들은 확신 있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참여해야 한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심과 같이 우리는 우리 이웃과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며 기꺼이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성만찬은 새로운 의미의 성만찬이 되어야 하고, 주님이 명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성만찬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명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5-03
  • [금주의 말씀] 영혼의 사냥꾼
      ▲ 오준환목사  현대인들은 마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과학과 문명이 고도화된 이 시대에 아직도 그런 걸 믿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마귀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 분명하게 말한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요한계시록 12장 7~9절)’. 이사야서 14장과 에스겔서 28장을 보면 마귀는 교만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다 타락한 루시퍼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를 보면 마귀와 그 졸개들인 더러운 귀신들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귀는 쫓겨난 후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있다. 마귀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다. 마귀는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귀는 계속 공격한다. 계속 유혹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마귀는 특히 고난 속에 있는 교인들을 노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난으로 인하여 약하기 때문이다.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소망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교인이 고난 속에서 약해지면 마귀의 밥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절대로 은혜의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버리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실 것이다. 교회도 고난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교인들은 절대 약해지지 말아야 한다. 자꾸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사사기 43장 19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이니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더욱 굳게 가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욱 깨어서 기도하고 헌신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반드시 든든히 서가게 될 것이다. 여러분 교회에 오시면 웃으시기 바란다. 우울한 표정을 짓지 말자. 다 잘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다시 세워 주실 것을 믿고 웃자. 웃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웃으면 제일 먼저 여러분을 살릴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들과 교회를 다시 살리는 놀라운 일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웃으면서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면 마귀는 절대로 우리에게서 어떤 틈도 발견할 수 없다. 그는 물러가고 말 것다. 나는 목회자로서 많은 성도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마귀의 밥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을 본다.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 모두 마귀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전 삶에 치밀하고 아주 교활하게 비집고 들어와 우리 삶을 망가뜨리는 이 영적 존재가 우리의 대적이요 원수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 그리고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결코 마귀의 밥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영혼의 사냥꾼에게 맥없이 내 삶을 갖다 바치는 어리석고 미련한 삶을 버리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계획 속에 있다.  /신림소망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4-29
  • [금주의 설교] 여기서부터
    ▲ 홍한식목사   근거 있는 설은 아니지만 대개 이성적인 사람은 산을 좀 더 좋아하고 감성적인 사람은 바다를 좀 더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바다도 좋지만, 산에 가고, 산을 보면 좀 더 좋다. 부질없는 것에 코 빠트리고 사는 한심한 저 같은 사람에게 성경이 보여주시는 산에서의 여러 소명 사건은 흥미롭다. 모세를 부르시고 만나신 곳도 호렙산이었고, 출애굽 후에 십계명을 주신 곳도 시내산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주님께서 제자 몇을 대동하시고 오르셔서 영혼의 숨고르기를 하신 후에 세상과 잠시 격리하시고 신비한 변형의 사건을 보이신 곳도 산이었다. 사실 제자들과 산에 오르신 이 시점에서 주님은 고난과 죽음의 길을 목전에 두시고, 이제 숨 가쁜 사건들을 맞이해야 하는 바로 그때, 한 템포 늦추어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들을 가꾸어 가신다. 우리들에게도 바쁘게 돌아가는 수레바퀴의 삶을 살다가도 문뜩 산으로 향할 수 있는 영적 지혜가 필요하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 것은 거기서 휘황찬란하게 마술을 부리듯 변하셔서 다 무릎 꿇게 하시고 경배 받고 두려워하게 하심이 아니라, 나를 버려야만 갈 수 있는 십자가 죽음의 길을 떠나시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 가지로 육신의 바쁜 삶 속에서 산에 못 올라가면, 이 시간 이곳에서 예배하며 영으로라도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 말의 숲과 계산적 행동의 반복이 일상인 삶에서 나를 떨어뜨려서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는 산 오름의 작업이 계속 있어야 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비이성적인 복음서의 기사를 빼고 진짜 예수가 누구냐 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예수는 도덕적 선생, 지혜를 가르치는 성인, 정치적 선도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이 다 같이 믿는바 예수는 도덕적 선생도 정치적 지도자도 아니요, 가난하고 헐벗고 눌린 자들을 해방시켜주는 선동가도 아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그만인 선생이 아니라 그분이 없다면 나의 온 삶,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나의 생명이 없어져버리고 마는 그 허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살아야하는 우리의 구세주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고백 속에서 죽음과 죄와 그로 인한 허무를 이기는 참 생명의 기쁨과 용기가 솟아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체험이다. 관록도 중요하다. 삶을 송두리채 흔들고 바꾸는,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만난 지진과도 같은 신비한 주님의 임재체험이 우리 각자에게 필요하다. 특별히 사순절기에 변화산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그 신비한 모습으로 나도 변화되는 은혜를 빈다. 그 성령의 체험으로 다시 구름 걷힌 산 아래로 내려와 변화된 삶을 살아내는 나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사순절기가 되기를 축원한다. 주께서 변화산에서 신비한 모습으로 변모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도덕적 선생이요 해방자로 알고, 또한 교회가 무슨 관공서나 친목단체처럼 가야한다고 믿는 우리들에게 회개하고 깨달으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우리가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십자가 빛 아래서 그리스도가 중심에 서신 변화된 모습으로 교회를 다시 대할 때, 교회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있는 몸이요, 그래서 사람을 살려내는 몸이란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다. 그 변화는 바로 여기부터이다. 산을 올라 변화하신 영광스런 주님을 만나 뵙고,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하시는 주님과 같이 내려가자. 변화된 나의 모습은 바로 이곳 영적인 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모인 교회 이곳이 바로 변화산이다.  /하늘문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4-19
  • 한국순교자의소리서 출판 간담회
    ▲ 한국순교자의소리는 공산국가 학생사역에 도움을 주고자 <마르크스와 사탄>을 발간했다고 밝혔다.   한국순교자의소리(이사장=에릭 폴리목사, 대표=현숙 폴리목사)는 지난 18일 순교자의소리 정릉 사무실에서 출판 간담회를 열고, 공산권 출신 유학생을 전도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동 단체는 공산주의가 진정 전하고자 하는 바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중국을 비롯해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유학생을 복음으로 가르쳐 이들을 통해 공산국가 사역에 나서야 한다고 피력했다. 여러 캠퍼스 사역자들이 전도와 친교, 예배를 통해 공산권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밝힌 에릭 폴리목사는 “이 학생들은 조국에 시행하는 기독교 박해를 충분히 감당할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돌아간다”며, “이에 리처드 웜브란트목사는 교회가 공산국가에서 온 학생에게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을 가르쳐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에서 신앙을 지키고자 감옥에 갇혔었던 웜브란트목사는 자유세계로 유학을 온 이들에게 친교를 맺거나 예배를 드리는 것 이상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공산권 유학생들이 진심으로 기독교인이 되도록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구를 변화하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간 <마르크스와 사탄>이란 책을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일종의 사탄주의 종교라고 피력한 폴리목사는 “공산주의 국가에 살면서 다양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눈 웜브란트목사는 마르크스주의가 진정 원하는 바가 무산계급의 해방이 아닌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고자 함에 있다고 전했다”며, “그렇기에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정치·경제적 이념이 아니라 사탄주의 종교라는 사실을 밝히고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알려 공산권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이 책을 집필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공산주의는 지금 사라지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주의가 계속해서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며, “한국교회와 캠퍼스 선교단체가 이 책을 통해 공산권 유학생을 교육해 가족과 친구를 변화하는 사람이 되도록 변화시키길 희망한다”고 역설했다. 끝으로 “공산주의를 증오하지만, 공산주의자를 사랑했던 웜브란트목사처럼 우리 또한 그들을 품어야 한다”며,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이들을 훈련하고 세워 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사역을 해낼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고 전했다. 한국순교자의소리 관계자는 “<마르크스와 사탄> 한국어 번역본을 온라인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며, “현재 중국 유학생들을 위한 중국어 번역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있으며, 베트남어 번역도 이른 시일 내에 진행할 방침이다”고 말했다. ▲ 리처드 웜브란트목사의 저서 <마르크스와 사탄>은 젊은 시절 마르크스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공산주의 이념이 추구하는 바를 파헤친 책이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4-18
  • [금주의 말씀] 주가 쓰시는 사람
    본문 30절은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이야기한다.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니 얼마나 부족해 보이는가. 아무 경험도 없어 어떻게 태워야 할지도 모른다. ‘이랴’라고 하면 가자는 것인지, ‘와’ 하면 서라는 것인지 사람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동물을 길들일 때 동물들은 답답해서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펄쩍펄쩍 뛴다. 참을성도 없다. 안타깝게도 나귀란 본디 그런 동물이다. 이런 나귀이니 예수님을 태우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귀를 타셨다. 어린 나귀는 한 사람 태우기 힘들어 한다. 어리기에 힘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며 몸도 작다. 경험도 없고 권위도 없어 사람들이 무시한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나귀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쓰셨다. 어리다고 낙심하고 반대로 나이 많다고 실망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다윗도 어렸지만 쓰셨고 요셉도 어렸지만 쓰셨다. 사무엘과 디모데도 어렸지만 쓰셨다. 아무리 무능해 보이고 연약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쓰시기로 작성하시면 어떻게든 그분의 인도하심 가운데 인간은 자신의 의무를 성취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라고 말씀하신다. 메어 있어도 풀어주셔서 쓰신다.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이나 의심, 무지 같은 잘못된 생각에 매여 있다. 사람은 잘못된 생각에 매이고, 돈이 없으니 돈이 매이며 권력이 없어 권력에 매여 있으며 건강하지 않아 건강에 매이고 매여 있는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 가지고 일어나면 다 할 수 있다. 지금 여러 가지에 매여 있다 해도 하나님이 풀어서 쓰실 테니까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만이 우리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이다.  나귀는 영어로 바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귀 같은 놈 그러면,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나귀는 가벼워도 태우고 무거워도 태우고 어떻게 보면 바보 같다. 하나님은 바보라도 쓰신다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이 이를 증명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귀는 체구가 작고 못생겼다. 말과 나귀는 비교해 보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몸도 작고 못생겼다. 말을 보면 멋있고 잘 달리고 힘이 세보인다. 그러나 나귀는 너무 못 나고 어리숙해보인다. 말은 적토마니 천리마니 그런 이름은 있어도 나귀는 천리나귀라는 말은 없다. 나는 왜 못생겼는지 힘도 없어 보이며 축 처질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런 사람을 쓰신다. 예수님께서는 말 타고 가지 않으시고 나귀 타고 가셨다. 수많은 나귀 가운데서 예수님께 선택 받은 나귀처럼 우리도 귀히 쓰임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부족해도 쓰신다. 어려도 쓰신다. 매여도 쓰신다. 어리석어도 쓰신다. 한 사람은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면 무슨 일이든 능히 해낼 수 있다. 우리 모두 쓰임 받기 위해 왕 되신 예수를 태우고 온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귀한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시기 바란다.  /조기암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4-10
  • [금주의 말씀] 삶은 고난이 있어 값지다
    ▲ 이재영목사 시냇물은 ‘졸졸졸’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시냇물이 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지를 아십니까? 그것은 물속에 돌멩이가 있기 때문이다. 서양 속담 중에도 ‘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라는 말이 있다. 시냇물 속에 들쑥날쑥한 돌멩이가 있기에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도 고난이라는 돌멩이가 있기에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곱고 성숙한 인격은 고난의 돌멩이와 함께해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도 고난의 돌멩이가 있어서 저의 삶이 더 아름답고 성숙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삶은 고난이 있어서 값진 것이다. 시편 저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하며 고난당한 것인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곧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법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이 고백을 하기 전에 이런 고백을 한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저자는 자신이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말씀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이 없이 자기 멋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만일 이 시편 저자가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여전히 자기 멋대로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처음 고난을 당할 때는 시편 저자도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 고난 자체는 분명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고난이 마음의 고난이든 몸의 고난이든 상황적인 고난이든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시편 저자는 그 고난 가운데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갔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고난이 유익임을 고백하고 있다. 고난을 통해 자신의 삶이 더 값지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소논문 〈질서〉에서 고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난이란 수를 놓은 천을 보는 것과 같다. 천의 뒷면을 보면 많은 색깔의 실이 무질서하게 얽혀 있기에 보기에 나쁘다. 고난을 다만 괴로움과 부조리로 보는 것은 뒷면만을 보기 때문이다. 천의 앞면을 본다면 혼란하던 실들의 형태와 색채가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고난의 혼란과 혼잡을 뚫고 아름다운 미래를 본다” 참 멋있는 비유이다. 수를 놓은 것은 정말 아름답다. 하지만 그 수놓은 뒷면을 보면 너무 지저분하고 보기가 싫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수놓은 뒷면처럼 고난과 고통으로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미래를 만드신다.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수를 놓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고난 너머에 있는 아름다운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보다 더 값진 삶을 살게 될 모습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고난도 우리의 믿음을 이길 수는 없다. 믿음으로 그 고난을 이겨낼 때 우리의 삶은 다이아몬드처럼 값진 삶이 된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다. 하나님은 그런 주님을 높여 주셨다.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고난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값지게 됨을 알고 고난의 아름다운 수를 놓아가야 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4-03
  • [금주의 말씀] 다양성의 연결
    ▲ 강임명목사   스티브 잡스가 ‘와이어드’와의 인터뷰에서 창의성에 관한 말을 했다. ‘창의성은 단지 사물을 잇는 것이다. 창의적인 사람들에게 그토록 굉장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물어보면 약간 죄책감을 느낀다. 뭔가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본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눈에 띈 후에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된다. 과거의 경험을 연결하여 새로운 것을 합성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경험이 많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많이 생각했기 때문이다.”(고영성, 신영준, 「일취월장」, 235~236.)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 생태계도 다양성이 더 풍성 할수록 생산성은 높아진다. 다양성이 풍성 할수록 혁신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혁신을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과 취향이 같거나 또는 비슷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쉬울 뿐만 아니라 일의 진행 속도도 빠르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며, 설득하고, 기다리며, 방향을 맞추어 가는 것은 어렵고, 속도도 느리고, 귀찮은 일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슷한 부류가 함께 하는 것이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무질서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사람들의 연결이 실제로는 훨씬 더 쉽고, 혁신을 만들며, 즐거울 수 있다. 그 예로 「일취월장」에서는 MIT의 ‘빌딩20’의 건물을 말한다. ‘빌딩20’은 방 번호가 일관성 없었고, E동이 A동과 D동 사이에 있는 무질서하고 비효율적인 건물이었다. 그러나 빌딩20은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고, 동시에 이 무질서한 공간은 우연한 연결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빌딩20에서는 노벨상 수상자가 9명이 나왔고, 혁신을 일으키는 수많은 발명품들이 나왔다. 예수님은 3년 정도의 사역 기간 동안에 12명의 제자를 세우는 것에 집중했다.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이 아닌 겨우 12명이었다. 그 12명도 비슷한 부류가 아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제자들로 인해 세상은 심하게 움직였다. 제자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은 변화가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있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다스릴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던 사도 바울 역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했다. 그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다양성을 즐거이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과는 그들과 같이 율법 아래 있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사람들에게는 그들과 같이 그것으로부터 자유한 삶을 살았다. 가난한 자와는 가난한 자로, 부한 자와는 부한 자로, 그들과 동일한 마음과 자세로 살았다. 바울은 다양한 신분, 종교, 인종의 사람들과 만났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다. 또한 그 다양한 사람들과 동역자로 함께 사역했다. 바울은 다양성과 그것들의 연결로 복음 증거의 위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한다. 그 다양한 부류들이 성령 안에서 연결되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그분을 닮아간다.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살아간다. 삶과 사역의 자리에서 ‘다양성의 연결’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제자순복음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3-27
  • [금주의 말씀] ‘도무지’에서 ‘도리어’로 바꾸라
    ▲ 김도인목사   문재인 정권의 경제 정책은 ‘소득주도성장’이다. 이 정책은 저소득계층이 더 많은 소득이 돌아가도록 하는 의도에서 추진되었다. 2년이 지난 뒤 ‘소득주도성장’의 결과는 거꾸로 최하위 20%의 사람들의 소득이 6년 전으로 후퇴했다. 지난 1년간 소득이 월평균 30만 원 감소했다. 그런데도 정책입안자들은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겠다고 한다. 이는 자기 생각이 옳다는 고집 때문이다. 나 또한 고집이 세다. 나와 다른 견해에 일단은 내 생각이 옳다고 우겨본다. 특히, 아내와의 의견충돌에서는 일단 내 말이 정답이라고 고집을 피운다. 하나님도 고집을 피우신다. 인간들의 고집과 하나님의 고집에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인간은 악한 고집이라면 하나님은 선한 고집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고집’이라면, 인간은 ‘세속적인 고집’이다. 인간의 고집은 ‘도무지’ 답이 없는 고집이라면 하나님의 고집은 답이 있는 ‘도리어’의 고집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고집을 부리셔야 한다. 인간의 고집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하나님의 고집은 인간을 살리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똥고집이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반전이 있는 거룩한 고집이기 때문이다. 오늘 베드로는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 ‘도무지’의 삶이 아니라 ‘도리어’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리어’의 의 축복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받는다. 하지만 그 고난은 하나님 안에서 ‘도리어’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성도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비는 자(9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9절)” 베드로는 성도는 ‘도리어’의 삶을 사는 자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남에게 받은 대로 행하지 말고 ‘도리어’로 행하라고 한다.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고 한다. 이는 성도는 ‘도무지’ 답이 없는 삶이 아니라 ‘도리어’ 답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고난 가운데서도 ‘도리어’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기 때문이다(12절)” 그리고 “하나님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기 때문이다(12절)” 성도는 ‘도무지’의 상황을 신앙으로 ‘도리어’로 바꾸며 살아아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도무지’의 신앙을 ‘도리어’의 신앙으로 바꿀 수 있는가? ‘딜레마’ 신앙을 ‘디딤돌’ 신앙으로 바꾸면 된다. 소득주도성장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 딜레마에 빠진다. 피운 고집이 잘못됨을 깨닫는 순간 딜레마에 빠진다. 신앙생활 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신앙의 딜레마에 빠진다. 이럴 때 딜레마의 신앙이 반전을 이룰 수 있는 디딤돌이 필요하다. 디딤돌을 만들려면 반드시 ‘도리어’의 신앙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즉 반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성도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마음이란 죽을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신 마음이다. 사람마다 두 개의 보따리를 지고 산다. 바로 근심 보따리와 웃음보따리다. 근심 보따리로는 고난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 하지만 웃음보따리는 고난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웃음보따리는 고난을 축복으로 바꾼다. ‘도무지’의 상황을 ‘도리어’의 상황으로 바꾼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성도는 ‘도무지’의 상황을 ‘도리어’의 상황으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이 있다.  /아트설교연구원 원장, 주담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3-17
  • [금주의 말씀] 열매 맺는 포도나무
    ▲ 조영민목사 중세교회가 무너진 결정적 원인은 궁극적으로는 교회가 예수라는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열매 맺지 못한 가지가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사실 이 비유는 당시 예수께서 율법과 성전의 전통에 얽매여있던 유대사회를 비판하며 하신 말씀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의 형식과 성전의 권위에만 국한시키려 했던 유대교의 모습이 결국 열매 맺지 못한 가지나 다름 없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본문 8절의 말씀을 통해 이를 다른 각도에서 설명해 주시기도 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의 모습을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견주어 설명하신 것이다. 사실 제자로 산다는 말은 한마디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분명한 것이었다.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었다. 요한복음 15장 10절에서 예수님은 계명을 지킬 때 주님의 사랑 가운데 머물 수 있다고 하셨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하나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사랑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제자로 살아갈 때 비로소 포도나무 안에 거하는 지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제 아무리 화려한 건물을 짓고, 율법에 아무리 능통하더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쓸모없는 가지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유대의 형식적 율법주의처럼 중세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기보다 오히려 세상을 자신의 욕망과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남에게 큰 잘못을 범하거나 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 의미보다 더 강력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포도나무의 지체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무엇을 크게 잘못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교회는 반성과 참회를 해야한다는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포도나무의 열매  맺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분단된 한반도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남북한 정상이 만나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 그리고 통일에 대한 합의문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약 10㎝밖에 되지 않는 경계를 두고 지난 65년의 시간을 반목과 갈등으로 보낸 우리 민족에게 역사적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여전히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일단 평화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첫 발걸음을 성큼 내디뎠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감격적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남북한이 갈라져 반세기이상을 반목하며 살아온 남과 북도 이제는 너무나도 다른 체제와 환경, 그리고 생활방식을 갖게 되었다.  바라기는 남북한의 평화와 화해 그리고 통일의 노력도 이와 같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를 통해 서로를 존중하고 상생의 길을 모색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는 길일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된 포도나무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급격하게 변해가는 환경과 정세 속에서 오늘 우리의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서로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모두가 열매 맺는 포도나무의 지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나눔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3-10
  • [금주의 말씀] 선한 열심
    ▲ 임상필목사 열심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열심이 있는 사람은 귀한 사람이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 열정적으로 일하지 않고서 성취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열정을 가진 사람, 예수님을 믿어도 열정을 갖고 믿는 성도만큼 귀한 사람도 없다. 예배와 기도, 봉사, 친교, 전도를 열심히 하는 분이 정말 필요하다. 열정이란 참 귀하다. 그래서 열정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맥이 빠지고 힘이 든다. 도대체 이런 사람들하고 함께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그만큼 열정은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야말로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여러 나라로 이민 가서 사는 한국인들은 국내에서 살 때와 같이 근면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한다. 자신의 건강을 생각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해외에 가보면 길에서 얻어먹는 한국인 거지를 본 적이 없다.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서 아주 열심이시다.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머리카락이라도 세시면서 우리를 지키시느라고 열심이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주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열심을 보이라고 촉구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로마서 12:11) 그런데 열심히 하는 것이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열심이 있다. 나쁜 열심은 나를 망하게 하고 다른 사람도 괴롭히고 결국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모두 망하게 한다. 잘못된 목적과 목표를 둔 열심은 수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은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한다. 독일의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함을 보여주려는 잘못된 열심으로 유대인 600만을 학살하는 악행을 자행했다. 또한, 구소련의 스탈린과 레닌은 자신들의 사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수많은 지도자가 사상과 이념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영달을 위해 불의에 영합하여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는데 열심을 보여 일상생활을 최선을 다하여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하였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에 열심히 보여야 하는가?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알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열심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참된 의, 즉 공의를 성취하시고 사랑을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아는데 힘을 기울이고 그의 사랑을 우리의 가슴에 채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은 생명력이 있다. 날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의로운 자리에 서게 하신다. 예수님만이 삶의 참 의미를 가져다준다. 우리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열심을 포기하자. 바울은 이렇게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하는 성도를 찬미한다. 이제 곧 사순절이 시작된다. 사순절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좋은 기회이다. 그동안 앞만 향해 무엇인가를 성취하려 쉼 없이 달렸던 자신을 살피자.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부정의 한 구조에서 차별과 가난 그리고 병고로 죽음의 길로 치닫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랑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내자.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느 무엇보다 아름답고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이다. 화려하게 보이는 것들을 위해 열심을 내지 말고 보이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의미와 뜻이 담겨있는 오직 생명을 존중하고 살리는 사랑의 일을 위해 최선의 열심을 보이자. 그래야 기쁘고 감격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가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임마누엘하우스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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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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