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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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14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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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5-01-20
  • [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1-14
  • [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2-17
  • [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1-22
  • 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1-21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악한 세대의 특징(눅 11장 29절~32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딤후3:5)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고 권면하고 있다. 본문의 무리들은 말씀을 듣는 것처럼 보이고,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예수님이 단호하게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요2:25)을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해 악한 세대의 특징을 살펴보며 시대도 악하고, 나의 믿음도 연약하지만 새롭게 각오를 세우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 표적을 구한다. 악한 세대라고 책망을 받는 이유는 “표적만”구하는 자세 때문이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바알세불의 힘입은 것(15절)이라 주장하거나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분명한 표적(16절)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표적만을 구하기 때문에 악한 세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악한 세대이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하신다. 표적을 쫓아다니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한 믿음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 믿음 없이 사는 것이 악한 세대의 모습이다.     둘째 사모함이 없다. 남방 여왕은 열왕기상 10장에 솔로몬을 찾아온 스바(에티오피아)의 여왕으로 예수님이 땅 끝(31절)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의 먼 곳이지만 직접 찾아올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악한 세대를 안타까워하시면서 스바 여왕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진리에 대해서는 사모함이 없고 자기 눈에 보이는 표적만을 요구하는 어리석은 모습 때문이다.    사모함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세로서 하나님은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107:9)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진리에 대한 열정과 사모함 없이 예수님 주변만 얼쩡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짚어보아야 한다.    셋째 찔림이 없다. 예수님이 니느웨의 회개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시고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지만 사람들은 회개하고 돌이키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까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5~16)고 말씀하고 있다. 악한 시대를 살기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 악한 세대의 특징은 찔림이 없는 것이다. 찔림이 없기에 처절한 회개도 따라오지 않는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오늘 이 시대는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없지만 보혜사 성령과 함께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찌 보면 예수님 시대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세대임이 분명하다. 베드로 사도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는 선포가 악한 세대를 벗어나 선한 세대를 살고자 하는 이들의 행동 강령이 되어야 한다. 한 주간 악한 세대의 잘못된 습성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바로 서서 승리하는 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길목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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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2-05-18
  •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방식 (눅12:49~59)
    길목교회 주재훈목사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믿음을 가진 자의 분명하고 정확한 길을 제시해 주신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을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고 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좁은 길, 좁은 문을 선택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선으로 힘들고 어려운 삶 가운데 멸망이 아닌 참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분쟁을 인정하라(49~53)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불은 화평이 아니라 분쟁의 출발점 이였으며(51절), 마태는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고 기록한다.   세상을 따라 살며 믿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큰 성읍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없어 심판 받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선포하셨다.   분쟁이 있기에 힘든 시간들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분쟁이 있다는 것은 죄에 때 묻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분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며 그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이되길 바란다.   둘째:어리석음을 인정하라(54~56)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모스는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선포한다. 생명의 말씀인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 책망 받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도 다를 바 없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바울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는 고백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셋째:잘못을 인정하라(57~59)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 판결을 받으러 가야 한다면 길에서라도 화해하기를 힘쓰라(58절)고 하시는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용서를 구하라는 말씀이다.   베드로에서 천국의 열쇠를 주시면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고 하셨고, 믿음의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주셨다(마18:18).   나의 실수와 잘못이 이 땅에서 당사자와 온전하게 풀어지지 않으면 그 문제는 하늘에서 묶여 있는 상태가 된다. 철저한 회개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에게는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고, 그 이후에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자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말은 하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변함없이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어리석은 모습을 회개하며 한 주간도 말씀 안에서 승리하는 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5-16
  •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눅12:29~34)
    길모교회 주재훈 목사  성경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이라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마음에 무엇을 담고 사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예수님은 온통 이 땅의 풍요로움만을 마음에 담고 살기에 믿음 없이 살 수 밖에 없음을 책망하신다.   말씀을 통해서 나의 마음은 지금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를 점검해 보고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깨끗이 비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채우기를 축원한다. 첫째:채우지 말아야 할 것(29~30)  이 세상의 것들로 마음을 채우면 찾아오는 것은 ‘근심’(29절)이다.   근심은 내 힘으로 살고자 할 때 찾아오는 마음이므로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고 성경은 말한다. 이렇듯 매일의 삶 속에서 근심의 무거운 짐에 눌려 사는 인생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시기에(30절)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아닌 일용할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근심은 내 손에 들려진 것보다 남의 손에 들려진 것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생긴다. 따라서 근심은 감사가 없기에 자리 잡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채워야 할 것(31~32)  마음이 세상의 근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의 나라를 구하라”(31절)는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나마 내 손의 있는 모든 것조차 다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는 것 같고 현실은 당장 내 눈 앞에 있으니 용기 있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맞아들이고 가득 채우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32절)이기에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최우선으로 삼아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채우는 비결(33~34)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 품고 사는 자는 이 땅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자이다.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른 이에게 흘려보내는 것이 하늘의 보물을 쌓는 일이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전11:1~2)   이것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지혜로운 삶을 사는 자의 모습이다. 썩어질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하늘의 것에 투자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11:25)는 말씀에서 보듯이 나의 물질을 흘려보내는 것이 더 많은 것들을 하늘에 쌓아두는 최고의 방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니라”(34절)는 말씀은 내 마음이 어떤 보물로 채워져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신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고 하신다.   이 세상의 것들로 마음이 채워져 있으면 절대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이 땅의 보물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속에 차고 넘쳐서 세상에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5-09
  • 의심 많은 도마(요한복음 11장 16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발명 혹은 즐겨 부르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노게, 즉 “우레의 아들’ (막3.17)로 불렸고, 시몬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신 후로는 베드로가 주된 이름이 되었다. 바돌로오매는 요한복음에서 나다나엘로 나타나는데 어느 것이 본명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다대오 출신의 유다는 자신의 본업인 유다보다는 그의 출신인 다대오가 오히려 그의 이름처럼 사용된 사람이다.   그리고 도마는 토마스(Thomas)라는 이름으로 ‘디두모’(쌍둥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여기에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비공식적인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의심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라고 부르기까지 gks다. 그런데 이러한 별명을 가진 제자들 가운데 조금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도마”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별명이 되려면 그래도 지속적으로 어떤 특징을 나타내거나 잘못한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야고보와 요한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것은 그들이 노상 성격이 크고 불같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붙여 주신 이름이었다. 하지만 도마는 딱 한 번 의심했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믿겠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그만 ‘도마’ 하면 ‘의심 많은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혀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제자들치고 예수님이 부활을 믿었던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나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던 것이다. 도마 역사도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이 보고 나서야 믿었던 것처럼, 그 또한 눈으로 직접 보아야 믿겠다고 한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만 정말 확실한 사실에 입각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더욱이 도마는 남에게 해 끼친 적도 없다. 베드로처럼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 배반하지 않겠다고 한 적도 없었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적도 없었다. 야고보와 요한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열을 받아 ‘하늘의 불을 내려 멸해도 되겠다‘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성경은 도마가 매우 의협심이 강한 사람임을 알려 준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 유대로 다시 가지고 하시니까 다른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돌로 처려 하는데 꼭 가야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고 말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의심 많은 사람이 일까?   또한 도마는 매우 솔직한 사람이었다. 처소를 예비하라 가지고 할 때에 솔직하게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기에 그 길을 믿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도마는 말을 함부로하지 않는 진실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은 한 번도 도마가 의심많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별명은 교회가 도마에 대해 가르치면서 기억하기 쉽게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 별명처럼 되어 버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고 믿게 된 도마는 후에 가장 확실한 순교자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연약점이 우리 인생의 전환점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주님의 역사가 오늘 우리 모든 성도에게 나타나게 되기를 축복한다./대전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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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2-05-04
  • 두려움을 만날 때(눅12:1~12)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두려움은 사람을 위축되게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밀려오는 세상적인 두려움의 파도 때문에 넘어질 수는 있지만 아주 쓰러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두려움을 넘어서는 해답을 찾아야 한다.   첫째:현실을 바라보지 마라(1~4)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한 책망은 그 영향력이 예수님 주변에 모인 수만 명이나 되는 이들의 일상에 깊이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태어 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아들을 고쳐 주심에도 부모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 함이러라”(요9:22)이다.   종교지도자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 서민들이 마주치는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예수님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들에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며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2)고 말씀하심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둘째:하나님을 바라보라(5~7)  참새 두 마리가 팔리는 것(6절), 사람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신 분(7절)이라는 의미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두려워할 분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크고 두려운 광야”(신1:19)를 지나게 하신 하나님이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신1:31;33)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나 보다 나를 더 잘 아시기에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이 계시기에 참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됨을 명심하며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  셋째:약속을 바라보라(8~12)  예수님은 부인하지 않는 자를 기억(8절)하며, 성령이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하실 것(11~12절)을 약속 하실 뿐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하기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하신다.   두려움은 내게 해답이 없다고 생각할 때 드는 감정이기에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성령과 함께 함으로 누리는 평안에서 온다. 그 해답은 이미 말씀 안에서 주어져 있다. 이사야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40:8)고 고백하고, 예수님도 분명하게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고 말씀하셨다.   분명한 약속이 있기에 어떤 두려움에서도 담대히 승리할 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    두려움을 뛰어넘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구체적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고 말한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 주셨고, 그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는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인생의 두려움 앞에 서게 될 때 하늘로부터 오는 사랑의 힘으로 모든 두려움들을 이겨내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5-02
  • 악한 세대의 특징(눅11:29~32)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딤후3:5)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고 권면하고 있다. 본문의 무리들은 말씀을 듣는 것처럼 보이고,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예수님이 단호하게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요2:25)을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해 악한 세대의 특징을 살펴보며 시대도 악하고, 나의 믿음도 연약하지만 새롭게 각오를 세우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표적을 구한다(29~30) 악한 세대라고 책망을 받는 이유는 “표적만”구하는 자세 때문이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바알세불의 힘입은 것(15절)이라 주장하거나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분명한 표적(16절)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표적만을 구하기 때문에 악한 세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악한 세대이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하신다. 표적을 쫓아다니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한 믿음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 믿음 없이 사는 것이 악한 세대의 모습이다.  둘째:사모함이 없다(31)  남방 여왕은 열왕기상 10장에 솔로몬을 찾아온 스바(에티오피아)의 여왕으로 예수님이 땅 끝(31절)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의 먼 곳이지만 직접 찾아올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악한 세대를 안타까워하시면서 스바 여왕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진리에 대해서는 사모함이 없고 자기 눈에 보이는 표적만을 요구하는 어리석은 모습 때문이다.   사모함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세로서 하나님은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107:9)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진리에 대한 열정과 사모함 없이 예수님 주변만 얼쩡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짚어보아야 한다.  셋째:찔림이 없다(32)  예수님이 니느웨의 회개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시고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지만 사람들은 회개하고 돌이키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까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5~16)고 말씀하고 있다. 악한 시대를 살기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 악한 세대의 특징은 찔림이 없는 것이다. 찔림이 없기에 처절한 회개도 따라오지 않는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오늘 이 시대는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없지만 보혜사 성령과 함께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찌 보면 예수님 시대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세대임이 분명하다. 베드로 사도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는 선포가 악한 세대를 벗어나 선한 세대를 살고자 하는 이들의 행동 강령이 되어야 한다. 한 주간 악한 세대의 잘못된 습성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바로 서서 승리하는 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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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5
  • 부활을 준비했는가?(눅23:50~56)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육체를 입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본다. 모든 것이 끝이 났다고 느껴지는 순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새롭게 시작하는 일에 쓰임 받음을 보게 되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아가면서 믿음과 용기를 잃어버리지 않으며 부활의 기쁨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기다리는 자(50~51)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공회 위원”직은 그의 사회적 지위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면, “선하고 의로운 사람”(50절)은 그의 신앙적인 성품을 보여준다.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하는 순간 그 일에 찬성(51절)하지 않아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선하고 의롭기” 때문에 악한 일에 동참하지 않게 되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의 자세로 살 때 하나님에게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게 된다.   예수님이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마25:1~13)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기다리며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주어진 삶을 선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부활의 소망을 두며 살아가길 축원한다.    둘째:행동하는 자(52~54)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을 준비하는 일들이 되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때로는 지금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감동으로 믿음의 행동을 할 때 그 분의 뜻을 이루게 된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아들 이삭을 얻는 복을 받을 뿐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 심판의 소식도 전해 듣게 되는데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는 놀라운 신뢰까지 부어 주신다. 지금 내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드리고, 행동하는 자가 될 때 부활의 참된 기쁨에 함께 할 수 있음을 명심하길 바란다.  셋째:함께하는 자(55~56)  본문의 여인들은 공생애 기간에도 함께 하며 필요한 것을 제공하였고, 고통당하시는 순간에도 지켜보며 함께 울며 아파했다. 이제는 무덤이 어디 인지를 확인하고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여 예수님의 장례까지 함께 한다.   베드로조차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고 맹세했지만 예수님의 예언처럼 저주하면서까지 세 번 부인한다. 마지막을 함께 한다는 것이 때로는 축복이 될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엄청난 비난과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활의 축복은 끝까지 함께 함께 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내게 붙여 주신 이들을 돌아보며 마지막까지 함께 하기로 결단하는 것이 부활을 맞이하는 참된 그리스도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아리마대 요셉이, 갈릴리의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마음 아파하며 마지막을 함께 했을 때 부활의 기쁨이 그들의 삶에 더욱 선명하게 새겨지게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부활절의 아침에 나는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떤 일을 하며, 무슨 준비를 하고 살고 있는지 돌아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자로 참된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4-18
  • 부활의 권능으로 산증인 되자(누가복음 24장 44절~49절)
      성경 말씀에 보면 크고 작은 수많은 예언이 있다. 그러나 가장 크고 완벽하게 성취된 사건은 바로 부활절이다. 일찍이 기독교가 이날이 없었다면 이 땅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특별히 기독교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 때문이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믿느냐”(요 11:25) 하셨다. 우리 모두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주님을 믿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둘째,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말씀(눅24:44.46)하셨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낮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주실 것임이니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 6:1.2)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여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시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뉘지 아니할지니라“(겔 37:21.22) 하셨다.   남북 우리 민족은 예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 하셨으며(갈 3:7, 29) 예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가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미21:43-45) 하셨기에 남북이 6·25 이후 잿더미 속에서도 이남은 복음이 확산되어 전 세계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세계 10대 강국에 들어가는 나라가 되었다. 이북은 이미 1907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칭했던 평양을 생각해 볼 때 우리 민족 남북은 영적 이스라엘이기에 죽은 것 같은 남북은 예수 부활의 권능과 예수 부활의 진리 때문에 새 소망을 갖게 되는 놀라운 은혜를 성경말씀을 통해서 확신할 수가 있다.   셋째, 부활의 권능을 받아 남북은 복음 통일로 세계 복음화를 위한 산증인 되길 위함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역사와 평화통일을 주관하신 부활의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면서 부탁하신 말씀“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행 1:8-11)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는 부활의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시면서 부탁하신 말씀 성령의 권세와 능력으로 충만 받아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며 능력이 있는 기도를 드릴 때 금년은 남북이 분단된 6.25가 일어난 지 70년이 지난해다. “토지가 황무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70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역 하 36:21) 하셨다.   이제 만사에 주님의 때가 있기에 민족분단 70년이 지난 지금에 때에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들의 모든 기도 제목 응답받되 남북은 꿈꾸는 것 같은 평화통일의 새 시대가 열리는 이 선한 일에 우리 다 함께 부활의 권능으로 충만한 산증인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한다. /조국 평화통일협의회 대표회장·서광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4-13
  • 자기 십자가(고난 주간)-(마27:24~26)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고난 주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의 선택을 한 예수님과 이 땅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불순종을 선택한 사람들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선택에 있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말씀 안에서 이 세상의 썩어 없어 없어질 것들이 아닌 부활을 향한 믿음의 선택이 되어야 하며, 그에 따르는 책임이 있음을 깨닫고 결단하기 축원한다.    첫째:선택의 동기(24a)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 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는데 자신의 선택으로 유대인들의 민란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24a). 흔히 죄를 짓는 것이 달콤한 유혹에 걸려 넘어져서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결정적인 죄는 두려움 때문에 짓게 된다.   유혹으로 인해 짓는 죄는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두려움으로 짓는 죄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짓는 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극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완전하게 회복되기도 어렵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두려움은 무엇인가? 그저 내 것을 빼앗길 것 같은 인간적인 두려움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를 바란다.  둘째:책임의 회피(24b)   보이는 두려움에 굴복한 사람은 돌아보고 회개하기 보다는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24b). 손을 씻지만 죄는 씻을 수 없다. 손을 씻어서 자신이 선택한 일이 아니라 군중들이 선택한 일이라는 시각적인 명분은 가질 수 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보다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 있음에도 모두가 손을 씻으며 뒤로 물러나는 상황 속에서 두려움에 담대히 맞서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물러서도 된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손을 씻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셋째:선택의 책임(25~26)   “백성이 다 담대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5절)”   그 피가 어떤 피인가? 도대체 무슨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들의 죄를 위해 오셔서 죽으시고 흘리시는 그 피를, 자신들의 죄를 덮고 가리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잘못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죄악의 모습을 보며 진리를 알지 못하면  엄청난 큰 죄악에 빠지게 되는지 깨닫게 된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성공과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라면 영혼을 사탄에게도 팔 기세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기를 기도하라.   삶의 자리를 통해서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믿음의 선택을 하며 그 선택에 책임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빠져 나갈 구멍을 찾기 보다는 내가 메워야 할 구멍이 무엇인지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될 것이며,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4-12
  • 기뻐해야 할 이유들 (눅10:17~20)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70명이 둘씩 짝을 지워 전도 여행을 다녀온 후 예수님과 만나는 모습은 기쁨이 차고 넘치지만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고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과는 다른 기쁨을 바라보신다. 말씀을 통해 이 땅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참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바란다.    첫째:과거의 승리(17) 믿음으로 살았던 지난 시간동안 나와 함께 하시고 승리하게 하셨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70인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특별한 순간들을 회고하며 기뻐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같은 기쁨이 없는 이유는 말씀에 순종하여 승리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라는 순종으로 자신에게 임한 말씀을 확신하며 살아갈 때 그에게 온 인류를 구원할 기쁨의 소식이 임하였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이 감동을 주실 때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시도하고 도전하는 인생이 되라. 제자들의 기쁨은 이 과정을 통해서 얻은 진정한 기쁨임을 명심하라.  둘째:현재의 능력(18~19) 매일 나의 삶에 변함없이 예수 그 이름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예수님은 염려하셨지만 놀라운 능력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이 놀라운 역사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사는 동안 함께 할 것을 약속하시며 선포(19절)하시는데 이 약속은 부활하신 후에는 물론이고(막16:17~18), 승천하시면서도(행1:8)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음은 분명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오늘도 제자의 삶을 살며 드러나는 능력을 통한 기쁨의 선포가 되어야 한다.      셋째:미래의 약속(20)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70인을 보내실 때 그들이 전해야 할 내용도 분명하게 주셨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9절,11절)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때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 사도 요한은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2,15)고 분명하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마지막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야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이 주어졌기에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오늘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참 기쁨은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것 외에는 우리에게 남겨지지 않는다. 느헤미야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선포하며 먹고 마시며 크게 즐거워하고 명령한다. 이 세상의 기쁨에 목을 매고 살다보니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기쁨을 잃어버리고 사는 나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며 참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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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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