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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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14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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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5-01-20
  • [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1-14
  • [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2-17
  • [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1-22
  • 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1-21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저수지와 파이프(창12:2-3(구14))
      오늘 본문 [창12:2]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복이 될지라’는 옛 성경에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교회가...그리고 교회를 이루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 즉 예수이름으로 모인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복’ 즉 그런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첫째로 말씀할 것은 저수지같은 교회가 되자! 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 즉 신자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복을 주시는 분은 누구신가? 그렇다! 하나님이시다. 복의 최초 근원지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온 성도들에게 ‘복’을 주셨다.    저 높고 높은 헐몬의 이슬(복,은혜)이 시온(작은 언덕과 같은...교회.성도공동체)에 임한다는 것인데... 그 복, 즉 하나님이 명하신 복은 다름 아닌 ‘영생’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복 중의 복, 가장 핵심은? 바로 ‘영생의 복’이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이들은 그 크신 복을 이미 받으신 줄 믿으라! 물론 건강의 복, 물질의 복, 출세의 복, 자녀의 복 등등의 복들도 복이고 중요하지만 그래도 최고의 복이요 필수적인 복은 영생의 복인 것이다. 이 복을 위해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저수지 못잖게 중요한 것이 뭐라고 했는가? 그렇다. 파이프(수로, 호스 등등)인 것이다. 그게 없어서 물부족국가의 경우 물 긷기 위해 걷는 거리가 평균 6Km인 것이고 많은 이들이 그 연결시설이 없어서 병들고 죽어가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으로 인해 그 복이 아브라함 한 사람이나 한 가족으로 그치지 않고 천하의 수없이 많은 심령들에게까지 흘러간다는 것이다.    마치 저수지의 물이 파이프를 통해 필요한 곳곳으로 흘러가듯이 말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해도 활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그 역할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게 선교나 전도가 아니라 바로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전도요, 선교인 것이다.    이스라엘엔 두 개의 대표적 바다가 있는데 그 하나는 갈릴리이다. 헐몬 산에서 시작된 요단강은 메롬 호수를 거쳐 갈릴리로 모여든다.  그런데 물을 모아만 두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통해 다시 흘려보낸다. 그런 갈릴리는 많은 생명체들이 공존하는 풍성한 곳이다. 자기도 물을 받고 또 물을 흘려 보내고...서로 풍성해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사해인데 사해는 물을 모으기만 하고 내보내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가 된 것이다. 보통 바다의 평균 염도가 3.5%인데도 짜다. 근데 사해는 염도가 무려 10배 정도인 34.2%이어서 물고기가 살 수 없다. 고로 교회공동체는 자기가 받은 복을 움켜쥐고만 있어선 안된다.  우리는 내가 복 받은 사람임을 믿고 그 복을 남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파이프 같은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한 알의 밀로 썩어질 때 부활의 기적을 경험하고 더 풍성히 나누게 되는 것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는 말씀! 아니, 땅의 모든 족속이 ‘나’ 때문에 복을 받는다고요? 안 믿어진다고요?  설령 그런들 난 아니라고요? 그렇치 않다!     원리는 단순하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예수님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말씀에 따르면 되는 것이다. /호산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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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5
  • 예수 부활의 권능(요 20:19-22)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우리가 특별히 기독교만를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부활 때문이다. 예수 부활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키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고, 성경 말씀을 믿고 따라 행할 수가 있다. 예수 믿는 우리 모두는 부활을 통하여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주신 권능을 보게 된다.    첫째로 예수 부활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으며(눅 24:44-46)”,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했으면 우리의 전파한 것도 헛것이요 너희 믿음이 헛것이라(고전 15:12-14)” 하셨다.    둘째로 부활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다. 이날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셨다. 부활의 주님께서 주신 평안은 두려움을 없애는 참 평안이며 일시적으로 왔다가 사라지는 평안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주신 영원한 평안이다. 예수를 믿고 가장 먼저 받은 축복은 마음의 평안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하셨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야 41:10)” 하셨다.   셋째, 부활의 권능으로 충만 받아 산증인 돼야 한다. 부활의 주님께서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22절) 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면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시며 부탁하신 말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행 1:8-11)” 하셨다.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성령의 권능이다. 성령 받지 못했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멀찍이 따랐고 예수님을 부인까지 하였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난 베드로가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의 권능을 받아 기도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다비다를 살리고(행 9:40) 그가 부활의 주님을 전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이에게 임하고(행 10:40-44). 그가 순교하기까지 성령의 권능이 충만하여 부활의 주님을 전한 것을 본다.    이미 북측에서만 남북 공동으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일곱 번 기도회를 드리고 난 후 이제 감사함으로 남북 공동 기도회를 드리자고 조그련 측과 합의하였으나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남북 공동 기회가 만사에 주님의 때가 있기에 민족 분단 70년이 지난 금년에 예수 부활의 권능으로 남북 공동 기도회가 평양 봉수교회와 금강산에서 은혜 가운데 잘 드려질 때 남북은 꿈 같은 조국 평화통일로 세계 으뜸 민족으로 세워 인류 평화와 온 세계 빛을 발하는 조국 평화통일의 새 시대가 열려질 것이다. 예수 부활의 권능과 예수 부활의 승리가 남북 우리 모두와 내 조국의 승리가 되며 예수 부활의 은혜와 평강이 온 세계에 차고 넘치는 가장 큰 기쁨의 소식 부활의 산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린다. /목포서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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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2
  • 예수 보혈의 능력(출애굽기 12장 1~13절)
    코로나 발생 이후 두 번째 고난주간을 맞이한다. 코로나 가운데서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어떠해야 할까? 고난주간에 많이 부르는 찬송 중에 하나가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이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1절). 고난주간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보혈이다. 예수님은 더럽고 추악한 죄로 인해 절망가운데 죽어가는 인류에게 당신의 보혈을 부어줌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행하신 이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것을 미리 예표해 주고 있는 표적이다. 표적이란 드러내고자 하는 중대한 메시지를 품고 있을 때 쓰는 용어이다. 막10:45절에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목적을 설명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섬김은 자신의 피를 흘려 주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번제는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인간의 죄가 용서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생의 어린양으로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피흘리심을 예표하고 있는 그림자일 뿐이다. 실제로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씻긴다면 굳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체를 가리키는 그림자이다.   출애굽기 12장은 10번째 재앙과 맞물려 있는 유월절 규례를 설명한다. 가정별로 어린양을 취하되 흠없고 일년된 수컷으로 한다. 니산월(첫달)14일에 양을 잡아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다. 그러면 그 밤에 여호와께서  현관문과 기둥에 피를 바른 집들은 지나가시고,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의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을 죽이신다. 살고 죽는 갈림길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현관문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느냐 하는 것이다. 유대인일지라도 미처 바빠서 피를 바르지 못한 집은 그 장자가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이집트인 일지라도 그 재앙이 두려워서 장남을 유대인 친구의 집에 머물게 했다면 그 장자가 보호받는다.   비록 피를 바른 유대인 가정의 장남이 범죄자이고, 도둑놈이고 살인자일지라도 그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이집트인의 장자가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착한 일을 많이 했어도 어린양의 피가 없기에 죽임을 당한다. 그 어린양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우리의 메시야요 구주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1:29)라고 소리쳤다. 이 땅에 오신 어린양 예수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 내실 수 있다.   인간이 구원받고 보호받는 것은 그의 선함이나 행위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은혜이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믿는 자가 은혜로 구원받는다. 우리에게 그 고귀한 보혈을 흘려주시기 위해 나 대신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흘리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 보혈에 함축되어 있다. 당신의 피를 흘리고 생명을 버리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이처럼 크고 놀라운 것이다. 나를 위해 피흘리신 그 사랑을 가슴깊이 새기고 우리 주님만 바라보는 고난주간이 되길 바란다.  /예수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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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30
  • 영적 지도자는 단순해야 한다(창세기 14장 1~16절)
      삶이 단순해야 한다. 삶에서 가장 단순해야 할 것은 생각이다. 생각이 단순해야 삶이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삶의 시작은 지금이다. 곧 지금을 말하는 오늘 하루다.   생각이 단순해야 한다. 삶이 단순해야 한다. 하루가 단순해야 한다. 무엇보다 단순해야 할 것은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이 단순할 때 하나님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럼 단순한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단순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만을 사랑해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단순함이 답이다. 단순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복잡해지는 순간 세상에 눈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삶이 단순하다.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 왕 등, 네 왕에게 잡혀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카 롯을 구하려 전쟁터로 갔다. 아브라함이 단순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롯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사람은 때론 바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바보가 아니다. 사랑의 마음이 클 뿐이다.   사랑하면 단순해진다. 한 사람만 본다. 사랑할까와 사랑하지 말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래! 사랑하자’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아내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결혼하기로 결정했는데 진짜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 남자에게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나가를 고민했다. 그 때 깨달았다. 복잡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복잡하다는 것은 갈등이 시작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갈등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답 대신 혼란만 가중된다.   삶은 단순해야 한다. 신앙생활도 단순해야 한다. 단순할 때 답을 찾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통일 왕국을 세운 다윗 왕도 단순했다. 자신에게 문제가 발생하자 단순하게 하나님만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만 찾았다. 단순한 사람이 다윗이 한 고백이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편 16편 1절).”   지진이 발생하면 단순해진다. 살길만 찾았다. 난생처음 오사카 전철역에서 지진을 경험했다. 그 때 사람들 행동은 단순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건물 밖으로 뛰었다. 나도 따라 뛰었다. 살기 위해 단순해졌다.   불이 나도 마찬가지다. 불난 곳에서 피해야 한다. 불이 없는 곳으로 뛰어야 한다. ‘코로나19’로 전염에 취약해졌다. 전염에 강해지려면 단순해야 한다.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한다. 마스크를 쓸까 말까를 고민하면 안 된다.   가장 단순해야 할 사람은 영적 지도자다. 예수님, 아브라함과 바울과 같은 영적 지도자는 단순하다. 그들이 단순한 것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단순함이다.   영적 지도자인 아브라함이 롯을 살리는 것에 단순했다. 예수님도 하나님 사랑하는 것에 단순했다. 십자가의 죽음을 망설임 없이 택했다. 바울도 하나님을 위한 헌신에 단순했다. 하나님을 위해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장 31절)”고 했다. 찰스 두히그는 〈1등의 습관〉에서 ‘탁월한 성적을 보이는 팀의 공통점’을 이야기한다. 훌륭한 팀을 만드는 것은 팀원이 아니라 ‘규범’이란 것이다. 훌륭한 팀은 규범이 있듯이, 영적 지도자는 지침서가 있어야 한다. 그 지침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 한 분으로 단순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으로 단순해야 한다. 하나님과 연결통로인 말씀으로 단순해야 한다. 단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순하게 사랑하신다. 오늘 하루의 삶, 단순하게 살았는가란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아트설교연구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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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0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이까(시편 13편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편 13편 1절) ‘어느 때까지이니이까’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모든 것을 해보았지만 섣부르게 희망을 발설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과 절망의 상황 속에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 속에도 이런 절망을 경험할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순간. 그저 먹먹한 마음과 멍한 감정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시간이 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이런 절망의 시간이 새로운 희망의 도래와 출현을 꿈꾸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신앙 안에서의 구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으로 살아온 듯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죽음 앞에 한 줌의 먼지로 소멸된다. 그제야 인간은 깨닫는다.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란 뜻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여정과 생명의 종착역은 창조주이며,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섭리라는 것이다. 이런 섭리를 가슴 깊이 새겨 놓을 때, 우리는 인생의 고난과 역경 앞에서 덜 당혹해한다. 고통의 시험을 지혜롭게 넘어설 수 있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편 12편 2절) 시편 기자의 솔직한 탄식은 계속된다. 거듭되는 영혼의 번민과 마음의 근심. 동시에 구원을 갈망하는 기도를 드린다. 시편 기자의 기도는 성숙된 기도이다. 아픈 마음을 있는 그대로 대면한다. 하나님께 기도한다.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지나친 자기 연민과 슬픔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한다. 나만 슬프고, 나만 아프다는 고립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굴절된 자기 연민은 더 큰 소외와 상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편 12편 3절) 시편 기자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한다. 눈이 밝아진다 것은 현상을 굴곡 없이 인식한다는 뜻이다. 바라봐야 할 것을 바라보고, 버려야 할 인식의 찌꺼기는 내려놓는 건강한 시선을 의미한다. 기도는 우리에게 이런 투명한 시선을 허락해 준다. 동시에 가야 할 길을 보게 하며 버려야 할 마음을 내려놓게 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편 12편 6절)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는 다시 마음을 부여잡는다. 회복의 주체를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둔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의지하여 다시 찬양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이 기도는 맹목적은 희망이 아니다. 지난 시간 속에서 경험된 구원의 하나님,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찬양이다. 그렇다. 삶의 역경과 어려움이 왔을 때, 지난 시간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보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회상해보라. 지금 우리는 “어느 때까지이니이까”란 탄식을 하나님께 드리고 지난 시간 잘못된 인간의 욕망을 성찰해야 한다. 나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로 여기고 함께 연대하며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견디며 나아갈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좋은나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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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3.1절 102주년 기념 미얀마 대사관 앞 연합기도회 설교
    스가랴 9:9-12   우리는 어제 하루에도 미얀마에서 군경의 무력 사용으로 인해 최소 18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했다는 유엔 인권사무소의 발표를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각지에서 목숨을 내어 놓고 군부와 맞서고 있는 미얀마 민중의 용기 있는 항쟁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미얀마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 대사관 앞에서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외침도 들었습니다.   우리도 아픈 역사를 가진 나라로서 이러한 외침이 남의 소리로만 들리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오늘은 삼일혁명 102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서 우리 선조들은 일본 군인들의 총칼 앞에 맨손으로 나서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적이 겨누고 있는 총구 앞에서 맨손으로 만세를 부른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는데 지금 미얀마의 형제자매 들이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투쟁을 적극지지하고 멀리서 응원하는 마음을 모아 여러분들의 승리를 기도합니다. 우리도 해방 후에 5.16(1961), 12.12(1979), 5.17(1980) 세 차례에 걸친 쿠데타를 경험했습니다. 가장 가까이 일어났던 광주민주항쟁 당시 수많은 광주의 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시는 무한한 권력을 누릴 것 같았던 군부 세력이지만 잠시 그들이 지배하는 동안에도 해마다 오월이 오면 광주를 방불케 하는 전국적인 저항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무릎을 꿇었고 오랏줄에 묶여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자기 국민을 향해 총질한 군인들을 어찌 용서할 수 있으며, 어찌 그 만행을 잊겠습니까? 미얀마 군부는 당장 총을 버리고 군인의 당연한 임무로 복귀하길 바랍니다. 군인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임무를 가졌지, 아무도 여러분에게 자기 국민을 살해할 권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국민을 향한 총질을 멈추십시오. 그 행위가 자손만대에 부끄러움이 될 엄청난 범죄임을 모르십니까? 여러분들이 미얀마의 모든 국민들을 없애지 않는 한 여러분들의 만행은 결코 잊혀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역사의 무거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얀마의 민주화를 지지하며 군부에 항쟁하는 민중을 도울 것입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도 미얀마 민중이 생명을 지키고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국제연대와 긴급한 조치들을 취해주시기를 바라며, 중국과 러시아도 미안마의 쿠데타 세력을 침묵으로 돕고 있는 행위를 즉각 멈추고 이들을 응징하는 당연하고 마땅한 인륜과 대의에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랐던 메시야에 대한 꿈입니다. 새롭게 오시는 구원자 메시야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으로서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땅 끝까지 이를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메시아에 대한 예언 중에 유일하게 민중 메시야에 대한 노래입니다. 그는 미끈하게 잘 뽑힌 군마를 없애고, 당시 사람들이 자랑하던 무기인 병거도 없애며 활도 꺾습니다. 그리고 나귀, 그중에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데 나귀는 전투용이 아니고 일하고 짐을 나르는 용도입니다. 군림하는 메시아가 아니고 국민들과 함께 일하는 메시아, 평화의 메시아가가 오신다는 이야기인데 예수는 정확하게 이 구절을 대본으로 연출하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고 우리에게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미얀마 국민들을 살해하는 군인들의 무기들을 반드시 꺾어버리실 것입니다. 그들은 각종 거짓으로 자신들의 폭력을 위장할 것이나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희생이 오랫동안 이어온 미얀마 군부세력의 폭력을 종식시키고 민주화된 새 세상을 열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듯이, 지금의 고난을 인내하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보상을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넘치게 주실 것이요, 반면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징벌로 갚으실 것입니다.   지금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저항하는 미얀마 민중의 행동에는 진실이 있고, 그 진실에는 거짓이 흉내 낼 수 없는 무게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진실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요,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용기를 잃지 않고 힘내십시오. 진리가 여러분들을 자유하게 할 것입니다.   /김경호목사(강남향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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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2
  • 하나님은 생명의 능력이시다(시편 27편 1~14절)
      “하나님, 살아있게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어떤 집사 한 사람이 IMF 시절에 제법 큰 공장을 운영하던 중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때 회계 책임자가 전화를 걸어 “사장님, 드디어 회사가 부도 처리가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자 곧 정신을 잃었다. 그래서 그의 차는 도로변 전봇대에 심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얼마 동안 넋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집사는 깨어진 유리창을 통해 하늘을 보았다. 그 하늘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 청명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때 차 안에서 집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하나님, 살아있게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비록 회사가 부도가 나서 많은 것을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신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다윗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여호와는 “나의 빛이라”, “내 생명의 능력이라”고 고백했다. 환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그 환난을 보고 두려워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두려움과 평온함의 차이는, 믿음의 눈으로 볼 줄 아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생겨난다. 다윗은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돌보심을 확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평생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살 수 있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다윗에게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고 그의 얼굴을 숨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다윗이 잊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다. 세상의 부모는 그들의 자녀들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은 기간을 기다리는 사람은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고 생전에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능력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을 그의 빛으로, 그의 구원과 생명의 능력으로 고백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편 27편 2~3절).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구원과 생명의 능력이 되신다.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한다. 환난의 때에 두려움과 평온함의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가?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편 27편 3절),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사편 7편 9절 하반절). 우리가 하나님을 굳게 믿을 때 굳게 서게 된다.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이 비록 얼굴을 가리고 침묵하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신자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바로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편 27편 13~14절).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다. 사람은 우리를 버릴 수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영접하신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오늘도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며 살길 바란다. 이를 위하 함께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의 값진 선물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굳게 믿고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찬양하게 하옵소서’  /파주시기독교총연합회 회장, 파주사랑의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1-27
  • 공생과 상생(로마서 8장 19~22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해방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유영모 선생은 “내가 먹는 낱알과 채소가 나를 위해 희생되어 나를 대속한다. 그리스도가 내 양식이라면 나를 위해 대속되는 만물은 죄다 그리스도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서 보다 심오한 차원을 열어 준다. 그리스도는 갈라진 것들을 하나되게 하기 위해 오셨는데 그 그리스도의 하나됨은 이제 그 범위를 만물로 확대한다. 그리스도는 만물과 동일시된다. 그러면 이제 만물이 그리스도이다. 골로새서의 이러한 기독론을 우리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이라고 부른다. 그러기에 아기 예수는 모든 생명을 위해, 만물의 충만함을 위해 오신 만물의 구세주이시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그렇다면 모든 신학은 이제 그 근본이 바뀌어야 한다.   문자 그대로 팬데믹(Pandemic) 세계적 대유행이 되었다. 그동안 흑사병, 스페인 독감 등 역사를 변화시킨 전염병과 질병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한 대륙의 질병, 국지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홍콩독감,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등의 질병이 창궐했다. 그러던 중 코로나 역병은 어쩌면 최초의 전 지구적 전염병으로 세계를 휩쓸고 있다. 해당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 코로나 역병은 그동안 서구사회의 기본을 흔들었다. 그동안 서구 사회는 풍요라는 신을 쫓아왔다. 자기들의 군사력의 우위, 경제력, 의료, 복지, 자본, 도시, 문명 등을 자랑했다.    이런 문화는 제국 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군사주의와 가부장제와 성장 이데올로기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런 문화 안에서 사람들은 생명과 분리된 채, 위계질서를 이룬 사회 안에서 내면적으로 병들어 있다. 코로나 역병은 그 맹점을 통렬하게 드러내며 지금의 세계를 수정하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국가든지 기업이든지 종교든지 이 경고를 경청하고 대비해야 한다.   기독교의 선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급속하게 기독인의 숫자를 늘린 것은 로마에 의해 공인되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그 숫자가 증가했다. 제국의 공인은 기독교의 질적인 타락을 가져왔지만 기독교가 오늘의 세계 종교로 성장하고 우리들에게 까지 전해진 것은 기독교의 제국화에 힘입은 것이다. 코로나 시대는 우리에게 기독교 신학과 조직, 체질 속에 내재된 제국의 요소들을 걸러낼 필요를 알려준다.   교회의 경우, 대교회주의가 유행했다. 특히 한국에서 대교회의 익명의 숲 안에 머무르는 교인들이 다수였다. 하지만 한국의 대형교회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낮선 교인이 올 수도 없고 오면 싫어한다. 등록교인 아니면 입장 불가하고 입장하더라도 익명으론 안 된다. 작은 교회들은 오히려 좋은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온라인시대에 걸 맞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교회도 유투브로 강남향린 성서학당을 개설하고 예배를 생중계한다. 이제 예배 현장에 몇 명이 앉아 있느냐는 별로 의미가 없다. 내용, 컨텐츠의 질이 소중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단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통의 면역체계를 구성하며 지구의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 서로의 상생을 강화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인데, 여기서 우리는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오고 지금 이미 함께 공생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모든 자연과 생태계를 포함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강남향린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1-26
  • 코로나 역병 이후 더욱 절실한 공생과 상생의 세계(로마서 8;19-22)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로마서 8:19-22)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해방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유영모 선생은 “내가 먹는 낱알과 채소가 나를 위해 희생되어 나를 대속한다. 그리스도가 내 양식이라면 나를 위해 대속되는 만물은 죄다 그리스도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서 보다 심오한 차원을 열어 준다. 그리스도는 갈라진 것들을 하나되게 하기 위해 오셨는데 그 그리스도의 하나됨은 이제 그 범위를 만물로 확대한다. 그리스도는 만물과 동일시된다. 그러면 이제 만물이 그리스도이다. 골로새서의 이러한 기독론을 우리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이라고 부른다. 그러기에 아기 예수는 모든 생명을 위해, 만물의 충만함을 위해 오신 만물의 구세주이시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그렇다면 모든 신학은 이제 그 근본이 바뀌어야 한다.   신학은 신(神)만을 이야기 할 수 없고 모든 생명과 만물, 우주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빼어 놓고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인권도 생명권과 분리해서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지구상에 수많은 생명의 종이 있지만 이 생명의 구성은 동일하다. 단순한 종에서 복잡한 종까지, 단세포 생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식물에서 동물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생명의 구성은 동일한 생명의 염기들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이중 나선구조로 되어 있는 DNA는 아데닌, 티민, 시토신, 구아닌의 4종류의 염기로 구성되어 있다. RNA에서 아데닌과 결합하는 우라실까지 합하면 모든 생명은 다섯가지 염기의 기본 물질로 구성되었다. 이것이 모든 생명의 기본요소이다. 이 염기들이 각각 다른 조합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생명체로 나타난다. 지금까지 밝혀진 150만종의 생물과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까지 합해 약 천만종에 이르는 생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은 모두 이들 염기들의 구성체들이다.   떡갈나무와 우리는 먼친척이다. 나비, 늑대, 버섯, 상어와 유전명령이 같다. 이것은 종이 분화되기 이전에 오랫동안 원시바다에서 발달한 생명 복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세포 핵 안에 DNA는 모든 생명이 읽을 수 있는 나선구조의 분자 구성체이고 각각의 사다리의 가로대를 이루는 4종류의 유전을 결정하는 염기들은 DNA를 이룬다. 이것은 생명이 성장하고, 환경을 감지하고, 움직이고, 소화하고, 번식하는 각각의 방법을 결정한다. 그 안에 자신들이 발전하고 생성해온 모든 기억, 생명의 역사를 간직하고 그 기록대로 새로운 세포들을 복제한다. 인간과 침팬지는 99.4%의 유전자가 동일하며 인간과 초파리에 나타나는 질병이 70%정도가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생명의 구성뿐만이 아니라 그 형성과정도 동일한 프로세스를 거친다. 인간의 생명도 지구 생명체의 모든 진화과정을 거쳐서 존재한다. 인간도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최초의 수정란은 단세포생물이다. 그것은 세포분열을 통해 다세포가 되고 각 기관이 생겨난다. 뱃속의 아기는 어머니의 양수 안에서 어류의 생태계를 거쳐 출생한다. 짧은 기간이지만 생명이 진화해온 수 십 억년의 과정을 압축하여 경험한다. 성서가 모든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명 안에서 그들을 충만하게 하신다는 고백과 같이 과학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하나임을 밝혀준다.   문자 그대로 팬데믹(Pandemic) 세계적 대유행이 되었다. 그동안 흑사병, 스페인 독감 등 역사를 변화시킨 전염병과 질병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한 대륙의 질병, 국지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홍콩독감,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등의 질병이 창궐했다. 그러던 중 코로나 역병은 어쩌면 최초의 전 지구적 전염병으로 세계를 휩쓸고 있다. 해당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 코로나 역병은 그동안 서구사회의 기본을 흔들었다. 그동안 서구 사회는 풍요라는 신을 쫓아왔다. 자기들의 군사력의 우위, 경제력, 의료, 복지, 자본, 도시, 문명 등을 자랑했다. 이런 문화는 제국 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군사주의와 가부장제와 성장 이데올로기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런 문화 안에서 사람들은 생명과 분리된 채, 위계질서를 이룬 사회 안에서 내면적으로 병들어 있다. 코로나 역병은 그 맹점을 통렬하게 드러내며 지금의 세계를 수정하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국가든지 기업이든지 종교든지 이 경고를 경청하고 대비해야 한다.   기독교의 선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급속하게 기독인의 숫자를 늘린 것은 로마에 의해 공인되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그 숫자가 증가했다. 제국의 공인은 기독교의 질적인 타락을 가져왔지만 기독교가 오늘의 세계 종교로 성장하고 우리들에게 까지 전해진 것은 기독교의 제국화에 힘입은 것이다. 코로나 시대는 우리에게 기독교 신학과 조직, 체질 속에 내재된 제국의 요소들을 걸러낼 필요를 알려준다. 교회의 경우, 대교회주의가 유행했다. 특히 한국에서 대교회의 익명의 숲 안에 머무르는 교인들이 다수였다. 하지만 한국의 대형교회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낮선 교인이 올 수도 없고 오면 싫어한다. 등록교인 아니면 입장 불가하고 입장하더라도 익명으론 안 된다. 작은 교회들은 오히려 좋은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온라인시대에 걸 맞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교회도 유투브로 강남향린 성서학당을 개설하고 예배를 생중계한다. 이제 예배 현장에 몇 명이 앉아 있느냐는 별로 의미가 없다. 내용, 컨텐츠의 질이 소중한 시대가 되었다.   본래 바이러스는 지구에 생명이 탄생하면서부터 함께 했으며 가장 기본적인 생명체 중에 하나이다. 지구 생태계의 질서가 유지되는 기본에는 바이러스가 존재한다. 우리 몸 안에도 바이러스들이 존재한다. 약 1만종의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살고 있으며 무려 100조개의 바이러스들과 우리는 몸을 숙주로 공생한다. 지금 지구상에는 160만종의 바이러스들이 밝혀졌는데 이는 존재하는 바이러스들의 1%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나라는 생명체의 주체가 나인지 우리 안에 바이러스가 주인인지 모를 일이다. 바이러스, 세균, 기생충도 모두 인간과 공생관계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오래 살기위해 숙주인 우리 몸의 병을 고치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한다. 오로지 내가 내 몸의 주체가 아닌 셈이다.   사람에게 생기는 신종 감염병의 75% 이상이 인수(人獸)공통 감염병이고, 이 인수공통 감염병의 대부분은 숙주가 야생동물이거나 가축들인 만큼 인간뿐 아니라 전체 생태계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런 개념을 '원 헬스(One Health)'라고 부른다. '원 헬스'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자연환경까지 하나로 연결된 만큼, 생태계 전반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에서 접근을 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인간에게만 이롭거나 동물에만 이로운 것, 혹은 자연에만 이로운 것이 아닌 모두에게 이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개념이다. 여기에 세계화로 국제사회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이므로 '원 헬스'뿐 아니라, '원 월드(One World)'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최근 50년간 신종 감염병이 급격히 증가한 이유는 병원체 자체가 진화하는 원인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간과 환경 간 상호작용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즉, 인구증가, 도시화, 여행, 교역의 증가, 빈부격차, 전쟁, 경제발달과 토지개발에 따른 생태환경의 파괴 등이 이러한 변화를 야기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인구 증가에 따라 새로운 지리적 공간으로 사회적 영역이 확장되고, 해외여행 등으로 인간은 병원체의 숙주인 동물종과 접촉할 기회가 증가하였다. 이렇게 사람으로 전이된 병원체는 인구밀도 및 인구이동 증가라는 사회적 변화와 결합하여 신종 감염병이 확산되는 요인이 되었다.   우리가 한 종의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침입을 당한다 하더라도 다른 생명체에게는 이미 그것을 극복할 면역 체계가 익숙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공동의 면역체계를 증진시키는 일은 결국 인간의 생명 유지를 위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지금 자연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그만큼 바이러스들이 적절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는 자연이라고 하고 창조의 질서라고 부른다. 이승무 박사(순환경제 연구소장)는 “산업 사회에서 원하지 않는 물질의 배출은 생물권에서 다양하고 예측할 수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새로운 미생물이 나타날 것이다”고 경고한다. 기존의 미생물, 즉 박테리아, 곰팡이 및 바이러스는 현재의 생명체가 균형을 이루는 조건을 만들어 왔다. 이것은 자연의 생명 유지 시스템의 살아있는 기초의 힘이며 그것을 적절하게 제어하는 시스템 역시 자연 속에 있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을 때, 창조의 질서라고 부르는 잔연의 균형이 급격하게 무너져 어떤 상황에 이르게 될지 모른다는 경고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단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통의 면역체계를 구성하며 지구의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 서로의 상생을 강화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인데, 여기서 우리는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오고 지금 이미 함께 공생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모든 자연과 생태계를 포함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이런 공생의 질서는 신학과 교회에서도 변화를 요구한다. 인간 중심의 신학은 전체 생명권을 중심으로, 나아가서 전체 물질세계까지 아우르는 신학으로 재편되어야 하며 교회의 조직과 선교의 목적 자체도 인간 중심의 시스템에서 모든 만물의 공생과 상생을 최우선하는 신학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해 2020년도는 대면 예배 보다 비대면 예배가 더 많았다. 목회자의 가장 큰 걱정은 교우들의 마음이 멀어질까봐 염려이며, 교회가 운영될까도 염려이다. 그러나 이런 염려도 내려놓으려 한다. 나 자신이 목회를 하고, 교회를 운영하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고 교회의 주인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이끌어 가실 줄로 믿는다. 목사가 목회의 주체가 아니고 교우들 각자가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 각자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우리를 이끄실 것이기 때문이다.   /강남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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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19
  • 시기와 우연이 있는 인생(전도서 9장 11절)
    전도서 9장 11절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시기’는 성경에 ‘에트’라고 하며, 이는 ‘어두움의 시간’을 말한다. ‘우연’은 성경에 ‘페가’라고 하며, 이는 ‘충돌’을 말한다. 인생에 있어서 어둠 속에서의 충돌을 말씀한 것인데, 둘 다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서 사람은 누구도 자기가 이것을 주관치 못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전도서 9장 12절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데 이 세상은 사람의 힘보다 월등한 ‘큰 임금’이 있어서 이 죄인 된 세상에 매우 견고한 ‘흉벽’을 쌓아 놓은 것을 말씀하셨다.   전도서 9장 14절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라고 기록됐다. ‘흉벽’이란, 성경에 ‘마쪼드’라 하며 이는 ‘짐승’을 잡기 위해 펼쳐 놓은 ‘그물’이란 것과, 전쟁에서 사용하는 군수용의 뜻도 있어서 그 견고함이 매우 강하다. 그 누구도 이 흉벽에 잡히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 이때에 성읍의 한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이 성읍을 구했으나, 이 사람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   전도서 9장 15절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라고 기록됐는데 이 멸망당할 성읍을 구한 가난한 지혜자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고 자기의 공의를 베푸시사 우리를 자녀삼아 그 멸망의 흉벽과 상관없게 해 주신 것이다.   2021년 올해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분들이 이 불행한 흉벽에서 자유하고, 시기와 우연이, 어둠 속에서의 충돌이 없는 행복한 인생을 사는 이들이 많기를 바란다.   전도서 9장 16절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절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참된 지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동안 사람들 사이를 거니시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시어 많은 이들에게 변화를 이끌어내셨지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같이 사회적인 입지가 공고한 이들에겐 변화가 미미한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 예수의 말씀은 빈자의 지혜로 들릴 수밖에 없었으며 그렇기에 스스로 참된 지혜자의 말을 듣지 못한 채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호통을 치는 우매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세상적 가치로 말씀을 판단하지 않고 참된 지혜를 전하는 지혜자로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마태복음 16장 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요한복음 8장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대한예수교오순절성회 총회장·만수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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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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