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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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김기호   사도행전 28장 1절부터 31절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 장면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마지막까지 전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는데,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죽음의 폭풍을 이겨내고 멜리데섬에 도착한 로마군인들과 선원들의 숫자는 276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람인 바울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죽지 않는 기적을 보고 멜리데섬 사람들 중에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기를 겪는 폭풍을 만났지만 그가 예수님을 의지할 때,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멜리데섬 사람들도 병을 고침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고침 받은 ‘보불리오’는 나중에 멜리데 오늘날의 몰타에 감독에 됩니다. 바울이 죽음의 폭풍을 뚫고 멜리데섬을 거쳐 가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만나는 폭풍과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인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가는 곳이 때로는 감옥과 같이 답답한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감옥과 같은 곳에서 지냈습니다.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꼼짝도 못하는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바울은 감옥에서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있는 가정과 직장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믿는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2006년 1월에 서른 세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 ‘안수현’씨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쓰는 이메일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 안수현” 자신이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7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성남 은혜제일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22
  • [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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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5-04-14
  • [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01
  • [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25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14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1-20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편 23편 1-6절, 요한복음서 10장 1-18절)
    오늘날 현대인들은 어떤 선택할 때 매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지도 알기 쉽지 않고, 믿고 따를만한 사람, 참된 지도자, 선한 목자, 올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숱하게 많은 지식 정보들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현대인들은 선택할 때 매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지도 알기 쉽지 않고, 믿고 따를만한 사람을 찾기도 너무나 어렵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오랜 시절 예수와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고백하고 믿고 따랐다. 실로 우리의 주님, 하나님은 험한 세상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오늘 시편 23편은 이 사실을 매우 아름다운 노래로 세상에 증언한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도 이 노래를 떠올리면서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여겼다. 우리는 목자와 양을 생각하면 푸른 들판에 매우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을 떠올린다. 마음씨 좋고 잘 생긴 멋진 목동이 어린 양에게 풀을 먹이는 매우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의 유목민이 양을 치는 것은 우리가 그리는 이런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이스라엘에는 푸른 초장 같은 것은 없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한 남쪽 유다는 황무지와 광야이다. 일 년에 푸른 풀이 돋아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11월부터 2월의 우기 이후에 3개월 정도이다.   6개월 동안의 건기에는 모든 것이 메말라 버립니다. 비가 오고 풀이 나기 시작해서 자라면 이제 목자들의 삶을 바빠집니다. 풀이 많이 자라는 곳을 계속 찾아다녀야 한다. 한낮에 물을 이용할 수 있는 곳 주위에서 하루일과를 계획해야 합니다. 무더운 여름이라면 시원한 언덕 경사지들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양들이 풀을 뜯고 쉬면서 안전하게 소화시킬 장소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목자라는 직업은 이렇게 힘들고 고단하고 더럽고 거칠었기에 당시 사람들이 피하는 직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멸시를 받는 직업이었다. 랍비들과 율법학자들은 제대로 씻지 못해 냄새나고 더러운 이런 목자들을 부정하게 여겼다. 목자는 세리, 창녀, 어부들처럼 유대인들이 천하게 여겨 배척하던 직업 가운데 하나였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런 목자와 동일시 한 것 자체가 바로 은혜이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고된 길을 가신 것이다.   예언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 목자로서 실패한 일곱 가지를 지적한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않았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않았고, 상한 자를 싸매주지 않았으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않았고, 길 잃은 자를 찾지 않았으며, 양들을 힘으로 통치하고 폭력으로 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고상하고 품위 있는 길이 아니라,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고 힘들고 피를 흘려야 하는 길을 가셨다.   올 한 해도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자. 주님은 뒤에서 회초리로 우리를 몰아치지 않으신다. 앞에서 차분히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주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실 것이다. 어떤 위협이 닥치고 위기가 온다 하여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하고,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무지의 감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주며, 욕망의 어둔 영창에 갇힌 이들을 끌어내어야 할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선한 목자를 따를 때에 누구도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며, 날마다 놀라운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생명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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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0
  • 야베스의 기도같이 살아가자(역대상 4장 9절에서 10절)
      2022년 임인년 한 해 동안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며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누리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드린다. 야베스의 간절한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었으면 한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을 뜻하는 ‘야차브’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로 보건대 그의 인생은 어떤 인생이었음 짐작할 수있다. 아주 고통스러운 인생이었을 것이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힘든 환경 가운데서 지내왔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서 극복한 사람이다. 이 야베스처럼 기도하며 살자.   첫째, 하나님께 매우 귀중한 자로 살아가자.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대상 4:9).    우리들은 하나님의 귀중한 자며, 그의 자녀들이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삶을 살자.   둘째, 삶의 모든 지역이 넓혀가는 삶을 살아가자.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대상 4:10a).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먼저는 신앙이 넓혀지고, 교회가, 일터가, 학문이, 모든 분야에서 넓혀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자.   셋째, 하나님의 도우심의 역사를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자.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대상 4:10b).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2-13).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소년들의 용기를 훈련하는 독특한 방법을 썼다. 이들은 소년들에게 숲 속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만들면서 소년들의 담력을 키웠다. 시험을 받는 날 밤, 소년은 얼마나 무서움을 느꼈겠는가! 그러나 날이 밝아오면서 소년은 그의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지키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아들 몰래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게 하기 위해 밤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넷재,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행복한 자로 살아가자.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c).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7-29).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로서 2022년을 야베스처럼 행복하게 만들어 가는 성도가 되자./강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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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레위 지파의 헌신(민수기 1장 47~54)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년 이월일일에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남자를 계수하게 한다(민 1:1~3). 이는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생활 곧 교회생활이 악한 영들과의 전쟁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앙은 영적 전쟁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라 고 말씀한다. 레위는 ‘연합된 (자)’를 의미하며 족장 야곱과 그의 아내 레아 사이의 셋째 아들(창 29:34)로, 이스라엘 중 그의 이름을 지니는 지파의 창시자이다. 레위는 형 시므온과 연합하여 누이동생의 치욕을 갚기 위해 세겜 성에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제 삼일에 고통 할 때에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와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칼로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왔다(창 34:24 이하). 그리고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로 양과 소와 나귀와 들에 있는 것들과 세겜 성의 그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했다(창 34:27 이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야곱은 죽기 전에 시므온과 레위에게 그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중에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5~7).”   이렇게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저주 받은 레위 지파를 하나님은 계수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출 32:8~9).”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5~29)”   오늘 설교 제목은 레위지파의 헌신이다. 바로 이 헌신 때문에 계수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 편에 서있었다. 이 헌신이 저주를 축복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들의 흩어짐은 온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하는 경우가 되었다. 레위의 자손들은 성전을 섬기는 자가 되었으며 제사장 직무를 맡았다(출 2:1 이하, 6:20; 신 33:8~11).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택하여 모든 가정의 장자를 대신하는 당신의 기업으로 삼으신 것이다(민 3:11~13).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헌신이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헌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란다. /참좋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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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26
  • 다시 믿음으로 (히브리서 11장 1~6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2).    히브리서 말씀은 믿음의 개념에 대한 말씀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현상에 대한 말씀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았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 에 대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절)   6절의 앞부분에는 믿음의 또 다른 현상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의 개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믿음이란? 첫 번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확신이란?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믿음이 생길 리가 없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험에 드는 이유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우상을 만드는 이유도,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믿음이란? 두 번째로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분이란 것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에게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저 믿음의 대상일 뿐, 아무런 능력이 없는 분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며,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며,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응답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믿음의 삶이란?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세상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삶이다. 이러한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는 특징이 있다. 첫 번째로 찬양이 넘치는 삶이다. 나의 마음이 온통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기에 찬양이 그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다. 현재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자족할 수 있기에, 범사에 감사가 넘치게 된다. 세 번째로 기쁨이 넘치는 삶이다.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하여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길가의 이름 모를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조차 예쁘게만 보인다. 이러한 삶이, 믿음의 삶을 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코로나로 말미암은 팬데믹의 장기화로 인해, 힘들고 어려운 시기다. 교회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으며, 성도들이 믿음을 잃어가며 넘어지고 있다. 이러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살아계시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감사와 기쁨, 찬양이 넘치는 성도의 삶이 되길 바란다.    / 농어촌목회자협 마을목회위원장, 덕곡교회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1-10
  • 또 달음질하라(고전 9장 23~27절)
       새로운 다짐으로 새해를 맞는 성도의 자세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과거의 성공이나 실패에 연연하지 말고 새로운 은혜를 사모하며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과거의 일에만 얽매어 새로운 성도의 삶을 시도하지 못한다면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바울 사도는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고 했다. 지난 성공이나 실패를 훌훌 털어 두로 던져 버리고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심기일전하고 일어나서 최후의 승리를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가자.    첫째로, 상을 받기 위해서는 달음질하는 방향(목표)을 분명히 해야한다(26절).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달음질하는 자는 관중석이 아닌 골인 지점을 주시하며 모든 역량을 다하여 끝까지 달음질해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향방 없이 목표지점 아닌 곳으로 달려가면 실격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은 최종 목표가 분명해야 하는데, 그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우리의 신랑 되시며 재림 주이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히12:2). 상급을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진력해야 한다.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바울 사도는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8~10)고 말씀했다. 세상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흘러넘쳐 나지만 세상유혹보다 더 크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도는 침몰되지 말고 믿음을 지켜나가야 한다.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영광과 승리의 면류관이란 목표가 분명하면 세상의 유혹이나 고난을 극복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둘째, 절제해야 한다(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는  ‘경쟁하다’,  ‘격렬히 몸부림치다’는 것으로 경주에 참가하는 모든 자를 가리킨다. ‘절제’는 고대 그리스의 운동 경기자들이 사용했던 전문 용어로 선수들은 통상 10개월가량의 고된 훈련을 받았으며 음식이나, 오락, 수면 시간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을 절제하여야 했다.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고린도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이스미안 경기’에서는 승자에게 월계수 잎을 엮어 만든 화환을 머리에 씌워 주었다. 이처럼 나뭇잎을 엮어 만든 경기자들에게 최고의 영예를 상징하는 것이었는데, 면류관은 금방 시드는 것이었고 그것을 쓴  우승자의 영예 역시 덧없는 것이다.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면류관은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 못지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 절제는 하고 싶은 육체의 욕망들 그것들을 자제하는 것으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하고 싶고 보고 싶은 욕망을 쳐 복종 시키며 절제생활을 해야한다.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자는 세상에는 화려한 것. 좋아 보이는 것, 행복하게 해줄듯 한 그럴싸한 선악과와 같은 것들, 이런 종류의 것들을 절제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모든 일에 절제하고 달리고 또 달려 크게 승리하는 한해가 되도록 하자. 그래서 우리의 주인 되시는 주 예수님의 칭찬과 상을 받는 성도들이 되자./유향교회 목사· 예장 합동개혁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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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2-01-04
  • 인생은 돌아가는 존재(전도서 12장 7절)
      우리 인생은 어린 시절에는 과자에 끌려가고, 젊어서는 정에 끌려 살고, 장년에는 돈에 끌려 살고, 노년에는 병고에 끌려 시달이다 간다. 인생의 짧은 세월 속에서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데 한해가 벌써 12월 마지막 날에 가듯이 인생이 모두 다 마지막을 향해서 가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결국이라는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 그 결국이 무엇인가?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음이며 평안이라 생각한다.    첫째, 인생은 돌아가는 존재이다. 솔로몬이 전도서 본문에서 우리에게 특별히 교훈하고 있는 말씀은 돌아간다는 것이다. 인생은 종착점으로 가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5절에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본문에‘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고 한다   우리는 한해가 끝날 때 돌아간다는 사실에 특별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사람이다.   둘째, 돌아갈 날이 가까울 수록에 주목하라. 본문 3절에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맺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다리가 구부러지고 허리가 구부러진다. 치아로 맷돌질해서 먹고 살았는데 이가 빠져서 맷돌이 잘 안 돌아간다. 이 몸의 창문이었던 눈이 이제 잘 안 보여 어두워진다.    돌아간다는 말씀을 기억하면 송년 주일에 은혜가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라 하셨다.   셋째, 우리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 14절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 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돌아가면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을 우리에게 예고해주시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고하셨다. 필경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것은 인간에 대한 심판의 선언이었다.   넷째, 그러므로 창조주를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제멋대로 살게 내버려 두었을까?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솔로몬아 네가 대표적으로 살아봐라. 네 아버지 덕에 왕위에 올라 네 맘대로 궁녀들을 데리고 살아봐라. 그리고 훗날 네가 회개하고 전도자의 길을 가라’ 하신 것 아닐까?   그래서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고 말씀한다.   전도서의 마지막 하는 말을 들어보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후대의 사람들은 그 길을 밟지 말고 젊어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라는 말씀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 자신이 우리를 돌아다보면서 새로운 해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준비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기에 인생의 참된 행복과 목적이 있다. /진명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12-26
  • 성탄의 깊은 뜻(요한복음 1장 1~14절)
      오늘날 온 세계 사람들은 서력기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올해가 서기 2021년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2021년 전에 예수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12월 25일이 되면 성탄 트리를 장식하고 카드를 보내고 캐럴을 부르기도 합니다. 성탄의 깊은 뜻은 성경 66권이 모두 예수님에 대하여 가르치고 증거하고 있으나 오늘은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그 깊은 뜻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여기서 의미하는 태초란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태초와 같은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 뜻은 다릅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며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으나, 요한복음의 태초는 그보다 더 이전, 즉 시간과 역사 이전, 영원히 아득한 태초를 의미합니다. 이 태초에 말씀이 함께 계셨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은 사람의 생각을 표현할 때 쓰여지는 표현 방법입니다. 말하는 것을 통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볼 수 있으며,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이란 자신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자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생각이 말씀으로 나타나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때 곧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요 1:14). 이 뜻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 말씀으로 나타나셨으며 이 말씀이 자기 행동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이 바로 성탄,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 가정 안에, 우리 마을에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며 평범한 인간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땅에 오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이 바로 성탄의 깊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민족 가운데 유대를 선별하시고, 이 민족을 못자리 민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를 근거로 하여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고 당신의 뜻을 피력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역사하셨던 바로 그곳 유대 한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은 탄생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였으나 태어나신 곳은 왕궁도 아니고, 따뜻한 방도 아니고, 외양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던 우연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겠으나 하나님의 역사, 섭리 속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외양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모르고 지나갔던 지난 성탄은 접어 두고라도 올해의 성탄은 나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우리의 생활을 현실화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그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영접은 환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등지고 모르는 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외양간 말구유로 초라하게 오셔도 우리는 주님을 주님인 줄 알아야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도 예수님인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주관이 앞서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예수님에게 못 미친다고 실망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는 안 됩니다.   지나간 나의 생활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혹시 내 생각과 같지 않다고 예수님을 못 박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눈을 떠서 이번 성탄을 뜻깊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한강교회 설립목사 · 한국기독교부흥협 증경대표회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12-16
  • 부르심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대상 21장 1-8절, 고전 7장 17-24절)
    오늘 다윗의 인구조사 명령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숫자로 확인하고 싶은 다윗의 불신앙을 드러낸다. 수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승전을 하고 남의 나라를 자신의 밑에 두자,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는 전쟁이 아니라, 군인이 될 만한 사람들의 숫자를 세면서 자신의 전쟁을 하고 싶은 욕망에 빠져 들었던 것이다.   만약에 이렇게 이해한다면, 다윗은 자신의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다가, 이제 왕위에 오르자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신의 정치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충신이었던 요압마저도 염려하고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셨고, 결국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와 용서를 빌어야 했다.   한국교회는 덩치가 커지고, 돈이 쌓이고, 권력이 생기자마자 다윗과 같은 죄를 저질렀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었는데, 세상의 조롱과 모욕의 대상이 된 것이다. 불의한 세상에 정의를 행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보다 더 세속적이고, 일반 시민사회보다 더 부도덕했기 때문에 손가락질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 시편의 저자처럼 우리가 다시 주님의 법도에 따라 옳게 선다면 주님께서는 분명 기회를 주실 것이다.   기회를 주실 때에 놓치지 않고 잡는 것이 지혜인데, 그런 지혜는 성공을 목표로 삼고 목회했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충실하게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다. 저는 총회나 노회에서 제게 맡겨진 일들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하는 편인데, 어떤 것은 스스로 나서서 하는 것도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총회 영성수련원의 활동이다. 오늘날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고, 여기에 함께 참여하시는 분들은 대체적으로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진실하게 주님의 길을 가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오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처지 그대로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부름은 세상의 정치적 사회적 삶의 위치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고, 하나님의 사역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루어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할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배웠든 못 배웠든, 가졌든 못 가졌든, 권력이 있든 없든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부름은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특수인식의 활성화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느냐 삼지 않느냐인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사는 사람과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 사회적 지위는 노예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유인으로 살아간다. 자유인이지만 돈이나 과거에 갇혀 있고, 교만하거나 자기를 비하하면서 종의 모습으로 사는 사람과 다르다. 자유인이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 섬기는 삶을 살아간다. 사랑으로 섬기면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세상과 사람을 위해 섬기러 오신 예수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 문제는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 모두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데 한 몫을 담당하자. 거대한 계획도 필요 없고, 많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여러분이 계신 그 자리에서 부르심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면 된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된다. 오늘 저도 여러분에게 권고한다. 여러분 모두는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분수 그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처지 그대로 살아가라. 다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라. /생명사랑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12-09
  • 시험에 대하여(마태복음 6장13절)
    그리스도인들에게 시험은 영적인 침체와 영적인 겨울잠과 같다. 가장 고통스럽고 긴 시간이다.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부패와 전적인 무능력과 전적인 무지의 정체성을 지닌 우리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주님은 기도하기를 가르치신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 땅의 지체인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둘째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셋째 성령님을 따라 살아야 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 16) 넷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은총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성령님의 전 임을 알아야 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성령님의 전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첫머리인 하나님 영광 즉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적 심판과 종말적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을 선하고 거룩한 위치에서 두려워하며 거룩 즉 죄의 부패성과 오염성을 멀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와 헌신의 삶을 살며 무시로 성령님안에서 기도하고 성부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과 성자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과 성령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찬양하며 날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거룩한 사귐과 다스림에 참여되며 하나님 나라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되어 교회를 받들어 섬기고 세워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신령한 위치에서 살아갈 적에 시험에 들지 않는 삶을 살수 있다. 우리들의 힘과 능력으로 신령한 삶을 살수 없다.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주리고 목마른 심령으로 간절히 사모하며 간구할때만 가능하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하나님께서는 부성적 사랑으로 우리들이 신령한 삶을 살수 있도록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러므로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로시 시험에 들지 말고 신령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한다./주명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12-05
  • 자족하는 큰 경건(딤전 6장 33절~10절)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마무리하면서 디모데에게 말씀과 경건의 자세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다.   먼저 3절~5절을 보면, 말씀과 경건의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이러한 자들의 특징은 4절과 5절과 같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러한 자들은 말씀을 떠난 자들이고, 경건조차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모양새만 갖추게 된다.   경건이라는 단어는 두 글자이지만, 경건의 의미는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를 말할 도로 크다. 즉 경건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말씀으로 인내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절제와 인내”를 필요로 한다. 벧후 1장 5절~7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절제와 인내를 거쳐 경건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경건의 끝은 사랑이다. 그러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절제와 인내가 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살아가게 된다.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경건을 자신의 이익으로 여기는 자들의 모습은 9절, 10절과 같다. 9절에서는 “부하려 하는 자들”과 10절에서는 “부하려 하는 자들의 마음에는 돈을 사랑함”이 있다고 말씀한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이 바로 이 땅 가운데에서 많은 소유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의 기준점을 “돈”에 둔다. 돈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점과 목적이 세워진다.   다시 본문 9절, 10절을 보면, 돈을 사랑함으로 부하려하는 자들의 결과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한다.   시험과 올무,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 파멸과 멸망, 그리고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건의 큰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6절을 보면,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자족하는 마음은 “충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더 이상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자족하는 마음은 물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7절과 8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바로 인간으로써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인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라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자족하는 큰 경건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이 고백한 자족함의 비결을 나눔으로 마무리하고자한다. 빌립보서 4장12절~13절이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매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을 탓하기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자족하는 큰 경건 가운데 거하시기를 간구드린다. /조치원장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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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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