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8(화)

교회/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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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14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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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5-01-20
  • [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1-14
  • [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2-17
  • [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1-22
  • 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1-21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방전된 몸으로 대문 나서지 마라 - 사도행전 1장 1~5절
      눈이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 인생에 눈이 크게 달라질 때가 있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이다. 한 가지 어려움을 만났을 뿐인데, 내 주변 풍경이 전부 빛 잃은 회색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때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힘내라는 말이 와닿지 않는다. 너무 지치면 모든 풍경이 절망이 된다.   그때 필요한 것은 충전이다. 하나님은 지쳐 있는 엘리야에게 다른 이야기를 안 하신다. 충전부터 시켜주신다. 지쳐 쓰러져 잠든 엘리야. 눈 떠보니 숯불에 구운 떡이 있었다. 먹고 또 잠에 든다. 자고 일어나니 또 먹을 것이 있다. 지쳐서 방전된 엘리야. 일단 충전부터 시켜 주신다. 방전된 몸으로 대문을 나서면 안 된다. 일단 충전부터 해야 한다.   방전된 스마트폰을 켜는 방법. 전원 버튼 계속 누르기가 아니다. 충전기 꼽고 내려놓기이다. 충전되어야 켜진다. 의지보다 중요한 것이 충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다. “예루살렘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성령으로 충전하라. 방전된 몸으로 대문 나서지 말고, 골방에 들어 앉아 성령으로 충전하라. 충만하게 살아라”   그래야 사고 나지 않는다. 그래야 주저앉지 않지 않는다. 제자들도 예수님 따르려던 의지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목숨까지 바치겠다며 장담했다. 의지는 대단했다. 그런데 금방 무너져 버렸다.   지속적으로 은혜를 충전하며 가는 사람은 쉽게 주저앉지 않는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어려운 일 찾아올 테니, 미리 영적으로 충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흘려듣는다. 기도하지 않고 잠든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때, 모두 부인하고 도망간다. 예수님 따르겠다는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방전된 영성으로는 내 결심 지키지 못한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어주심을 기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을 부어 줄 테니 사모하면서 기다려라. 더는 방전된 몸으로 신앙생활 하지 마라.   신앙생활 하는 동안 평탄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픔도 있고 갈등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을 만난다. 그때도 주저앉지 말고 전진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는 신앙되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 하님이 부어주실 은혜를 기대 것이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의 삶을 폭탄으로 부르셨다. 불발탄으로 끝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채워짐이 폭발력을 만든다. 우리가 은혜로 충전될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가족들의 삶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지체들의 공통점이 있다. 기도하는 이들이다. 그렇게 사랑의 화약이 채워지고, 은혜의 화약이 채워지게 된다. 그러니 집에서도 사랑이 폭발하고, 은혜가 폭발한다. 내 감정 줄어들고 말씀이 앞서게 된다.   채우는 삶은 믿음의 선순환 삶이다. 주일에 찬양하고 말씀 들으며 은혜로 채운다. 그러면서 한 주간 가정에서 삶의 터전에서 승리한다. 그 맛을 아니까, 또 은혜의 자리로 나온다. 그러면서 점점 삶이 은혜로 채워진다. 폭발력 있는 믿음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주일 예배에 부르신 이유가 있다. 은혜로 충전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더는 방전된 몸으로 살면 안 된다. 더 이상 은혜 없이 살면 안 된다. 한 모금 물 가지고, 한 주일 살겠다고, 고집 피우면 안 된다. /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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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4
  • 믿음은 물음표가 아니라 느낌표다 - 본문 : 사도행전 1장 6~11절
      인생을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해야 한다.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유명한 철학자에게 물었다.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철학자는 대답 대신 질문을 바꾸어 주었다. “어떤 사람이 부자입니까?” 철학자의 대답은 “이 나라에서 제일 부자는 만족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였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부자 되는 방법을 묻는다. 어디에 투자해야 되는 지 묻는다. 얼마나 돈을 많이 가져야 되는지 묻는다. 질문이 잘못됐다. 부자가 무엇인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많이 가져서 부자가 아니라 만족해서 부자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잘 사는 방법을 묻기 전에 잘 사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을 만들기 때문이다. 질문을 잘못하면 평생 질문만 하는 ‘물음표 인생’이 된다. 성도는 물음표 인생이 아니라 답을 알고 있는 느낌표 인생이 되어야 한다.    오늘 말씀 속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한다. “예루살렘은 언제 회복됩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으니 큰일을 하시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질문이 잘못되었다. ‘언제 회복되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회복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진정한 회복은 예루살렘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다. 예루살렘의 회복보다 영혼의 회복이 더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된 제자들은 늘 물음표의 삶이었다. “언제 됩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느낌표 인생이었다. 질문이 아니라 실행하는 삶이었다. 언제 회복되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실천하라고 얘기하신다.    믿음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약 2:17).    위대한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힘을 길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여야 한다. 문명은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때, 그리고 그런 횟수가 많아질 때 진보해왔다.”라고 말했다.    성장하는 인생은 무엇인가를 꾸준히 해나가는 인생이다. 질문만 하는 인생이 아니라 질문이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제자들이 해야 할 실천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었다. 우리 삶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원래 의지가 약하다.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다. 시간이 많은 사람은 없다. 허비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삶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아서 그렇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인생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장 8절)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이 잘 못 됐다. 바르게 사는 삶은 무엇인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다. 질문을 잘못하면 질문만 하는 물음표 인생이 된다. 성도는 물음표 인생이 아니라 실천하는 느낌표 인생이 되어야 한다.    인생은 질문이 중요하다. 그러나 질문하는 이유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대로 살기 위해서다. 그대로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행동하는 인생이 되길 축복한다. /행복한나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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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십자가만 자랑하라 -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당신은 지금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근대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를 설립한 조지 워싱턴의 일화이다. 그가 장군으로 있을 때 정부에서 사절단이 온 적이 있다. 워싱턴을 만난 관리는 그가 국민을 대표할만한 훌륭한 애국자라며 좋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워싱턴은 날카롭게 대답했다. “그런 말은 내게 아무런 기쁨을 주지 않습니다. 한마디만 말하십시오. 당신은 지금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좋은 말로만 차려 놓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몸으로 표시된, 즉 생활로 구체화된 제사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이다.    갈라디아서 6장 말씀을 보면 거짓 교사들은 핍박을 면하고 할례를 받은 자들의 수를 늘리며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고 싶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한 사실이 나온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만 자랑했다.   바울과 같은 신앙을 품기 위해선 사리분별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거짓 교사들이 할례를 강요하고 바울의 가르침을 공격했던 이유는 그리스도 십자가 때문에 초래되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율법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진리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였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안위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천박한 위선일 뿐이었다. 교회에 은밀히 침투한 거짓 교사들과 잘못된 가르침에 속지 않으려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지혜가 있어야 한다.    역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바른 가르침으로 무장한 교인들이 있을 때, 교회 안에 거짓 교사와 거짓 가르침은 설 자리를 잃는다. 바른 교사와 거짓 교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이나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영광은 받으려 하면서 박해는 피하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고 다른 길,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모색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결단코 자기 백성으로 영접하지 않으신다.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는지 점검해 보자. 너무 많은 종교적 행위들에 가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지 못한다면 속히 치우고 덜어낸다.    이를 잘 따르기 위해선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흔적을 마음속에 가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할례의 흔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 곁에 살아계시며 말씀을 전하셨던 예수님의 흔적이다. 바울에게 예수님의 흔적이란 예수님께 충성한 결과로 받은 핍박의 흔적이며, 고난의 상처였다.    우리에게는 어떤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가. 혹시 예수님의 흔적이 아닌 세상의 흔적으로만 가득하지는 않는가. 겉으로 드러나는 혈통이나 할례가 진정한 믿음의 표시가 아니듯, 외적인 직분이나 성취가 믿음의 표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 혼자 고통 받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 받은 징계는 그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것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이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질병과 가난과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선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교회 안의 가정들도 다들 문제를 갖고 어려움도 있고 고민도 있다. 진정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자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무릇 사도 바울과 같이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파주시교회시협의회 회장, 파주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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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2
  •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 누가복음 17장 11~19절
      코로나바이러스의 재확산이 심상치 않다. 수도권과 충청권이 지금 걱정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그제 전 세계에서는 하루 최다 확진자가 나왔다. ‘조용한 전파’가 특성인 이 바이러스 때문에 혹여 나도 확진자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코로나 19 확진을 받은 한 환자가 음압병실에서 작성한 글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나는 코로나 19 확진자입니다”라는 제목의 이 글은 여섯 살과 백일이 갓 지난 두 아이를 둔 엄마의 글이다. 회사 동료로부터 감염된 남편이 병원으로 이송된 날 새벽, 아무 증상이 없던 자신도 감염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음성이었다.   며칠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자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고난 속에서 느낀 감사에 대해 고백하기 시작했다. “저랑 남편이 양성임에도 우리와 가장 가까이 붙어 지낸 아이들이 음성임에 감사합니다. 긴급 상황에서도 친정엄마가 아이들을 돌봐주실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격리 상태로 입원할 수 있는 병실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새벽 시간에도 감염을 막기 위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빠르게 확인한 보건소 직원분들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인 누가복음 17장 11~19절에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한 한센병 환자 이야기가 나온다. 열 명이 고침을 받았는데 예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한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돌아와 감사한 이 한 사람에게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포하셨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치유는 이 한 사람에게만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마리아 출신 한센병 환자는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즉 감사의 찬송을 드렸다.   그리고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사가 곧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는 선포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감사를 곧 믿음과 동의어로 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를 은밀히 내세우는 거짓 감사가 아니라 나를 겸손히 비우는 진정한 감사는 세상에 속한 것을 거룩하게 만들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장 6절)라고 했다.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살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염려라는 말은 그 어원처럼, 우리의 마음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려는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고 내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바울은 염려를 기도로 바꾸라고 말한다. 염려 대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말한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장 6~7절)라고 확언한다. 또 바울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에베소서 5장 4절)라고 권면한다.   감사는 이 고통스럽고 힘든 코로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다. 감사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충분히, 아니 더 많이 느끼게 한다. 감사는 내 존재를 열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포용이다. 그렇게 감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주권이 여러분에게 머물며 이 고난을 이겨나가는 충만한 한 주가 되시길 바란다. /이화대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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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야곱과 함께 하신 하나님 - 창세기 28장 10~22절
      성경은 신앙과 체험이 담긴 한편의 신앙고백이다. 성경에는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진솔한 고백이 담겨있다. 오늘 말씀에는 야곱의 광야의 어려움 가운데 신앙을 깨닫는 장면이 실려 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장자권리를 사서 멋지게 살아 보고자 했었다.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려고 하였지만, 이 일로 인해 자신의 기대와 다른 큰 위기가 찾아왔다. 창세기 27장 45절 말씀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야곱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야곱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가야만 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러한 처지에는 함께 하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꿈속을 헤매는 야곱을 깨우시고 새로운 삶을 깨닫게 하셨다. 창세기 28장 16절 말씀이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은 자신의 처량한 처지 가운데 꿈 꿀 수 없었던 함께 계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놀라운 삶을 하나님께 요청한다. 창세기 28장 20-22절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여 주시고, 이 여행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을 주셔서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시면 여호와를 저의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내가 기둥처럼 세운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자신의 삶을 지켜주시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셔서 정말 돌아오게 된다면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창세기 35장 9절 말씀을 보면 야곱이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돌아올 때 다시 만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나온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은 야곱이 바라던 삶이 비로소 회복되게 해주셨다. 그 삶의 자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의 자리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돌아오고 싶어 했던 복의 자리에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고백한다. 시편1편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의인의 삶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고 심판이 와도 견딜 수 있다”   하나님은 야곱의 삶에 함께 해주셨다. 하나님은 야곱이 있는 모든 곳에서 그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지켜주셨다. 우리의 삶에도 함께 계신 하나님과 함께 견고히 설 수 있길 기도해 본다. 교회는 삶의 어려움을 견디고 바람을 이겨낼 수 있는 피난처와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 이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의인들의 모임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야곱처럼 자신의 삶을 자리를 행복의 자리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삶이 가능한 것은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을 때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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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9
  • [금주의 말씀] 거울인생과 거룩인생 - 본문 : 레위기 19장 2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 소설은 천재 문학가 괴테를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이자, 핵폭탄이었다. 특히 청년들에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시대 젊은이들의 마음을 문학적 장치를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의 슬픔이 베르테르라는 인물을 통해 시대의 슬픔이 되었다.    괴테가 수려한 글을 통해 감정을 매만질 수 있었던 이유로는 어린 시절 겪었을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당시 청년들의 연애에 관한 내면적 감정들을 세심하게 다루면서 읽어주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후기, 전기수라는 직업이 있었다. 소설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는 직업이다. 당대 삼삼오오 짝을 이루며 많은 이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점을 보면 많은 인기가 있었다. 뛰어난 전기수는 현장의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다. 소설을 읽어주면서 단순히 재미난 이야기를 건네주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그 시대 백성들의 기쁨과 아픔을 읽어주었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 이 영화도 주목을 받았다. 여성들의 마음을 잘 읽어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은 시어머니와 함께 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할 정도였다. 지금 사회는 공감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공감이 자본이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주는 구절이 있을까? 하나님의 마음 상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일까? 바로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거룩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코데쉬’라는 말은 ‘잘라냄, 분리함’을 의미한다. 원래 거룩은 하나님께만 있는 성품으로서 모든 피조물과 완전히 구별되심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되신다.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구별됨을 추구하는 것이 ‘거룩’이다.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구체적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성경은 레위기다. 레위기에서도 핵심이 되는 19장의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면 전부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철학적인 관념이 아니다. 일상적인 지침들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은 ‘지식적 앎’이 뿐 만이 아닌 ‘현실적 삶’을 나누는 교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인생은 두 가지다. 거울인생과 거룩인생이다. 거울인생은 거울에 비춰진 ‘나’만 보며 사는 인생이다. 삶의 기준이 거울로 보이는 자신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관심이 오직 ‘나’에게 있다. 매일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결핍들을 채워나간다. 누가 나의 감정들을 알아주거나 읽어주지 않으면 때론 화도 낸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거룩인생이 있다.   거룩인생은 거울 속 자신이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며 사는 인생이다. 삶의 기준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있다. 일상의 관심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한 삶을 사는 이들은 매일 성경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지금 부족한 것을 느끼며 부족한 것들을 기도하며 채워나간다.   누가 나의 감정들을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하다. 인생의 목적이 ‘거울 속의 나 보기’가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 보기’이기 때문이다. 매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다. 하나님과 일상의 행복을 누리면서 영원을 사는 인생이다. /반석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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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6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이까 - 본문 : 시편 13편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편 13편 1절)   ‘어느 때까지이니이까’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모든 것을 해보았지만 섣부르게 희망을 발설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과 절망의 상황 속에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 속에도 이런 절망을 경험할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순간. 그저 먹먹한 마음과 멍한 감정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시간이 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이런 절망의 시간이 새로운 희망의 도래와 출현을 꿈꾸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신앙 안에서의 구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으로 살아온 듯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죽음 앞에 한 줌의 먼지로 소멸된다. 그제야 인간은 깨닫는다.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란 뜻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여정과 생명의 종착역은 창조주이며,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섭리라는 것이다. 이런 섭리를 가슴 깊이 새겨 놓을 때, 우리는 인생의 고난과 역경 앞에서 덜 당혹해한다. 고통의 시험을 지혜롭게 넘어설 수 있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편 12편 2절)   시편 기자의 솔직한 탄식은 계속된다. 거듭되는 영혼의 번민과 마음의 근심. 동시에 구원을 갈망하는 기도를 드린다. 시편 기자의 기도는 성숙된 기도이다. 아픈 마음을 있는 그대로 대면한다. 하나님께 기도한다.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지나친 자기 연민과 슬픔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한다. 나만 슬프고, 나만 아프다는 고립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굴절된 자기 연민은 더 큰 소외와 상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편 12편 3절)   시편 기자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한다. 눈이 밝아진다 것은 현상을 굴곡 없이 인식한다는 뜻이다. 바라봐야 할 것을 바라보고, 버려야 할 인식의 찌꺼기는 내려놓는 건강한 시선을 의미한다. 기도는 우리에게 이런 투명한 시선을 허락해 준다. 동시에 가야 할 길을 보게 하며 버려야 할 마음을 내려놓게 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편 12편 6절)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는 다시 마음을 부여잡는다. 회복의 주체를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둔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의지하여 다시 찬양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이 기도는 맹목적은 희망이 아니다. 지난 시간 속에서 경험된 구원의 하나님,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찬양이다. 그렇다. 삶의 역경과 어려움이 왔을 때, 지난 시간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보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회상해보라.   지금 우리는 “어느 때까지이니이까”란 탄식을 하나님께 드리고 지난 시간 잘못된 인간의 욕망을 성찰해야 한다. 나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로 여기고 함께 연대하며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견디며 나아갈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좋은나무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0-04-24
  • 코로나와 예배의 회복 - 사사기 6장 25~27절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혼란과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코로나가 끼친 영향 중에 좋든 싫든 가장 많이 접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교회의 예배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권고에 따라 현장예배에서 온라인 영상예배로 많은 교회들이 변화를 꾀했다. 두 주간의 거리두기 캠패인이 끝나고도 사회는 교회에 온라인 영상예배를 희망하는 분위기다. 부활절을 맞는 많은 교회들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현장예배로 점차 돌아서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코로나19가 지속되는 한 현장예배에 대한 사회의 불만은 계속해서 터져 나올 것이다. 실제로 500명이 모이는 예배당에서 코로나 방역기준을 적용해서 자리를 배치한다면 100명 밖에 앉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가 교회의 과제이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끌어안고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같은 예배는 어떻게 드려져야 하고 과연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신령한 예배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기드온이 살던 시대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에 의해 압제당하던 때였다. 하나님께서는 농사꾼인 기드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명령하신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주저하던 기드온은 결국 하나님이 보여주신 표징을 보고 순종을 결심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주신 첫 번째 미션은 아버지가 관리자로 있는 바알신당의 석상을 헐어버리고 아세라 목상을 깨트려서 그 나무와 칠 년 된 수소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난감한 명령이었다. 아버지가 관리자로 있고 온 친족과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섬겨오던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깨트리고 찍어버리는 일은 생명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버지를 대적하는 일이요 이 마을의 공공의 적이 되는 모험이다. 이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결단한 기드온은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마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고자 우상의 단을 과감하게 헐어버린다.   여호와께서는 기드온을 보호하신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 누구도 그의 영혼과 육체를 해칠 수 없다. 이제 기드온은 나팔을 불어 소집한 이스라엘의 용사들을 데리고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연합군을 맞아 승리의 전쟁을 치른다. 겁많은 농부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우상 숭배자에서 진정한 예배자로의 인생의 회복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올바른 예배에서 시작되었다.    인생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에서부터 출발 됨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주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예배하는 자리에 설 때에 그는 인생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 바른 예배, 신령한 예배, 주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자가 되려면 먼저 내 안에 있는 우상과 악한 것들을 깨트리고 찍어 버려야 한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왕 되심을 선포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노래해야 한다.    주님이 없는 예배는 예배일 수가 없다. 오프라인 예배냐 온라인 예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냐를 물어야 한다. 예배당이라는 건물 안에서 드려야 주님이 받으시는가? 아름답고 웅장한 예배당 자체도 또 다른 우상이 되고, 내게 신령한 예배라는 착각을 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이제 질문하자. 우리의 예배에 주님의 임재가 있는가? 당신의 예배 공동체에서는 진정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왕으로서 다스리고 계시는가?/예수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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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0-04-09
  • 미스바로 모이라 - 본문: 사무엘상 7장 1~12절
      세상 종말이 되면 막을 수 없는 병으로 수많은 자들이 죽는다. 작금의 세계 모든 민족이 전무한 ‘신종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크나큰 죽음의 공포로 세계의 경제, 외교, 문화, 종교가 큰 위기를 맞고 대처할 방법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지만, 과학을 맹신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과 정부는 위기극복에는 매우 미미한 힘을 보여주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과학만능, 정보사회, 최첨단을 자랑하는 나라정부, 회사도 속수무책으로 망연자실로 당하고만 있는 현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위기 앞에서는 하나님 앞에 모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미스바로 모이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참된 회개를 통해서 국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모여서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로 모든 죄악을 버려야 한다. 사무엘 선지자는 모든 백성들에게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라”(3절)라고 강력하게 이방신들을 버리라고 외치고 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최상의 방법은 모든 백성들 중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모든 죄들을 먼저 제해야만 참된 회개가 될 수 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시는 더러운 죄들을 버리고 미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참된 회개는 이제까지 행했던 죄악 된 행실을 증오하고 그 모든 죄악 된 행실들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단절시키고 영원히 결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그 모든 악한 길에서 떠나 주님의 부르심과 성결케 하심에 기꺼이 응답하는 것이다.   둘째로 나의 삶의 방향을 여호와께로 향하는 것이다. 3절 말씀에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 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던 모든 죄악된 것들 이방신과 세상과 타협하고 저질렀던 창조질서들을 부정하고 인간들이 하나님의 지위를 탐했던 모든 부정, 부패, 비리, 구습과 관습, 전통, 적당주의, 불순종, 인본주의, 사치, 음란등등 지금 국난을 당한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은 미스바에 모여서 회개하며 부르짖으며 세상과 짝하며 적당하게 살며 자위했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회복되어야 할 신앙 양심 회복, 진리에의 절대순종, 신앙 인격 회복, 구원받은 자로서의 인격적인 행동, 사고, 실천,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셋째로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3절 말씀에서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 향하여 그만 섬기라”라고 외친다.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메시지이다. 백성들이 애굽의 고역에서 부르짖고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면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잊고 가나안의 신들을 함께 섬기고 혼인하고 그들의 풍습을 따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온갖 바알, 아세라 신들과 목석의 우상들을 섬기면서 영적으로 깊이 타락하게 되었다.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열방과 민족이 주를 찬양하여 주의 긍휼하심의 은혜가 이 땅을 덮어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는 세상을 만들어야만 한다. /예장 합동개혁측 총회장, 유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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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2
  • 참된 예배 - 이사야 1장 11~16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한국 교인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길게 지속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묻게 된다. 교회 문이 닫혀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던 일들은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제시대에도 그랬고, 공산당이 남한을 점령했을 때에도 교인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으나, 그때에 믿음의 선진들은 그 모든 상황들과 탄압을 잘 이겨냄으로서 믿음의 유산을 우리들에게 남겨주었다.   오늘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사태는 종교 탄압도 아니고, 바이러스의 더 큰 확산을 막기 위한 모임 방지이기 때문에 현재를 살고 있는 한국 성도들은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우리가 행해야 할 바를 찾는 데에 혼란스러울 수 있다. 믿음의 선진들이 여러 가지 정황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이겨냈듯이 우리들도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예배드리러 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책망하는 말씀이 이사야 1장에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닐까? 스스로 돌아보면서 이 시기를 극복하기 원한다.   (이사야 1장 1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1장 12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 이니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적으로 마음 없이 제물을 가지고 성전을 출입했다. 이에 하나님은 “너희가 보이러 오는 예배”는 “마당만 밟고 가는 헛된 예배”라며 책망을 하셨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으로 드려야만 한다.   (이사야 1장 13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사야 1장 14절)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많은 예배를 드리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드려지는 많은 예배가 무거운 짐이 되어 하나님이 지기에 곤비하였다”고 하신다. 우리 스스로의 예배를 점검해보자. 이런 예배와 제물은 주님이 받으시지 않고 기도의 응답도 없다고 하신다.   (이사야 1장 15절)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이사야 1장 16절)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우리의 믿음의 모습들을 뒤돌아보고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자. 사사기 1장 18절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우리의 어떤 잘못이라도 돌이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모아 먼저 우리의 손을 씻는 회개의 기도를 함으로 참된 예배를 회복하는 길이 유일한 해결이다. 하나님께 우리의 예배를 올바로 회복시킬 때 하나님의 손 아래서 담대함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사사기 1장 19절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우리의 예배가 회복될 때 누리는 평안함이다. 이런 은혜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우리 모두 기도하자./베들레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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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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