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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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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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5-04-14
  • [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01
  • [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25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14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1-20
  • [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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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게 하소서!(요엘 2장 17절)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은 1959년 총회에서 WCC 가입 문제를 놓고 갈등하였을 때, 오직 순혈적인 보수신학 하나 지키려고 분리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교단의 적통성과 법통성은 우리가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단의 선진들은 현실적으로는 허허벌판 황무지로 나와야 했다. 그리하여 나무 한 그루 살지 않고, 풀 한 포기 살지 않는 허허벌판 광야 같은 곳에서 기도의 눈물을 뿌리며 교단을 일구었다. 전국의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기도의 제물을 바치며 총신대를 세우고 총회회관을 세워서 오늘날 한국의 장자교단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장로교단을 이룬 것이다.   우리는 선진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헌신과 기도의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 신명기 32장 7절에서도 역대의 연대를 기억하라고 하지 않는가? 역사가 토인비 역시 「역사의 연구」에서 “한 민족이나 국가를 망하게 하려면 그 역사를 먼저 지워버리라”고 했다. 그만큼 지나온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어느 때부턴가 교단이 희생과 헌신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기도와 영성 운동보다는 정치가 앞서게 되고, 교조적인 교단이 되어 갔다. 그 결과 교권 싸움을 하며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 사랑과 처음 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격을 잃어버리니까 하나님을 등지며 예배가 타성화되고 신앙이 매너리즘에 빠져 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더러운 떡을 제단에다 올려놓고 병든 것과 눈멀고 다리 저는 짐승을 제사의 제물로 드린 것이다(말 1:7).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누군가 성전 문을 닫아버리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겠는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필자는 코로나 상황에서 이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였습니다. “혹시 코로나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이렇게 비난받고 문이 닫혀 버린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격, 예배를 향한 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닌가. 하나님은 이런 매너리즘에 빠진 예배가 역겨워서 누군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것은 아닌가”.   코로나19 팬데믹은 끝이 안 보이고, 우리가 노력하면 할수록 예배 회복의 길은 더 멀어지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우리가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 요엘서 2장을 보면 제사장들이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기도하지 않았는가?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욜 2:17)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밖에 없다. 우리가 먼저 울어야 한다.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운다는 말은 강단에서 운다는 말이다. 우리가 강단에 엎드려 울어야 한다. 지금 이렇게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우리의 잘못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를 위해서 눈물을 훔치는 기도를 하자. 그리고 우리는 교단 선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제105회 총회에서 허락을 받고 전국목사장로기도회 때 총회공로훈장 수여식을 하게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총회장, 새에덴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7-11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모습(로마서 7:21-23)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우리의 의를 자랑하는 것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않다. 우리 의는 우리의 구원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죄인인 우리가 우리를 무엇인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직 구원의 길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히 만물의 왕 되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그리고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선물하신 신앙이고, 믿음이다. 그곳에 우리의 의, 힘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함으로 지키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마음과도 반대가 되는 우리의 판단하는 행동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고난의 아이콘인 욥의 이야기가 있다. 사단은 하나님께 허락을 구하고 욥을 시험한다. 그로 인해 욥은 아프고, 친구들이 떠나고, 가족들이 떠나고, 주변 환경이 점점 더 극한으로 어려움에 달했다. 그 때, 고통스러운 상황이 너무 서운한 나머지 그들이 자신을 번뇌케 하고 열 번이나 학대 했다고 대놓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욥을 종이라 표현하시면서 제사장으로서의 고귀한 임무를 부여하셨다.(욥 42:7~10) 그것은 자신을 괴롭히고, 아프게 했던 친구들에 대한 화해와 용서, 바로 사랑이다.   그 때 욥은 너무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순종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한 용서였다.    우리가 욥같이 용서를 행할 때 우리를 기쁘시게 받으실 줄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대한 우리의 순종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한 사람도 받으실 것이다. 용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육체적 고난과 정신적 모멸감을 항상 생각해 보자. 십자가의 그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희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내 삶의 주인이 마치 나인 것처럼 해서는 것은 안 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명,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그 십자가에서 처절히 죽임을 당하셨다. 그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예수님처럼 매사에 순교적인 자세로 살아야 한다.   어머니 마리아가 손수 짜서 입혀드린 세마포 옷을 군병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을 때, 수많은 군중 앞에 알몸이 되셔서 수치를 당하실 때를 생각하면 무엇이든지 이겨내실 수 있다. 주님은 자신의 본질을 희롱당하는 고통도 감내하셨다.   우리는 주님이 고통가운데 보여주신 사랑과 고통을 이겨내시는 모습을 통해 세상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품고 용서하고 사랑을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 때 그 빛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될 줄 확신한다. /샘터마을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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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07-02
  • 레위 지파의 헌신 성경(민 1:47~54)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년 이월일일에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남자를 계수하게 한다(민 1:1~3). 이는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생활 곧 교회생활이 악한 영들과의 전쟁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앙은 영적 전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라 고 말씀한다. 레위는 ‘연합된 (자)’를 의미하며 족장 야곱과 그의 아내 레아 사이의 셋째 아들(창 29:34)로, 이스라엘 중 그의 이름을 지니는 지파의 창시자이다. 레위는 형 시므온과 연합하여 누이동생의 치욕을 갚기 위해 세겜 성에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제 삼일에 고통 할 때에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와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칼로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왔다(창 34:24 이하). 그리고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로 양과 소와 나귀와 들에 있는 것들과 세겜 성의 그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했다(창 34:27 이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야곱은 죽기 전에 시므온과 레위에게 그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중에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5~7).   이렇게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저주 받은 레위 지파를 하나님은 계수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출 32:8~9).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5~29).   오늘 설교 제목은 레위지파의 헌신이다. 바로 이 헌신 때문에 계수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 편에 서있었다. 이 헌신이 저주를 축복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들의 흩어짐은 온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하는 경우가 되었다. 레위의 자손들은 성전을 섬기는 자가 되었으며 제사장 직무를 맡았다(출 2:1 이하, 6:20; 신 33:8~11).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택하여 모든 가정의 장자를 대신하는 당신의 기업으로 삼으신 것이다(민 3:11~13).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헌신이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헌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좋은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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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06-27
  • 아쉬레! 마카리오이!(마태복음 28:1~10)
    성경에서 ‘복 있는 사람’을 히브리어로 ‘아쉬레’라 하고(시 1:1), 헬라어로 ‘마카리오이’라고 한다(마 5:3~11). 하나님은 성도들이 복 있는 자가 되고 복 있는 자로 살기를 원하신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복 있는 인생만이 하나님을 높이고 세상을 축복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복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아쉬레와 마카리오이는 다음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첫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반드시 가야 할 길을 바르게 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셋째는 가야 할 길을 바르게 가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감당하고 수행할 때를 의미한다. 마지막 넷째는 그 일을 수행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평강은 은혜의 결과로서 복 있는 사람에게 중심적으로 나타나는 실제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평강과 기쁨을 풍성히 누린다. 다른 한편으로 복 있는 사람이라도 근심과 염려, 어려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근심의 포로는 되지 않으며, 그 염려에 함몰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채우고도 남는 평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외견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 속에서도, 모든 것이 부족하고 때로는 없는 경우에도 실제적으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할 수 있고, 가라고 한 그 길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으며, 또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성령이 주시는 평안으로 웃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복 있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주님의 은혜가 전파되고 주님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다. 주님이 때를 따라 미래와 희망의 문을 열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갖기를 원한다.  “주여! 주 앞에서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복 있는 인생이 시작되게 하옵소서! 나부터 먼저 복 있는 인생으로 서게 해 주옵소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복 있는 사람이 되고 복 있는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마태복음의 마지막 28장 말씀은 부활의 아침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이라는 두 부류가 나타난다.    우선 복 없는 사람은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과 그들에게서 무덤 소식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이다. 경비병들은 예수님이 그 무덤에 장사되시던 순간부터 부활의 아침까지 무덤을 견고하게 지키면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현장과 빈 무덤 그리고 천사의 모습과 지진이 나고 돌이 굴러간 모든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또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경비병에게서 무덤 소식을 들은 자들로서 사회적으로 힘 있는 기득권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으로도 복 있는 인생이 될 수 없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 부류는 복 있는 사람으로서 여인들이다. 새벽에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 무덤에 간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 두 사람이다. 이들은 약한 자들이었으나 복 있는 사람으로 세움 받고 쓰임 받는 자들이 되었다. 이는 복 있는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어야 함을 증언한다. 세상에 있을지라도 불변하는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 /원주중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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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06-20
  • 우리의 한숨을 바꾸시는 하나님(로마서 8:26~30)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어려울 때 어김없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있다. 그것을 ‘탄식’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탄식하다’는 말의 뜻은 ‘절박한 상황이나 안타까운 상황에서 절망을 느끼다’란 뜻이다. 그런데 ‘탄식’ 하다는 말의 한자를 살펴보면 그 절박한 상태를 더욱 느낄 수 있게 된다.   먼저, ‘탄식하다’라는 말에서 ‘탄’ 자는 ‘탄식할 탄’이다. ‘진흙 근’ 자와 ‘하품 흠’ 자가 합쳐져서 늪과 같이 빠지면 나오기 어려운 상황에서 입을 벌려 하품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상태에서 입을 벌리느냐에 따라 ‘한숨을 쉬다’라는 의미도 나타내지만, ‘감탄하다’는 의미도 나타낸다. 즉,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정말 빠져 나오기 어려운 일을 당하여 크게 입을 벌리고 절망의 소리를 낼 때는 ‘한숨을 쉬다’ 혹은 ‘탄식하다’ 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반대로 무척 어려운 일인데도 거뜬히 해 내는 사람을 보고 입을 벌려 감탄할 때에는 ‘감탄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이다. 한편, ‘탄식하다’ 는 말에서 ‘식’자는 ‘숨을 쉴 식’ 자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숨을 한 번 들이 마시고 내쉬는 동작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이 ‘식’ 자를 순 우리말로 바꾸면 ‘한 숨’이 된다. 그러니까 ‘탄식’하다는 말은 몹시 어려운 상황에서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한숨을 짓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탄식을 해 보셨는지요! 아마도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누가 시키지 않아도 탄식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세상은 없을 것이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 쉽지 않은데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겹쳤으니 사람들이 입만 열면 그 입에서 한 숨이 나오고 탄식 소리가 나오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비탄과 통탄과 개탄과 애탄과 한탄 등, 온갖 종류의 탄식 소리가 우리 주변을 메우고 있다. 비탄(한매)은 몹시 슬퍼하면서 내뱉는 한숨을 말하며, 통탄은 그런 탄식의 정도가 아주 심한 상태를 말합니다. 개탄은 정말 분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해서 나오는 한숨이고, 애타는 억장이 무너지듯이 슬픔이 가득할 때 나오는 한숨이며, 한탄은 원통하거나 뉘우치는 일이 있을 때 탄식하며 쉬는 한숨을 말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우리는 그저 이 한숨을 가지고 사정을 하소연하며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우리 하나님께 탄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8장 26절 말씀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짊어져야 할 탄식을 우리 성령 하나님께서 짊어지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한숨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28절은 우리 하나님께서 성령의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30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때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 인생의 소망이 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한숨을 바꾸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한숨이 변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에 감탄이 되게 하시고, 우리 입술에서 탄복과 경탄과 찬탄과 영탄이 나오게 하사, 우리가 소망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달려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제 6월이 시작되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의 가정마다 그 한숨이 변하여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의 탄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대전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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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06-18
  • 다시 일어 나세요(스바냐 3:14-17)
    계속되는 바이러스로 인해 저마다 기가 죽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교인들의 기가 죽었는데 교회가 부흥될리 없고, 사원들의 기가 죽었는데 기업이 잘 될 리가 없고, 남편과 아내의 기가 죽어 있는데, 그런 가정이 행복할리 만무한 거다.   16절에서 “그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기죽지 말고 힘을 내라는 말입니다. 비록 너희들이 처한 환경은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오히려 노래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주신 시대적 배경은 요시아 임금이 통치하던 시대인데, 임금의 할아버지인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폭정을 한 사악한 왕이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태양신과 바알신이 득실거렸고 우상숭배와 매춘행위가 나라 안팎에서 기승을 부렸으며, 국민들은 한결같이 가난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저마다 낙망에 빠져 있었다.   이런 도탄속에서 겨우 갓 여덟살 된 요시아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너무 어린 왕이 권좌에 앉자, 사람들은 나라의 멸망을 예견하고 풀이 죽어 있었고, 국민들은 어리고 철도 들지 않은 임금에게 나라와 자신들의 운명을 맡길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주시면서,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당시 모든 것이 부패하고 타락한 상황속에서도 정절을 지키고 살던 남은 자들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신앙을 버리고 절망에 빠져 살던 그때에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을 움켜쥐고 희망의 줄을 놓지 않았던 「남은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날마다 죄앞에 넘어지고 스러져서 실추된 자녀로서의 명예와 기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신다.   17절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러면서 15절에서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즉, 하나님께서 이 백성의 죄를 용서했기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므낫세와 아몬이 지은 끔직한 죄를 어린왕 요시아에게 형벌로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형벌에 대한 탕감선언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해치고 넘어뜨리는 원수와 대적들의 도전이 있지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성과 방패와 요새가 되시고,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셔서 매순간마다 보살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면서 결코 여러분들이 잡은 손을 뿌리치치 아니하신다. 우리는 결코 낙심하거나, 주저 앉아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다시 한번 주안에서 힘을 내시기 바란다.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라는 복음가사처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고 항상 도와 주심을 믿으시고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말고 고난의 뒤편에 잇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면서 감사하시고 다시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동신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6-08
  • “신앙과 삶의 기초-가정”(창37:19)
      인간은 다른 종과 달리 자기에 대한 지원을 받을 때만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동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독을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검토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사용하여 현실에 부딪치면서 무언가를 해 냈을 때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기감을 갖게 되고 이것을 지원해 주는 사람을 고마워하고 그 때 사랑받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만 인간의 삶은 공허하지 않고 삶이 실제처럼 느껴지게 된다. 자녀들에게는 똑똑한 부모보다는 무지한 부모나 스승이 필요하다. 이들은 자녀의 시행착오에 대해 초조해 하지 않고 결국 자기 스스로 해 내도록 기다릴 줄 안다. ‘자아지원’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거짓으로 인생을 살거나 눈치보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그들은 평생 자신을 찾기 위해 방황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참된 자기의 느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인간의 자기감은 하나님도 꺾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은 바로 이 자기감이라는 곳에 깃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브니엘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고 네가 이겼다라고 말씀했다.(창32:28) 때문에 ‘자기부정’은 먼저 이 ‘자기감’이 잘 구축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청지기로서 자녀의 이 본성이 짓밟히지 않고 잘 발현되게 해 주어야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이 힘은 거짓 인생에서 벗어나 진솔한 인간, 현실을 창조적으로 잘 변형시키면서 살아가게 하는 무엇이며 믿음에서도 아주 주요한 요소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이 자기라는 느낌이 온전해질 때 우리는 나에게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수 있다. 이것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는 말의 의미다. 이 기초가 없는 사람은 평생을 자신을 찾는 일에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자기를 찾아 헤매는 사람에게 “너는 왜 꿈이 없니, 왜 비전을 갖지 못하니?” 라고 야단칠 수는 없다.   성공의 공식과 원리를 아는 우리는 자녀에게 꿈을 강요하지만 꿈은 위에서 오는 것이지 강요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고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 받은 야곱의 꿈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는 꿈이었다. 야곱은 사랑타령 돈타령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인생말년에 자기부정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삶으로 깨달은 다음의 일이었다. 반면에 요셉은 17살 때부터 성화의 과정에 던져졌다. 그는 이미 그 이전에 부모와 사랑과 야곱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감이 구축되었기에 하나님은 자신있게 그를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 수 있다. 만약 요셉이 현실인식 능력이 뛰어나서 형들의 눈치를 살필 줄 알았고 자기감에 대해 그렇게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면 형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꿈 이야기를 두 번씩이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정에서 채우지 못한 이 결핍을 군대에서 채우려 하는 군인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행진할 힘도 구호를 외칠 힘도 없어 치료만 받고있는 병사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성도들은 주님의 사랑, 성육신의 과정에서 평생을 머물기를 원한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자기부정을 강요하거나 왜 비전을 갖지 못하냐고 야단칠 수 없다. 저들의 삶과 말씀은 항상 분열속에 머물게 된다. 삶의 기초는 인생의 초기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감에 상처받은 성도는 복음을 어려워하고 평생 사랑받기만을(유유) 고집한다. 우리는 그 원인을 가정에서 찾아야 한다. 가정이 교회와 인간의 모든 삶의 기초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양지평안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5-28
  • “신앙과 삶의 기초-가정”(창37:19)
      인간은 다른 종과 달리 자기에 대한 지원을 받을 때만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동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독을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검토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사용하여 현실에 부딪치면서 무언가를 해 냈을 때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기감을 갖게 되고 이것을 지원해 주는 사람을 고마워하고 그 때 사랑받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만 인간의 삶은 공허하지 않고 삶이 실제처럼 느껴지게 된다. 자녀들에게는 똑똑한 부모보다는 무지한 부모나 스승이 필요하다. 이들은 자녀의 시행착오에 대해 초조해 하지 않고 결국 자기 스스로 해 내도록 기다릴 줄 안다. ‘자아지원’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거짓으로 인생을 살거나 눈치보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그들은 평생 자신을 찾기 위해 방황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참된 자기의 느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인간의 자기감은 하나님도 꺾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은 바로 이 자기감이라는 곳에 깃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브니엘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고 네가 이겼다라고 말씀했다.(창32:28) 때문에 ‘자기부정’은 먼저 이 ‘자기감’이 잘 구축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청지기로서 자녀의 이 본성이 짓밟히지 않고 잘 발현되게 해 주어야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이 힘은 거짓 인생에서 벗어나 진솔한 인간, 현실을 창조적으로 잘 변형시키면서 살아가게 하는 무엇이며 믿음에서도 아주 주요한 요소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이 자기라는 느낌이 온전해질 때 우리는 나에게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수 있다. 이것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는 말의 의미다. 이 기초가 없는 사람은 평생을 자신을 찾는 일에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자기를 찾아 헤매는 사람에게 “너는 왜 꿈이 없니, 왜 비전을 갖지 못하니?” 라고 야단칠 수는 없다.   성공의 공식과 원리를 아는 우리는 자녀에게 꿈을 강요하지만 꿈은 위에서 오는 것이지 강요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고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 받은 야곱의 꿈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는 꿈이었다. 야곱은 사랑타령 돈타령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인생말년에 자기부정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삶으로 깨달은 다음의 일이었다. 반면에 요셉은 17살 때부터 성화의 과정에 던져졌다. 그는 이미 그 이전에 부모와 사랑과 야곱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감이 구축되었기에 하나님은 자신있게 그를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 수 있다. 만약 요셉이 현실인식 능력이 뛰어나서 형들의 눈치를 살필 줄 알았고 자기감에 대해 그렇게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면 형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꿈 이야기를 두 번씩이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정에서 채우지 못한 이 결핍을 군대에서 채우려 하는 군인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행진할 힘도 구호를 외칠 힘도 없어 치료만 받고있는 병사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성도들은 주님의 사랑, 성육신의 과정에서 평생을 머물기를 원한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자기부정을 강요하거나 왜 비전을 갖지 못하냐고 야단칠 수 없다. 저들의 삶과 말씀은 항상 분열속에 머물게 된다. 삶의 기초는 인생의 초기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감에 상처받은 성도는 복음을 어려워하고 평생 사랑받기만을(유유) 고집한다. 우리는 그 원인을 가정에서 찾아야 한다. 가정이 교회와 인간의 모든 삶의 기초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양지평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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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05-21
  • 모세의 인생 고백(출 18:1~12)
    “이름값 한다”는 말이 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를 말한다. 동시에 히브리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거나 고달픈 인생길을 자녀의 이름이나 지명을 통해서 고백했다.    이처럼 이름으로 그 내용을 전달하는 경우를 보자. 사무엘이 미스바 기도회 이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뜻에서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또한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었다는 뜻에서 ‘사무엘’, 비느하스의 아내가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위기 때 아들을 낳으며 ‘이가봇’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했다. 더 구체적으로 모세의 120년의 삶을 세 이름으로 요약할 수 있다.   ❶ 모세(물에서 건졌다 (출 2:10))  바로의 궁전에서 40년은 ‘모세’로 요약된다. 나일강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모세가, 물에서 건짐 받아 바로의 궁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학문적으로, 지도자로 준비하는 기간이다.    ❷ 게르솜(거기 나그네가 됨)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보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으니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함이요”(출18:2-3)   모세가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을 때, 모든 것이 허망했을 것이다. 그때 모세의 기분은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죽겠다고 자살소동을 벌이거나 늘 방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인생을 한탄하는 것과 같다. 모세에게 더 이상의 희망이 없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원망스럽고, 사는 것이 귀찮았다. 그때 십보라가 아들을 낳았을 때, 게르솜이라 지었다. ‘게르솜’이란 “내가 이방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인데, 이것은 미디안 광야에서 희망없이 살아가는 미디안 광야 40년의 삶을 대변한다. 이 모세처럼 우리도 고달픈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데, 그것이 게르솜으로 대변할 수 있다.    ❸ 엘리에셀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출18:4)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때 애굽에서 전해지는 바로 왕의 정치보복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왕은 한때 모세와 왕권 다툼을 했던 왕자가 애굽의 파라오 즉 왕이 되어 정적들을 다 제거했다는 것이다. 그때 모세는 비로소 자신이 미디안 광야로 도망 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었다.    만약 애굽에 있었다면 바로 왕에게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는데, 미디안 광야로 도망 옴으로 살게 되었다. 그때 모세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미디안 광야로 오게 했다는 뜻에서 두 번째 아들의 이름을 ‘엘리에셀’이라 지었다.    엘리에셀은 모세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을 산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디안 광야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순간, 게르솜 즉 원망스러운 인생이 물러가고 미디안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진정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에게 출애굽의 지도자로 사명을 맡기셨기에 엘리에셀은 출애굽을 한 후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40년을 보냈던 모세의 삶을 대변하여 준다./제7영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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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05-14
  • 순항할 수 있는 비결(사도행전 27장 13-25절)
      우리의 기준인 성경 말씀대로만 살아간다면, 코로나19라는 듣도 보도 못한 바이러스를 경험해도 우리는 안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 속에 있으면 지금 내가 깊은 고난 속에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위로를 얻을 수 있고, 소망을 회복하며 그 가운데 비전을 발견하고, 사명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많은 시간을 죄수로 지내야 했습니다. 끊임없이 박해를 당하고, 재판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속에서 좌절하거나 고통에 몸서리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고, 평안해 보였습니다. 그에게는 예수그리스도라는 정답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했기에 사나 죽으나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살았습니다. 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개척하고, 사역했던 교회들을 향해 서신을 보냈구요. 재판을 받을 때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변론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이용해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합니다. 이에 유대총독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도바울의 상소를 인정하고, 그를 로마로 이송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로마로 이송되는 여정 중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야기 직전의 여정에서 보면 “간신히 이르렀다.”,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났다.” 라는 말이 연달아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항해가 굉장히 어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겨울을 지내기 위해 뵈닉스로 가자는 의견들이 있어서 출발하려고 하는데 사도바울은 이동을 만류합니다. “지금 출발하면 우리의 생명이 위태하고, 손해가 심할 것이다!” 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통솔권이 있는 백부장은 어떤 선택을 했나요? 사도행전 27장 11절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백부장은 사도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뵈닉스로 향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선장과 선주의 말대로 남풍이 순하게 불어 순탄한 항해가 시작되어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예상대로라면 큰 위기 없이 뵈닉스에 잘 도착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우려대로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결국 사도바울의 말대로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백부장과 선장, 그리고 선주처럼 자신들이 정답을 내고 앞으로 향합니다. 그러니 세상은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치듯,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답답합니다. 속상합니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 있지만 바울처럼 정답을 외칠 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을 역전하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 세상에 구원의 도구로 귀하게 쓰임 받으시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선장과 선주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사도바울의 경고를 무시하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장은 배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지중해를 통해 여러 대륙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장은 평생을 지중해에서 배를 타왔기에 항해에 대한 지식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정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이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광풍과 같은 상황을 잠재울 수 있는 힘이 없다.   사도바울은 광풍 유라굴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들을 23절처럼 안심시킵니다. 마치 유라굴로를 만난 것과 같은 이 시간 속에서 주님과 함께 순항 할 수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서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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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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