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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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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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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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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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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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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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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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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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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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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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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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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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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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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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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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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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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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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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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달음질하라(고전 9장 23~27절)
- 새로운 다짐으로 새해를 맞는 성도의 자세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과거의 성공이나 실패에 연연하지 말고 새로운 은혜를 사모하며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과거의 일에만 얽매어 새로운 성도의 삶을 시도하지 못한다면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바울 사도는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고 했다. 지난 성공이나 실패를 훌훌 털어 두로 던져 버리고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심기일전하고 일어나서 최후의 승리를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가자. 첫째로, 상을 받기 위해서는 달음질하는 방향(목표)을 분명히 해야한다(26절).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달음질하는 자는 관중석이 아닌 골인 지점을 주시하며 모든 역량을 다하여 끝까지 달음질해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향방 없이 목표지점 아닌 곳으로 달려가면 실격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은 최종 목표가 분명해야 하는데, 그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우리의 신랑 되시며 재림 주이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히12:2). 상급을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진력해야 한다.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바울 사도는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8~10)고 말씀했다. 세상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흘러넘쳐 나지만 세상유혹보다 더 크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도는 침몰되지 말고 믿음을 지켜나가야 한다.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영광과 승리의 면류관이란 목표가 분명하면 세상의 유혹이나 고난을 극복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둘째, 절제해야 한다(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는 ‘경쟁하다’, ‘격렬히 몸부림치다’는 것으로 경주에 참가하는 모든 자를 가리킨다. ‘절제’는 고대 그리스의 운동 경기자들이 사용했던 전문 용어로 선수들은 통상 10개월가량의 고된 훈련을 받았으며 음식이나, 오락, 수면 시간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을 절제하여야 했다.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고린도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이스미안 경기’에서는 승자에게 월계수 잎을 엮어 만든 화환을 머리에 씌워 주었다. 이처럼 나뭇잎을 엮어 만든 경기자들에게 최고의 영예를 상징하는 것이었는데, 면류관은 금방 시드는 것이었고 그것을 쓴 우승자의 영예 역시 덧없는 것이다.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면류관은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 못지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 절제는 하고 싶은 육체의 욕망들 그것들을 자제하는 것으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하고 싶고 보고 싶은 욕망을 쳐 복종 시키며 절제생활을 해야한다.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자는 세상에는 화려한 것. 좋아 보이는 것, 행복하게 해줄듯 한 그럴싸한 선악과와 같은 것들, 이런 종류의 것들을 절제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모든 일에 절제하고 달리고 또 달려 크게 승리하는 한해가 되도록 하자. 그래서 우리의 주인 되시는 주 예수님의 칭찬과 상을 받는 성도들이 되자./유향교회 목사· 예장 합동개혁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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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달음질하라(고전 9장 23~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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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돌아가는 존재(전도서 12장 7절)
- 우리 인생은 어린 시절에는 과자에 끌려가고, 젊어서는 정에 끌려 살고, 장년에는 돈에 끌려 살고, 노년에는 병고에 끌려 시달이다 간다. 인생의 짧은 세월 속에서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데 한해가 벌써 12월 마지막 날에 가듯이 인생이 모두 다 마지막을 향해서 가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결국이라는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 그 결국이 무엇인가?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음이며 평안이라 생각한다. 첫째, 인생은 돌아가는 존재이다. 솔로몬이 전도서 본문에서 우리에게 특별히 교훈하고 있는 말씀은 돌아간다는 것이다. 인생은 종착점으로 가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5절에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본문에‘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고 한다 우리는 한해가 끝날 때 돌아간다는 사실에 특별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사람이다. 둘째, 돌아갈 날이 가까울 수록에 주목하라. 본문 3절에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맺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다리가 구부러지고 허리가 구부러진다. 치아로 맷돌질해서 먹고 살았는데 이가 빠져서 맷돌이 잘 안 돌아간다. 이 몸의 창문이었던 눈이 이제 잘 안 보여 어두워진다. 돌아간다는 말씀을 기억하면 송년 주일에 은혜가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라 하셨다. 셋째, 우리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 14절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 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돌아가면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을 우리에게 예고해주시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고하셨다. 필경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것은 인간에 대한 심판의 선언이었다. 넷째, 그러므로 창조주를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제멋대로 살게 내버려 두었을까?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솔로몬아 네가 대표적으로 살아봐라. 네 아버지 덕에 왕위에 올라 네 맘대로 궁녀들을 데리고 살아봐라. 그리고 훗날 네가 회개하고 전도자의 길을 가라’ 하신 것 아닐까? 그래서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고 말씀한다. 전도서의 마지막 하는 말을 들어보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후대의 사람들은 그 길을 밟지 말고 젊어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라는 말씀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 자신이 우리를 돌아다보면서 새로운 해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준비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기에 인생의 참된 행복과 목적이 있다. /진명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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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돌아가는 존재(전도서 12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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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깊은 뜻(요한복음 1장 1~14절)
- 오늘날 온 세계 사람들은 서력기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올해가 서기 2021년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2021년 전에 예수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12월 25일이 되면 성탄 트리를 장식하고 카드를 보내고 캐럴을 부르기도 합니다. 성탄의 깊은 뜻은 성경 66권이 모두 예수님에 대하여 가르치고 증거하고 있으나 오늘은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그 깊은 뜻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여기서 의미하는 태초란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태초와 같은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 뜻은 다릅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며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으나, 요한복음의 태초는 그보다 더 이전, 즉 시간과 역사 이전, 영원히 아득한 태초를 의미합니다. 이 태초에 말씀이 함께 계셨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은 사람의 생각을 표현할 때 쓰여지는 표현 방법입니다. 말하는 것을 통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볼 수 있으며,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이란 자신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자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생각이 말씀으로 나타나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때 곧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요 1:14). 이 뜻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 말씀으로 나타나셨으며 이 말씀이 자기 행동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이 바로 성탄,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 가정 안에, 우리 마을에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며 평범한 인간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땅에 오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이 바로 성탄의 깊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민족 가운데 유대를 선별하시고, 이 민족을 못자리 민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를 근거로 하여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고 당신의 뜻을 피력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역사하셨던 바로 그곳 유대 한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은 탄생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였으나 태어나신 곳은 왕궁도 아니고, 따뜻한 방도 아니고, 외양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던 우연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겠으나 하나님의 역사, 섭리 속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외양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모르고 지나갔던 지난 성탄은 접어 두고라도 올해의 성탄은 나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우리의 생활을 현실화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그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영접은 환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등지고 모르는 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외양간 말구유로 초라하게 오셔도 우리는 주님을 주님인 줄 알아야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도 예수님인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주관이 앞서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예수님에게 못 미친다고 실망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는 안 됩니다. 지나간 나의 생활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혹시 내 생각과 같지 않다고 예수님을 못 박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눈을 떠서 이번 성탄을 뜻깊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한강교회 설립목사 · 한국기독교부흥협 증경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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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깊은 뜻(요한복음 1장 1~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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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대상 21장 1-8절, 고전 7장 17-24절)
- 오늘 다윗의 인구조사 명령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숫자로 확인하고 싶은 다윗의 불신앙을 드러낸다. 수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승전을 하고 남의 나라를 자신의 밑에 두자,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는 전쟁이 아니라, 군인이 될 만한 사람들의 숫자를 세면서 자신의 전쟁을 하고 싶은 욕망에 빠져 들었던 것이다. 만약에 이렇게 이해한다면, 다윗은 자신의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다가, 이제 왕위에 오르자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신의 정치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충신이었던 요압마저도 염려하고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셨고, 결국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와 용서를 빌어야 했다. 한국교회는 덩치가 커지고, 돈이 쌓이고, 권력이 생기자마자 다윗과 같은 죄를 저질렀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었는데, 세상의 조롱과 모욕의 대상이 된 것이다. 불의한 세상에 정의를 행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보다 더 세속적이고, 일반 시민사회보다 더 부도덕했기 때문에 손가락질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 시편의 저자처럼 우리가 다시 주님의 법도에 따라 옳게 선다면 주님께서는 분명 기회를 주실 것이다. 기회를 주실 때에 놓치지 않고 잡는 것이 지혜인데, 그런 지혜는 성공을 목표로 삼고 목회했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충실하게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다. 저는 총회나 노회에서 제게 맡겨진 일들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하는 편인데, 어떤 것은 스스로 나서서 하는 것도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총회 영성수련원의 활동이다. 오늘날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고, 여기에 함께 참여하시는 분들은 대체적으로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진실하게 주님의 길을 가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오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처지 그대로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부름은 세상의 정치적 사회적 삶의 위치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고, 하나님의 사역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루어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할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배웠든 못 배웠든, 가졌든 못 가졌든, 권력이 있든 없든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부름은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특수인식의 활성화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느냐 삼지 않느냐인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사는 사람과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 사회적 지위는 노예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유인으로 살아간다. 자유인이지만 돈이나 과거에 갇혀 있고, 교만하거나 자기를 비하하면서 종의 모습으로 사는 사람과 다르다. 자유인이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 섬기는 삶을 살아간다. 사랑으로 섬기면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세상과 사람을 위해 섬기러 오신 예수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 문제는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 모두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데 한 몫을 담당하자. 거대한 계획도 필요 없고, 많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여러분이 계신 그 자리에서 부르심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면 된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된다. 오늘 저도 여러분에게 권고한다. 여러분 모두는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분수 그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처지 그대로 살아가라. 다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라. /생명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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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대상 21장 1-8절, 고전 7장 17-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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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대하여(마태복음 6장13절)
- 그리스도인들에게 시험은 영적인 침체와 영적인 겨울잠과 같다. 가장 고통스럽고 긴 시간이다.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부패와 전적인 무능력과 전적인 무지의 정체성을 지닌 우리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주님은 기도하기를 가르치신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 땅의 지체인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둘째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셋째 성령님을 따라 살아야 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 16) 넷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은총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성령님의 전 임을 알아야 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성령님의 전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첫머리인 하나님 영광 즉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적 심판과 종말적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을 선하고 거룩한 위치에서 두려워하며 거룩 즉 죄의 부패성과 오염성을 멀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와 헌신의 삶을 살며 무시로 성령님안에서 기도하고 성부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과 성자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과 성령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찬양하며 날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거룩한 사귐과 다스림에 참여되며 하나님 나라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되어 교회를 받들어 섬기고 세워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신령한 위치에서 살아갈 적에 시험에 들지 않는 삶을 살수 있다. 우리들의 힘과 능력으로 신령한 삶을 살수 없다.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주리고 목마른 심령으로 간절히 사모하며 간구할때만 가능하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하나님께서는 부성적 사랑으로 우리들이 신령한 삶을 살수 있도록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러므로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로시 시험에 들지 말고 신령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한다./주명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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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대하여(마태복음 6장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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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하는 큰 경건(딤전 6장 33절~10절)
-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마무리하면서 디모데에게 말씀과 경건의 자세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다. 먼저 3절~5절을 보면, 말씀과 경건의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이러한 자들의 특징은 4절과 5절과 같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러한 자들은 말씀을 떠난 자들이고, 경건조차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모양새만 갖추게 된다. 경건이라는 단어는 두 글자이지만, 경건의 의미는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를 말할 도로 크다. 즉 경건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말씀으로 인내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절제와 인내”를 필요로 한다. 벧후 1장 5절~7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절제와 인내를 거쳐 경건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경건의 끝은 사랑이다. 그러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절제와 인내가 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살아가게 된다.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경건을 자신의 이익으로 여기는 자들의 모습은 9절, 10절과 같다. 9절에서는 “부하려 하는 자들”과 10절에서는 “부하려 하는 자들의 마음에는 돈을 사랑함”이 있다고 말씀한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이 바로 이 땅 가운데에서 많은 소유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의 기준점을 “돈”에 둔다. 돈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점과 목적이 세워진다. 다시 본문 9절, 10절을 보면, 돈을 사랑함으로 부하려하는 자들의 결과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한다. 시험과 올무,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 파멸과 멸망, 그리고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건의 큰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6절을 보면,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자족하는 마음은 “충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더 이상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자족하는 마음은 물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7절과 8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바로 인간으로써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인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라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자족하는 큰 경건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이 고백한 자족함의 비결을 나눔으로 마무리하고자한다. 빌립보서 4장12절~13절이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매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을 탓하기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자족하는 큰 경건 가운데 거하시기를 간구드린다. /조치원장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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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하는 큰 경건(딤전 6장 33절~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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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넘치게(로마서 14장 17절)
- 이스라엘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네 마음의 밭을 새로 갈라”고 외쳤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 밭을 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수님께서 마음 밭에 대하여 돌작밭 같은 마음, 길가와 같은 마음 가시덤불이 있는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에 대한 교훈은 유명한 것이다. 사실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밭을 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마음 밭은 몹시 거칠고 메마르고 어지러워졌다고 하겠다. 자갈투성이에 잡초가 무성하고 독버섯과 벌레가 우글거리는 황폐한 마음 밭이나 우리가 사는 공기도 오염되었고 강물도 오염되었고 사람들의 마음도 오염되어 졌으니 결국 정신적 부패는 심각한 것이다. 우리 국민의 마음이 더러워지고 양심이 무디어지고 정신이 혼탁해지고 심히 약해졌으며 혼이 흐려지고 취하여 버렸다. 그러기에 가장 시급한 것은 마음을 씻는 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시급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 대학이 늘고 대학원이 늘어 고도의 지식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공부가 시급하다. 영어공부, 과학 공부 보다 마음공부가 더 시급하다. 하늘나라는 내 마음 속에 있다고 성경은 외치고 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어떤 마음인가? 사랑과 평화와 감사가 넘치는 마음이 곧 천국이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감사의 달을 맞이하여 내 마음이 천국이 되어 검사가 넘치는 역사가 임하기를 기원한다. 감사는 마음에 만족함이 넘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미덕이다. (빌 4:11)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존하기를 배웠노라” 바울 사도는 고백했다. 그렇다면 마음의 만족은 어디서 올까? 바울 사도는 (빌3:7) “내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산 소망 중에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인 것이니 이 세상의 것은 다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감사는 마음에 평안이 넘칠 때 나타나는 평안의 열매이다. 이 평안은 예수님의 선물이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셨고 이 평안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은혜이니 교회의 은혜와 평강이 있을 것이 인사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이 기쁨 넘치게 된다. 감사는 사랑의 노예가 된 사람의 행동이다. (롬8:25-2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외친 이 외침은 온 그리스도인의 외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엡3:18-9) “하나님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를 깨달은 것이니” 우리는 하나님의 포로가 된 생활인 것이다. 사랑의 노예는 일을 하면 할수록 희생을 하면할수록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는 것이다. 사랑의 노예는 수고가 감사로 되고 사랑이 없는 곳에는 불평뿐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역사만이 참된 신앙이니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만족과 평강과 사랑의 삼위일체의 인간성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감사는 그 사랑의 믿음과 직결되는 신앙의 열매이기도 하다. /예장 합동해외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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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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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넘치게(로마서 14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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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분노가 가득할 때(시편109:1~10절)
- 요즘 어디를 가나 화가 나서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분노라는 감정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망가트리는지 우리는 그 해악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라는 감정을 조절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이것은 모세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모세는 가장 위대한 영적 지도자 중 한 사람이자, 하나님으로부터 온유한 자라고 인정을 받은 자였다. 그런데 그렇게 출애굽부터 40년 광야 생활하는 내내 백성들의 온갖 불평과 불만을 잘 참고 견디던 하나님의 사람도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가나안 입구에서 “우리가 너희를 위해서 물을 내랴!”라고 하면서 지팡이를 두 번이나 내려치며 분노하였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맛보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쉽게 분노하지 말아야 할 것다. 하지만 우리가 분노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가 분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때로는 분노하되, 분노의 감정을 잘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분노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 안서 잘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분노해야 할까? 첫째, 분노의 감정이 생겼을 때,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표현해야 한다. 시편 109편은 다윗의 시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라는 사랑과 인정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지금 불같이 화를 내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다윗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때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분노를 쏟아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분노를 처리하는 방법이다. 분노의 감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본성입니다. 그런데 이 감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을 때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고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해치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분노를 잘 다스리셔서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둘째, 분노를 하되 마귀에게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사도 바울은 분노하되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말하며, 그 방법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먼저, 분을 내되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가 분명한 우리들은 분노의 감정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즉 나를 분노하게 한 사람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분을 표출하여 나의 마음도 상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심히 상하게 했다면, 이것은 분명히 마귀에게 틈을 내주는 죄를 짓는 것이다. 분을 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면 이것이 바로 분노가 죄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세상이 온통 화날 일 천지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언제 끝날지 모르고, 정치는 혼란스럽고 경제 상황은 매우 좋지 않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배와 기도 생활마저 제대로 못 하시는 분들이 많다 보니 심령이 메마르고 분노의 감정이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때,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잘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준 천국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패역하고 음란하며, 죄가 크고 사랑이 식은 이 세상에 참된 자유와 만족, 평안함이 가득한 세상을 이루시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분노가 가득할 때, 이것을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마음의 분노가 생겼다면,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쏟으시길 바란다. /새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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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분노가 가득할 때(시편109: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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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같은 이’는 예수 그리스도인가? (요한계시록 1장 13∼16절)
-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계시록 1장 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을 한다. 바른 해석일까? 너무도 이상한 것은 사도 요한이 삼년 반 동안이나 주님을 따라 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던 터라 “인자”와 “인자와 같은 이”가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요한 사도가 본 “인자 같은 이”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닐 수 있다. 첫째,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계 1장 13절.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인가? 천사장인가? 우리가 알아 둘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지 않으나 일곱 천사장은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다. 계 15장 6절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를 보면 일곱 천사장의 가슴에 금띠가 있으므로 “인자 같은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천사장 중에 한분이다. 둘째,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계 1장 14절). 천사의 증언이나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털은 노란색 계통의 색(금발)을 띠고 있으나 미카엘 천사장의 머리털은 흰 색을 띠고 있으므로 “인자와 같은 이”는 미카엘 천사장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셋째,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계 1장 16절). “인자 같은 이”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소에 칼을 지니고 있지 않다. 미카엘은 실제로 두 개의 칼을 양 옆구리에 차고 있으므로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계 1장 13∼16절에서 “인자 같은 이”는 미카엘 천사장이다. 넷째, “인자 같은 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주장하는 근거로 계 1장 17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는 말씀을 들고 있다. 다섯 째, “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계 14장 14∼15절). 계시록 14장 14절에도 “인자와 같은 이”가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다른 천사”가 “인자와 같은 이“를 향하여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고 명령하고 있다. “인자와 같은 이”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한낱 천사의 말을 듣고 낫을 휘둘러 거둘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분명하게 “인자와 같은 이”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없고 미카엘 천사장이라면 어울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계시록 1장에 “인자와 같은 이”로서 미카엘 천사장을 소개한 이유가 있다. 앞으로 장차 인생들에게 너무 두렵고 떨리는 일들이 일어나겠고 사단과 마귀의 엄청난 공격을 받아 큰 환난이 있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비밀 병기로서 “인자 같은 이”인 미카엘 천사장을 보내어 대책을 세웠으니(단 12장 1절) 안심하라는 뜻이었으리라. 매우 중요한 것은 “인자와 같은 이”에 대하여 관념적인 해석에 그칠 것이 아니다. 머리털이 희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고, 두 개의 칼을 지니고 있는 “인자와 같은 이”인 군대장관 미카엘 천사장을 우리는 주목해야한다. /SMG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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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같은 이’는 예수 그리스도인가? (요한계시록 1장 13∼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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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회복의 길로 나갑시다(호세아 1장 2~9절)
-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할 때 회복의 길로 인도하신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하였음이니라”(호세아 1:2) 존 맥아더 목사의 <주님 없는 복음>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한다 해서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불신자들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거짓 고백을 할 수 있다. 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속아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값싼 은혜와 쉬운 믿음이라는 왜곡된 복음이 교회의 순결을 망치고 있다. 그 결과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완화시키는 일과 함께,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며, 무엇이든 구원 얻는 믿음으로 여기는 부패한 포용주의가 따라왔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거부만 아니면 무엇이든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려는 것 같다. 현재의 복음주의가 만든 크고 뚜렷한 가장자리는 의심스러운 교리를 가진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일을 거역하는 마음을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존 맥아더 목사는 종교지도자들에게 거듭남을 요구하시는 요한복음 3장의 예수님과 니고데모 간의 만남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물론이고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목사와 장로들의 가치관과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있다. 특히 복음적인 가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상징을 잃어버리고 종교인의 삶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큰 혼돈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큼 이념과 종교적인 혼돈을 경험한 적이 없다. 이 혼돈은 교회 생태계와 성도들의 삶을 급격히 변화시키고 있다. 일상적인 삶은 물론이고, 교회와 노회, 총회, 연합기관의 사역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이념과 사상의 대립, 신학적 해석에 관한 독선 및 종교적인 편협은 사회적인 현상을 뛰어넘어 정치적인 이슈로 발전해가고 있다. 이렇게 심화되고 있는 현상들로 인해 교회의 지형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도 깊다. 이런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문득 오늘 본문의 호세아를 생각하게 됐다. 충격적인 하나님의 요구와 선언이다! 본문의 주인공인 호세아는 주전 8세기 북왕국(이스라엘)에서 태어나 남쪽(유다) 나라에서 예언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희한한 요구를 하신다. “창녀를 취해서 아내를 삼고, 부정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거다. 기가 막히고 충격적인 말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요구를 하실 수 있는가? 선지자를 창녀와 결혼하라니요. 아마도 오늘날 어느 목회자가 창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면 그는 온갖 비난 앞에 직면해야 하고 성직자의 삶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거기다가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더욱 수긍하기 힘든 충격적인 명령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고멜’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바로 우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분과 삶이 창녀와 같고, 음탕한 고멜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는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나라가, 교회가, 성도들이 집단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떠난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 반전의 은혜가 있다./영성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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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회복의 길로 나갑시다(호세아 1장 2~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