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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슴]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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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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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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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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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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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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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슴]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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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슴]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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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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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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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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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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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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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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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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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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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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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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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 (요 12:1~11)
- 예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시체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시점에 이르러 버린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그곳에 와서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예수와 함께 앉아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간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나사로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로가 누구인가? 어떤 자인가? 첫 번째 주님의 계획은 항상 그분의 사랑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그 분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신 희생의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저들은 대속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선택을 받은 자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던 자가 아니었습니까? 두번째 주님의 계획은 나사로가 다시 사는 부활 은총을 체험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뜻밖에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당신의 사랑하는 자가 병들어 위독하다고 전달하였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나사로 무덤의 현장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불신이 예수님을 가로막았습니다. 우리들은 큰 믿음은 있는데 작은 믿음은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믿음은 가지고 있는데, 우리 일상생활에서 큰 불가능을 만나고 고난과 고통을 만날 때 그 믿음은 사라져 버립니다. 당신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과거와 상처와 수치를 깨끗하게 씻어주심을 믿으십니까? 이제 그 크신 그 분의 사랑을 경험했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 분을 의지하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다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둘러선 무리들과, 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내신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하여 당신 기도에 응답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때 바로 그 시간에 죽었던 나사로, 벌써 죽은지 나흘이 되어 버린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걸어나왔습니다. 주님은 그 얼굴을 가린 수건과 몸을 싸고 있는 수의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사로만 지목해서 부활을 명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날에 전 인류의 부활(영생과 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의 절정입니다. 그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고 인생들로 하여금 부활의 진리를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나사로는 주님을 모시고 감사의 잔치를 열었던 자였습니다. 예수께서 초청 받은 베다니의 잔칫집은 문둥병자 시몬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모두 예수에게 은총을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나사로의 부활을 감사하며 예수를 위해 보은의 잔치를 벌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사참배 반대로 유명한 최권능목사님이 신사참배의 문제로 경찰에 잡혀 고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고문하는 순경이 매를 때릴 때마다 최목사님은 “예수, 천당” 하면서 매를 맞으셨습니다. 고문하는 순경이 하도 기가 막혀서 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매를 맞으면서도 “예수, 천당을 하느냐?” 이에 대한 목사님의 대답이 또한 명언이셨습니다. “내 몸에는 예수가 꽉 차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튀어 나오니 듣기 싫으면 때리지 말아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 예수의 사랑을 받은 사람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예수께 감사하여 보은의 잔치, 곧 감격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일어납니다./창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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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 (요 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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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따라가려면 (눅9:57~62)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예수님과 세 사람 대화 속 공통적인 단어는 타동사 “따르다”로 “그대로 되풀이 하여 행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상을 함께 하여 말과 행동을 배우며 그 분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며 그 뜻을 이어가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는 고백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임을 증명한다. 본문을 통해 내가 이끌어가는 인생이 아닌 따라가는 진정한 제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기 바란다. 첫째:안정감을 포기하라(57~58)어디든지 따라갈 수 있다는 이에게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는 한 마디로 나그네로 사는 것이다. 야곱이 들판에서 돌을 베고 누워서 잠을 청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고 그곳을 “벧엘”(창28:19), 즉‘하나님의 집’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집이 가장 안정감을 주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머리 둘 곳도 없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안정감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나의 안정감은 어디에 있는가? 광야를 지나고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잠들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축복은 세상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둘째:우선 순위를 분명히 하라(59~60) 장례는 대부분의 율법적인 행위들보다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의 대답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60절)고 하신다. 이는 부모를 위한 일을 뒤로 하고라도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60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떠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나에게 분명한 확신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 있지만 아직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돌아보며 회개하게 된다. 셋째:과감한 결단을 내리라(61~62)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본인의 결단과 헌신이 먼저 있어야 한다.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당장 예수를 쫓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막1:16~20)이 그랬고, 세리였던 마태도 예수님이 부르시자 그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 나섰다(마9:9). 그들이 12제자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남들보다 탁월하고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이 있을 때 과감한 결단 때문이다. 과감한 결단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표현대로라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62절)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과감한 결단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62절)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고 하셨는데 오히려 십자가 대신 나만을 위한 안정감, 흔들리는 원칙, 머뭇거리는 확신을 메고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 이같이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머리를 맞대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제자로 세워져 가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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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따라가려면 (눅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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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자리는? (눅9:37~43)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내 신앙의 상태의 바로미터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에서 보듯이 해답은 금방 나온다. 나는 지금 어느 자리에 머물고 있는가? 말씀을 통해 각자의 모습을 돌아보고 온전한 믿음의 자리에 나를 바로 세우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문제만 있는 자리(37~39) 큰 무리가 가운데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38절)라고 외치는 아비가 있다. 변화산상에서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눅9:33)라고 말했던 베드로의 제안보다 예수님의 마음은 문제를 안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산 밑에 계셨다.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고 하신다. 문제의 자리에 서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에 담대할 수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책망만 있는 자리(40~41)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아비는 아들의 귀신들린 상태를 이야기함과 제자들이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41절)라고 책망하신다. 이는 수많은 이들의 관심사는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귀신을 과연 스승인 예수님이 쫓아낼 수 있는지에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신다. 책망은 아프고, 쓰리지만 그 주님의 음성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돌이킬 수 있는 영적 자세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셋째:영광이 드러나는 자리(42~43) 귀신은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겨우 떠나 가니라”(39절)에서 보듯이 자기가 원하는 순간에 나타나서 그 아들을 괴롭게 하였다. 사람들에게는 잠시 떠난 것처럼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꾸짖음만 듣고 떠날 수 밖에 없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 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9)고 이 원리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사단은 신앙인의 삶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유발하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절망으로 밀어 넣지만 그 순간 오늘 말씀을 기억하자!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위엄이 드러나야 하는 순간임을 말이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시작되었듯이 내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하나님께 묻고, 그 음성을 들으며 순종할 수 있는 자의 머무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임을 명심하여 한 주간 어느 곳이 되었든 믿음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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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자리는? (눅9:3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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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선 (눅9:10~17)
- 오병이어의 기적 앞에서 어떻게(how)에 집중하기에 정말 중요한 왜(why)를 놓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믿음이 성숙해 질수록 방법에 시선을 두는 어떻게(how)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바라보는 왜(why)에 시선을 두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현상이나 상황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놓치게 된다. 본문을 통해 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첫째: 나만 바라보지 말라(10~11) 예수님과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받은 은혜를 나누고 더 깊은 교제를 위해서 벳새다 지역의 빈들(10절)로 향하셨다. 제자들은 나를 통해서 이루어진 일들에 온통 시선을 두고 있지만 예수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계신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6)처럼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한결 같으시다. 시선이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으면 돌려보내고 피하고 싶지만 다른 이들을 향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배고픔과 궁핍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둘째: 없는 것만 바라보지 말자(12~15)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3절)고 명령하신다. 제자들은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차고 넘치게 주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계셨다. 사르밧에 살던 한 여인의 집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남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으며(왕상17:14), 빌려 온 모든 그릇에 기름을 가득 채우는 엘리사의 기적을(왕하4:1~7)을 통해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제자들은 손에 들려 있는 작은 것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 작은 것에 덧 입혀질 크고 놀라운 것들을 바라보셨다. 불신앙의 시선은 내가 지금 얼마나 큰 것의 한 부분을 붙잡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한다. 셋째: 남은 것만 바라보지 말라(16~17) 왜 그 남은 것들을 거두라고 말씀하셨을까? 인간의 본성상 그 남은 것들이 사람들의 손에 들려 흩어지게 된다면 그것은 불신앙의 도구가 될 것이 뻔하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놋뱀이 세워진다(민21:4~9). 그런데 이 놋뱀이 500여년이 지난 히스기야 시대의 종교 개혁 과정 속에 놋뱀을 부수고 그저 놋조각에 불과할 뿐이라며 ‘느후스단’이라 불리게 된다(왕하18:3~4). 남겨진 것을 보며 기억하기 보다는 이미 차고 넘치게 주셨던 더 많은 것을 기억하며 바라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나의 시선이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지 돌아보며 참된 믿음의 시선을 가진 자의 인생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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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선 (눅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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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언약(창 2장 1~3절, 15절, 18~25절
-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창조라는 말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을 할 수가 있다. 이를 발명·발견이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과 닮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창조에 동참할 수가 있다. 창조언약은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맺은 언약을 말한다. 창조언약은 일방적인 언약이라고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일방적이란 말이 좋은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기 때문에 그분의 일방적인 언약은 사람에게 복된 일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창조언약은 안식의 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를 통해 출예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이란 명령을 주셨다. 그리고 그 언약을 주시면서 남종과 여종, 그리고 짐승에게까지 안식일에 쉬라고 말씀하셨다. 짐승에게까지 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죽어라고 일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살라고 일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죽도록 일만 하다가 생을 마친다. 그러기 때문에 안식일에 쉬어야한다. 그리고 예배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야한다. 더불어 쉬는 것도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쉴 수도 없다. 우리가 쉬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안식일 날 쉬라고 하셨지만, 하나님은 안식일 날 쉬시지 않는다. 안식일 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이 쉬고 싶으셔서 안식일을 만드신 게 아니다. 우리에게 안식일 날 쉬면서 복을 받으라는 의미에서 만든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쉬면서 복을 받으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일하라고 만드셨기 때문에 충분히 쉰다면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여기에 충분히 쉰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서도 창조성이 발동되게 되어 있다. 두번째로 창조언약은 재능을 주신대로 일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한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같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잘하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 만약에 내가 축구에서 골키퍼를 좋아해서 하고 싶다. 그런데 골을 막지 못한다면 하지 않는 것이 맞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골은 잘 못 막지만, 넣는 것은 잘한다면 공격수를 하면 된다. 내가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마지막으로 창조언약은 결혼을 하는 것이다. 결혼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날 때부터 고자된 자와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고자된 자를 제외하면 누구나 결혼을 해야한다. 짐승도 짝을 찾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다. 이는 창조언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혼할 때 남자에게는 한 아내를, 여자에게는 한 남편을 주셨다. 이는 경건한 자손을 낳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배우자와 함께 삶을 계속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것이 자녀를 낳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에 동참하도록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시고, 자녀를 주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 주시고, 축복된 삶을 살도록 주신 것이 바로 가정이다. 이 땅에 떠나면서 남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자녀를 남기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신비롭게 만드신 계획인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데로 자녀를 낳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언약에 순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흥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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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언약(창 2장 1~3절, 15절, 18~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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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무기(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20절)
- 오늘 성경본문은 산상수훈이라고 알려진다. 산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 핵심적인 것을 모아놓은 것이다. 말씀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산에서 가르치셨다고 하면서 엄숙하고 낭만적인 멋있는 배경을 세팅해 놓고 진지한 말씀을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마태는 책을 쓰면서 그런 세팅을 하고 있다. 그중 우리에게 맞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17절을 보자 “내가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이 말씀은 교회에서 구약과 이스라엘의 신앙 역사·전통을 비판하다 보니 사람들의 의구심이 생겼다. 이스라엘은 할례를 했다. 구별을 지은 것이다. 또 안식일을 지켰다. 겉으로 드러나야 이스라엘이라고 형식적으로 구별을 지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보적 인물이 되려면 뭔가 구별을 지었다. 70년대에는 머리를 장발로 기르고, 80년대에는 길에서 데모도 했고, 괜히 청바지 잘라 입고, 피어싱 몇 개 하고, 뭐 그랬다. 너도나도 그러는 것에 대해 예수는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할례도 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 장발도 안 해도 된다. 청바지 잘라 입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이전의 형식적인 것을 무조건 폐하고자 하는 것 아니라 그런 형식이 중요한 것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이 중요한 것이라고 그래야 온전해진다고 예수는 말하는 것이다. 둘째 18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리라”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율법·구약의 모든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의 필연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서를 폐하지 않고 완전하게 해서 타락과 죄악에 대한 심판을 반드시 할 것이며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확실성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오늘 우리 현실에 대입해 보면 매우 엄숙한 말씀이다.예수님의 말씀과 약속은 매우 철저하다. 요즘 말로 세상 공짜 없다. 반드시 땀의 댓가 노동의 댓가가 있다는 말이다. 약속은 반드시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자기 몸을 매다는 희생 없이 구원의 약속을 이룰 수 없다. 셋째 19절 누가 이 일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다.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고 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일이라도 무시하지 않고 이를 행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크다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쓰레기 치우는 일, 청소하는 일, 밥하는 일 등 그런 일을 하는 자를 크다 인정하신다. 리더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자리 그것이 중요한 것이고 큰 것이다. 마지막으로 20절 “너희 의가 바리새인, 서기관들 보다 낫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고 한다. 바리새인은 금식, 기도, 성서읽기, 연구, 명상, 구제, 봉사 등을 하며 존경받았다. 서기관은 성서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개미처럼 성실했다. 요즘 얘기하면 기득권에 있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가? 그런 사람들보다 힘없고 약한 자는 더 열심히 일해야 이긴다는 것이다. 한 발짝 이라도 더 악착 같이 뛰고 싸우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다. 손자병법에 포위전은 병력이 10배가 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약자를 에워싼 기득권자들 편은 100배가 넘다. 그러면 나머지는 무엇으로 매워야 하는가? 우리의 의로 메워야 한다. 우리의 정당성. 천지가 다 없어져도 올바르다는 굳센 신념. 믿음이 우리의 무기다. /평화의 교회 목사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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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무기(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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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편 23편 1-6절, 요한복음서 10장 1-18절)
- 오늘날 현대인들은 어떤 선택할 때 매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지도 알기 쉽지 않고, 믿고 따를만한 사람, 참된 지도자, 선한 목자, 올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숱하게 많은 지식 정보들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현대인들은 선택할 때 매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지도 알기 쉽지 않고, 믿고 따를만한 사람을 찾기도 너무나 어렵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오랜 시절 예수와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고백하고 믿고 따랐다. 실로 우리의 주님, 하나님은 험한 세상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오늘 시편 23편은 이 사실을 매우 아름다운 노래로 세상에 증언한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도 이 노래를 떠올리면서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여겼다. 우리는 목자와 양을 생각하면 푸른 들판에 매우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을 떠올린다. 마음씨 좋고 잘 생긴 멋진 목동이 어린 양에게 풀을 먹이는 매우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의 유목민이 양을 치는 것은 우리가 그리는 이런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이스라엘에는 푸른 초장 같은 것은 없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한 남쪽 유다는 황무지와 광야이다. 일 년에 푸른 풀이 돋아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11월부터 2월의 우기 이후에 3개월 정도이다. 6개월 동안의 건기에는 모든 것이 메말라 버립니다. 비가 오고 풀이 나기 시작해서 자라면 이제 목자들의 삶을 바빠집니다. 풀이 많이 자라는 곳을 계속 찾아다녀야 한다. 한낮에 물을 이용할 수 있는 곳 주위에서 하루일과를 계획해야 합니다. 무더운 여름이라면 시원한 언덕 경사지들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양들이 풀을 뜯고 쉬면서 안전하게 소화시킬 장소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목자라는 직업은 이렇게 힘들고 고단하고 더럽고 거칠었기에 당시 사람들이 피하는 직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멸시를 받는 직업이었다. 랍비들과 율법학자들은 제대로 씻지 못해 냄새나고 더러운 이런 목자들을 부정하게 여겼다. 목자는 세리, 창녀, 어부들처럼 유대인들이 천하게 여겨 배척하던 직업 가운데 하나였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런 목자와 동일시 한 것 자체가 바로 은혜이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고된 길을 가신 것이다. 예언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 목자로서 실패한 일곱 가지를 지적한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않았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않았고, 상한 자를 싸매주지 않았으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않았고, 길 잃은 자를 찾지 않았으며, 양들을 힘으로 통치하고 폭력으로 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고상하고 품위 있는 길이 아니라,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고 힘들고 피를 흘려야 하는 길을 가셨다. 올 한 해도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자. 주님은 뒤에서 회초리로 우리를 몰아치지 않으신다. 앞에서 차분히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주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실 것이다. 어떤 위협이 닥치고 위기가 온다 하여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하고,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무지의 감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주며, 욕망의 어둔 영창에 갇힌 이들을 끌어내어야 할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선한 목자를 따를 때에 누구도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며, 날마다 놀라운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생명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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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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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편 23편 1-6절, 요한복음서 10장 1-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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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의 기도같이 살아가자(역대상 4장 9절에서 10절)
- 2022년 임인년 한 해 동안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며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누리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드린다. 야베스의 간절한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었으면 한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을 뜻하는 ‘야차브’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로 보건대 그의 인생은 어떤 인생이었음 짐작할 수있다. 아주 고통스러운 인생이었을 것이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힘든 환경 가운데서 지내왔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서 극복한 사람이다. 이 야베스처럼 기도하며 살자. 첫째, 하나님께 매우 귀중한 자로 살아가자.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대상 4:9). 우리들은 하나님의 귀중한 자며, 그의 자녀들이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삶을 살자. 둘째, 삶의 모든 지역이 넓혀가는 삶을 살아가자.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대상 4:10a).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먼저는 신앙이 넓혀지고, 교회가, 일터가, 학문이, 모든 분야에서 넓혀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자. 셋째, 하나님의 도우심의 역사를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자.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대상 4:10b).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2-13).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소년들의 용기를 훈련하는 독특한 방법을 썼다. 이들은 소년들에게 숲 속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만들면서 소년들의 담력을 키웠다. 시험을 받는 날 밤, 소년은 얼마나 무서움을 느꼈겠는가! 그러나 날이 밝아오면서 소년은 그의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지키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아들 몰래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게 하기 위해 밤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넷재,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행복한 자로 살아가자.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c).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7-29).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로서 2022년을 야베스처럼 행복하게 만들어 가는 성도가 되자./강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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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의 기도같이 살아가자(역대상 4장 9절에서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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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 지파의 헌신(민수기 1장 47~54)
-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년 이월일일에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남자를 계수하게 한다(민 1:1~3). 이는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생활 곧 교회생활이 악한 영들과의 전쟁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앙은 영적 전쟁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라 고 말씀한다. 레위는 ‘연합된 (자)’를 의미하며 족장 야곱과 그의 아내 레아 사이의 셋째 아들(창 29:34)로, 이스라엘 중 그의 이름을 지니는 지파의 창시자이다. 레위는 형 시므온과 연합하여 누이동생의 치욕을 갚기 위해 세겜 성에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제 삼일에 고통 할 때에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와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칼로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왔다(창 34:24 이하). 그리고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로 양과 소와 나귀와 들에 있는 것들과 세겜 성의 그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했다(창 34:27 이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야곱은 죽기 전에 시므온과 레위에게 그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중에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5~7).” 이렇게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저주 받은 레위 지파를 하나님은 계수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출 32:8~9).”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5~29)” 오늘 설교 제목은 레위지파의 헌신이다. 바로 이 헌신 때문에 계수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 편에 서있었다. 이 헌신이 저주를 축복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들의 흩어짐은 온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하는 경우가 되었다. 레위의 자손들은 성전을 섬기는 자가 되었으며 제사장 직무를 맡았다(출 2:1 이하, 6:20; 신 33:8~11).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택하여 모든 가정의 장자를 대신하는 당신의 기업으로 삼으신 것이다(민 3:11~13).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헌신이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헌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란다. /참좋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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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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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 지파의 헌신(민수기 1장 4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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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믿음으로 (히브리서 11장 1~6절)
-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2). 히브리서 말씀은 믿음의 개념에 대한 말씀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현상에 대한 말씀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았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 에 대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절) 6절의 앞부분에는 믿음의 또 다른 현상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의 개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믿음이란? 첫 번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확신이란?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믿음이 생길 리가 없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험에 드는 이유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우상을 만드는 이유도,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믿음이란? 두 번째로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분이란 것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에게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저 믿음의 대상일 뿐, 아무런 능력이 없는 분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며,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며,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응답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믿음의 삶이란?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세상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삶이다. 이러한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는 특징이 있다. 첫 번째로 찬양이 넘치는 삶이다. 나의 마음이 온통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기에 찬양이 그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다. 현재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자족할 수 있기에, 범사에 감사가 넘치게 된다. 세 번째로 기쁨이 넘치는 삶이다.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하여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길가의 이름 모를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조차 예쁘게만 보인다. 이러한 삶이, 믿음의 삶을 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코로나로 말미암은 팬데믹의 장기화로 인해, 힘들고 어려운 시기다. 교회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으며, 성도들이 믿음을 잃어가며 넘어지고 있다. 이러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살아계시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감사와 기쁨, 찬양이 넘치는 성도의 삶이 되길 바란다. / 농어촌목회자협 마을목회위원장, 덕곡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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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믿음으로 (히브리서 11장 1~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