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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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 어린 아이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에서 5절)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어린이는 인생의 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저물어 가는 시점은 “인생의 열매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어린이 주일은 꽃의 주일이라고 표현을 해봅니다. 어린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크게 두가지로 표현한다면 첫째 사회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 둘째 성경적으로 심령이 깨끗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가 든든히 서갈 때 교회가 부흥 되어 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70년, 80년대 교회는 내면을 보면 교회학교가 급성장하여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줄 압니다.그러나 현 시대는 저출산과 독신주의와 더 나아가서는 어린아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학교가 부흥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라는 것을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희망! 교회학교 어린이를 사랑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장성한 어른으로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함으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본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 믿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아론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였습니다. 애굽에서 400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이 수가 점점 더해가자 애굽에서는 불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출생할 당시에 남자아이가 출산하게 되면 죽이라고 왕이 명령을 내리는 결단을 합니다. 그러나 모세 어머니 요게벳은 지혜와 믿음이 충만하여 왕의 법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 뜻을 지켰던 믿음의 여인이였습니다. 한마디로 순교를 각오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지혜로운 어머니였습니다.    둘째 지혜로운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요게벳은 행동을 합니다. 아기모세를 작은 바구니에 넣어서 크고 넓은 나일강가에 띄워 놓습니다. 아기가 죽을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누군가 아기를 발견하여 키워주지 않는 이상 아이는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살 수 없는 확률이 99% 불가능한 현실이지만 요게벳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분명히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게벳은 나일강가에서 애굽의 공주가 목욕하는 시간대와 장면을 보고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계획하는 지혜와 믿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학교와 자녀들을 향하여 가르치고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믿음과 지혜로운 행동을 보여주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말씀 안에서 순복하는 교회학교와 자녀들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들 가정에 꽃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하늘의 별처럼 부흥되기를 예수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욕심을 버리고 나를 낮추는 자가 되어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으며 계산적이지 않는 착한 성도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광명대한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29
  • [말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김기호   사도행전 28장 1절부터 31절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 장면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마지막까지 전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는데,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죽음의 폭풍을 이겨내고 멜리데섬에 도착한 로마군인들과 선원들의 숫자는 276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람인 바울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죽지 않는 기적을 보고 멜리데섬 사람들 중에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기를 겪는 폭풍을 만났지만 그가 예수님을 의지할 때,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멜리데섬 사람들도 병을 고침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고침 받은 ‘보불리오’는 나중에 멜리데 오늘날의 몰타에 감독에 됩니다. 바울이 죽음의 폭풍을 뚫고 멜리데섬을 거쳐 가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만나는 폭풍과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인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가는 곳이 때로는 감옥과 같이 답답한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감옥과 같은 곳에서 지냈습니다.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꼼짝도 못하는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바울은 감옥에서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있는 가정과 직장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믿는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2006년 1월에 서른 세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 ‘안수현’씨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쓰는 이메일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 안수현” 자신이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7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성남 은혜제일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22
  • [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14
  • [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01
  • [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25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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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 복 받는 신앙인의 감사(눅17:11-19)
      유월절 7주 후에 지키는 칠칠절, 오순절. 첫 열매를 거둔다 하여 초실절(출34:22),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열매를 수확한 것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가르치기 위해 주신 명령이다. 오순절은 애굽에서 나온지 50일째 되는 날이기에 명명했고,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날(출19:16)이다. 그 날에 법을 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새롭게 출범하는 특별한 의미이다. 또 신약에서는 오순절에 성령을 주심으로 초대교회가 탄생했다.   맥추절이 가나안 땅에 첫 열매를 거둔 것,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나라의 신령한 첫 열매를 거둔 영적 추수와 같다. 오순절에 성령을 주심으로 예수 안에서 교회가 탄생하고 중생한 영적 열매를 주의 창고인 교회에 끌어들이는 영혼 추수이고, 맥추감사절을 통해 넘치는 감사의 축복, 축원이다.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행복지수를 높여 행복한 삶을 살게 한다. 성도들은 불신자들보다 더 행복지수가 높아야 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로(갈5:22-23)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모두에게 풍성하게 베풀며 사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행복할 수 있음은 죄 사함 받고 영생의 보장을 주님께로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님은 죄로 인해 고통가운데 지친 우리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셔서 삶을 풍성하고 행복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세상에 오셨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지금 이 모습 이대로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다” 감사한 만큼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행복은 소유에 정비례하기 보다는 감사에 정비례한다. 감사한 만큼 삶은 풍요롭고 행복, 감사 생활을 풍성하게 하므로 가장 복된 인생, 또한 감사는 성공과 승리의 삶을 보장해준다. 인생의 성공, 승리에 있어서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 아무리 절망적인 현실에 부딪쳐도 그 사실(사건)에 대해서 즉, 그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며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인데 감사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사할 수도 있고 불평할 수도 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2:14)   감사 생활에 풍성하고 적극적이 되어 인생을 성공하며 복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 감사조건을 찾아서 하라. 감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하며 찾아야 한다. “나의 주된 인생관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연습하는 것이다. 감사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되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표현하라.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11:17)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고 구속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감사 기도를 드리므로 찬양함으로 예물로...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사하는 감사를 베풀고 풍성하게 표현하므로 큰 복을 받고 성공적인 성도로 새로워지기를 축원한다. /유향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7-30
  • 나사로가 보여준 신앙(요11:35-40)
      신앙이란 말을 가장 의미 있게 표현해주는 단어는 무엇일까? 일단은 사랑 신뢰 의지 순종 충성 헌신 전심 등과 같은 말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본문의 나사로는 우리에게 신앙이란 곧 주님과의 진한 우정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성경엔 나사로라 이름하는 사람이 둘이 나온다. 하나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요,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다. 이 중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은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이 생각하는 기적의 통념을 깨고 나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만 천하에 증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사건은 시간상으로는 유대인의 최고 명절인 유월절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고, 거리상으로는 예루살렘을 지척에 둔 베다니 마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영적인 것과 천국과 기적을 믿지 않는 제사장(사두개인) 그룹에게는 매우 곤혹스런 사건이었다. 당시 제사장들이 벌이던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전횡과 수탈은 대다수의 유대 민중들에게 큰 분노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나사로의 부활사건은 사두개인들의 불안한 리더십에 치명타를 가하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제사장(산헤드린 공의회의 사두개파 그룹)들은 예수님 살해계획을 세우게 된다. (요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결국 가룟유다가 그들의 음모에 희생양이 되어서 예수님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팔아 넘겼고, 그 이후에 예수님의 사형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유월절 직전에 제사장들은 저들의 악한 뜻을 이룰 수가 있었다.      남아있는 역사기록에 의하면 제사장들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제거해서 우환의 싹을 제거하려고 했는데, 이런 첩보를 입수한 나사로는 급히 구브로(현, 키프러스) 섬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     사실 나사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오해를 받아 온 인물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나 사랑하시고 나흘 만에 부활시켜주기까지 하셨는데, 그렇게 큰 은총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이 그 참담한 고난을 당하고 비참하게 죽는 동안에 코빼기 하나 안 보였냐는 것이다. 적어도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라고, 잘못한 게 없는 분이라고 군중들 앞을 막아서며 변호라도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나사로가 처했던 전후사정을 모른다면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이겠지만, 그러나 나사로는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임을 증거 해주는 몇 안 되는 핵심증인이었기 때문에 그에겐 우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유대 땅을 떠나서 가장 가까운 지중해 섬인 구브로(현, 키프러스)로 피신한 나사로는 남부의 라나카 지역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평생동안 주님을 증거하며 복음사역에 충성하다가 그 역시도 주님의 뒤를 따라 순교자가 되었다. 이러한 나사로의 행적은 라나카에 있는 나사로 기념교회에 생생히 보존되어 있다. 교회 지하에 있는 무덤엔 나사로의 석관이 있는데, 흉하게 부수어진 관뚜껑은 죽어서까지 고난을 당하던 나사로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의 험난했던 사역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의 석관 옆면에 새겨진 글귀다. 거기엔 헬라어 대문자로 ‘필리오이’(나의 친구라)라고 쓰여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나의 친구라’는 말을 들었던 인물은 나사로가 유일했으며, 그래서 나사로는 이 말씀을 평생의 자랑으로 축복으로 생각하면서, 그도 또한 예수님에게 신실한 친구가 되려고 죽기까지 노력했던 것이다.      이런 나사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신앙의 의미는 ‘주님과의 우정’이다. 친구 사이의 우정은 때로 가족이나 부부관계도 넘어서는 숭고함이 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우정과 사랑을 잊지 않고서 끝까지 의리를 지킨 나사로의 삶은 오늘날 줏대 없이 흔들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교훈과 깨우침을 주고 있다. 신앙은 우정이다. 내 친구되신 우리 주님과의 뜨거운 우정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휘경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7-12
  • 울게 하소서!(요엘 2장 17절)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은 1959년 총회에서 WCC 가입 문제를 놓고 갈등하였을 때, 오직 순혈적인 보수신학 하나 지키려고 분리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교단의 적통성과 법통성은 우리가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단의 선진들은 현실적으로는 허허벌판 황무지로 나와야 했다. 그리하여 나무 한 그루 살지 않고, 풀 한 포기 살지 않는 허허벌판 광야 같은 곳에서 기도의 눈물을 뿌리며 교단을 일구었다. 전국의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기도의 제물을 바치며 총신대를 세우고 총회회관을 세워서 오늘날 한국의 장자교단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장로교단을 이룬 것이다.   우리는 선진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헌신과 기도의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 신명기 32장 7절에서도 역대의 연대를 기억하라고 하지 않는가? 역사가 토인비 역시 「역사의 연구」에서 “한 민족이나 국가를 망하게 하려면 그 역사를 먼저 지워버리라”고 했다. 그만큼 지나온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어느 때부턴가 교단이 희생과 헌신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기도와 영성 운동보다는 정치가 앞서게 되고, 교조적인 교단이 되어 갔다. 그 결과 교권 싸움을 하며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 사랑과 처음 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격을 잃어버리니까 하나님을 등지며 예배가 타성화되고 신앙이 매너리즘에 빠져 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더러운 떡을 제단에다 올려놓고 병든 것과 눈멀고 다리 저는 짐승을 제사의 제물로 드린 것이다(말 1:7).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누군가 성전 문을 닫아버리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겠는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필자는 코로나 상황에서 이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였습니다. “혹시 코로나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이렇게 비난받고 문이 닫혀 버린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격, 예배를 향한 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닌가. 하나님은 이런 매너리즘에 빠진 예배가 역겨워서 누군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것은 아닌가”.   코로나19 팬데믹은 끝이 안 보이고, 우리가 노력하면 할수록 예배 회복의 길은 더 멀어지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우리가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 요엘서 2장을 보면 제사장들이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기도하지 않았는가?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욜 2:17)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밖에 없다. 우리가 먼저 울어야 한다.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운다는 말은 강단에서 운다는 말이다. 우리가 강단에 엎드려 울어야 한다. 지금 이렇게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우리의 잘못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를 위해서 눈물을 훔치는 기도를 하자. 그리고 우리는 교단 선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제105회 총회에서 허락을 받고 전국목사장로기도회 때 총회공로훈장 수여식을 하게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총회장, 새에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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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07-11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모습(로마서 7:21-23)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우리의 의를 자랑하는 것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않다. 우리 의는 우리의 구원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죄인인 우리가 우리를 무엇인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직 구원의 길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히 만물의 왕 되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그리고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선물하신 신앙이고, 믿음이다. 그곳에 우리의 의, 힘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함으로 지키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마음과도 반대가 되는 우리의 판단하는 행동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고난의 아이콘인 욥의 이야기가 있다. 사단은 하나님께 허락을 구하고 욥을 시험한다. 그로 인해 욥은 아프고, 친구들이 떠나고, 가족들이 떠나고, 주변 환경이 점점 더 극한으로 어려움에 달했다. 그 때, 고통스러운 상황이 너무 서운한 나머지 그들이 자신을 번뇌케 하고 열 번이나 학대 했다고 대놓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욥을 종이라 표현하시면서 제사장으로서의 고귀한 임무를 부여하셨다.(욥 42:7~10) 그것은 자신을 괴롭히고, 아프게 했던 친구들에 대한 화해와 용서, 바로 사랑이다.   그 때 욥은 너무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순종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한 용서였다.    우리가 욥같이 용서를 행할 때 우리를 기쁘시게 받으실 줄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대한 우리의 순종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한 사람도 받으실 것이다. 용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육체적 고난과 정신적 모멸감을 항상 생각해 보자. 십자가의 그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희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내 삶의 주인이 마치 나인 것처럼 해서는 것은 안 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명,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그 십자가에서 처절히 죽임을 당하셨다. 그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예수님처럼 매사에 순교적인 자세로 살아야 한다.   어머니 마리아가 손수 짜서 입혀드린 세마포 옷을 군병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을 때, 수많은 군중 앞에 알몸이 되셔서 수치를 당하실 때를 생각하면 무엇이든지 이겨내실 수 있다. 주님은 자신의 본질을 희롱당하는 고통도 감내하셨다.   우리는 주님이 고통가운데 보여주신 사랑과 고통을 이겨내시는 모습을 통해 세상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품고 용서하고 사랑을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 때 그 빛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될 줄 확신한다. /샘터마을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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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07-02
  • 레위 지파의 헌신 성경(민 1:47~54)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년 이월일일에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남자를 계수하게 한다(민 1:1~3). 이는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생활 곧 교회생활이 악한 영들과의 전쟁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앙은 영적 전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라 고 말씀한다. 레위는 ‘연합된 (자)’를 의미하며 족장 야곱과 그의 아내 레아 사이의 셋째 아들(창 29:34)로, 이스라엘 중 그의 이름을 지니는 지파의 창시자이다. 레위는 형 시므온과 연합하여 누이동생의 치욕을 갚기 위해 세겜 성에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제 삼일에 고통 할 때에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와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칼로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왔다(창 34:24 이하). 그리고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로 양과 소와 나귀와 들에 있는 것들과 세겜 성의 그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했다(창 34:27 이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야곱은 죽기 전에 시므온과 레위에게 그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중에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5~7).   이렇게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저주 받은 레위 지파를 하나님은 계수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출 32:8~9).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5~29).   오늘 설교 제목은 레위지파의 헌신이다. 바로 이 헌신 때문에 계수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 편에 서있었다. 이 헌신이 저주를 축복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들의 흩어짐은 온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하는 경우가 되었다. 레위의 자손들은 성전을 섬기는 자가 되었으며 제사장 직무를 맡았다(출 2:1 이하, 6:20; 신 33:8~11).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택하여 모든 가정의 장자를 대신하는 당신의 기업으로 삼으신 것이다(민 3:11~13).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헌신이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헌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좋은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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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7
  • 아쉬레! 마카리오이!(마태복음 28:1~10)
    성경에서 ‘복 있는 사람’을 히브리어로 ‘아쉬레’라 하고(시 1:1), 헬라어로 ‘마카리오이’라고 한다(마 5:3~11). 하나님은 성도들이 복 있는 자가 되고 복 있는 자로 살기를 원하신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복 있는 인생만이 하나님을 높이고 세상을 축복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복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아쉬레와 마카리오이는 다음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첫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반드시 가야 할 길을 바르게 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셋째는 가야 할 길을 바르게 가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감당하고 수행할 때를 의미한다. 마지막 넷째는 그 일을 수행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평강은 은혜의 결과로서 복 있는 사람에게 중심적으로 나타나는 실제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평강과 기쁨을 풍성히 누린다. 다른 한편으로 복 있는 사람이라도 근심과 염려, 어려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근심의 포로는 되지 않으며, 그 염려에 함몰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채우고도 남는 평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외견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 속에서도, 모든 것이 부족하고 때로는 없는 경우에도 실제적으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할 수 있고, 가라고 한 그 길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으며, 또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성령이 주시는 평안으로 웃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복 있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주님의 은혜가 전파되고 주님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다. 주님이 때를 따라 미래와 희망의 문을 열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갖기를 원한다.  “주여! 주 앞에서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복 있는 인생이 시작되게 하옵소서! 나부터 먼저 복 있는 인생으로 서게 해 주옵소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복 있는 사람이 되고 복 있는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마태복음의 마지막 28장 말씀은 부활의 아침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이라는 두 부류가 나타난다.    우선 복 없는 사람은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과 그들에게서 무덤 소식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이다. 경비병들은 예수님이 그 무덤에 장사되시던 순간부터 부활의 아침까지 무덤을 견고하게 지키면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현장과 빈 무덤 그리고 천사의 모습과 지진이 나고 돌이 굴러간 모든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또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경비병에게서 무덤 소식을 들은 자들로서 사회적으로 힘 있는 기득권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으로도 복 있는 인생이 될 수 없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 부류는 복 있는 사람으로서 여인들이다. 새벽에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 무덤에 간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 두 사람이다. 이들은 약한 자들이었으나 복 있는 사람으로 세움 받고 쓰임 받는 자들이 되었다. 이는 복 있는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어야 함을 증언한다. 세상에 있을지라도 불변하는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 /원주중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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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06-20
  • 우리의 한숨을 바꾸시는 하나님(로마서 8:26~30)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어려울 때 어김없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있다. 그것을 ‘탄식’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탄식하다’는 말의 뜻은 ‘절박한 상황이나 안타까운 상황에서 절망을 느끼다’란 뜻이다. 그런데 ‘탄식’ 하다는 말의 한자를 살펴보면 그 절박한 상태를 더욱 느낄 수 있게 된다.   먼저, ‘탄식하다’라는 말에서 ‘탄’ 자는 ‘탄식할 탄’이다. ‘진흙 근’ 자와 ‘하품 흠’ 자가 합쳐져서 늪과 같이 빠지면 나오기 어려운 상황에서 입을 벌려 하품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상태에서 입을 벌리느냐에 따라 ‘한숨을 쉬다’라는 의미도 나타내지만, ‘감탄하다’는 의미도 나타낸다. 즉,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정말 빠져 나오기 어려운 일을 당하여 크게 입을 벌리고 절망의 소리를 낼 때는 ‘한숨을 쉬다’ 혹은 ‘탄식하다’ 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반대로 무척 어려운 일인데도 거뜬히 해 내는 사람을 보고 입을 벌려 감탄할 때에는 ‘감탄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이다. 한편, ‘탄식하다’ 는 말에서 ‘식’자는 ‘숨을 쉴 식’ 자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숨을 한 번 들이 마시고 내쉬는 동작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이 ‘식’ 자를 순 우리말로 바꾸면 ‘한 숨’이 된다. 그러니까 ‘탄식’하다는 말은 몹시 어려운 상황에서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한숨을 짓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탄식을 해 보셨는지요! 아마도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누가 시키지 않아도 탄식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세상은 없을 것이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 쉽지 않은데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겹쳤으니 사람들이 입만 열면 그 입에서 한 숨이 나오고 탄식 소리가 나오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비탄과 통탄과 개탄과 애탄과 한탄 등, 온갖 종류의 탄식 소리가 우리 주변을 메우고 있다. 비탄(한매)은 몹시 슬퍼하면서 내뱉는 한숨을 말하며, 통탄은 그런 탄식의 정도가 아주 심한 상태를 말합니다. 개탄은 정말 분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해서 나오는 한숨이고, 애타는 억장이 무너지듯이 슬픔이 가득할 때 나오는 한숨이며, 한탄은 원통하거나 뉘우치는 일이 있을 때 탄식하며 쉬는 한숨을 말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우리는 그저 이 한숨을 가지고 사정을 하소연하며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우리 하나님께 탄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8장 26절 말씀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짊어져야 할 탄식을 우리 성령 하나님께서 짊어지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한숨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28절은 우리 하나님께서 성령의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30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때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 인생의 소망이 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한숨을 바꾸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한숨이 변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에 감탄이 되게 하시고, 우리 입술에서 탄복과 경탄과 찬탄과 영탄이 나오게 하사, 우리가 소망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달려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제 6월이 시작되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의 가정마다 그 한숨이 변하여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의 탄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대전중앙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6-18
  • 다시 일어 나세요(스바냐 3:14-17)
    계속되는 바이러스로 인해 저마다 기가 죽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교인들의 기가 죽었는데 교회가 부흥될리 없고, 사원들의 기가 죽었는데 기업이 잘 될 리가 없고, 남편과 아내의 기가 죽어 있는데, 그런 가정이 행복할리 만무한 거다.   16절에서 “그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기죽지 말고 힘을 내라는 말입니다. 비록 너희들이 처한 환경은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오히려 노래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주신 시대적 배경은 요시아 임금이 통치하던 시대인데, 임금의 할아버지인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폭정을 한 사악한 왕이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태양신과 바알신이 득실거렸고 우상숭배와 매춘행위가 나라 안팎에서 기승을 부렸으며, 국민들은 한결같이 가난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저마다 낙망에 빠져 있었다.   이런 도탄속에서 겨우 갓 여덟살 된 요시아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너무 어린 왕이 권좌에 앉자, 사람들은 나라의 멸망을 예견하고 풀이 죽어 있었고, 국민들은 어리고 철도 들지 않은 임금에게 나라와 자신들의 운명을 맡길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주시면서,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당시 모든 것이 부패하고 타락한 상황속에서도 정절을 지키고 살던 남은 자들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신앙을 버리고 절망에 빠져 살던 그때에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을 움켜쥐고 희망의 줄을 놓지 않았던 「남은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날마다 죄앞에 넘어지고 스러져서 실추된 자녀로서의 명예와 기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신다.   17절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러면서 15절에서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즉, 하나님께서 이 백성의 죄를 용서했기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므낫세와 아몬이 지은 끔직한 죄를 어린왕 요시아에게 형벌로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형벌에 대한 탕감선언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해치고 넘어뜨리는 원수와 대적들의 도전이 있지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성과 방패와 요새가 되시고,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셔서 매순간마다 보살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면서 결코 여러분들이 잡은 손을 뿌리치치 아니하신다. 우리는 결코 낙심하거나, 주저 앉아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다시 한번 주안에서 힘을 내시기 바란다.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라는 복음가사처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고 항상 도와 주심을 믿으시고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말고 고난의 뒤편에 잇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면서 감사하시고 다시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동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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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06-08
  • “신앙과 삶의 기초-가정”(창37:19)
      인간은 다른 종과 달리 자기에 대한 지원을 받을 때만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동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독을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검토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사용하여 현실에 부딪치면서 무언가를 해 냈을 때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기감을 갖게 되고 이것을 지원해 주는 사람을 고마워하고 그 때 사랑받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만 인간의 삶은 공허하지 않고 삶이 실제처럼 느껴지게 된다. 자녀들에게는 똑똑한 부모보다는 무지한 부모나 스승이 필요하다. 이들은 자녀의 시행착오에 대해 초조해 하지 않고 결국 자기 스스로 해 내도록 기다릴 줄 안다. ‘자아지원’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거짓으로 인생을 살거나 눈치보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그들은 평생 자신을 찾기 위해 방황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참된 자기의 느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인간의 자기감은 하나님도 꺾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은 바로 이 자기감이라는 곳에 깃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브니엘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고 네가 이겼다라고 말씀했다.(창32:28) 때문에 ‘자기부정’은 먼저 이 ‘자기감’이 잘 구축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청지기로서 자녀의 이 본성이 짓밟히지 않고 잘 발현되게 해 주어야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이 힘은 거짓 인생에서 벗어나 진솔한 인간, 현실을 창조적으로 잘 변형시키면서 살아가게 하는 무엇이며 믿음에서도 아주 주요한 요소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이 자기라는 느낌이 온전해질 때 우리는 나에게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수 있다. 이것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는 말의 의미다. 이 기초가 없는 사람은 평생을 자신을 찾는 일에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자기를 찾아 헤매는 사람에게 “너는 왜 꿈이 없니, 왜 비전을 갖지 못하니?” 라고 야단칠 수는 없다.   성공의 공식과 원리를 아는 우리는 자녀에게 꿈을 강요하지만 꿈은 위에서 오는 것이지 강요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고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 받은 야곱의 꿈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는 꿈이었다. 야곱은 사랑타령 돈타령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인생말년에 자기부정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삶으로 깨달은 다음의 일이었다. 반면에 요셉은 17살 때부터 성화의 과정에 던져졌다. 그는 이미 그 이전에 부모와 사랑과 야곱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감이 구축되었기에 하나님은 자신있게 그를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 수 있다. 만약 요셉이 현실인식 능력이 뛰어나서 형들의 눈치를 살필 줄 알았고 자기감에 대해 그렇게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면 형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꿈 이야기를 두 번씩이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정에서 채우지 못한 이 결핍을 군대에서 채우려 하는 군인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행진할 힘도 구호를 외칠 힘도 없어 치료만 받고있는 병사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성도들은 주님의 사랑, 성육신의 과정에서 평생을 머물기를 원한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자기부정을 강요하거나 왜 비전을 갖지 못하냐고 야단칠 수 없다. 저들의 삶과 말씀은 항상 분열속에 머물게 된다. 삶의 기초는 인생의 초기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감에 상처받은 성도는 복음을 어려워하고 평생 사랑받기만을(유유) 고집한다. 우리는 그 원인을 가정에서 찾아야 한다. 가정이 교회와 인간의 모든 삶의 기초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양지평안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5-28
  • “신앙과 삶의 기초-가정”(창37:19)
      인간은 다른 종과 달리 자기에 대한 지원을 받을 때만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동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독을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검토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사용하여 현실에 부딪치면서 무언가를 해 냈을 때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기감을 갖게 되고 이것을 지원해 주는 사람을 고마워하고 그 때 사랑받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만 인간의 삶은 공허하지 않고 삶이 실제처럼 느껴지게 된다. 자녀들에게는 똑똑한 부모보다는 무지한 부모나 스승이 필요하다. 이들은 자녀의 시행착오에 대해 초조해 하지 않고 결국 자기 스스로 해 내도록 기다릴 줄 안다. ‘자아지원’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거짓으로 인생을 살거나 눈치보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그들은 평생 자신을 찾기 위해 방황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참된 자기의 느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인간의 자기감은 하나님도 꺾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은 바로 이 자기감이라는 곳에 깃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브니엘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고 네가 이겼다라고 말씀했다.(창32:28) 때문에 ‘자기부정’은 먼저 이 ‘자기감’이 잘 구축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청지기로서 자녀의 이 본성이 짓밟히지 않고 잘 발현되게 해 주어야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이 힘은 거짓 인생에서 벗어나 진솔한 인간, 현실을 창조적으로 잘 변형시키면서 살아가게 하는 무엇이며 믿음에서도 아주 주요한 요소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이 자기라는 느낌이 온전해질 때 우리는 나에게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수 있다. 이것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는 말의 의미다. 이 기초가 없는 사람은 평생을 자신을 찾는 일에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자기를 찾아 헤매는 사람에게 “너는 왜 꿈이 없니, 왜 비전을 갖지 못하니?” 라고 야단칠 수는 없다.   성공의 공식과 원리를 아는 우리는 자녀에게 꿈을 강요하지만 꿈은 위에서 오는 것이지 강요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고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 받은 야곱의 꿈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는 꿈이었다. 야곱은 사랑타령 돈타령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인생말년에 자기부정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삶으로 깨달은 다음의 일이었다. 반면에 요셉은 17살 때부터 성화의 과정에 던져졌다. 그는 이미 그 이전에 부모와 사랑과 야곱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감이 구축되었기에 하나님은 자신있게 그를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 수 있다. 만약 요셉이 현실인식 능력이 뛰어나서 형들의 눈치를 살필 줄 알았고 자기감에 대해 그렇게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면 형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꿈 이야기를 두 번씩이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정에서 채우지 못한 이 결핍을 군대에서 채우려 하는 군인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행진할 힘도 구호를 외칠 힘도 없어 치료만 받고있는 병사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성도들은 주님의 사랑, 성육신의 과정에서 평생을 머물기를 원한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자기부정을 강요하거나 왜 비전을 갖지 못하냐고 야단칠 수 없다. 저들의 삶과 말씀은 항상 분열속에 머물게 된다. 삶의 기초는 인생의 초기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감에 상처받은 성도는 복음을 어려워하고 평생 사랑받기만을(유유) 고집한다. 우리는 그 원인을 가정에서 찾아야 한다. 가정이 교회와 인간의 모든 삶의 기초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양지평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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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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