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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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님이 주시는 부활의 소망(고전15:1~58)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헛되이 지키네. 예수 내 구주 헛되이 봉하네. 예수 내 주 거기 못 가두네. 예수 내 구주 우리를 살리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진리의 복음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 예수님의 부활은 마귀의 사망 권세에 영원히 갇혀서 소망을 잃어버린 모든 인류의 절대적이며 유일한 희망이다. 부활이 GOOD NEWS인 것은 사망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꼼짝없이,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들, 죽음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삼일만에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기적,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또한 부활은, 세상을 장악한 마귀권세와 그의 하수인들의 힘과 계획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퀘거이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이 세상 神인 악한 영들에게 비참하게 모든 것을 강탈당한 것(질병, 불신앙, 우상섬기는 일, 미래의 소망까지 빼앗긴 인생들)을 다시 소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은 하나님의 힘이 죽음을 넘어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 역전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타락한 세상의 힘과 질서를 거스르는 도전이며 이를 응징한 大事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도에게 이 세상의 질서가 아닌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려 내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낸 대사건이어서 부활 신앙은 역경을 감수하는 신앙이고, 역전을 기대하는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고통의 시간에도 절망하지 않는 신앙이며, 억울한 순간에도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부활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영성을 갖춘 영적인 존재, 즉,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남이다. 진정한 부활신앙은 먼 미래의 그 종말적 재림의 그 날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곳에서부터 새로운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닮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님께 연합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들과 성도들이 부활의 큰 사건과 위대함을 너무 가벼운 일회성 행사로 전락시킨 면을 안타까워해야 할것이며 더 크고 위대하게 선포하며 전해야 할 것입니다. 안일하게 타협하며 내세지향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지켜져 온 것이 아닌가, 그저 나의 죽음 이후를 보장하고, 우리 성도들의 죽음에 조금의 위안을 주는 단순한 일회성 절기로 소홀이 취급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재림의 그날의 부활, 나의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다시 오늘 살아나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성경적인 부활은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죄와 더불어 먹고 살았던 육적인 모습, 자신의 죄 된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고 새로운 자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성도들이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부활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 삶의 방향을 선하신 하나님께로 고정하고 나의 존재를 의의 도구로, 성품을 주님의 성품으로 바꾸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20~58)/유향교회 목사·예장 합동개혁측 대전광역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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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4-03-28
  • [설교] 최고의 역전 드라마, 부활
    김 학겸 목사    극적인 드라마를 보면 그 안에 반전이 있습니다. 인류 최고의 역전 드라마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비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모습을 보기 전에는 부활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요20:1).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요20:2). 그리고 두 제자도 달려가서 빈 무덤을 보고 시체가 도난당했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열린 무덤은 그저 놀라운 사건에 그칠 뿐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주님을 위한 걱정이나 열정도 그저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요20:16). 마리아는 눈으로 볼 때에는 누군지 몰랐는데,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음성을 귀로 듣고 예수님인 줄 알았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마리아의 영적인 귀와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증인이 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요20:21).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다음 세대가 부활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각자 받은 사명을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충성을 다하면 됩니다. 달란트를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갖지 말고, 주님이 맡겨 주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사명을 받은 이들에게 평강과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요20:21-22). 우리의 능력과 가진 것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실력과 소유가 아닌 예수님의 성품과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사명 받은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패감과 죄책감 등으로 깊은 절망 가운데 있던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고기를 주신 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 입은 마음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의 상처 입은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과거를 가지고 괴로워하는 모습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명 감당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는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마자 그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죽음 너머에 위대한 부활이 있었음을 믿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담대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새순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3-22
  • [설교] 건축자들이 버린 돌
       성경 시편 기자는 시편118편 22부터 23절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118편 22절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면서 자주 인용한 구약성경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이 구약의 성경구절의 예언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건축자들은 교만한 지도자들이고 모퉁이 돌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지도자들인 건축자들은 이 돌이 쓸모 없다고 버립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자신들이 지을 성전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재료라 생각하고 버렸습니다. 건축자들은 성전을 짓는 최고의 기술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최고의 기술자들이 보기에 성전은 튼튼하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화려한 재료가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성전은 무너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절 2절 “여기에 있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건축자들이 건축한 이 성전은 로마 군에 의해 예수님의 예언처럼 벽돌 하나도 남김없이 허물어졌습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사라졌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전만이 존재할 뿐 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옮겨 다닐 수 없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성전이 되어 어디든 옮겨 다닙니다. 여기도 저기도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이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일을 합니다.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 성전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건축공사에서 제일 먼저 놓이는 돌이 바로 모퉁이의 머릿돌입니다. 이 돌은 건축하고자 하는 벽의 방향과 길을 결정해 주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린 돌이 되셨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성전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 머릿돌 위에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건축 재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건축 재료로 쓰임 받는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따르고 믿고 사랑하는 예수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행하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 삶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 날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기적입니다. 기적은 다시 기적을 낳을 것입니다. 그 믿는 사람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여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기적이 사방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의 인생이 풍요롭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3-04
  • 달콤한 소통(사도행전 5장 38절에서 42절)
       오늘 사도행전 이야기는 오순절 성령강림 후 사도들의 변화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 전에는 두려워하고 절망하면서 다락방에 스스로 유폐되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강림 후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우리의 구세주라고 목소리 높여 선포하기 시작했고, 앉은뱅이나 눈이 먼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소리를 높여서 사회의 권력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분개해서 제자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중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원로답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여러 번 보아왔듯이 제자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하나님께서 곧 없어지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좀 두고 보자. 이렇게 제자들을 해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말렸습니다. 그 대신 제자들을 채찍질한 다음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투옥되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채찍 맞고 걸어 나오는 제자들이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고통 속에서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기독교인들만의 특별한 모습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편해졌을 때 망합니다. 신앙은 마침내 부활이요 승리지만 그전에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생략한 부활·행복·생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고난을 생략하면 기독교는 망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 가는 것이 전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일만 되면 일을 시키거나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해서 그것을 뚫고 교회 나오는 것은 매주 전쟁이었습니다. 때로는 빗자루로 얻어맞고 여성들은 머리도 막 잘리면서도 교회에 갔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신앙이 진짜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교회 가는 것 때문에 아무런 고난이 없습니다. 다 편합니다. 교회에 와도 목회자가 쓴소리하기 어렵습니다, 교회 안 나올까 봐. 결국, 희생이나 헌신 없이 달콤한 열매만 추구하게 되면 그 신앙도 죽고 교회도 죽습니다. 우리 교회가 움직여지고 선교 공동체로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많은 성도의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정상적입니다. 너무 합리적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복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시간과 건강과 노동과 물질을 드리면 나는 당장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몸이 아프고 다른 일도 하지 못하고 돈 쓸 곳이 여러 군데인데 못 쓰니 고통입니다. 근데 그 고통을 기뻐하게 된다는 것은 거룩한 중독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어떤 고통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전통입니다. 이걸 다시 찾아야 합니다. 달콤한 고통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주민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2-05
  • [금주의말씀] 교회에서 찾을 영광
       신학교 재학 시절, 캠퍼스 안에 기숙하고 있던 학생들과 ‘뉴욕 곰탕집’에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신학교로 돌아오면서, 차 안의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드셨어요?” 모두들 잘 먹었다고 하는데 한 학생만 “아니요!”라고 답을 합니다. “왜?” 되물었더니, “짜장면이 맛이 없어요” “아니, 곰탕집에 갔으면, 곰탕을 먹어야지, 짜장면을 먹고 맛이 없다고?”하며 모두 웃었던 일이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썼던 C.S 루이스는 크리스천으로 회심을 한 후에도 오랫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교회에 대한 역할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동물원에 가는 것만큼이나 교회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의식에서 시작 된 것으로 신경이 무척 쓰이는 ‘같이하기’ 행사였다”고 하며, 교회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개인적인 탐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에 임재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크리스천의 삶이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인간으로서,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여, 어디에 속할 필요가 있다.”   파스칼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신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교회 안에 분명한 표징을 두었다.” 그러면, 교회에만 있는 그 무엇, 교회에서 찾아야 할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를 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2c-3절 말씀처럼,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변형’(transfigured)의 뜻은 ‘안으로부터 나오는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문화와 사회의 상황과 각자의 생활 속에 바쁘게 살면서, 예수님도 그 모든 영향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마음과 시간과 공간을 구별하여 모인 교회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4-6절 말씀처럼, 성경 속의 인물·사건·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체험합니다. 7절에서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은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영광된 체험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어디입니까? 변화 산 자체가 특별하고, 유명한 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변화 산입니다. 어느 교회이든지, 하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의 영광 된 교회입니다.   또한 2절에 ‘따로’, ‘높은’, ‘올라가셨더니’의 단어처럼, 우리는 예배의 시간과 장소를 특별히 구별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 중에, 나를 따로 구별하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또 8절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현실에 충실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광된 변화 산과 교회에서, 생활 현실로 돌아와 충실 하십시오. 내 생활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소명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맛을 보았으면, 그 힘으로 내 삶이 영광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세상에서, 일상생활에서 그 영광의 능력을 발휘하시길 축원합니다./목사·새빛다문화센터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1-30
  • [설교] 기도
    김국현목사    우리는 보통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제일 쉬운 일은 숨 쉬는 것입니다. 숨 쉬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워서 떡 먹기보다 더 쉬운 것이 누워서 숨쉬기입니다. 교회가 생명력이 있다면 살아있는 기도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성도들이 소유한 능력의 원천이며, 동시에 건강의 척도입니다. 성도는 어마어마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거머쥐신 분의 능력을 청구해 쓰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능력을 주시는데, 그 연결선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아무리 잠재적인 능력이 많다 하더라도 참 무력해 보입니다.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없으면 참 무력해 보입니다. 반면 몇 명 모이지 않는 교회라 할지라도 살아있는 기도가 있으면 역사를 움직이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기도의 능력을 가르쳐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2~14).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들은 나의 일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니 더 큰 일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면” 시행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장막 안에 금향단이 있습니다. 이 금향단에 성도의 기도가 담겨져 하나님 앞에 올라갑니다.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주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위해 기도하고 이 기도의 응답으로 이 땅 위에 종말의 증거을 보이십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도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행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땅 위에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행해집니다. 이것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알리는 사인입니다.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주님도 다시 오십니다. 기도에 이렇게 엄청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악한 마귀는 잘 압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기도를 못하게 만듭니다. 바쁘게 만들고, 이유를 만들고, 어떨 때는 핍박을 통하여 하여튼 기도만은 못하게 하려고 획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난관을 뚫고 나아가서 기도하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그분이 주시는 사랑을 받는 아주 단순한 일입니다. 기도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기도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커다란 착각이며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우리의 영혼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주리고 목마르십니까? 우리의 삶이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렘 2:13)와 같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럴 때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말씀하신 주님의 초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주께로 나아가십시오. 갈급한 심령으로 주 앞에 나아와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 홍천 풍성한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1-25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억지로에서 기꺼이로 (막15:21)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간 그 길을 오늘날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이라 한다. 예수님이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간 길이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십자가(수난)의 길’, ‘고통의 길’, ‘슬픔의 길’이란 뜻으로 길을 의미하는 ‘비아(via)’와 슬픔, 고통(고난)을 의미하는 ‘돌로로사(dolorosa)’가 합쳐진 라틴어이다. 이 길을 순례하는 순례객들은 비아 돌로로사 거리에 특별히 의미 있는 열네 지점을 표시하고 각 지점마다 걸음을 멈추어 처형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하며 기도를 드린다. 열 네 묵상 중에서 다섯 번째는 「구레네 사람 시몬, 예수께서 십자가 옮기심을 돕다」이다.   로마 군인들의 채찍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는 길에서 쓰러지자, 로마 군인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장까지 끌고 가야겠기에 마침 옆을 지나가던 한 사람을 징발한다. 그가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아주 재수 없는 사람이었다. 빌라도 법정에 모여 있던 그 많은 군중을 놔두고, 또 골고다 언덕길 좌우에서 구경하고 있던 수많은 구경꾼들을 놔두고, 하필 시골에서 올라와 바삐 자기 길을 가던 그가 붙잡혔던 것이다.   시몬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구경하던 것도 아니었는데, 아무 것도 모른 채 붙잡혀 예수님과 함께 억지로 골고다 길을 오르게 됐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쳐 쓰러졌을 때 그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마지막 언덕길을 올랐다. 그리고는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성서 어디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간 후 투덜대며 바삐 자기 길을 갔는지,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는 것까지 보고 갔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하신 십자가에서 죽는 것까지 보고 갔는지 알 길이 없다. 후대의 전설에 의하면 시몬은 계란 장수였는데,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그가 집에 돌아가 보니 계란이 모두 무지갯빛으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부활절에 계란을 나누는 유래가 생겨났다고도 한다.   그러나 구레네 사람 시몬, 그는 결코 재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가던 길에서 붙잡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기는 했지만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로마서 16장 13절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히 추천하는 사람으로 알렉산더와 루포를 꼽는다. 그 둘은 바로 시몬의 아들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처음 교회의 좋은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본문에서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소개하는 것은 그들이 마가 공동체에도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억지로 붙잡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시몬에게서 우리는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누구나 하고 싶지 않지만 억지로라도 해야 할 많은 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일로 바꾸는 것이 바로 인간들의 능력이고 가능성이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시몬이 처음에는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갔더라도 그 길에서 예수님을 깨닫고 나중에는 기꺼이 예수 운동에 동참했다. 마가공동체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과 로마에 있는 교회에까지 그의 이름과 아들들이 알려져 있던 것이 그 증거이다. 억지로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단 그 일이 옳은 일이라면 기꺼이 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몫이다. ‘억지로’를 ‘기꺼이’로 바꾸는 몸과 마음의 움직임이 우리의 삶을 조금 더 충만하게 할 것이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10-15
  • 성령으로 치유와 회복을 체험하라(행 9장 32절~43절)
        ‘사도행전’은 12사도들의 행적을 기술한 내용이다. 사도 베드로의 사역을 다룬 본문 말씀을 세 가지 키워드를 중점으로 보고자 한다. 하나는 중풍병과 죽음, 그리고 영적인 죽음, 마지막으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방법이다.   본문말씀은 중풍으로 8년째 누워지내는 병자 애니아란 인물을 예수님께서 치유하는 일과, 죽은 여제자 다비다라는 여제자를 살리시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엔 중풍병으로 번역했지만, 요즘은 뇌졸중으로 표현되어 모든 신체가 다 마비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신체적인 증상뿐 아니라 영적인 중풍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운명주의, 허무주의, 패배주의 △열등감, 패배감, 무력감 △경쟁심, 시기심, 질투심 △두려움, 불안, 공포심 △원망, 불평, 수군거림 등이다. 이것들의 원인은 모두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온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통해 영적, 신체적 질병에서 해방될 것을 굳게 믿고 나아가야 한다.   오늘 사건 중에 특별히 다른 성경내용과 차이점이 있는 것 중 하나가 중풍병자의 이름이나 또는 죽었다가 살아난 애니아나 다비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들의 이름을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이 사건이 확실하고 분명하게 특정 누군가에게 일어난 사건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영적인 죽음 가운데 있던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장면은 이들의 영적인 죽음도 함께 해결되는 모습이다. 또한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를 재현하는 베드로의 영권과 영력이다. 무엇보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생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여 살리는 역사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우리는 아담 안에서 다 죽은 사람들이다. 우리 모든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영혼이었고, ‘죽어가고 있는’ 영혼이다. 본문에서 현재형과 현재진행형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살림을 받았고, 이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죽은 자이며, 죽어가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또 기업 무를 자로 삼으셨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다’(롬8:17). 하나님께서 은혜 주심으로 죽어가는 영혼들과 마귀의 자녀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   영적인 죽음 상태는 무엇이며, 잠든 영혼을 깨우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는 영적인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5:14). 그리하여 영적인 위기를 각성하고 깨어나도록 해야 한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단12:2). 일어나 빛을 발할 것(사60:1)을 명령하셨다. 그리고 삶 속의 여러 영적위기를 돌파하라(역상11:18).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역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는 일이다. 이런 권능은 전적인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선택받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기로 작정한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다. 간청하는 자, 선택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를 기도로 간절히 구하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인격과 상관없이, 지식과 상관없이 주신다. /영동침례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10-11
  • 일꾼으로 세워지려면 (눅24:44~49)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예수님이 마지막까지 집중하셨던 것은 사람을 세우는 일이셨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분명한 목적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 소명을 감당하는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믿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씀 안에서 나는 과연 내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지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깨달음(44~45)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이미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서 이미 자신을 위해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 설명해 주신다(44절).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나, 기적 때문에 변하는 것이 아님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 보여준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45절)될 때 진정한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라며 그 말씀 앞에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난다고 가르치고 있다.   신앙적인 연륜, 직분, 혹은 섬김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준이 아니라 말씀이 그 마음에 들어와 참된 깨달음으로 충만해야 함을 기억하며 말씀에 집중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둘째:부르심(46~48)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하는 자들을 향해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승천하시기전에 그곳에 모인 이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명령하셨다.   이에 베드로는 오순절에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면서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2:32)고 담대하게 선포할 뿐 아니라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그 일로 사람들이 자신들을 주목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면서 “이 일의 우리가 증인이라”(행3:15)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참된 제자는 예수 믿고, 구원받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만족하는 자가 아니라 증인의 삶을 살아내는 자이다. 지금 얼마나 증인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 각자의 모습을 돌아보자. 셋째:기다림(49)  은혜를 받고, 열정이 넘치다 보면 자기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 성령이다. 이 성령이 나를 온전히 이끌어 가실 수 있는 순간까지 해야 할 일은 온전히 기다리는 것이다.   다윗은 사무엘을 통해서 10대의 소년 시절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았지만 왕이 되기까지 10년이 넘는 세월(삼하5:4)을 기다려야 했으며,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아라비아 광야(갈1:17)의 연단을 거처 3년이 지나서 사도들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500여 형제에게 보이셨으나(고전15:6절) 성령이 임하는 마가의 다락방에는 약 120명의 사람(행1:15)만이 모여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것은 더딘 것 같지만 가장 빠른 지름길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오늘도 가장 미련해 보이는 일을 묵묵히 감당할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의 일꾼은 특별한 능력을 행하거나 사람들에게 인정  받을 수 있는 은사를 행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귀한 일꾼은 복음을 전하는 자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는 바울의 고백이 이 시대의 일꾼이 되길 소망하는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10-11
  • 말씀 없이 사는 삶 (눅24:1~12)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첫날 역사적인 빈 무덤의 사건을 경험한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부활의 사건은 먼 옛날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회적인 기적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도 끊임없이 고백되어질 뿐 만 아니라 반복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역동적인 사건이 되어야 한다.     부활의 약속이 이미 주어졌고, 그것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졌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말씀이 중심인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부활하신 주님을 오늘 나는 어떤 마음과 자세로 맞이하며 살고 있는지 깨닫고 결단하기를 축원한다.  첫째:무의미한 행위(1~3)  말씀 없이 사는 자는 의미 없는 일에 힘과 노력과 재정을 쏟아 붓는 삶을 산다.   그녀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서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다(눅23:56). 하지만 그녀들이 마음과 정성, 물질을 다해 준비한 향품과 향유는 빈 무덤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녀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사모하고 준비하며 기다렸다면 향품과 향유가 아닌 다른 것들을 준비했을 것이다. 우리도 빈 무덤 앞에 서 있는 이 여인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며 살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지만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도 쓸모없는 일들에 대한 열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땅에 썩어질 것들에 시선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길 바란다.  둘째:근심에 매임(4~8)  말씀 없이 사는 자는 말씀이 없고, 그것을 기억하지 않고 살기에 근심에 매인 삶을 산다.   이 근심의 시작은 말씀을 기억하지 못함에서 출발하는데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가 해답이다.   이미 예수님은 세 번이나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 하셨을 뿐 만 아니라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16:21, 막8:31, 눅9:22). 하지만 매순간 말씀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고 분명하게 약속해 주셨다.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명심하며 내 마음의 자리에 성령이 주인 되시도록 내어드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길 바란다.   셋째:믿음을 잃어버림(9~12)  말씀 없이 사는 자는 믿음이 바로 서지 못하기에 신앙 없는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산다.   부활의 소식에 제자들은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11절)로 반응한다. 죽은 나사로(요11:39~44)를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5:38~43)도 살리셨을 뿐 아니라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7:11~17)을 살리신 현장에 있었던 이들이었다.   문제는 무엇인가?   그들의 시선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그 약속의 말씀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기적들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악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기억하고 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가 살아있을 때 3일후에 다시 살아난다고 했으니 군사를 보내어 무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마27:62~66).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놀라운 은혜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본문은 말씀 없이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라”(암8:11)고 말씀하셨는데 마지막이 올수록 말씀의 자리는 사라지게 될 수밖에 없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한 주간도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한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의 고백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10-04
  • 긍휼의 힘(룻기 4장 10절에서 13절)
      2022년 대한민국 출산율을 0.75명을 기록하였다. 우리는 더 이상 저출산 국가가 아니다. “초”저출산 국가가 된지 오래다. 이러한 저출산 문제는 학령인구 감소, 노동 인구 감소 등의 사회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국가의 미래를 암울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강하고 분명하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가족 개념이 약화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결혼과 출산의 당사자인 우리의 다음 세대가 현재 매우 행복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한 소망과 기대도 현저히 낮아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가 많은 재정을 투입하고, 다양한 정책들을 펼치고 있지만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가족의 해체와 소망 없음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사랑과 긍휼의 회복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이러한 내용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특별히 룻기는 그러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 가운데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룻기는 사사기와 사무엘서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사사시대의 어둠과 다윗왕의 영광이 교차하는 그 중심에 룻기가 놓여있다. 우리는 룻기 안에서 보여지는 깨어지고 무너진 한 가정의 회복이야기가 이스라엘을 사사시대의 어두움에서 건져내는 위대한 역전의 이야기가 됨을 보게 된다.   룻기의 등장하는 가정은 매우 흥미롭다. 우선 이들은 피가 섞어지 않은 “비혈연 공동체”이다. 이들을 혈연으로 연결해주던 남자들은 모두 죽었다. 또한 이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다문화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위대한 변화와 회복의 중심에 비혈연 공동체, 다문화 가정을 중심에 두신 것이다. 이것은 가족을 가족되게 하는 진정한 중심은 혈연관계나 문화적 친연성에 있지 않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도리어 진정으로 가족을 가족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서로를 향한 사랑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바로 긍휼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긍휼은 적극적인 자기화이다. 타자의 고통을 자기화하고, 깊이 공감하는 것이다.   룻기는 이러한 긍휼의 향연이다. 이방 며느리 룻은 남편과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향한 긍휼을 느낀다. 그래서 시어머니와 함께 한다. 시어머니는 남편을 잃고, 자기를 좇아 먼 타지까지 나와준 며느리 룻을 향한 깊은 긍휼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에게 행복한 삶을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애쓴다. 보아스는 이들의 처지와 상황을 깊이 이해한다. 놀랍게도 룻기에서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역할이 그리 크게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대신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사랑의 말과 행동이 이야기 전체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이러한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가정의 회복은 친연성의 회복이나 문화적 결속 강화에 있지 않고 도리어 서로를 향한 긍휼의 회복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마치 룻기에서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기 시작할 때, 깨어지고 부서진 가정이 살아나고, 그러한 가정의 회복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을 다시금 소망의 빛으로 밝히는 놀라운 터닝 포인트가 될 줄 믿는다. 긍휼의 힘을 믿으며, 긍휼의 사람이 되기를 힘쓰는 이 시대의 룻과 보아스가 되길 기도한다/기쁨의 교회 목사·쉐이커스 미니스트리 대표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9-26
  • 온전한 믿음의 자세 (눅23:50~56)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내 속에 가득한 진리에 대한 확신이 행동으로 드러나 것으로 예수님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참된 믿는 자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형식적인 예배와 외식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능력 없는 믿음은 오히려 불신자들의 비웃음과 전도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결과만을 초래하고 만다. 시대도 악하고, 마지막 때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시대를 탓하고, 환경에 핑계될 것이 아니라 내가 참다운 믿는 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첫째:기대(50~51)  아리마대 요셉은 사회의 신분으로는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였고, 성품으로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50절)이었으며,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기다리던 자(51절)였다.   예수님을 죽이는 결의에 찬성하지 않아서 그가 선하고 의로운 자가 아니라 선하고 의롭기 때문에 불의한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기 때문에 목에 칼이 들어와도 결코 불의한 일에 동참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하고 의로운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자다.   선하고 의로움은 성품에서 나오는 말이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믿음을 가진 자의 태도이자 자세이다. 나는 어느 곳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둘째:행동(52~54)  아리마대 요셉은 불의한 일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불의한 사람들이 벌인 악한 일에 대해서 선하고 의로운 행동으로 예수님의 장례 절차를 감당해 내는 믿음을 가진 자의 온전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믿음은 이처럼 어두움의 시대라 할지라도 높이 들려 환하게 비추어져야 한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2:17~18)며 믿음으로 행동하며 사는 것에 대해 강조한다.   무엇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이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은 나의 성격이나 주변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임을 명심하며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승리하는 인생이 되길 바란다.  셋째:준비(55~56)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하던 여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었다는 급박한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 아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막15:40~41)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본문의 여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사역에 필요한 부분들에 대해 헌신하고 수고한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며 돌아가신 후에도 그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자로 그 곁을 지키고 있다. 온전한 믿음의 자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드러나지는 않지만 준비하는 자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며 맡겨진 책임을 감당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 세대는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11:19)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마지막 때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패역한 자들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살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고 명령하신다. 온전한 믿음의 자세는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임을 깨닫고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9-26
  • 믿음이 없으면 나타나는 현상 (눅23:13~25)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십자가의 사건은 불신앙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독특한 방식을 오롯이 보여준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고 말씀하신다.   본문의 사람들은 악한 날에 악인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그들이 악인의 길을 가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해서 맡기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기에 스스로 악인의 길을 가며 그 날에 쓰여 지고 있을 뿐이다.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없이 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깨닫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굳건하게 바로 서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사람을 바라보게 된다(13~16)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였지만 죄를 찾지 못하였고, 그저 소란스러운 일을 제공했기에 때려서 놓겠다고 말한다. 결정권자인 빌라도가 무죄를 선포하고 풀어주면 복잡한 일들은 마무리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고소했던 이들을 판결 내리는 순간에 다시 불러 모은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풀어주는 자신의 선언으로 인해 어떤 혼란이 일어날지에 대한 반응을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으면 사람을 쳐다보게 된다.   초대 교회의 비극적인 사건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는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나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행5:1~2)로 시작된다.   이 일의 결과로 이 부부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믿음으로 해야 하는 많은 것들을 사람을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각자의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자.  둘째:마음이 완악하여 진다(17~23)  마음이 완악하여지면 안 되는 이유는 돌이킬 수 여유가 들어갈 틈이 마음에 없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약속한 가룟유다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마26:21)고 말씀하셨고,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고도 말씀하셨다.   악한 일에 몰두하여 완악해진 마음은 돌처럼 견고해서 선한 양심이나 진리가 삐 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오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이들이 바로 믿음이 없기에 완악해진 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 생각과 계획이 분명하게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무엇인지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듣는 자가 마음이 돌같이 완악해지는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셋째:불의를 선택하게 된다(24~25)  빌라도의 선택은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25절)였다. 믿음이 없으면 불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다. 믿음이 없으면 타협할 수 밖에 없으며, 믿음이 없으면 사람들의 큰 목소리를 뛰어 넘어 진실을 지켜낼 수 있는 자신감을 상실하게 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창20:11), 이삭도 그랄 땅에서 그 아버지의 아들로서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만다(창26:10~11).   빌라도가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음에도 십자가에 내어 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불의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까지 우리가 살아야 할 이 땅은 항상 믿음의 사람들에게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믿음 없이 불의와 더불어 살 것인지 아니면 믿음 안에서 진리를 선택하며 살 것인지 분명하게 결단해야 한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지키고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9-19
  • 세상에서 경계해야할 호기심(창 34:1~17)
      이번 설교는 야곱의 딸 디나 사건을 통해 배워야할 성도들의 보는 것과 호기심을 경계하기 위한 말씀이다. 은혜가 풍성하고 경건한 신앙생활로 끝까지 승리하시기를 축원한다. 첫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창34:1~2)    둘째, 성도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셋째, 성도는 세상에 빠지지 말고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넷째, 안목의 정욕은 사람으로서 하여금 넘어지게 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3:6),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창34:1)    다섯째, 경건한 부모도 자녀 교육을 잘못하면 불행을 맞을 수 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 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삼상2:12~15 , 2;22, 34, 3:11~22,) 여섯째, 성도들은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분별해야 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 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사사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관할하는 자 중에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 형제에게로 온지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민25:1~9)/유향교회·합동개혁총회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9-17
  • 준비된 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 (눅22:54~62)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되는 예수님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길을 가고 있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없었다.   말씀을 통해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비참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결단하여 매일의 삶을 통해 준비하는 자가 되길 축원한다.    첫째:동떨어진 자가 된다(54~55)  준비된 자로 살지 않으면 동떨어진 자가 된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에 비하면 그나마 봐줄만 하지만 ‘멀찍이’이 쳐다보면서 따라갈 뿐이다.   대제사장 종인 말고의 귀를 칼을 들어 자르기도 하였지만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고 오히려 베드로의 행동을 막으셨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의 자리는 멀리 서 바라보는 곳이다. 예수님이 고난의 자리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베드로의 자리는 항상 예수님의 옆자리였을 것이다.   각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나와 주님과의 거리는 얼마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며, 특별히 십자가 앞에서 나와 주님과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짚어보아야 한다. 단번에 그 곁으로 갈 수 없다면 한 걸음씩이라도 주님 곁으로 믿음의 걸음을 내딛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둘째:부인하는 자가 된다(56~60)  준비된 자로 살지 않으면 부인하는 자가 되는데 베드로의 모습은 준비되지 못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모두가 다 떠날 것이라 마음 아파하지만 베드로가 무엇이라 장담했는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고 자신 있게 말했다.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연거푸 부인하는 것은 믿음의 고백으로 고기와 배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믿음의 결단을 부정하는 것이며, 공생애 기간 내내 예수님과 함께 하며 감격했던 은혜의 모든 사건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한순간에 쓸모없는 시간들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부인하지 않으면 고난을 당할 수 있지만 성경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고 약속하신다.  셋째:통곡하는 자가 된다(61~62)  준비된 자로 살지 않으면 통곡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자 닭이 울었고, 그 순간 예수님이 뒤돌아 보셨고 베드로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 베드로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역동적인 시간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친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준비되지 못한 자인지 깨닫고 밖으로 뛰쳐나가 통곡하는 자가 된다. 깨닫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자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베드로의 통곡은 후회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는 통곡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과 시선을 맞추며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돌이키는 통곡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임을 잊지 말자. 마지막 때를 살고 있지만 준비된 자들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고, 나는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9:37~38)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부르시는 장면이 떠오른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6:8). 준비된 자가 그 부르심에 응답하게 된다. 나는 준비된 자인가?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9-13
  • 이렇게 기도하라 (눅22:39~46)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길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는 열심에 그칠 수 있기에 기도는 바르게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제자들도 이 사실을 알았기에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기도의 모습을 열거하시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6:9)며 주기도문을 알려 주신다. 그 이유는 나의 방법이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본문의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각자의 기도의 모습을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첫째:방법(39~41)  예수님이 눈앞에 둔 십자가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습관을 따라’(39절) 기도하러 가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시험을 이기고 문제를 넘어갈 수 있는 기도는 평소에 쌓아 놓는 것이다.   바울은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고 말한다. 기도를 계속하는 자가 기도의 능력을 깨닫고,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에 기도가 인생의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니라”(행6:4)고 말한다. 폼 나는 일은 재물을 가지고 위로하며 나누어 주는 일이지만 그 일을 내려놓는데 이유는 간단한다.   기도가 습관이 되지 않으면,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할지라도 선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기도가 될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기도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둘째:내용(42~44)  본문의 기도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찾아보기 어려운 자신을 위한 기도이다. 그렇기에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귀한 말씀이기도 하다.   고난의 길이고,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 길임에도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의 뜻을 향한 기도였다. 이 기도의 내용이 중요한 것은 이렇게 기도할 때 주시는 축복이 바로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43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하는 것이기에 인간의 힘으로만 기도할 수 없다.   올바른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기도하는 있는 그 시간 내가 감당할 있도록 힘을 주시고, 함께 하시는 하늘의 능력이 임하는 시간이 된다.   기도의 내용이 바로 세워질 때 능력 있는 기도를 체험하게 된다.  셋째:목적(45~46)  기도의 목적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46절)고 하신다. 아니 이미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40절)고 말씀하셨다.   기도는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문제를 여유롭게 지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목적이다.   바울과 실라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밤에 옥문이 다 부서질 정도의 큰 지진이 일어나게 된다. 그들의 복음증거로 간수와 그의 온 가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결과를 통해서 그들의 기도가 그저 감옥을 나가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향한 열정의 기도였음을 깨닫게 된다.   기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우리는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게 된다.   기도는 시작과 마지막이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전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며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잡히시던 날도 온 힘을 다해 기도하셨고, 십자가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것은 몰라도 기도만큼은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기도를 점검해 보고, 말씀 안에서 바로 세워지는 기도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와 참된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는 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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