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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인가
이병곤 목사 영적 전쟁의 시대, 누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인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세대는 평화의 시기가 아닌 전쟁의 시기다. 1953년 7월의 정전 이후, 한반도에는 총성만 멎었을 뿐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이 멈춘 적이 없다.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셨다고 단언한다. 군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무능은 적이 누구인지, 지금이 전시인지 평시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을 통해 우리에게 명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훈련소가 아닌 실전에 즉각 투입된다. 삶의 모든 현장이 영적 격전지이며, 특히 ‘기도’는 총성 없는 참혹한 전쟁의 정점이다. 이 전쟁에서 사탄의 전략은 교묘하다. 사탄은 우리를 예배의 주관자가 아닌 구경꾼으로, 참여자가 아닌 들러리로 전락시키려 군사로서의 성도들의 무장을 해재 시키려 애쓴다. 누가 얼마나 잘하는지 평가하고 비판하게 하며, 예배를 감정과 느낌이라는 형식의 틀에 가두려고 한다. 그러나 참된 예배는 내가 무언가를 ‘보러’ 가거나 ‘받으러’ 가는 자리가 아닌 나를 ‘드리는’ 자리여야 한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급진적인 변화 속에 악과 부조리가 만연해 있다. 정치적 이념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은 좌우로 갈라졌고, 미움과 시기는 물리적·심리적 살인을 서슴지 않게 한다. 정치는 본질상 경제, 안보, 교육, 보건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이 장치가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국가 전체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교회는 중대한 질문 앞에 선다.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미명 아래 진리를 선포하고 수호해야 할 참된 사명을 외면해오지 않았는가. 교회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영향을 미쳐야 하는 공동체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의 특혜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정치와 사회에 의해 훼손되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해야 할 ‘영적군사’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다. 세상의 평가가 두려워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고 스스로 무장을 해제 한다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자격이 없다. 교회가 세상의 눈치를 보며 자정능력을 잃을 때, 교회의 빛은 희미해지고 소금의 짠맛을 잃어 버리고 결국은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이 타협이 계속된다면 결국엔 타협하는 지상 교회와 진리를 수호하려는 지하 교회로 나뉘게 될지도 모른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님의 진리의 말씀과 예배를 수호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닌 하나님의 얼굴이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알리고,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 알리는(시 67편) 군사의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빛이 비치면 어둠 속에 있던 백성들이 하나님을 높이게 될 것이다. 주님은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깨어날 때, 비로소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임하게 될 것이다. 이미 전쟁은 시작 되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인가? /마운틴로스터스 카페처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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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새로운 운명' (마태복음 1장 23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우리 구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기쁜 성탄의 날, 여러분의 가정과 삶 위에 하나님의 평강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오늘의 성탄절은 화려한 조명과 아름다운 장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2천 년 전, 첫 번째 성탄절의 풍경은 사뭇 달랐습니다. 화려한 호텔도, 따뜻한 방도 없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누우신 곳은 짐승의 밥통인 구유였습니다. 냄새나고, 춥고, 초라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인류를 구원할 가장 큰 빛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그토록 낮은 곳으로 오셨는지, 그 성탄의 참된 의미를 세 가지 관점에서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내가 저곳에서 이곳으로 너희와 같이 되리라'고 선언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저곳에서 우리와 같은 유한한 몸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의 아픔과 눈물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책임져 주시고 사랑으로 끌어안아 주시겠다는 하나님 사랑의 가장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제 외로운 우리는 새로운 동반자가 생겼습니다. 우리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들어주시고 또 치료해주실 분이 생긴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동행을 통해 새로운 운명과 소명을 선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히 우리 개인에게 위로를 주는 것을 넘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 역사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이 동행은 우리에게 새로운 운명을 선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담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축복과 제자됨의 의무가 결합된 것입니다. 이러한 동행에서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뜻이 아닌 나 자신의 뜻대로 살수 있습니까? 이제 자신의 자유를 버리고 주님의 동행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신앙인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물결이 정한 대로 떠다니는 고독하고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을 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운명은 무엇입니까? 이땅 가운데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펼쳐서 사랑으로 하나된 인류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사막 같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투입하시고 책임져 주시겠다는 프로젝트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셋째,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의 운명 안에서 진정으로 피어납니다 혹자는 묻습니다.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야 한다면, 믿는 자에게 자유는 없습니까?" 성도 여러분, 믿는 자의 자유는 운명대로 살 때 진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법과 원칙이 없을 때 방탕한 방종이 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참된 자유가 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세상은 우리를 옭아매는 염려, 물질, 욕망을 쫓으라고 말합니다. 물질이 목적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이 삶의 목적, 즉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생명이 약동하는 에덴의 거주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이 복된 운명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찾아야 합니다. "그 일이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십자가는 낭만이나 여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롯이 자기 자신이 수고와 헌신으로 짊어져야 하는 무게입니다. 이 십자가를 외면할 때, 생명의 혈관이 막혀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운명의 시작입니다. 세상이 주는 운명, 사탄이 주는 운명, 내 욕망이 주는 운명에 빠지지 마십시오. 오로지 하나님이 예수 탄생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 이 거룩한 운명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소명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입니다. 이 운명을 최선으로 살아갈 때, 여러분은 복인 중에 복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어떻게 왜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햇다면 이제 예수님과 동행하는 운명을 맞이한 우리는 이 운명을 어떻게 감당하고 살아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 삶의 목적을 되찾고,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며, 하나님과 운명을 같이하는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진정한 축복이 되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사회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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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다시 태어나게 하는 교회 - 사도행전 19장 21절에서 41절
도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되는 공간입니다. 문화와 경제, 유행, 사람들의 희망과 불안이 뒤섞여 거대한 흐름을 이룹니다. 교회는 이런 도시 속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거대한 도시 속에 있는 작은 공동체일 뿐입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사람들이 반기독교적인 문화에 젖어 있는 시대 속에서 교회의 모습이란 그저 작은 몸짓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다 교회는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교회 안에 끝없는 갈등과 어려움을 안고 가고 있습니다. 힘을 모아도 어려운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스스로 보기에도 교회가 무기력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믿지만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아 보입니다. 도대체 교회가 도시에 어떤 힘과 능력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사도행전 19장은 도시 속에서 교회가 가진 힘과 능력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는 도시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진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교회가 가진 생명력이 무엇이길래 교회가 도시 마저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비결이 바로 복음에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도시의 변화를 위해 교회에 복음을 주셨음에도 교회가 그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기에 변화의 주체로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된다는 말도 아니고, 장차 소금이 될 것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성도 자신이 빛이요 소금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할 뿐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여서 드리는 공적예배는 분명히 우리에게 하늘의 은혜와 불을 내려 줍니다. 하지만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교회가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예배가 교회의 심장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중심이지만, 공적예배만으로는 지역사회에 어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아무리 착해도, 세상은 “교회가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은혜가 교회 안에서만 머물면 도시는 교회를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가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주일 이후 평일의 예배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참된 예배는 삶에서 이어지는 예배입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드리는 삶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예배당 안에서 머무는 말씀이 아니라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라 하신 이웃을 실제로 섬기며 그 사랑을 도시 속에 흘려 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예배요, 도시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시는 완벽한 교회를 통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예배 드리는 교회를 통해 다시 태어납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가 걸어가는 이 길이 대전이라는 도시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대전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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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뜻밖의 풍성한 감사(에베소서 3장 20~21절)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에베소서 3장 20~21절) 에베소서 3장 14~21절, 바울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19절까지는 성도가 영적으로 건강하고 충만하기를 위한 기도, 20절과 21절은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운동력 있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부활, 승천, 구원의 능력을 말한다. 구속사적 사건뿐 아니라 우리 기도를 통해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능력이다.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에게 큰 기쁨은 역사하시는 능력이 주를 믿고 의지하는 자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구하는 기도를 빠짐없이 들어주신다. 한나가 드린 눈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당대 최고의 영적 지도자, 사무엘을 주셨고(삼상 1:19~20, 27), 백성을 잘 돌보기 위해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에게 부와 명예까지 더하여 넘치도록 응답해 주셨다(왕상 4:22~30). 또한 우리가 지혜가 부족할 때 구하면 넘치도록 넉넉히 주신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한다.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하나님은 아량이 넓고 포용이 크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더구나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더욱 그러하시다. 바울 기도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가 된 교회를 위한 것이다.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 빛나는가? 우리가 그분의 자랑이 될 때다. 하나님의 하신 일과 그분 자신을 높일 때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할 때다. 그리고 그 일은 ‘모든 세대를 통해 영원히 영원히’ 이어가야 한다. 어떻게? 그런 자리에 공동체가 같이하고,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이 주신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면 된다. 그러면 거룩한 세대가 이어진다. 이어진 세대가 우리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여 높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축복한다. 성경에는 불임으로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던 현장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아브라함, 이삭, 한나, 사가랴와 엘리사벳 등. 그러나 오히려 이런 어려움이 그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든 동기와 동력이 되었다. 고난이 축복으로 바뀐 거다. 그는 아이를 못 갖고 없어서 막힌 인생의 어둠을 뚫고 오히려 출산의 빛을 열어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났다. 아침교회도 그러하다. 하나를 구했는데, 둘을 주시는 하나님. 제주도 여행이면 족한데 일본에 가게 하시는 하나님!! 이사할 집이 전셋집이어도 감사한데, 걱정 없이 살 자기 집을 주시는 하나님!! 말썽만 안 부려도 OK인데, 공부까지 열심히 하게 된 자녀들, 남의 편만 아니어도 되는데, 나의 편이 되어준 남편, 예배만 와도 땡큐인데 와서 제자가 되고 동역자가 되는 여러분 같은 성도!! 선교사들에게 헌금만 보내도 기쁜데, 현장까지 마을까지 들어가 영혼을 구원하고 일꾼을 세우고 그 나라 목회자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아침교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능력이고 여러분에게 능력대로 주신 믿음이 아닌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침교회는 2006년도 5월 28일에 세워졌다. 아주 작고 힘겹게 출발했다.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공간도 부족한 상태로 시작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어 하나님께서 일하기 좋은 상태였다. 그런 황량한 들판 같던 교회가 19년이 지나 성전이 성도들로 가득하다. 보통 성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필요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준비가 된 충직한 청지기들이다. 7개월 후면 아침교회는 어엿한 청년, 스무 살이 된다. 아침인 연령대로 보면 모든 연령대 중에 20대가 가장 늦게 모였다. 하지만 지금은 10여 명의 청년이 출석하고, 얼마 전 청소년부가 생겨나 모든 부서를 갖춘 규모 있는 교회가 되었다. 현실은 냉혹하다. 한국교회 절반 이상이 교회학교가 없다. 아이들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우린 역전을 거듭하고 있다. 나는 아침교회가 한국교회의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왜냐하면 여전히 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응원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뜻밖의 여행이 열흘간 있었다. 한 번도 구하거나 생각하지 않았던 장소와 일정이었다. 여행계획을 세울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초대한 선교사님 부부는 그냥 편하게 오라고 하셨다. 빅아일랜드는 하와이의 시골과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풍성하고 충분한 영적, 정서적, 관계적, 육체적 리트릿이 될 수 있도록 이끄셨다. 이번 여행은 계획단계부터 특별한 선물이었다. 이사와 장남 혼인을 앞두고 엄두도 못 낼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 부부를 특별하고 세미하게 이끌어주셨다. 마치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 일한 것에 대한 존엄(dignity)을 지켜주고 돌려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선교사님 부부의 강한 권유가 계기였지만, 30년 전 청년 때 받았던 제자훈련학교(DTS)에 강사로 오셨던 분들이 말끝에 열방대학에 한 번 오라는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부부 목사 둘이 전부인 교회가 이런 계획을 하는 것은 모험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숙소, 만남, 일정, 날씨, 식사, 재정, 특별한 경험 등 하나님의 세심한 인도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선망했던 열방대학 방문. 특별한 숙소를 배정받았다. 상상할 수 없는 비용으로 숙박했다. 이런 경우가 없었다고 선교사님은 누누이 말씀하셨다. 가는 비행기 좌석은 둘이 떨어져 앉는 자리였다. 결혼 30주년을 기념하는 여행도 되는 기회인데, 아쉬웠다. 하지만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 내 옆 좌석이 둘이나 비어있는 것을 봤다. 큰 비행기에 딱 두 자리만 비어있었다. 승무원에게 아내 자리를 옮겨도 되는지 묻자 쾌히 허락해줬다. 호놀룰루 국제공항까지 아주 편하게 대화하며 올 수 있었다. 하나님의 깜짝 이벤트는 열방대학 숙소였다. 숙소 번호가 118호였다. “내가 너희 숙소를 특별히 준비했어.”라는 하나님 신호였다. 현재 사는 아파트 비밀번호였다. 반복되는 우연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직접 개입이고 간섭이다. 그 사건이 주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릴 사랑하고 인정하며 교회를 기억하신다는 신호였다. 뜻밖의 풍성한 감사 제목을 생각하며 우린 감동어린 감사를 드린다. 열방대학 예배모습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하도록 열방대학 기도실을 가까이에 두셨고, 주일 밤 출발했으나 시차로 주일 낮에 도착하여, 다음 날 월요일 아침부터 천여 명의 세계에서 온 수많은 예배자와 함께 찬양하고 마음껏 기도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것이 하와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곳은 한적하고 쾌적한 날씨로, 기온이 22~26도, 밤에는 산바람 아침엔 바닷 바람으로 생활하기에 적합했다. 무엇보다 경건하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선교사님들 덕분에 검소하고 부지런한 시간을 보냈다. 새벽마다 깨어 기도하고 조깅하여 함께한 시간이 참 복되었다. 20대 시절 소속된 단체에서 제자훈련을 받을 때 오셨던 열방대학 강사님들이 여러분도 꼭 와서 보라고 했던 영적으로 충만한 세계선교의 요람이자 뿌리가 되는 열방대학을 방문하여, 예배할 수 있었다. 아내 박목사님은 20대 때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풋풋한 기억을 만날 수 있어 좋았고, 열방대학 여러 학생이 한국에 대해 묻고 Korean Prayer에 대해 물어봐 줘서 나눌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열방대학 청년들의 모습 나는 고교 시절부터 철야기도를 하며 세계 여러 나라들을 위해 오랜 기간 기도해왔는데, 평생을 헌신하여 선교하고 특히 젊은이들이 파도처럼 몰려올 것에 대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림을 따라 믿음으로 삶을 살아낸 YWAM의 로렌 커닝햄 목사님 부부와 거룩한 부르심을 잇는 수 많은 크리스천을 만나고 얼굴을 마주 대하며 서로 격려하고 얘기 할 수 행복하고 감사했다. 파도가 높을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 높은 파도가 이는 바다를 찾아 가장 높은 파고를 향해 헤엄치는 사람들이 있다. 서퍼들입니다.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파도를 찾아온다. 높은 파도를 기다린다. 그런 파도에 매료되어 삶을 즐긴다. 고난이 고난 아닌 축복으로 바뀐다. 여러분은 어떤가? 우리는 어떤 고난도 넘을 수 있는 크리스천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고난은 고통이나 짐이 아니라 축복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렇다. 예수전도단(YWAM)을 설립한 로렌 커닝햄은 환상을 봤다. 높은 파고를 일으키며 온 세계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몰려오는 것을 봤다. 두려움이 아닌 환희를 가지고, 1960년 청년선교단(YWAM)의 시작되었다. 로렌 커닝햄 목사님의 말씀이다. "저는 세계 지도에서 파도를 보았습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갔습니다. 그리고 파도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의 파도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러 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꼭 필요한 예배, 좋은 안내자, 상쾌하고 적절한 쉼, 창조주의 아름다움과 광대함을 편히 볼 수 있어 감사했다. 나라 걱정, 교회와 외부 사역도 잠시나마 잊고 내려놓을 수 있어 잘 쉬었다. 6일간 머물렀던 제주도나 시골 같은 열방대학(Univisity of the Nations) 빅아일랜드 카일루아-코나지역은 정말 특별한 상급이었다. 세계 최대 천문대 마르나케어 한 날은 세계 최대의 천문대라고 하는 마우나케어를 찾았다. 그런데 근처에 도착하자 하필 비가 왔다. 먹구름으로 제법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방문자센터까지 가서 다시 물어보기로 했다. 나이 든 가이드는 올라가도 괜찮다고 말했다. 입장료도 없었고 사륜구동 차량인지, 내려올 때 기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만 안내해줬다. 아주 높은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와도 왜 올라가도 괜찮은지 알았다. 비구름대는 아래쪽에 있었고 위쪽은 넓고 맑은 구름대가 펼쳐졌다. 정상에 이르니 추웠지만 아주 좋은 날씨였다. 그렇구나! 대한민국의 영적 기상도 이와 같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마우나케어에서 환상적인 노을을 목격했다. 경이로운 광경이 창조주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노래하기에 족했다. 뜻밖의 풍성한 감사도 곳곳에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안석문목사는 중앙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중고등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가르쳤고, 정릉교회와 예능교회 부목사를 거쳐 2006년 아침교회를 창립했다. 어린이, 교육과 관련된 일을 줄곧 해 오다가 현재는 YP클럽의 대장과 한국교회 다음세대지킴이 연합(한다연) 상임총무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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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홍석영목사 할렐루야! 오늘은 다음 주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추수감사절을 잘 준비하는 것인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대 교회의 추수감사절은 1621년 가을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국교회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지 못해 갈등을 겪던 이들은 네델란드로 이주를 합니다. 그러나 네델란드에서의 삶 역시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돈을 모아 메이플라워호를 구입하여 신대륙으로 향하게 됩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이들의 삶은 매우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1620년에 102명의 사람들이 도착했는데 첫 겨울을 지내면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44명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듬해 현지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1621년 가을 첫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도움을 준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함께 칠면조 고기를 먹으며 식사를 했던 것이 현대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1904년부터 미국과 동일하게 11월 셋째 주에 처음으로 지켜졌습니다. 이후 한국의 추수 시기에 맞추어 조정을 하게 되면서 현재는 많은 교회들이 10월 마지막 주 혹은 11월 셋째주를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추수감사절은 성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세번의 시기는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었습니다(신16:16). 이중에 초막절은 한 해 수확의 첫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키라 명령하신 세 절기 중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는 초막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고양시에 위치한 안디옥성결교회의 예배모습 첫째,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분주한 삶 가운데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몸 가짐이 조심스러워 지는 곳을 선택하라면 가장 먼저 교회를 꼽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여 하나님을 만나도록 분주한 삶 가운데 구별된 곳입니다. 다른 곳 보다 주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각 사람이 빈 손으로 나오지 말고 감사 제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아오는 자는‘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신16:17)’ 제물을 준비하여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열매가 다를 것입니다. 각자, 그리고 우리 가정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내 삶의 열매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특별한 예물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받으시고 큰 복을 더 하실 것입니다. 셋째, 함께 기쁨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아무 것도 없어 초막에 거주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을 기념하도록 하기 위해 한 주간 초막에 거하게 하셨습니다(레23:43). 그리고 이 기간에는 ‘너와 네 자녀, 노비, 레위인, 객, 고아,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부터 얻은 소득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 주변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소득이 없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있다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득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주의 은혜 가운데로 초청하십시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빈 자리가 주의 은혜로 채워 질 것입니다. 복음을 나누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5년 추수감사절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추수감사절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얻은 소득으로 힘껏 드리기 위해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주변의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며 섬기십시오. 특히 교회 믿음의 형제 자매, 목회자들과 식사라도 한 끼 나누며 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의 뜻을 실천하는 여러분의 삶의 범사에 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 안디옥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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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병목의 은혜(마가복음 5장 25절에서 34절)
여기 한 여인이 예수님의 좋은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와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언비천리>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과 같이 내 입술에서 좋은 말이 만들어져 나가길 소망합니다. 교회자랑, 목사님자랑, 성도자랑, 새가족이 믿음이 정착하는 자랑을 할 때 동서남북에서 많은 자랑의 소문을 듣고 병목의 은혜로 교회는 차고 넘칠 줄 믿습니다. 본문에 기적을 체험한 여인은 좋은 소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 혈루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합니다.(31절) 학1:5-6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우리의 행위를 살피고 새어 나가는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학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의 좋은 소문을 내는 성도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떨어지면 물질도 나가고 건강도 잃게 됩니다. 치료함의 방법은 마태복음 3장 2절에서 세례요한이 외쳤던 말씀처럼 여인은 회개하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예배의 게으름, 기도를 쉬는 것, 불순종한 것을 회개하면 신앙 회복과 육체와 물질의 혈루증이 깨끗이 나음을 얻습니다. 2. 믿음의 기적을 일으킵니다.(27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기회와 찬스를 놓치지 않고 무리를 뚫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긍정의 마인드로 전진할 때 믿음의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옷자락을 붙잡기만 하자, 주의 전에 오기만 해도 주님은 날 만나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일으킴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9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인의 믿음처럼 우리도 믿음이 커가므로 예수님의 보혈로 몸의 질병이 말라가는 기적이 이루어지길 예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3. 병목의 은혜가 임합니다. 동서남북에서 밀려오는 축복이 내 삶 속에서 임할 줄 믿습니다. 창세기 6장 5~7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노아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120년 동안 배를 만드는 중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에도 좌지우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이 지시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의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말씀처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의 인내를 이루어 나갈 때 의로운 자로 병목의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삶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손잡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 속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영육의 질병 또한 나음을 믿고 강건함을 누리는 하나님자녀 되길 예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광명대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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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인가
- 이병곤 목사 영적 전쟁의 시대, 누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인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세대는 평화의 시기가 아닌 전쟁의 시기다. 1953년 7월의 정전 이후, 한반도에는 총성만 멎었을 뿐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이 멈춘 적이 없다.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셨다고 단언한다. 군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무능은 적이 누구인지, 지금이 전시인지 평시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을 통해 우리에게 명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훈련소가 아닌 실전에 즉각 투입된다. 삶의 모든 현장이 영적 격전지이며, 특히 ‘기도’는 총성 없는 참혹한 전쟁의 정점이다. 이 전쟁에서 사탄의 전략은 교묘하다. 사탄은 우리를 예배의 주관자가 아닌 구경꾼으로, 참여자가 아닌 들러리로 전락시키려 군사로서의 성도들의 무장을 해재 시키려 애쓴다. 누가 얼마나 잘하는지 평가하고 비판하게 하며, 예배를 감정과 느낌이라는 형식의 틀에 가두려고 한다. 그러나 참된 예배는 내가 무언가를 ‘보러’ 가거나 ‘받으러’ 가는 자리가 아닌 나를 ‘드리는’ 자리여야 한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급진적인 변화 속에 악과 부조리가 만연해 있다. 정치적 이념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은 좌우로 갈라졌고, 미움과 시기는 물리적·심리적 살인을 서슴지 않게 한다. 정치는 본질상 경제, 안보, 교육, 보건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이 장치가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국가 전체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교회는 중대한 질문 앞에 선다.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미명 아래 진리를 선포하고 수호해야 할 참된 사명을 외면해오지 않았는가. 교회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영향을 미쳐야 하는 공동체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의 특혜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정치와 사회에 의해 훼손되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해야 할 ‘영적군사’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다. 세상의 평가가 두려워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고 스스로 무장을 해제 한다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자격이 없다. 교회가 세상의 눈치를 보며 자정능력을 잃을 때, 교회의 빛은 희미해지고 소금의 짠맛을 잃어 버리고 결국은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이 타협이 계속된다면 결국엔 타협하는 지상 교회와 진리를 수호하려는 지하 교회로 나뉘게 될지도 모른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님의 진리의 말씀과 예배를 수호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닌 하나님의 얼굴이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알리고,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 알리는(시 67편) 군사의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빛이 비치면 어둠 속에 있던 백성들이 하나님을 높이게 될 것이다. 주님은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깨어날 때, 비로소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임하게 될 것이다. 이미 전쟁은 시작 되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인가? /마운틴로스터스 카페처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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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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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성경은 우리 삶의 기준인가? (시119편105, 신28:2)
- 예수품교회 이영무 담임목사 오늘날 현대인들은 성경을 어떤 책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은 오늘도 우리가 그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읽고 실천하고 순종할 책인가? 아니면 그저 책장에 꼽아놓고 필요할 때 참고서적으로 가끔 확인해야 할 책일까? 이 시대 믿음의 사람들은 성경을 내 생명을 걸만한 진리의 책으로 인정하고 그 말씀을 기준 삼아 살고자 하는지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한다. 시편119: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말한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말씀을 등과 빛 삼아서 인생의 길을 가고 있는가? ‘열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책’은 하와이 열방대학 총재인 로렌커닝헴 박사가 쓴 책이다. 그 책에는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 비케언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부터 2백 30년 전에 영국 군함 바운티에서 항해 도중 반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호송되던 9명의 죄수들이 선원들과 군인들을 죽이고 배를 탈취한다. 그들은 바다에서 만난 한 상선을 탈취하고 여인들을 포로로 잡았다. 아이들과 여인들을 데리고 작은 무인도로 들어갔는데 그곳이 바로 피케언 섬이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도록 배를 불살라 버렸다. 거기에 정착을 하고 생활을 한다. 집을 짓고 결혼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상한 약초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지고 술을 만들어 먹는다. 그들은 취하고/ 도박을 하고 싸우고 서로 죽이고/ 지옥같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몇 번의 살인이 자행되어 진다. 그때 존 에덤스와 열명의 여자들이 남게 되는데 존 에덤스는 어느 날 배에서 내린 상자를 정리하다가 한권의 책을 발견하게 된다. 그 책이 바로 성경책이었다. 그는 난생 처음 성경을 읽으면서 그 책의 매력에 깊이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되겠다고 다짐한다. 정기적으로 그 책을 읽고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놀랍게도 성경말씀을 같이 나누면서부터 이 섬에 놀라운 평화가 도래한다. 질서가 세워지고 도둑이 없어진다. 속이는 일이나 술취해 싸우는 일이 없어진다. 얼마 후 그 섬은 천국과 같은 섬이 되었다. #1991년 그 섬을 방문한 열방대학 총재인 로렌커닝헴 목사가 그 섬은 지상에 세워진 천국과 같았다고 말한다. 주민들은 자신들에게 변화를 준 성경책을 유리관에 넣어서 보관해 놓았다. “이 말씀이 우리의 인생과 우리 섬을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성경은 과연 우리 삶의 기준이 되고 있는가? 성경의 정경을 가리키는 말이 ‘캐논’인데, 그 뜻은 곧은 막대기, 자, 규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흐르고 역사가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올바른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비케언 섬에서 성경말씀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너무나 극명하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남성과 여성을 만드셨다는 당연한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 소수자에 대한 배려나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 기준이 허물어지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신명기 28:2절의 말씀은 복이 따라오는 인생을 말한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이 말씀을 새 번역으로 보니 의미가 더 분명해 진다. “....이 모든 복이 너를 찾아와서 너희를 따를 것이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복을 기원한다. ‘복 받으라’는 덕담을 나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을 잡으려고 연초부터 노력한다. 그런데 복은 내가 잡는 것이 아니라, 복이 나를 따라와야 한다. 유명한 앤드류 카네기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복을 쫓아다니는 사람은 지쳐 쓰러지지만,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쫓아가는 사람은 복이 그 뒤를 따라온다’고 말했다. 그렇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그 말씀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복이 따라오는 인생이 될 수 있다. 여러분들이 이 복을 누리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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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성경은 우리 삶의 기준인가? (시119편105, 신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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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새로운 운명' (마태복음 1장 23절)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우리 구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기쁜 성탄의 날, 여러분의 가정과 삶 위에 하나님의 평강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오늘의 성탄절은 화려한 조명과 아름다운 장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2천 년 전, 첫 번째 성탄절의 풍경은 사뭇 달랐습니다. 화려한 호텔도, 따뜻한 방도 없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누우신 곳은 짐승의 밥통인 구유였습니다. 냄새나고, 춥고, 초라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인류를 구원할 가장 큰 빛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그토록 낮은 곳으로 오셨는지, 그 성탄의 참된 의미를 세 가지 관점에서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내가 저곳에서 이곳으로 너희와 같이 되리라'고 선언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저곳에서 우리와 같은 유한한 몸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의 아픔과 눈물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책임져 주시고 사랑으로 끌어안아 주시겠다는 하나님 사랑의 가장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제 외로운 우리는 새로운 동반자가 생겼습니다. 우리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들어주시고 또 치료해주실 분이 생긴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동행을 통해 새로운 운명과 소명을 선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히 우리 개인에게 위로를 주는 것을 넘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 역사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이 동행은 우리에게 새로운 운명을 선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담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축복과 제자됨의 의무가 결합된 것입니다. 이러한 동행에서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뜻이 아닌 나 자신의 뜻대로 살수 있습니까? 이제 자신의 자유를 버리고 주님의 동행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신앙인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물결이 정한 대로 떠다니는 고독하고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을 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운명은 무엇입니까? 이땅 가운데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펼쳐서 사랑으로 하나된 인류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사막 같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투입하시고 책임져 주시겠다는 프로젝트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셋째,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의 운명 안에서 진정으로 피어납니다 혹자는 묻습니다.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야 한다면, 믿는 자에게 자유는 없습니까?" 성도 여러분, 믿는 자의 자유는 운명대로 살 때 진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법과 원칙이 없을 때 방탕한 방종이 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참된 자유가 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세상은 우리를 옭아매는 염려, 물질, 욕망을 쫓으라고 말합니다. 물질이 목적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이 삶의 목적, 즉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생명이 약동하는 에덴의 거주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이 복된 운명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찾아야 합니다. "그 일이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십자가는 낭만이나 여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롯이 자기 자신이 수고와 헌신으로 짊어져야 하는 무게입니다. 이 십자가를 외면할 때, 생명의 혈관이 막혀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운명의 시작입니다. 세상이 주는 운명, 사탄이 주는 운명, 내 욕망이 주는 운명에 빠지지 마십시오. 오로지 하나님이 예수 탄생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 이 거룩한 운명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소명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입니다. 이 운명을 최선으로 살아갈 때, 여러분은 복인 중에 복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어떻게 왜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햇다면 이제 예수님과 동행하는 운명을 맞이한 우리는 이 운명을 어떻게 감당하고 살아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 삶의 목적을 되찾고,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며, 하나님과 운명을 같이하는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진정한 축복이 되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사회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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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새로운 운명' (마태복음 1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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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다시 태어나게 하는 교회 - 사도행전 19장 21절에서 41절
- 도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되는 공간입니다. 문화와 경제, 유행, 사람들의 희망과 불안이 뒤섞여 거대한 흐름을 이룹니다. 교회는 이런 도시 속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거대한 도시 속에 있는 작은 공동체일 뿐입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사람들이 반기독교적인 문화에 젖어 있는 시대 속에서 교회의 모습이란 그저 작은 몸짓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다 교회는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교회 안에 끝없는 갈등과 어려움을 안고 가고 있습니다. 힘을 모아도 어려운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스스로 보기에도 교회가 무기력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믿지만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아 보입니다. 도대체 교회가 도시에 어떤 힘과 능력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사도행전 19장은 도시 속에서 교회가 가진 힘과 능력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는 도시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진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교회가 가진 생명력이 무엇이길래 교회가 도시 마저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비결이 바로 복음에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도시의 변화를 위해 교회에 복음을 주셨음에도 교회가 그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기에 변화의 주체로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된다는 말도 아니고, 장차 소금이 될 것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성도 자신이 빛이요 소금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할 뿐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여서 드리는 공적예배는 분명히 우리에게 하늘의 은혜와 불을 내려 줍니다. 하지만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교회가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예배가 교회의 심장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중심이지만, 공적예배만으로는 지역사회에 어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아무리 착해도, 세상은 “교회가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은혜가 교회 안에서만 머물면 도시는 교회를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가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주일 이후 평일의 예배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참된 예배는 삶에서 이어지는 예배입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드리는 삶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예배당 안에서 머무는 말씀이 아니라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라 하신 이웃을 실제로 섬기며 그 사랑을 도시 속에 흘려 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예배요, 도시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시는 완벽한 교회를 통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예배 드리는 교회를 통해 다시 태어납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가 걸어가는 이 길이 대전이라는 도시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대전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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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다시 태어나게 하는 교회 - 사도행전 19장 21절에서 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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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뜻밖의 풍성한 감사(에베소서 3장 20~21절)
-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에베소서 3장 20~21절) 에베소서 3장 14~21절, 바울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19절까지는 성도가 영적으로 건강하고 충만하기를 위한 기도, 20절과 21절은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운동력 있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부활, 승천, 구원의 능력을 말한다. 구속사적 사건뿐 아니라 우리 기도를 통해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능력이다.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에게 큰 기쁨은 역사하시는 능력이 주를 믿고 의지하는 자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구하는 기도를 빠짐없이 들어주신다. 한나가 드린 눈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당대 최고의 영적 지도자, 사무엘을 주셨고(삼상 1:19~20, 27), 백성을 잘 돌보기 위해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에게 부와 명예까지 더하여 넘치도록 응답해 주셨다(왕상 4:22~30). 또한 우리가 지혜가 부족할 때 구하면 넘치도록 넉넉히 주신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한다.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하나님은 아량이 넓고 포용이 크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더구나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더욱 그러하시다. 바울 기도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가 된 교회를 위한 것이다.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 빛나는가? 우리가 그분의 자랑이 될 때다. 하나님의 하신 일과 그분 자신을 높일 때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할 때다. 그리고 그 일은 ‘모든 세대를 통해 영원히 영원히’ 이어가야 한다. 어떻게? 그런 자리에 공동체가 같이하고,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이 주신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면 된다. 그러면 거룩한 세대가 이어진다. 이어진 세대가 우리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여 높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축복한다. 성경에는 불임으로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던 현장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아브라함, 이삭, 한나, 사가랴와 엘리사벳 등. 그러나 오히려 이런 어려움이 그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든 동기와 동력이 되었다. 고난이 축복으로 바뀐 거다. 그는 아이를 못 갖고 없어서 막힌 인생의 어둠을 뚫고 오히려 출산의 빛을 열어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났다. 아침교회도 그러하다. 하나를 구했는데, 둘을 주시는 하나님. 제주도 여행이면 족한데 일본에 가게 하시는 하나님!! 이사할 집이 전셋집이어도 감사한데, 걱정 없이 살 자기 집을 주시는 하나님!! 말썽만 안 부려도 OK인데, 공부까지 열심히 하게 된 자녀들, 남의 편만 아니어도 되는데, 나의 편이 되어준 남편, 예배만 와도 땡큐인데 와서 제자가 되고 동역자가 되는 여러분 같은 성도!! 선교사들에게 헌금만 보내도 기쁜데, 현장까지 마을까지 들어가 영혼을 구원하고 일꾼을 세우고 그 나라 목회자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아침교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능력이고 여러분에게 능력대로 주신 믿음이 아닌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침교회는 2006년도 5월 28일에 세워졌다. 아주 작고 힘겹게 출발했다.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공간도 부족한 상태로 시작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어 하나님께서 일하기 좋은 상태였다. 그런 황량한 들판 같던 교회가 19년이 지나 성전이 성도들로 가득하다. 보통 성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필요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준비가 된 충직한 청지기들이다. 7개월 후면 아침교회는 어엿한 청년, 스무 살이 된다. 아침인 연령대로 보면 모든 연령대 중에 20대가 가장 늦게 모였다. 하지만 지금은 10여 명의 청년이 출석하고, 얼마 전 청소년부가 생겨나 모든 부서를 갖춘 규모 있는 교회가 되었다. 현실은 냉혹하다. 한국교회 절반 이상이 교회학교가 없다. 아이들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우린 역전을 거듭하고 있다. 나는 아침교회가 한국교회의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왜냐하면 여전히 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응원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뜻밖의 여행이 열흘간 있었다. 한 번도 구하거나 생각하지 않았던 장소와 일정이었다. 여행계획을 세울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초대한 선교사님 부부는 그냥 편하게 오라고 하셨다. 빅아일랜드는 하와이의 시골과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풍성하고 충분한 영적, 정서적, 관계적, 육체적 리트릿이 될 수 있도록 이끄셨다. 이번 여행은 계획단계부터 특별한 선물이었다. 이사와 장남 혼인을 앞두고 엄두도 못 낼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 부부를 특별하고 세미하게 이끌어주셨다. 마치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 일한 것에 대한 존엄(dignity)을 지켜주고 돌려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선교사님 부부의 강한 권유가 계기였지만, 30년 전 청년 때 받았던 제자훈련학교(DTS)에 강사로 오셨던 분들이 말끝에 열방대학에 한 번 오라는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부부 목사 둘이 전부인 교회가 이런 계획을 하는 것은 모험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숙소, 만남, 일정, 날씨, 식사, 재정, 특별한 경험 등 하나님의 세심한 인도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선망했던 열방대학 방문. 특별한 숙소를 배정받았다. 상상할 수 없는 비용으로 숙박했다. 이런 경우가 없었다고 선교사님은 누누이 말씀하셨다. 가는 비행기 좌석은 둘이 떨어져 앉는 자리였다. 결혼 30주년을 기념하는 여행도 되는 기회인데, 아쉬웠다. 하지만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 내 옆 좌석이 둘이나 비어있는 것을 봤다. 큰 비행기에 딱 두 자리만 비어있었다. 승무원에게 아내 자리를 옮겨도 되는지 묻자 쾌히 허락해줬다. 호놀룰루 국제공항까지 아주 편하게 대화하며 올 수 있었다. 하나님의 깜짝 이벤트는 열방대학 숙소였다. 숙소 번호가 118호였다. “내가 너희 숙소를 특별히 준비했어.”라는 하나님 신호였다. 현재 사는 아파트 비밀번호였다. 반복되는 우연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직접 개입이고 간섭이다. 그 사건이 주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릴 사랑하고 인정하며 교회를 기억하신다는 신호였다. 뜻밖의 풍성한 감사 제목을 생각하며 우린 감동어린 감사를 드린다. 열방대학 예배모습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하도록 열방대학 기도실을 가까이에 두셨고, 주일 밤 출발했으나 시차로 주일 낮에 도착하여, 다음 날 월요일 아침부터 천여 명의 세계에서 온 수많은 예배자와 함께 찬양하고 마음껏 기도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것이 하와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곳은 한적하고 쾌적한 날씨로, 기온이 22~26도, 밤에는 산바람 아침엔 바닷 바람으로 생활하기에 적합했다. 무엇보다 경건하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선교사님들 덕분에 검소하고 부지런한 시간을 보냈다. 새벽마다 깨어 기도하고 조깅하여 함께한 시간이 참 복되었다. 20대 시절 소속된 단체에서 제자훈련을 받을 때 오셨던 열방대학 강사님들이 여러분도 꼭 와서 보라고 했던 영적으로 충만한 세계선교의 요람이자 뿌리가 되는 열방대학을 방문하여, 예배할 수 있었다. 아내 박목사님은 20대 때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풋풋한 기억을 만날 수 있어 좋았고, 열방대학 여러 학생이 한국에 대해 묻고 Korean Prayer에 대해 물어봐 줘서 나눌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열방대학 청년들의 모습 나는 고교 시절부터 철야기도를 하며 세계 여러 나라들을 위해 오랜 기간 기도해왔는데, 평생을 헌신하여 선교하고 특히 젊은이들이 파도처럼 몰려올 것에 대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림을 따라 믿음으로 삶을 살아낸 YWAM의 로렌 커닝햄 목사님 부부와 거룩한 부르심을 잇는 수 많은 크리스천을 만나고 얼굴을 마주 대하며 서로 격려하고 얘기 할 수 행복하고 감사했다. 파도가 높을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 높은 파도가 이는 바다를 찾아 가장 높은 파고를 향해 헤엄치는 사람들이 있다. 서퍼들입니다.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파도를 찾아온다. 높은 파도를 기다린다. 그런 파도에 매료되어 삶을 즐긴다. 고난이 고난 아닌 축복으로 바뀐다. 여러분은 어떤가? 우리는 어떤 고난도 넘을 수 있는 크리스천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고난은 고통이나 짐이 아니라 축복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렇다. 예수전도단(YWAM)을 설립한 로렌 커닝햄은 환상을 봤다. 높은 파고를 일으키며 온 세계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몰려오는 것을 봤다. 두려움이 아닌 환희를 가지고, 1960년 청년선교단(YWAM)의 시작되었다. 로렌 커닝햄 목사님의 말씀이다. "저는 세계 지도에서 파도를 보았습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갔습니다. 그리고 파도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의 파도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러 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꼭 필요한 예배, 좋은 안내자, 상쾌하고 적절한 쉼, 창조주의 아름다움과 광대함을 편히 볼 수 있어 감사했다. 나라 걱정, 교회와 외부 사역도 잠시나마 잊고 내려놓을 수 있어 잘 쉬었다. 6일간 머물렀던 제주도나 시골 같은 열방대학(Univisity of the Nations) 빅아일랜드 카일루아-코나지역은 정말 특별한 상급이었다. 세계 최대 천문대 마르나케어 한 날은 세계 최대의 천문대라고 하는 마우나케어를 찾았다. 그런데 근처에 도착하자 하필 비가 왔다. 먹구름으로 제법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방문자센터까지 가서 다시 물어보기로 했다. 나이 든 가이드는 올라가도 괜찮다고 말했다. 입장료도 없었고 사륜구동 차량인지, 내려올 때 기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만 안내해줬다. 아주 높은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와도 왜 올라가도 괜찮은지 알았다. 비구름대는 아래쪽에 있었고 위쪽은 넓고 맑은 구름대가 펼쳐졌다. 정상에 이르니 추웠지만 아주 좋은 날씨였다. 그렇구나! 대한민국의 영적 기상도 이와 같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마우나케어에서 환상적인 노을을 목격했다. 경이로운 광경이 창조주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노래하기에 족했다. 뜻밖의 풍성한 감사도 곳곳에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안석문목사는 중앙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중고등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가르쳤고, 정릉교회와 예능교회 부목사를 거쳐 2006년 아침교회를 창립했다. 어린이, 교육과 관련된 일을 줄곧 해 오다가 현재는 YP클럽의 대장과 한국교회 다음세대지킴이 연합(한다연) 상임총무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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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뜻밖의 풍성한 감사(에베소서 3장 20~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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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 홍석영목사 할렐루야! 오늘은 다음 주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추수감사절을 잘 준비하는 것인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대 교회의 추수감사절은 1621년 가을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국교회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지 못해 갈등을 겪던 이들은 네델란드로 이주를 합니다. 그러나 네델란드에서의 삶 역시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돈을 모아 메이플라워호를 구입하여 신대륙으로 향하게 됩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이들의 삶은 매우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1620년에 102명의 사람들이 도착했는데 첫 겨울을 지내면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44명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듬해 현지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1621년 가을 첫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도움을 준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함께 칠면조 고기를 먹으며 식사를 했던 것이 현대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1904년부터 미국과 동일하게 11월 셋째 주에 처음으로 지켜졌습니다. 이후 한국의 추수 시기에 맞추어 조정을 하게 되면서 현재는 많은 교회들이 10월 마지막 주 혹은 11월 셋째주를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추수감사절은 성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세번의 시기는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었습니다(신16:16). 이중에 초막절은 한 해 수확의 첫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키라 명령하신 세 절기 중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는 초막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고양시에 위치한 안디옥성결교회의 예배모습 첫째,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분주한 삶 가운데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몸 가짐이 조심스러워 지는 곳을 선택하라면 가장 먼저 교회를 꼽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여 하나님을 만나도록 분주한 삶 가운데 구별된 곳입니다. 다른 곳 보다 주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각 사람이 빈 손으로 나오지 말고 감사 제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아오는 자는‘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신16:17)’ 제물을 준비하여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열매가 다를 것입니다. 각자, 그리고 우리 가정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내 삶의 열매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특별한 예물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받으시고 큰 복을 더 하실 것입니다. 셋째, 함께 기쁨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아무 것도 없어 초막에 거주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을 기념하도록 하기 위해 한 주간 초막에 거하게 하셨습니다(레23:43). 그리고 이 기간에는 ‘너와 네 자녀, 노비, 레위인, 객, 고아,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부터 얻은 소득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 주변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소득이 없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있다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득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주의 은혜 가운데로 초청하십시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빈 자리가 주의 은혜로 채워 질 것입니다. 복음을 나누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5년 추수감사절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추수감사절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얻은 소득으로 힘껏 드리기 위해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주변의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며 섬기십시오. 특히 교회 믿음의 형제 자매, 목회자들과 식사라도 한 끼 나누며 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의 뜻을 실천하는 여러분의 삶의 범사에 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 안디옥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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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하나님의 진노(로마서1:1~32)
-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상태를 진단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며, 그 불의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복음을 깨달을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는 ‘본질적인 완전함’입니다. 대상에 따라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합니다. 그것을 ‘본질적으로 완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악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본질적인 완전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죄와 악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고, 죄와 악이 있으면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예측 가능합니다. 철저히 이성적입니다. 오로지 죄와 악에 대해서만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죄와 악에 대해서만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죄와 악에 대해서 분노하실까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신론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사람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만 존재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광대하시며, 영원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분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고, 모두 이해할 수 없고, 초월해 있고, 모두 알 수 없는 영역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나면 우상이 반드시 출연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결코 중립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어떤 것을 섬기고 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으면 우리의 생각이 허망해지고, 어두워지며, 결국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진노가 세 가지 채널로 나타났습니다. 마지막 날 궁극적으로 폭발하듯 나타나는 진노가 있습니다. 매 순간 우리 삶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통해 나타나는 진노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내버려두심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정욕대로 살도록 더러움에 내버려 두시니 그들은 서로의 몸을 욕되게 했습니다”(24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대로 내버려 두셨다, 정상적인 관계를 비정상적인 관계로 바꿨다, 순리를 역리로 바꾸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며 위반하였다”(26~27절). “더구나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하찮게 여기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타락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28절). ‘내버려 두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악을 행하게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진노의 한 모습입니다. 그 자체가 징벌입니다. 우리가 두려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단어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의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마음으로 인하여 온갖 죄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불의, 악행, 탐욕, 악의, 질투, 살인, 다툼, 악독, 분쟁,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부모를 거역, 우매함, 배역함, 무정함, 무자비 등입니다. 악은 새로운 죄를 계속 만들어내고, 악을 행하는 법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구원의 감격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앞에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불의로 진리를 막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받아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온누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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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하나님의 진노(로마서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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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결산할 때가 온다 (눅16:1~13)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들이 언젠가는 끝이 있음을 되새겨 준다. 남송 시인 양만리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시를 읊었으며, 성경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3:1)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맡겨 주신 사명을 얼마만큼 잘 감당했는지에 대한 결산을 준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으므로 말씀을 통해서 각자의 삶을 돌아보길 바란다. 첫째:하지 말아야 할 일(1~3) 청지기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것을 맡아 대신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이다. 좋은 예는 요셉으로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창39:4~5)이다. 본문의 청지기는 자신의 불의함을 주인이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6~17)말씀처럼 주인은 청지기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청지기로 부르심을 받았다. 시간, 물질, 붙여주신 사람, 믿음의 공동체 등등 작은 일이라 여겨질지라도 귀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해야 할 일(4~9) 앞으로 먹고 살 일이 걱정이 된 청지기는 변하지 않고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 일을 한다. 이 청지기는 주인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의 잔꾀를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칭찬하고 있다(8절). 이러한 주인의 태도는 돈에 관점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재정적으로 얼마를 손해 보는지는 중요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돈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9절)는 주인의 말이 그 해답이다. 돈을 얻기 위해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고 끝내는 배신하는 것조차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시대에 하나님의 청지기로 정말 해야 할 일은 사람을 얻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결산의 기준(10~13) 주인의 결산 기준은 자신의 재산에 얼마만큼의 이익을 더 발생시켰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성실하게 충성했느냐이다. 칭찬을 받은 다섯이나 두 달란트를 받았던 자들과 달리 책망을 받고 쫓겨난 한 달란트 받았던 자의 비유(마25:14~30)에서 보듯이 주인의 칭찬을 받는 것은 맡은 것에 대한 소중함과 충성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느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선택을 요구하신다(13절). 바울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무엇을 남길 것인지 보다는 얼마나 순종하며 충성하는 삶을 살 것인지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의 마지막 결산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게 되며 그 결산이 특별한 것은 후회하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결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한 주간 나의 삶이 마지막 결산의 때에 칭찬의 모습이 될지 혹은 책망의 이유가 될지 돌아보며 깨어 칭찬 받을 만한 믿음의 삶을 살아내길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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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결산할 때가 온다 (눅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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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고 사는 것 (눅15:1~7)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눅15장에서 예수님은 한 마리의 양, 한 드라크마,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의 비유를 통하여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책망은 정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4~5).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따라서 순위를 매기고, 그 중요성에 따라 사는 어리석은 삶을 회개하며 정말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축원한다. 첫째:긍휼히 여기는 마음(1~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라는 말씀대로 살지만,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6)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셨다.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습이 지식은 있고, 말씀도 있지만 그 중심에 긍휼함이 없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손가락질 받고, 미움 받는 일 때문에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을 품기로 결정하셨다. 긍휼함을 잃어버리고 살기 시작하면 마음은 점점 강퍅하여질 수밖에 없다. 긍휼함을 품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자만이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게 됨을 명심하자. 둘째:소중히 여기는 마음(3~6) 비유를 통해 집중 할 것은 목자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비유로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10:3~4)라고 말씀하셨다. 목자는 백 마리가 되어도 양의 이름을 알고, 양은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자의 음성을 안다. 그렇기에 한 마리의 양이라 할지라도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 목자의 마음이다. 소중한 존재들이 되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의미가 담겨 있는 함께 해온 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어진 관계들임 깨닫고 때론 내게 유익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 지라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 셋째:하나님 아버지의 마음(7) 의인의 선함은 감동을 주지만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던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진멸당할 위기에 처한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32)라고 간청하고 있다. 바울도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기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자만이 하나님에게 감동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오늘 우리들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며 살지만 마음은 나의 노력과 결단에 의해 지켜낼 수 있음을 명심하자.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말씀하신다.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로 이미 해답을 주셨다. 모든 것을 잃었던 욥이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정말 소중한 것을 날마다 힘써 지키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내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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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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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고 사는 것 (눅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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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갖추어야 할 것 (눅14:25~35)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예수님의 기준으로 무리의 반대말은 개인이 아니라 제자이다. 유대인들이 선민의식 때문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처럼, 무리의 일원이기에 하나님이 기뻐 받아 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무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격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애쓰고 노력해야 주어지는 것임을 기억하며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적극성(25~27)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이 부모를 공경하라(신5:16)는 명령도 부정할 뿐 아니라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마22:39)는 말씀조차 버리는 것이 아니라 미워해야 할 정도의 적극성이 있어야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하만의 계략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에스더 왕비에게 모르드개는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4:14)며 용기를 가지라는 권면에 결단을 내리는 에스더처럼 제자로서 살기 위해서는 세상과 맞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인지 깨달아 알기에 힘들고 어렵지만 그 길을 선택하는 적극성을 지닌 자에게 놀라운 하늘의 축복이 주어지게 된다. 둘째:준비성(28~33) 망대를 짓는 자가 예산을 따져 보고, 전쟁을 앞둔 왕이 군사력을 점검해 보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처럼 제자로 살기를 바란다면 따져 보고, 점검해서 선택해야 하는데 그것은 자기의 소유를 버리는 것이다(33절). 40년 광야를 지나고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 진을 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는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한다(수5:2~9).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고 가장 강해져야 할 순간에 자신들이 가장 약해지는 선택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고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약속의 땅을 소유하기 위한 가장 완벽한 준비 과정이 된다. 제자로서 살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포기라면 아직 출발도 하지 못한 어리석은 인생이 아닌지 돌아보길 바란다. 셋째:유용성(34~35) 예수님의 기준의 유용성은 얼마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받은 은사를 잃어버리지 않고 잘 사용하느냐의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고 권면한다. 참된 제자는 덕이 될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유익이 되어야 한다. 시대가 악하고,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탄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 악한 시대에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될지 아니면 쓸모가 없어 길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될지에 대해 분명하게 선택해야 할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35절)로 말씀을 마무리 하셨다. 예수님도 아무리 귀한 교훈이 되고 능력이 있는 말씀이라도 듣고, 깨우치고, 변화되는 자는 많지 않음을 아셨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다”(사26:3)고 약속해 주셨다. 제자는 마음을 정하고 신뢰감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자로 평강하도록 지켜주심을 경험하며 사는 자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이 평안이 말씀을 통해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한 성도들의 삶에 충만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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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갖추어야 할 것 (눅14: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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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少數)의 길을 가라 (눅13:22~30)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다수의 주장이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이 아니다. 열두 명 가운데 단 두 사람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믿음의 고백을 하고, 엘리야의 시대는 7천의 사람만이 믿음을 지켰으며, 400여명의 다윗의 군사들은 소수였지만 옳은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고 하신다. 말씀을 통해 믿음 안에서 소수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깨닫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힘쓰라(22~24)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의 약속으로 구원의 첫 번째 문은 넓고 크지만 점점 작아지는 수많은 문들을 만나게 되고, 궁극적으로 마지막 문 앞에 서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이다. 마지막 이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썩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남겨질 것에 대해 힘써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6).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힘쓰고 살고 있는지 돌아보자. 둘째:떠나라(25~27) 예수님의 주변에 머물며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행위를 행악(27절)이라며 떠나라고 하신다. 마치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18:21)에서 보듯이 행악은 저울질하며 사는 것이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7)는 말씀처럼 악한 자의 모습을 떠날 때 소수의 길을 가게 되고 나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것에 대해 떠나는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셋째:참여하라(28~30)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으니라”(30절)고 말씀하시만 문제는 처음이냐 나중이냐가 아니라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수 도 있기에 참으로 두려운 마음도 든다. 예수님이 천사와 함께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오른편에 있는 이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소수의 길을 가는 자는 자기에게 어떤 것도 되돌려 줄 수 없는 이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는 자이며 이런 자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내 인생의 마지막 잔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명심하자.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다수의 삶은 물 흘러가듯이 살면 되지만 소수의 삶은 선택에 따른 책임과 대가를 치러내야 한다. 그렇기에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믿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소수가 될 수밖에 없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막13:13)는 말씀처럼 믿음의 소수로 사는 것은 다수인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만 구원받는 소수의 축복을 믿으며 구원받는 소수가 되길 위해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아내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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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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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少數)의 길을 가라 (눅1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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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펴고 살자 (눅13:10~17)
-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얼마나 많은 혼란이 있는가? 그 혼잡함 속에서 다른 이의 판단은 무조건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는 아집을 버리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고 책망한다. 말씀을 통해서 문제와 상황에 쪼그라져 사는 인생이 아니라 믿음 안에 가슴을 펴고 사는 축복의 자리에 머물기를 축원한다. 첫째:꼬부라진 육체(10~13) 18년 동안 꼬부라진 몸을 가진 여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듣는 것은 투병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여인처럼 오랜 시간동안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8~9)는 응답을 받는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삶의 꼬부라진 것들만 바라보며 살 것인지 아니면 그 문제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살 것인지 그 선택은 언제나 나의 것임을 기억하며 눈을 들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참된 신앙인이 되길 바란다. 둘째:꼬부라진 마음(14~16) 회당장은 만만한 무리들을 향해서만 화를 낼 뿐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에게는 왜 안식일을 범하느냐고 따지지 못한다(14절). 오랜 세월 고통을 받았던 여인의 마음보다 자신이 처하게 될 상황의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시대를 불문하고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의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29:25~26)고 말씀하신다. 꼬부라진 육체를 가지고 있었던 여인보다 더 큰 질병을 가지고 있던 자는 바로 회당장이였고 그 회당장이 오늘을 사는 나의 모습이다. 셋째:꼿꼿해진 영혼(17) 예수님이 책망하시자 반대하던 이들이 깨닫고 부끄러워하는데, 부끄러움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증거이다. 40일 동안이나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 군대를 우습게 여기는 골리앗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삼상17:26)이 전달되었음에도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지만,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6:5)라고 고백할 때 제단의 숯불로 그 입을 깨끗하게 하여 주신다. 부끄러움을 감추는 것이 예수님이 책망하셨던 외식하는 자의 모습이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죄의 권세를 이기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비결임을 잊지 말자. 사명을 따라 살아갈 때 홍해 앞에도 서고 십자가도 지어야 하기에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는 은혜가 주어지는 기회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인생의 한계 앞에 쪼그라드는 삶이 아니라 믿음 가운데 당당하게 쭉 펴는 승리의 인생으로 변화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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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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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펴고 살자 (눅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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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세대의 특징(눅 11장 29절~32절)
-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딤후3:5)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고 권면하고 있다. 본문의 무리들은 말씀을 듣는 것처럼 보이고,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예수님이 단호하게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요2:25)을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해 악한 세대의 특징을 살펴보며 시대도 악하고, 나의 믿음도 연약하지만 새롭게 각오를 세우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 표적을 구한다. 악한 세대라고 책망을 받는 이유는 “표적만”구하는 자세 때문이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바알세불의 힘입은 것(15절)이라 주장하거나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분명한 표적(16절)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표적만을 구하기 때문에 악한 세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악한 세대이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하신다. 표적을 쫓아다니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한 믿음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 믿음 없이 사는 것이 악한 세대의 모습이다. 둘째 사모함이 없다. 남방 여왕은 열왕기상 10장에 솔로몬을 찾아온 스바(에티오피아)의 여왕으로 예수님이 땅 끝(31절)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의 먼 곳이지만 직접 찾아올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악한 세대를 안타까워하시면서 스바 여왕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진리에 대해서는 사모함이 없고 자기 눈에 보이는 표적만을 요구하는 어리석은 모습 때문이다. 사모함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세로서 하나님은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107:9)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진리에 대한 열정과 사모함 없이 예수님 주변만 얼쩡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짚어보아야 한다. 셋째 찔림이 없다. 예수님이 니느웨의 회개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시고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지만 사람들은 회개하고 돌이키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까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5~16)고 말씀하고 있다. 악한 시대를 살기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 악한 세대의 특징은 찔림이 없는 것이다. 찔림이 없기에 처절한 회개도 따라오지 않는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오늘 이 시대는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없지만 보혜사 성령과 함께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찌 보면 예수님 시대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세대임이 분명하다. 베드로 사도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는 선포가 악한 세대를 벗어나 선한 세대를 살고자 하는 이들의 행동 강령이 되어야 한다. 한 주간 악한 세대의 잘못된 습성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바로 서서 승리하는 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길목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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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세대의 특징(눅 11장 29절~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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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방식 (눅12:49~59)
- 길목교회 주재훈목사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믿음을 가진 자의 분명하고 정확한 길을 제시해 주신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을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고 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좁은 길, 좁은 문을 선택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선으로 힘들고 어려운 삶 가운데 멸망이 아닌 참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분쟁을 인정하라(49~53)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불은 화평이 아니라 분쟁의 출발점 이였으며(51절), 마태는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고 기록한다. 세상을 따라 살며 믿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큰 성읍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없어 심판 받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선포하셨다. 분쟁이 있기에 힘든 시간들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분쟁이 있다는 것은 죄에 때 묻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분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며 그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이되길 바란다. 둘째:어리석음을 인정하라(54~56)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모스는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선포한다. 생명의 말씀인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 책망 받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도 다를 바 없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바울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는 고백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셋째:잘못을 인정하라(57~59)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 판결을 받으러 가야 한다면 길에서라도 화해하기를 힘쓰라(58절)고 하시는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용서를 구하라는 말씀이다. 베드로에서 천국의 열쇠를 주시면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고 하셨고, 믿음의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주셨다(마18:18). 나의 실수와 잘못이 이 땅에서 당사자와 온전하게 풀어지지 않으면 그 문제는 하늘에서 묶여 있는 상태가 된다. 철저한 회개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에게는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고, 그 이후에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자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말은 하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변함없이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어리석은 모습을 회개하며 한 주간도 말씀 안에서 승리하는 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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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방식 (눅12:4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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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눅12:29~34)
- 길모교회 주재훈 목사 성경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이라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마음에 무엇을 담고 사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예수님은 온통 이 땅의 풍요로움만을 마음에 담고 살기에 믿음 없이 살 수 밖에 없음을 책망하신다. 말씀을 통해서 나의 마음은 지금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를 점검해 보고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깨끗이 비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채우기를 축원한다. 첫째:채우지 말아야 할 것(29~30) 이 세상의 것들로 마음을 채우면 찾아오는 것은 ‘근심’(29절)이다. 근심은 내 힘으로 살고자 할 때 찾아오는 마음이므로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고 성경은 말한다. 이렇듯 매일의 삶 속에서 근심의 무거운 짐에 눌려 사는 인생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시기에(30절)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아닌 일용할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근심은 내 손에 들려진 것보다 남의 손에 들려진 것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생긴다. 따라서 근심은 감사가 없기에 자리 잡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채워야 할 것(31~32) 마음이 세상의 근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의 나라를 구하라”(31절)는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나마 내 손의 있는 모든 것조차 다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는 것 같고 현실은 당장 내 눈 앞에 있으니 용기 있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맞아들이고 가득 채우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32절)이기에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최우선으로 삼아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채우는 비결(33~34)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 품고 사는 자는 이 땅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자이다.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른 이에게 흘려보내는 것이 하늘의 보물을 쌓는 일이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전11:1~2) 이것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지혜로운 삶을 사는 자의 모습이다. 썩어질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하늘의 것에 투자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11:25)는 말씀에서 보듯이 나의 물질을 흘려보내는 것이 더 많은 것들을 하늘에 쌓아두는 최고의 방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니라”(34절)는 말씀은 내 마음이 어떤 보물로 채워져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신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고 하신다. 이 세상의 것들로 마음이 채워져 있으면 절대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이 땅의 보물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속에 차고 넘쳐서 세상에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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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눅12: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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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많은 도마(요한복음 11장 16절)
-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발명 혹은 즐겨 부르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노게, 즉 “우레의 아들’ (막3.17)로 불렸고, 시몬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신 후로는 베드로가 주된 이름이 되었다. 바돌로오매는 요한복음에서 나다나엘로 나타나는데 어느 것이 본명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다대오 출신의 유다는 자신의 본업인 유다보다는 그의 출신인 다대오가 오히려 그의 이름처럼 사용된 사람이다. 그리고 도마는 토마스(Thomas)라는 이름으로 ‘디두모’(쌍둥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여기에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비공식적인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의심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라고 부르기까지 gks다. 그런데 이러한 별명을 가진 제자들 가운데 조금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도마”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별명이 되려면 그래도 지속적으로 어떤 특징을 나타내거나 잘못한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야고보와 요한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것은 그들이 노상 성격이 크고 불같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붙여 주신 이름이었다. 하지만 도마는 딱 한 번 의심했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믿겠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그만 ‘도마’ 하면 ‘의심 많은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혀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제자들치고 예수님이 부활을 믿었던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나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던 것이다. 도마 역사도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이 보고 나서야 믿었던 것처럼, 그 또한 눈으로 직접 보아야 믿겠다고 한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만 정말 확실한 사실에 입각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더욱이 도마는 남에게 해 끼친 적도 없다. 베드로처럼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 배반하지 않겠다고 한 적도 없었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적도 없었다. 야고보와 요한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열을 받아 ‘하늘의 불을 내려 멸해도 되겠다‘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성경은 도마가 매우 의협심이 강한 사람임을 알려 준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 유대로 다시 가지고 하시니까 다른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돌로 처려 하는데 꼭 가야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고 말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의심 많은 사람이 일까? 또한 도마는 매우 솔직한 사람이었다. 처소를 예비하라 가지고 할 때에 솔직하게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기에 그 길을 믿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도마는 말을 함부로하지 않는 진실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은 한 번도 도마가 의심많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별명은 교회가 도마에 대해 가르치면서 기억하기 쉽게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 별명처럼 되어 버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고 믿게 된 도마는 후에 가장 확실한 순교자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연약점이 우리 인생의 전환점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주님의 역사가 오늘 우리 모든 성도에게 나타나게 되기를 축복한다./대전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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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많은 도마(요한복음 11장 16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