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5(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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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김기호   사도행전 28장 1절부터 31절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 장면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마지막까지 전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는데,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죽음의 폭풍을 이겨내고 멜리데섬에 도착한 로마군인들과 선원들의 숫자는 276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람인 바울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죽지 않는 기적을 보고 멜리데섬 사람들 중에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기를 겪는 폭풍을 만났지만 그가 예수님을 의지할 때,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멜리데섬 사람들도 병을 고침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고침 받은 ‘보불리오’는 나중에 멜리데 오늘날의 몰타에 감독에 됩니다. 바울이 죽음의 폭풍을 뚫고 멜리데섬을 거쳐 가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만나는 폭풍과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인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가는 곳이 때로는 감옥과 같이 답답한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감옥과 같은 곳에서 지냈습니다.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꼼짝도 못하는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바울은 감옥에서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있는 가정과 직장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믿는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2006년 1월에 서른 세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 ‘안수현’씨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쓰는 이메일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 안수현” 자신이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7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성남 은혜제일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22
  • [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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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5-04-14
  • [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01
  • [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25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14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1-20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동행하는 자의 모습 (시108:1~13)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멀리서 명령을 내리시고, 그대로 잘 살고 있는지 가끔 사람을 보내거나 찾아오셔서 점검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날마다 그 자녀의 삶에 함께 하시며 동행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는 것이 은혜가 될 것인지, 아니면 엄청난 저주가 될 것인지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점검해 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마음을 다해 찬양하라(1~5)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첫 번째는 바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찬양은 나의 감정이나, 내 믿음의 고백을 담아내는 중요한 방식이지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출발은 마음이다.   더욱이 “내 마음을 정하였으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1절)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채워진 상태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에서 말씀하신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인 것이다.   마음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만 내 마음이 가득 채워져서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약1:8)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 마음으로 가득한 자의 모습이다. 나의 마음에는 무엇이 채워져 있는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현실적인 나의 삶이 아니라 먼저 마음에서 시작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귀를 열어 들으라(6~9)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두 번째는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응답하시며(6절), 그의 성소에서 말씀해 주셨다(7절)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성소”(7절)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소로 가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묻는 자세를 가지고 살았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께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귀를 열고 하나님 앞에 머물 수 있는 것은 나의 생각과 방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온전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심을 확신하는 자가 취할 수 있는 자세이다.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순종함이 동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나님은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에게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라고 하시며 말씀해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귀를 열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삶을 살려고 하는 우리 모두의 축복이 되길 바란다. 셋째:눈을 들어 선포하라(10~13)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세 번째는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다윗은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12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 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시20:7~8)라는 고백 속에 살아간다.   믿음의 기도로 산다는 것은 사람의 손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그 문제를 만져 주실 때 완전한 승리가 주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문제를 만날 때 사람을 찾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며, 그 역사를 믿고 구하는 사람이다. 오늘 나는 얼마나 믿음의 선포를 하며 살고 있는가? 믿음의 선포는 나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축복임을 명심해야 한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세상의 근심과 걱정 두려움에 눈이 가려져 있으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자신들의 대화에 끼어 들어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눅24:17).   예루살렘에서 엠마오의 거리가 이십 오리(눅24:13) 정도의 거리인데 그 긴 시간을 걸어가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 될 정도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삶에도 함께 하고 계시지만 내가 그 주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가는 순간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창조 이후로 자신의 창조하신 피조물과 동행하신다. 그런 하나님과 나는 동행하고 있는가? 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나의 신앙의 모습을 바로 세워가는 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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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3-05-31
  • [설교]흥왕케 하는 사람이 됩시다 ( 느헤미야 2장 10절)
      우리의 인생이 우리들이 있는 곳마다, 공동체마다 사람을 흥왕케 하고 기도를 흥왕케 하고, 말씀을 흥왕케 하는 인생 되시길 축복합니다. 흥왕케 하는 인생이 되길 원하는 사람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모든 것을 더하리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흥왕케 하는 사람은 소원과 버킷리스트를 구분합니다. 버킷리스트는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하면 좋겠지만, 안해도 아쉽지만 괜찮은 것입니다. 그것 안 한다고 죽을 만큼 괴롭거나 힘든 것은 아닙니다. 소원은 목숨 걸고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버킷리스트를 소원이라고 유혹합니다. 돈과 명예는 좋아 보이지만 인생의 목적이나 소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살아가면서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마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버킷리스트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소원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성결이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임을 알아야 합니다.모든 인생은 다 다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타락과 구속과 구원의 틀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이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인생은 각각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공과 행복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행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의 성공과 행복에 목숨 걸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의 인생에서 병과 가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이는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민감해지고 더욱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유익을 위하여 매일매일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주십니다.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길어도 응답은 순간입니다. 느헤미야는 왕 앞에서도 순간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를 직면할 때 문제를 문제삼지 말고 주님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라도 두려울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얼굴에도 근심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원수 마귀는 기도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마음을 집어넣습니다. 순간 두려움이 임하면 기도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근심 다 버리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쉬지 기도해야 합니다.(살전5:16-18)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해도 우리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하고 두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다. 그때! 쉬지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해결할 능력이 없지만 오직 하나님께 해결이 있고 정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걱정으로 삶을 허비하지 말고 기도함으로 빛 되신 말씀을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잠깐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주님 앞에 다섯 번 기도하고, 연합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형식과 내용은 같이 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형식, 전심으로 예배 드리는 것은 내용입니다. 내 몸을 쳐서 하나님 앞에서 자세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정규적인 경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말 하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유호교회 담임·경상남도기독교총연합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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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3
  • 감사하며 찬양하라 (시107:1~9)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사는 인생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심을 온전하게 고백하는 자라 할 수 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3~14)의 고백처럼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아는 자들은 감사하며 찬양하며 살 수 밖에 없다.    나는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고 있는가?     본문은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 혹여나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을 잃어 버렸다면 다시 회복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첫째:구원해 주심(1~3)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속량’의 사전적 의미는 ‘몸값을 받고 종을 놓아주어 일반백성이 되게 함’의 뜻이 있다.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과 출발을 할 수 있는 되는 것이 바로 ‘속량’을 받은 자의 모습이다.   시107편은 바벨론 포로시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배경으로 쓰여 진 것으로, 정치적이나 현실적으로 볼 때는 바사의 고레스의 명령(역대하36:22~23)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본문은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2절)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며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이루심을 잊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비유처럼 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음에도 백 데나리온을 갚지 못하는 이(마18:23~35)를 향해 불평과 원망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가?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돌리는 것은 물론이며, 그 감사와 찬양이 이 땅을 향해 흘러가기를 바란다. 둘째:부르짖음을 들으심(4~7)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부르짖음을 듣고 고통에서 건져 주시기 때문이다.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5~6)라며 분명한 고백이 있는데,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성경에 차고 넘친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도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출3:7;9)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레미야에게도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고 말씀하시며 부르짖을 것을 명령하신다.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 도움을 호소하며 부르짖을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인가?  셋째:채워주심(8~9)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모든 것은 한 마디로 하자면 ‘기적’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8절)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말씀을 통해서 매일이 기적의 순간들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기적의 출발점은 바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온전히 감사하며 찬양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모하는 영혼’, ‘주린 영혼’(9절)이 되어야 한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그것을 사모하고, 배고파 할 때에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모하는 마음, 주린 영혼’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자세를 온전히 가지면 하늘의 것을 사용하면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는 축복을 경험하게 살게 될 것이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 내가 감사와 찬양으로 보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고, 원망과 불평으로 투덜거리며 지냈던 시간들을 기억해 보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우리 모두가 분명하게 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한 주간 만나고, 경험하게 되는 모든 일들 가운데서 내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끊이지 않는다면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궁정에서 사는 축복의 날이 될 줄 확신한다. 이 축복의 삶을 붙들고 누리시는 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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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3-05-22
  •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 비결 (시99:6~9)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을 보면 “그의 제사장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는 사무엘이 있도다”(6절)며 세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있는가?  그 수많은 제사장들 가운데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맡겨진 사역을 감당했던 셀 수 없는 이들 가운데 사무엘을 언급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영적 관계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각자의 삶 속에서 나와 하나님은 온전한 관계 가운데 있는지를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올바른 기도(6)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첫 번째 비결은 올바른 기도를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모세와 아론, 사무엘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6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가운데 머물러 있음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1~42)며 관계에 기반이 되어 기도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셨다.   이 예수님의 기도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큰 소리로 하셨던 기도의 내용이다. 과시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응답받는 기도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각자 기도 모습을 돌아보자. 나의 기도는 왜 응답받지 못할까?   다른 어떤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잃어버렸기 때문임은 아닌지 점검해 보고, 올바른 기도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둘째:말씀을 행함(7)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두 번째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행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함께 하는 이들은 그 말씀을 귀로만 듣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지키며 사는 자이다.   말씀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 어려움을 토로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 땅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니라”(신30:11,14)고 말씀하셨다.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결단이 없기 때문에 말씀이 주시는 능력을 체험하며 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얼마나 그 말씀을 존중하며 따르느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용서를 받음(8~9)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세 번째 비결은 죄와 허물을 용서 받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본문을 보면 “그들이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8절)고 기록하고 있다.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어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질 수 있는 죄의 모습들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하나님께 용서받음으로 말미암아 진실 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사야 선지지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59:1~2)고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죄의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지 못하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이 죄는 나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용서하심 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분명하게 알고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잘 해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1~13)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안에 살며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인생은 고난 중이라도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큰 축복을 누리며 사는 자임을 명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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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3-05-16
  • 잊지 말아야 할 것 (시95:1~11)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중요한 한 가지를 더 가지고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향해서 안타까워 눈물 흘리시면서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었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고 말씀하셨다.   기억력의 문제나 습관처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믿음에서 멀어지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잊지 않으려고 더욱더 믿음 안에 머무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살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점검해 보고, 굳게 붙들고 살기를 결단하기를 축원한다.  첫째:왕 되신 하나님(1~3)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첫 번째는 바로 하나님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왕이시라는 사실이다.   본문에 보면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3절)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혼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시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영적인 존재들에 불과할 뿐이다.   바울이 아덴(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신들을 위한 제단을 보게 된다.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행17:23)도 언급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참으로 어리석게 살 수 밖에 없음을 잘 알게 된다.  나의 삶이 매일 흔들리고, 확신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진정한 왕이 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 되심은 그 권위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저 입바른 말로 하나님이 나의 왕이 아니라 순종과 복종으로 왕이신 하나님 앞에 머무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둘째:주의 백성과 양(4~7)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두 번째는 바로 우리 모두가 주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라는 사실이다.   본문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7절)으로 삼으셨다고 하신다. 그 어디에 속하는 것보다 가장 큰 은혜가 바로 하나님의 손길 아래 머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49:15~16)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고 그의 손으로 돌보시는 양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어떠한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셋째:은혜의 경험(8~11)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세 번째는 바로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녀들의 삶에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 다는 사실이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았던 40년의 시간들을 상시시키고 있다. 특별히 므리바 혹은 맛사라고 불리는 곳에서 있었던 일(출17:1~7)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모세와 다투어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바로 마음이 완악해졌기 때문이다.   마음이 완악해지면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 능력을 조사하게 된다(9절). 마음이 완악해지기 시작하면(8절), 그 마음이 미혹에 빠지게 되고(10절), 미혹된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느끼고 있는 당장의 결핍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보다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믿음의 자리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부어 주신 은혜만 따져보아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함에도 매일 다가오는 일상의 부족함들이 나의 마음을 흔들고, 그 흔들림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어리석은 자리로 몰아간다.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그 땅에 들어가면 집에 거주하며, 소와 양이 번성하게 될 것이며, 네 소유가 풍부하게 될 것이라 하시며 그런 가운데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7~18)고 말이다.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이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은 쉽게 잊고 지낸다. 당연하게 여기며, 무덤덤하게 감사의 메마른 나의 모습은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살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다른 건 다 잊어도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만큼은 잊지 않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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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3-05-08
  • 하나님 앞에서 (왕하23:21~23)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열왕기상하를 보면 많은 왕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으며, 그들에 대한 소개와 어떤 모습으로 나라를 이끌었는지를 기록해 놓고 있다.   한 나라의 왕으로 세워지는 순간에는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가 번영하고, 모두가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유다도 멸망으로 향하여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에게 기준을 두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사람 앞에 서려고 하는 모든 노력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깨닫게 된다.   꼭 왕이나 중요한 책임을 맡은 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모두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 있는 자세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서는 자가 될 것인지를 깨닫고 결단하기를 바란다.  첫째:말씀이 기준(21)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는 모든 선택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이 정직히 행할 수”(왕하22:2)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에 있었기 때문이다.   왕하 22장을 보면 요시야 왕은 성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율법책을 발견하게 되고, 요시야는 그 말씀을 듣고 자신의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을 뿐 아니라(왕하22:11), 백성들에게도 들려지게 하여 백성들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언약을 따르게 결단하게 한다(왕하23:3).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그 말씀이 기준이 되어 살 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생이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듣기 좋은 소리, 혹은 잔소리가 될 뿐이다.   요시야는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즉각적으로 이것이 자신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씀 앞에 서는 자가 되었다.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을 살 수 있음을 명심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최선의 노력(22)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가 되기 위한 두 번째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22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월절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이 광야에서 첫 번째 유월절을 보낼 때 그들의 마음과 자세는 어떠했을까?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드려지는 첫 번째 유월절은 또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그 부강했던 국력을 바탕으로 온 백성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드렸던 유월절은 얼마나 화려하고 기품이 있었을까?   하지만 하나님은 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요시야 시대의 백성들이 지켰던 유월절을 그 어느 시대의 유월절보다 기쁜 마음으로 받으셨다.   우리는 항상 부족함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로지 얼마나 최선으로 자신 앞에 나아오는지에 관심을 가지실 뿐이다.   오늘 얼마나 최선을 다해 하나님 앞에 머물며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셋째:인격적인 만남(23)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가 되기 위한 세 번째는 누구의 권면이나 외부적인 영향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유월절을 전심으로 지키는 요시야 왕을 성경은 “여호와 앞에”(23절)서 유월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시야가 왕에 오르고 열여덟째 해가 되었을 때에 그 이전에도 없었던 온전한 유월절을 지켰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22절).   그의 나이 26세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참된 믿음의 사람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믿음의 삶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요시야가 할아버지, 아버지의 악한 영향력 아래에서 허덕이는 삶을 살고, 그 길을 쫓아 살았다면 그는 망해가는 나라의 그저 그런 왕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이전에 한 번도 볼 없었던 유월절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보여 드리고 있다. 환경이나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애를 쓰고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 해서라도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하는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있으면서도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어리석게 살고 있는지 말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서는 자가 되기 위한 권면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3)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삶은 자신감이나 교만함이 아니라 그 은혜를 향한 삶을 인생의 가치로 여기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가 누리는 기쁨과 은혜로 충만한 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4-24
  • [금주의 말씀] 십자가의 아이러니(마태복음 27장 39절~44절)
        우리가 믿는 복음의 중심에 십자가가 우뚝 서 있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상징물이 아닙니다. 죄 가운데 빠져있어 진노의 자녀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극히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진리입니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함께 못 박음으로 부활의 생명으로 살게 하는 살아있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십자가가 삶의 중심이 되고, 원리가 되며,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았던 바울처럼 살게 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난의 여정에서 십자가를 둘러싼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연약한 모습으로 못 박혀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처형에 가담했던 로마 군병들, 사형을 언도했던 본디오 빌라도, 빌라도를 압박했던 유대 지도자들, 지나가는 군중들 모두 가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특히 로마 군병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 내뱉은 조롱의 말들이 아이러니로 나타납니다.     ‘아이러니’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로 ‘시치미를 뚝 떼다’, ‘위장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모르고 무지하게 내뱉은 말들이 그대로 나타날 때, 결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내뱉은 말이 실제로 나타났을 때 ‘아이러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아이러니가 나타납니다. 오늘은 세 가지 아이러니가 나타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고난 전체가 그것을 나타내지만, 오늘은 <마태복음> 28장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군병들에 의해서 왕이라고 조롱받으셨던 예수님은 실제 왕이셨습니다. 27절 이하에 나타난 로마 군병들의 행동은 평상시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총독 관저 앞으로 들어오자 모든 군병이 예수님을 둘러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혔습니다. 마치 왕이 입는 화려한 가운처럼 자주색 옷을 입히고, 왕관을 상징하는 면류관을 가시로 만들어서 씌우고, 왕이 휘두르는 홀과 같은 갈대를 들게 하고, 모두 무릎을 예수님 앞에 꿇었습니다.     마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왕이 화려한 옷과 홀, 왕관을 쓴 모습을 연출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 사람의 왕,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평소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죄수에게는 하지 않는 매우 특이한 행동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진정 경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러니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조롱하고 모욕하는 그분이 진정 세상의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한 왕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하기 위해 글을 쓰다가 도리어 증거하는 사람으로 바뀐 사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고난을 겪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살아갈 때 놀랍게도 세상 가운데 아이러니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처럼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십자가를 굳게 붙잡으십시오. 십자가의 역설이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아이러니가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아이러니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온누리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4-18
  • 다 이루었다 (요19:30)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모든 목적을 완전하게 다 성취하셨음을 보여주는 선언적 말씀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가?   매일 바쁘고 분주하게 살고 있지만 정작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이 시간만 흘려보내고, 몸만 축내는 나의 모습을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내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어떤 결과를 내느냐에 매달려 살면 항상 아쉬움이 남지만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위해 살면 그 마지막은 가슴 뿌듯한 성취감으로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다 이루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 보면서 나는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매일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정말 소망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도 말씀을 통해 깨닫기를 축원한다.  첫째:육체의 사명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하는 선언은 육신을 입고 감당하셔야 했던 이 땅의 일들이 끝났다는 고백의 의미가 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은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오죽하시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요8:20)고 하셨을까?   복음서에 예수님이 피곤해 하시고, 시장해 하셨던 기록들을 보면 가는 곳마다 대접을 받으며 환호를 받았을 것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생각인지 깨닫게 된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한계가 분명한 육체를 가지고 해야 할 일을 이제 다 마쳤다는 고백이다. 얼마나 홀가분하고 시원하셨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호흡이 있는 동안, 육체를 통해서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동안은 치열하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썩어질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맡겨 주신 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힘쓰고 애쓰다 주님 부르실 때 감사함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고백하며 돌아갈 수 있는 것이 모두의 소망이 되길 축원한다.  둘째:약속의 성취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하는 선언은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게 되었다는 고백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3)고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이 약속의 성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는 선포에서 깨닫게 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으면 죄를 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은 이 죄의 문제가 이제 자신의 죽음으로 완전하게 해결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약속의 성취는 예수님이 죽으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는 사건(눅23:45)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셨던 죄에 더 이상 끌려 다니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비젼의 완성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하는 선언은 자신의 사명을 붙잡고, 그 길을 쫓아 갈 믿음의 사람들을 향한 고백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는 의미는 이제 자신의 하셨던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마음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하며 양육하고, 가르쳤음에도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란 것 투성이지만 그들이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존재들이다.   주님은 우리의 현재를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라면 부족하고 책망 받을 수밖에 없지만 앞으로 행할 일들에 소망을 두시고 그것을 바라보시는 분이시다.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이야 함은 예수님이 그런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성도 한 명 한 명이 바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한 자들임을 명심하며 그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주신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기를 축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어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삶을 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 땅을 떠날 때 ‘최선을 다했다’는 고백은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 낼 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네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딤후4:7~8)는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족한 것만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십자가로 우리에게 열어주신 생명과 축복의 길을 믿음으로 매일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4-10
  • 선택과 책임 (마27:24~26)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종려 주일이며 고난 주간을 앞둔 주일 아침이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건과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쩌면 신앙생활은 선택과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결단하고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것 그것이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이라 여겨진다.     본문은 그런 점에서 선택할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과 선택한 후에 그 일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며, 거기에 따르는 책임까지 감수 할 수 있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 즉 반면교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참된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첫째:선택의 동기(24a)  본문은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 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4a).   빌라도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이고, 그 앞에서 침을 튀기며 죄를 고발 하는 증인들의 진실성에도 관심이 없다.   선택의 동기는 자신의 입신양명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이 최우선순위이다. 따라서 군중들의 함성이 그를 두렵게 했고, 그 군중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앞길이 막힐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는 죄를 범하고 만다.   흔히 죄를 짓는 것이 달콤한 유혹에 걸려 넘어져서 죄를 짓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결정적인 죄는 두려움 때문에 짓게 된다.   유혹으로 인해 짓는 죄는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두려움으로 짓는 죄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짓는 죄이기 때문에 주는 상처가 훨씬 크고, 오랫동안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우리를 괴롭힌다. 오늘 내가 만나는 두려움은 무엇인가? 그저 내 것을 빼앗길 것 같은 인간적인 두려움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둘째:책임의 회피(24b)  눈에 보이는 두려움에 굴복한 사람의 모습은 어떻게 되는가?   오늘 24절 하반절을 보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회개하기 보다는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내어 주면서 자신은 이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손을 씻는다. 손은 씻지만 그의 죄는 씻을 수 없다. 손을 씻어서 자신이 아닌 군중들이 선택한 일이라 명분은 가질 수 있어도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에 대해 그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어디를 가든 눈에 보이는 교회와 성도들의 숫자를 자랑하지만 빌라도처럼 손을 씻는 사람들만 보이고, 두려움에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그리스도 같은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물러서도 된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손을 씻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내가 책임지겠다고 선포하라. 이럴 때 하나님이 내 인생에 깊이 관여하시고 주님 안에서 참된 승리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하실 것이다.  셋째:책임과 결과(25~26)  “백성이 다 담대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5절)   그 피가 어떤 피인가? 하나님이 흘리시는 피 눈물이며,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인가?   자신들의 죄를 위해 오셔서 죽으시고 흘리시는 그 피를, 자신들의 죄를 덮고 가리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아집과 욕심과 못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죄악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목적만을 바라보지 말라.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기를 기도하라.   고난 주간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많이 생각하고 묵상하며 보내야 한다. 나를 먼저 돌아보고 내가 빠져 나갈 구멍을 찾기 보다는 내가 메워야 할 구멍이 무엇인지를 찾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될 것이며,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고난 주간 한 주간을 시작한다. 고난 주간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무거운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거룩한 부담감은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참 기쁨을 깨닫기 위한 출발점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을 살면서 어떤 선택을 하며, 그 선택에 따른 책임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가장 정확하고 분명하게 보여주신 분이시다.   그는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선택하셨고, 그 선택을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온전히 책임을 지셨다.   2023년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선택하며, 어떤 책임을 지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다시금 믿음 안에서 바로 서는 고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4-06
  • [금주의 말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눅24:13~35)
      부활은 성경에 여러 번 예언되어 있습니다. 또한 주님이 살아 계실 때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제자들은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이를 보고 모두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두움 속에 숨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비겁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담대해졌으며 예수의 부활을 힘있게 증거하게 되었을까요? 이는 산 예수를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사는 믿음을 가졌기에 새로운 용기와 능력을 힘입어 외쳤고, 그들의 외침이 오늘날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대낮의 밝은 길을 걸으면서도 마음은 절망의 어두움에 잠겨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주께서 오셔서 저들의 대화에 동참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저희의 눈이 가려져서 알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6절). 눈은 마음의 창이요 몸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눈이 가리어지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18절).  바로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느냐고 물으면서 우리는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33년 생애를 알고, 그의 약속을 알고, 그의 수난을 알고,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신 것을 알고 있으나 슬픈 빛을 띠고 낙심하여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으니, 이는 아는 것이 아니고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17절).  그들은 예수님을 길 가는 한 나그네로 여겼지만 머물러 섰다고 했습니다. 관심을 가진 데서부터 첫 대화가 시작되었으며, 이 대화 속에 예수님과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신 줄을 몰랐으나 무엇인가를 이분에게서 배우며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들은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28~29절) 관심 있는 대화에서 시작된 예수님과의 만남은 강권하여 매달림으로 영접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전해 주시는데 마음이 뜨거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길을 걸었으며, 그 길은 엠마오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떡을 뗄때에 그가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떡을 떼는 성도의 교제 속에 사랑은 깊어지고 이해가 두터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입니다.  성경은 집에서 홀로 읽어도 진리를 깨우칠 수 있으며 라디오의 방송 설교를 들으면서도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나의 구주로 믿어지려면 서로 은혜를 나누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간증과 믿음의 만남 속에서 예수에 대한 확증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코이노니아이며 성도의 교제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났을때 그들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비겁에서 담대한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한강장로교회 원로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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