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목회Home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
[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
[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
[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
-
[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
-
[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
-
[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
부활의 권능으로 산증인 되자(누가복음 24장 44절~49절)
- 성경 말씀에 보면 크고 작은 수많은 예언이 있다. 그러나 가장 크고 완벽하게 성취된 사건은 바로 부활절이다. 일찍이 기독교가 이날이 없었다면 이 땅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특별히 기독교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 때문이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믿느냐”(요 11:25) 하셨다. 우리 모두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주님을 믿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둘째,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말씀(눅24:44.46)하셨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낮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주실 것임이니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 6:1.2)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여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시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뉘지 아니할지니라“(겔 37:21.22) 하셨다. 남북 우리 민족은 예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 하셨으며(갈 3:7, 29) 예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가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미21:43-45) 하셨기에 남북이 6·25 이후 잿더미 속에서도 이남은 복음이 확산되어 전 세계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세계 10대 강국에 들어가는 나라가 되었다. 이북은 이미 1907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칭했던 평양을 생각해 볼 때 우리 민족 남북은 영적 이스라엘이기에 죽은 것 같은 남북은 예수 부활의 권능과 예수 부활의 진리 때문에 새 소망을 갖게 되는 놀라운 은혜를 성경말씀을 통해서 확신할 수가 있다. 셋째, 부활의 권능을 받아 남북은 복음 통일로 세계 복음화를 위한 산증인 되길 위함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역사와 평화통일을 주관하신 부활의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면서 부탁하신 말씀“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행 1:8-11)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는 부활의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시면서 부탁하신 말씀 성령의 권세와 능력으로 충만 받아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며 능력이 있는 기도를 드릴 때 금년은 남북이 분단된 6.25가 일어난 지 70년이 지난해다. “토지가 황무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70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역 하 36:21) 하셨다. 이제 만사에 주님의 때가 있기에 민족분단 70년이 지난 지금에 때에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들의 모든 기도 제목 응답받되 남북은 꿈꾸는 것 같은 평화통일의 새 시대가 열리는 이 선한 일에 우리 다 함께 부활의 권능으로 충만한 산증인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한다. /조국 평화통일협의회 대표회장·서광교회 목사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부활의 권능으로 산증인 되자(누가복음 24장 44절~49절)
-
-
자기 십자가(고난 주간)-(마27:24~26)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고난 주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의 선택을 한 예수님과 이 땅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불순종을 선택한 사람들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선택에 있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말씀 안에서 이 세상의 썩어 없어 없어질 것들이 아닌 부활을 향한 믿음의 선택이 되어야 하며, 그에 따르는 책임이 있음을 깨닫고 결단하기 축원한다. 첫째:선택의 동기(24a)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 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는데 자신의 선택으로 유대인들의 민란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24a). 흔히 죄를 짓는 것이 달콤한 유혹에 걸려 넘어져서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결정적인 죄는 두려움 때문에 짓게 된다. 유혹으로 인해 짓는 죄는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두려움으로 짓는 죄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짓는 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극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완전하게 회복되기도 어렵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두려움은 무엇인가? 그저 내 것을 빼앗길 것 같은 인간적인 두려움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를 바란다. 둘째:책임의 회피(24b) 보이는 두려움에 굴복한 사람은 돌아보고 회개하기 보다는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24b). 손을 씻지만 죄는 씻을 수 없다. 손을 씻어서 자신이 선택한 일이 아니라 군중들이 선택한 일이라는 시각적인 명분은 가질 수 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보다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 있음에도 모두가 손을 씻으며 뒤로 물러나는 상황 속에서 두려움에 담대히 맞서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물러서도 된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손을 씻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셋째:선택의 책임(25~26) “백성이 다 담대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5절)” 그 피가 어떤 피인가? 도대체 무슨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들의 죄를 위해 오셔서 죽으시고 흘리시는 그 피를, 자신들의 죄를 덮고 가리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잘못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죄악의 모습을 보며 진리를 알지 못하면 엄청난 큰 죄악에 빠지게 되는지 깨닫게 된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성공과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라면 영혼을 사탄에게도 팔 기세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기를 기도하라. 삶의 자리를 통해서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믿음의 선택을 하며 그 선택에 책임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빠져 나갈 구멍을 찾기 보다는 내가 메워야 할 구멍이 무엇인지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될 것이며,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자기 십자가(고난 주간)-(마27:24~26)
-
-
기뻐해야 할 이유들 (눅10:17~20)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70명이 둘씩 짝을 지워 전도 여행을 다녀온 후 예수님과 만나는 모습은 기쁨이 차고 넘치지만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고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과는 다른 기쁨을 바라보신다. 말씀을 통해 이 땅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참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바란다. 첫째:과거의 승리(17) 믿음으로 살았던 지난 시간동안 나와 함께 하시고 승리하게 하셨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70인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특별한 순간들을 회고하며 기뻐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같은 기쁨이 없는 이유는 말씀에 순종하여 승리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라는 순종으로 자신에게 임한 말씀을 확신하며 살아갈 때 그에게 온 인류를 구원할 기쁨의 소식이 임하였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이 감동을 주실 때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시도하고 도전하는 인생이 되라. 제자들의 기쁨은 이 과정을 통해서 얻은 진정한 기쁨임을 명심하라. 둘째:현재의 능력(18~19) 매일 나의 삶에 변함없이 예수 그 이름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예수님은 염려하셨지만 놀라운 능력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이 놀라운 역사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사는 동안 함께 할 것을 약속하시며 선포(19절)하시는데 이 약속은 부활하신 후에는 물론이고(막16:17~18), 승천하시면서도(행1:8)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음은 분명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오늘도 제자의 삶을 살며 드러나는 능력을 통한 기쁨의 선포가 되어야 한다. 셋째:미래의 약속(20)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70인을 보내실 때 그들이 전해야 할 내용도 분명하게 주셨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9절,11절)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때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 사도 요한은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2,15)고 분명하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마지막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야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이 주어졌기에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오늘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참 기쁨은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것 외에는 우리에게 남겨지지 않는다. 느헤미야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선포하며 먹고 마시며 크게 즐거워하고 명령한다. 이 세상의 기쁨에 목을 매고 살다보니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기쁨을 잃어버리고 사는 나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며 참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길 축원한다.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기뻐해야 할 이유들 (눅10:17~20)
-
-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 (요 12:1~11)
- 예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시체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시점에 이르러 버린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그곳에 와서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예수와 함께 앉아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간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나사로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로가 누구인가? 어떤 자인가? 첫 번째 주님의 계획은 항상 그분의 사랑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그 분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신 희생의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저들은 대속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선택을 받은 자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던 자가 아니었습니까? 두번째 주님의 계획은 나사로가 다시 사는 부활 은총을 체험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뜻밖에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당신의 사랑하는 자가 병들어 위독하다고 전달하였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나사로 무덤의 현장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불신이 예수님을 가로막았습니다. 우리들은 큰 믿음은 있는데 작은 믿음은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믿음은 가지고 있는데, 우리 일상생활에서 큰 불가능을 만나고 고난과 고통을 만날 때 그 믿음은 사라져 버립니다. 당신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과거와 상처와 수치를 깨끗하게 씻어주심을 믿으십니까? 이제 그 크신 그 분의 사랑을 경험했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 분을 의지하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다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둘러선 무리들과, 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내신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하여 당신 기도에 응답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때 바로 그 시간에 죽었던 나사로, 벌써 죽은지 나흘이 되어 버린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걸어나왔습니다. 주님은 그 얼굴을 가린 수건과 몸을 싸고 있는 수의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사로만 지목해서 부활을 명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날에 전 인류의 부활(영생과 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의 절정입니다. 그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고 인생들로 하여금 부활의 진리를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나사로는 주님을 모시고 감사의 잔치를 열었던 자였습니다. 예수께서 초청 받은 베다니의 잔칫집은 문둥병자 시몬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모두 예수에게 은총을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나사로의 부활을 감사하며 예수를 위해 보은의 잔치를 벌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사참배 반대로 유명한 최권능목사님이 신사참배의 문제로 경찰에 잡혀 고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고문하는 순경이 매를 때릴 때마다 최목사님은 “예수, 천당” 하면서 매를 맞으셨습니다. 고문하는 순경이 하도 기가 막혀서 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매를 맞으면서도 “예수, 천당을 하느냐?” 이에 대한 목사님의 대답이 또한 명언이셨습니다. “내 몸에는 예수가 꽉 차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튀어 나오니 듣기 싫으면 때리지 말아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 예수의 사랑을 받은 사람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예수께 감사하여 보은의 잔치, 곧 감격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일어납니다./창조교회 목사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 (요 12:1~11)
-
-
예수를 따라가려면 (눅9:57~62)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예수님과 세 사람 대화 속 공통적인 단어는 타동사 “따르다”로 “그대로 되풀이 하여 행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상을 함께 하여 말과 행동을 배우며 그 분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며 그 뜻을 이어가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는 고백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임을 증명한다. 본문을 통해 내가 이끌어가는 인생이 아닌 따라가는 진정한 제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기 바란다. 첫째:안정감을 포기하라(57~58)어디든지 따라갈 수 있다는 이에게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는 한 마디로 나그네로 사는 것이다. 야곱이 들판에서 돌을 베고 누워서 잠을 청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고 그곳을 “벧엘”(창28:19), 즉‘하나님의 집’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집이 가장 안정감을 주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머리 둘 곳도 없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안정감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나의 안정감은 어디에 있는가? 광야를 지나고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잠들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축복은 세상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둘째:우선 순위를 분명히 하라(59~60) 장례는 대부분의 율법적인 행위들보다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의 대답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60절)고 하신다. 이는 부모를 위한 일을 뒤로 하고라도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60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떠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나에게 분명한 확신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 있지만 아직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돌아보며 회개하게 된다. 셋째:과감한 결단을 내리라(61~62)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본인의 결단과 헌신이 먼저 있어야 한다.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당장 예수를 쫓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막1:16~20)이 그랬고, 세리였던 마태도 예수님이 부르시자 그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 나섰다(마9:9). 그들이 12제자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남들보다 탁월하고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이 있을 때 과감한 결단 때문이다. 과감한 결단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표현대로라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62절)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과감한 결단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62절)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고 하셨는데 오히려 십자가 대신 나만을 위한 안정감, 흔들리는 원칙, 머뭇거리는 확신을 메고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 이같이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머리를 맞대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제자로 세워져 가길 축원한다.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예수를 따라가려면 (눅9:57~62)
-
-
지금 나의 자리는? (눅9:37~43)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내 신앙의 상태의 바로미터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에서 보듯이 해답은 금방 나온다. 나는 지금 어느 자리에 머물고 있는가? 말씀을 통해 각자의 모습을 돌아보고 온전한 믿음의 자리에 나를 바로 세우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문제만 있는 자리(37~39) 큰 무리가 가운데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38절)라고 외치는 아비가 있다. 변화산상에서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눅9:33)라고 말했던 베드로의 제안보다 예수님의 마음은 문제를 안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산 밑에 계셨다.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고 하신다. 문제의 자리에 서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에 담대할 수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책망만 있는 자리(40~41)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아비는 아들의 귀신들린 상태를 이야기함과 제자들이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41절)라고 책망하신다. 이는 수많은 이들의 관심사는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귀신을 과연 스승인 예수님이 쫓아낼 수 있는지에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신다. 책망은 아프고, 쓰리지만 그 주님의 음성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돌이킬 수 있는 영적 자세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셋째:영광이 드러나는 자리(42~43) 귀신은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겨우 떠나 가니라”(39절)에서 보듯이 자기가 원하는 순간에 나타나서 그 아들을 괴롭게 하였다. 사람들에게는 잠시 떠난 것처럼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꾸짖음만 듣고 떠날 수 밖에 없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 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9)고 이 원리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사단은 신앙인의 삶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유발하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절망으로 밀어 넣지만 그 순간 오늘 말씀을 기억하자!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위엄이 드러나야 하는 순간임을 말이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시작되었듯이 내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하나님께 묻고, 그 음성을 들으며 순종할 수 있는 자의 머무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임을 명심하여 한 주간 어느 곳이 되었든 믿음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지금 나의 자리는? (눅9:37~43)
-
-
믿음의 시선 (눅9:10~17)
- 오병이어의 기적 앞에서 어떻게(how)에 집중하기에 정말 중요한 왜(why)를 놓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믿음이 성숙해 질수록 방법에 시선을 두는 어떻게(how)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바라보는 왜(why)에 시선을 두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현상이나 상황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놓치게 된다. 본문을 통해 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첫째: 나만 바라보지 말라(10~11) 예수님과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받은 은혜를 나누고 더 깊은 교제를 위해서 벳새다 지역의 빈들(10절)로 향하셨다. 제자들은 나를 통해서 이루어진 일들에 온통 시선을 두고 있지만 예수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계신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6)처럼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한결 같으시다. 시선이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으면 돌려보내고 피하고 싶지만 다른 이들을 향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배고픔과 궁핍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둘째: 없는 것만 바라보지 말자(12~15)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3절)고 명령하신다. 제자들은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차고 넘치게 주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계셨다. 사르밧에 살던 한 여인의 집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남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으며(왕상17:14), 빌려 온 모든 그릇에 기름을 가득 채우는 엘리사의 기적을(왕하4:1~7)을 통해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제자들은 손에 들려 있는 작은 것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 작은 것에 덧 입혀질 크고 놀라운 것들을 바라보셨다. 불신앙의 시선은 내가 지금 얼마나 큰 것의 한 부분을 붙잡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한다. 셋째: 남은 것만 바라보지 말라(16~17) 왜 그 남은 것들을 거두라고 말씀하셨을까? 인간의 본성상 그 남은 것들이 사람들의 손에 들려 흩어지게 된다면 그것은 불신앙의 도구가 될 것이 뻔하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놋뱀이 세워진다(민21:4~9). 그런데 이 놋뱀이 500여년이 지난 히스기야 시대의 종교 개혁 과정 속에 놋뱀을 부수고 그저 놋조각에 불과할 뿐이라며 ‘느후스단’이라 불리게 된다(왕하18:3~4). 남겨진 것을 보며 기억하기 보다는 이미 차고 넘치게 주셨던 더 많은 것을 기억하며 바라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나의 시선이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지 돌아보며 참된 믿음의 시선을 가진 자의 인생이 되길 축원한다.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믿음의 시선 (눅9:10~17)
-
-
창조언약(창 2장 1~3절, 15절, 18~25절
-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창조라는 말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을 할 수가 있다. 이를 발명·발견이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과 닮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창조에 동참할 수가 있다. 창조언약은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맺은 언약을 말한다. 창조언약은 일방적인 언약이라고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일방적이란 말이 좋은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기 때문에 그분의 일방적인 언약은 사람에게 복된 일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창조언약은 안식의 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를 통해 출예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이란 명령을 주셨다. 그리고 그 언약을 주시면서 남종과 여종, 그리고 짐승에게까지 안식일에 쉬라고 말씀하셨다. 짐승에게까지 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죽어라고 일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살라고 일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죽도록 일만 하다가 생을 마친다. 그러기 때문에 안식일에 쉬어야한다. 그리고 예배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야한다. 더불어 쉬는 것도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쉴 수도 없다. 우리가 쉬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안식일 날 쉬라고 하셨지만, 하나님은 안식일 날 쉬시지 않는다. 안식일 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이 쉬고 싶으셔서 안식일을 만드신 게 아니다. 우리에게 안식일 날 쉬면서 복을 받으라는 의미에서 만든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쉬면서 복을 받으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일하라고 만드셨기 때문에 충분히 쉰다면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여기에 충분히 쉰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서도 창조성이 발동되게 되어 있다. 두번째로 창조언약은 재능을 주신대로 일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한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같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잘하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 만약에 내가 축구에서 골키퍼를 좋아해서 하고 싶다. 그런데 골을 막지 못한다면 하지 않는 것이 맞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골은 잘 못 막지만, 넣는 것은 잘한다면 공격수를 하면 된다. 내가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마지막으로 창조언약은 결혼을 하는 것이다. 결혼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날 때부터 고자된 자와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고자된 자를 제외하면 누구나 결혼을 해야한다. 짐승도 짝을 찾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다. 이는 창조언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혼할 때 남자에게는 한 아내를, 여자에게는 한 남편을 주셨다. 이는 경건한 자손을 낳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배우자와 함께 삶을 계속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것이 자녀를 낳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에 동참하도록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시고, 자녀를 주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 주시고, 축복된 삶을 살도록 주신 것이 바로 가정이다. 이 땅에 떠나면서 남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자녀를 남기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신비롭게 만드신 계획인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데로 자녀를 낳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언약에 순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흥중앙교회 목사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창조언약(창 2장 1~3절, 15절, 18~25절
-
-
약자의 무기(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20절)
- 오늘 성경본문은 산상수훈이라고 알려진다. 산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 핵심적인 것을 모아놓은 것이다. 말씀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산에서 가르치셨다고 하면서 엄숙하고 낭만적인 멋있는 배경을 세팅해 놓고 진지한 말씀을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마태는 책을 쓰면서 그런 세팅을 하고 있다. 그중 우리에게 맞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17절을 보자 “내가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이 말씀은 교회에서 구약과 이스라엘의 신앙 역사·전통을 비판하다 보니 사람들의 의구심이 생겼다. 이스라엘은 할례를 했다. 구별을 지은 것이다. 또 안식일을 지켰다. 겉으로 드러나야 이스라엘이라고 형식적으로 구별을 지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보적 인물이 되려면 뭔가 구별을 지었다. 70년대에는 머리를 장발로 기르고, 80년대에는 길에서 데모도 했고, 괜히 청바지 잘라 입고, 피어싱 몇 개 하고, 뭐 그랬다. 너도나도 그러는 것에 대해 예수는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할례도 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 장발도 안 해도 된다. 청바지 잘라 입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이전의 형식적인 것을 무조건 폐하고자 하는 것 아니라 그런 형식이 중요한 것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이 중요한 것이라고 그래야 온전해진다고 예수는 말하는 것이다. 둘째 18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리라”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율법·구약의 모든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의 필연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서를 폐하지 않고 완전하게 해서 타락과 죄악에 대한 심판을 반드시 할 것이며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확실성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오늘 우리 현실에 대입해 보면 매우 엄숙한 말씀이다.예수님의 말씀과 약속은 매우 철저하다. 요즘 말로 세상 공짜 없다. 반드시 땀의 댓가 노동의 댓가가 있다는 말이다. 약속은 반드시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자기 몸을 매다는 희생 없이 구원의 약속을 이룰 수 없다. 셋째 19절 누가 이 일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다.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고 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일이라도 무시하지 않고 이를 행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크다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쓰레기 치우는 일, 청소하는 일, 밥하는 일 등 그런 일을 하는 자를 크다 인정하신다. 리더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자리 그것이 중요한 것이고 큰 것이다. 마지막으로 20절 “너희 의가 바리새인, 서기관들 보다 낫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고 한다. 바리새인은 금식, 기도, 성서읽기, 연구, 명상, 구제, 봉사 등을 하며 존경받았다. 서기관은 성서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개미처럼 성실했다. 요즘 얘기하면 기득권에 있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가? 그런 사람들보다 힘없고 약한 자는 더 열심히 일해야 이긴다는 것이다. 한 발짝 이라도 더 악착 같이 뛰고 싸우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다. 손자병법에 포위전은 병력이 10배가 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약자를 에워싼 기득권자들 편은 100배가 넘다. 그러면 나머지는 무엇으로 매워야 하는가? 우리의 의로 메워야 한다. 우리의 정당성. 천지가 다 없어져도 올바르다는 굳센 신념. 믿음이 우리의 무기다. /평화의 교회 목사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약자의 무기(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20절)
-
-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편 23편 1-6절, 요한복음서 10장 1-18절)
- 오늘날 현대인들은 어떤 선택할 때 매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지도 알기 쉽지 않고, 믿고 따를만한 사람, 참된 지도자, 선한 목자, 올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숱하게 많은 지식 정보들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현대인들은 선택할 때 매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지도 알기 쉽지 않고, 믿고 따를만한 사람을 찾기도 너무나 어렵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오랜 시절 예수와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고백하고 믿고 따랐다. 실로 우리의 주님, 하나님은 험한 세상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오늘 시편 23편은 이 사실을 매우 아름다운 노래로 세상에 증언한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도 이 노래를 떠올리면서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여겼다. 우리는 목자와 양을 생각하면 푸른 들판에 매우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을 떠올린다. 마음씨 좋고 잘 생긴 멋진 목동이 어린 양에게 풀을 먹이는 매우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의 유목민이 양을 치는 것은 우리가 그리는 이런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이스라엘에는 푸른 초장 같은 것은 없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한 남쪽 유다는 황무지와 광야이다. 일 년에 푸른 풀이 돋아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11월부터 2월의 우기 이후에 3개월 정도이다. 6개월 동안의 건기에는 모든 것이 메말라 버립니다. 비가 오고 풀이 나기 시작해서 자라면 이제 목자들의 삶을 바빠집니다. 풀이 많이 자라는 곳을 계속 찾아다녀야 한다. 한낮에 물을 이용할 수 있는 곳 주위에서 하루일과를 계획해야 합니다. 무더운 여름이라면 시원한 언덕 경사지들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양들이 풀을 뜯고 쉬면서 안전하게 소화시킬 장소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목자라는 직업은 이렇게 힘들고 고단하고 더럽고 거칠었기에 당시 사람들이 피하는 직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멸시를 받는 직업이었다. 랍비들과 율법학자들은 제대로 씻지 못해 냄새나고 더러운 이런 목자들을 부정하게 여겼다. 목자는 세리, 창녀, 어부들처럼 유대인들이 천하게 여겨 배척하던 직업 가운데 하나였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런 목자와 동일시 한 것 자체가 바로 은혜이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고된 길을 가신 것이다. 예언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 목자로서 실패한 일곱 가지를 지적한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않았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않았고, 상한 자를 싸매주지 않았으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않았고, 길 잃은 자를 찾지 않았으며, 양들을 힘으로 통치하고 폭력으로 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고상하고 품위 있는 길이 아니라,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고 힘들고 피를 흘려야 하는 길을 가셨다. 올 한 해도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자. 주님은 뒤에서 회초리로 우리를 몰아치지 않으신다. 앞에서 차분히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주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실 것이다. 어떤 위협이 닥치고 위기가 온다 하여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하고,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무지의 감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주며, 욕망의 어둔 영창에 갇힌 이들을 끌어내어야 할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선한 목자를 따를 때에 누구도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며, 날마다 놀라운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생명사랑교회 목사
-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편 23편 1-6절, 요한복음서 10장 1-1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