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2-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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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가 다시 태어나게 하는 교회 - 사도행전 19장 21절에서 41절
     도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되는 공간입니다. 문화와 경제, 유행, 사람들의 희망과 불안이 뒤섞여 거대한 흐름을 이룹니다. 교회는 이런 도시 속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거대한 도시 속에 있는 작은 공동체일 뿐입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사람들이 반기독교적인 문화에 젖어 있는 시대 속에서 교회의 모습이란 그저 작은 몸짓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다 교회는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교회 안에 끝없는 갈등과 어려움을 안고 가고 있습니다. 힘을 모아도 어려운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스스로 보기에도 교회가 무기력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믿지만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아 보입니다. 도대체 교회가 도시에 어떤 힘과 능력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사도행전 19장은 도시 속에서 교회가 가진 힘과 능력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는 도시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진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교회가 가진 생명력이 무엇이길래 교회가 도시 마저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비결이 바로 복음에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도시의 변화를 위해 교회에 복음을 주셨음에도 교회가 그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기에 변화의 주체로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된다는 말도 아니고, 장차 소금이 될 것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성도 자신이 빛이요 소금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할 뿐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여서 드리는 공적예배는 분명히 우리에게 하늘의 은혜와 불을 내려 줍니다. 하지만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교회가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예배가 교회의 심장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중심이지만, 공적예배만으로는 지역사회에 어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아무리 착해도, 세상은 “교회가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은혜가 교회 안에서만 머물면 도시는 교회를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가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주일 이후 평일의 예배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참된 예배는 삶에서 이어지는 예배입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드리는 삶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예배당 안에서 머무는 말씀이 아니라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라 하신 이웃을 실제로 섬기며 그 사랑을 도시 속에 흘려 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예배요, 도시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시는 완벽한 교회를 통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예배 드리는 교회를 통해 다시 태어납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가 걸어가는 이 길이 대전이라는 도시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대전중앙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12-02
  • [금주의 말씀] 뜻밖의 풍성한 감사(에베소서 3장 20~21절)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에베소서 3장 20~21절)    에베소서 3장 14~21절, 바울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19절까지는 성도가 영적으로 건강하고 충만하기를 위한 기도, 20절과 21절은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운동력 있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부활, 승천, 구원의 능력을 말한다. 구속사적 사건뿐 아니라 우리 기도를 통해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능력이다.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에게 큰 기쁨은 역사하시는 능력이 주를 믿고 의지하는 자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구하는 기도를 빠짐없이 들어주신다. 한나가 드린 눈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당대 최고의 영적 지도자, 사무엘을 주셨고(삼상 1:19~20, 27), 백성을 잘 돌보기 위해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에게 부와 명예까지 더하여 넘치도록 응답해 주셨다(왕상 4:22~30). 또한 우리가 지혜가 부족할 때 구하면 넘치도록 넉넉히 주신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한다.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하나님은 아량이 넓고 포용이 크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더구나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더욱 그러하시다. 바울 기도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가 된 교회를 위한 것이다.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 빛나는가? 우리가 그분의 자랑이 될 때다. 하나님의 하신 일과 그분 자신을 높일 때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할 때다. 그리고 그 일은 ‘모든 세대를 통해 영원히 영원히’ 이어가야 한다. 어떻게?    그런 자리에 공동체가 같이하고,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이 주신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면 된다. 그러면 거룩한 세대가 이어진다. 이어진 세대가 우리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여 높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축복한다.    성경에는 불임으로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던 현장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아브라함, 이삭, 한나, 사가랴와 엘리사벳 등. 그러나 오히려 이런 어려움이 그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든 동기와 동력이 되었다. 고난이 축복으로 바뀐 거다. 그는 아이를 못 갖고 없어서 막힌 인생의 어둠을 뚫고 오히려 출산의 빛을 열어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났다. 아침교회도 그러하다. 하나를 구했는데, 둘을 주시는 하나님. 제주도 여행이면 족한데 일본에 가게 하시는 하나님!! 이사할 집이 전셋집이어도 감사한데, 걱정 없이 살 자기 집을 주시는 하나님!! 말썽만 안 부려도 OK인데, 공부까지 열심히 하게 된 자녀들, 남의 편만 아니어도 되는데, 나의 편이 되어준 남편, 예배만 와도 땡큐인데 와서 제자가 되고 동역자가 되는 여러분 같은 성도!! 선교사들에게 헌금만 보내도 기쁜데, 현장까지 마을까지 들어가 영혼을 구원하고 일꾼을 세우고 그 나라 목회자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아침교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능력이고 여러분에게 능력대로 주신 믿음이 아닌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침교회는 2006년도 5월 28일에 세워졌다. 아주 작고 힘겹게 출발했다.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공간도 부족한 상태로 시작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어 하나님께서 일하기 좋은 상태였다. 그런 황량한 들판 같던 교회가 19년이 지나 성전이 성도들로 가득하다. 보통 성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필요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준비가 된 충직한 청지기들이다. 7개월 후면 아침교회는 어엿한 청년, 스무 살이 된다. 아침인 연령대로 보면 모든 연령대 중에 20대가 가장 늦게 모였다. 하지만 지금은 10여 명의 청년이 출석하고, 얼마 전 청소년부가 생겨나 모든 부서를 갖춘 규모 있는 교회가 되었다.    현실은 냉혹하다. 한국교회 절반 이상이 교회학교가 없다. 아이들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우린 역전을 거듭하고 있다. 나는 아침교회가 한국교회의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왜냐하면 여전히 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응원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뜻밖의 여행이 열흘간 있었다. 한 번도 구하거나 생각하지 않았던 장소와 일정이었다. 여행계획을 세울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초대한 선교사님 부부는 그냥 편하게 오라고 하셨다. 빅아일랜드는 하와이의 시골과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풍성하고 충분한 영적, 정서적, 관계적, 육체적 리트릿이 될 수 있도록 이끄셨다.    이번 여행은 계획단계부터 특별한 선물이었다. 이사와 장남 혼인을 앞두고 엄두도 못 낼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 부부를 특별하고 세미하게 이끌어주셨다. 마치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 일한 것에 대한 존엄(dignity)을 지켜주고 돌려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선교사님 부부의 강한 권유가 계기였지만, 30년 전 청년 때 받았던 제자훈련학교(DTS)에 강사로 오셨던 분들이 말끝에 열방대학에 한 번 오라는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부부 목사 둘이 전부인 교회가 이런 계획을 하는 것은 모험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숙소, 만남, 일정, 날씨, 식사, 재정, 특별한 경험 등 하나님의 세심한 인도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선망했던 열방대학 방문. 특별한 숙소를 배정받았다. 상상할 수 없는 비용으로 숙박했다. 이런 경우가 없었다고 선교사님은 누누이 말씀하셨다.    가는 비행기 좌석은 둘이 떨어져 앉는 자리였다. 결혼 30주년을 기념하는 여행도 되는 기회인데, 아쉬웠다. 하지만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 내 옆 좌석이 둘이나 비어있는 것을 봤다. 큰 비행기에 딱 두 자리만 비어있었다. 승무원에게 아내 자리를 옮겨도 되는지 묻자 쾌히 허락해줬다. 호놀룰루 국제공항까지 아주 편하게 대화하며 올 수 있었다.    하나님의 깜짝 이벤트는 열방대학 숙소였다. 숙소 번호가 118호였다. “내가 너희 숙소를 특별히 준비했어.”라는 하나님 신호였다. 현재 사는 아파트 비밀번호였다. 반복되는 우연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직접 개입이고 간섭이다. 그 사건이 주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릴 사랑하고 인정하며 교회를 기억하신다는 신호였다.    뜻밖의 풍성한 감사 제목을 생각하며 우린 감동어린 감사를 드린다.   열방대학 예배모습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하도록 열방대학 기도실을 가까이에 두셨고, 주일 밤 출발했으나 시차로 주일 낮에 도착하여, 다음 날 월요일 아침부터 천여 명의 세계에서 온 수많은 예배자와 함께 찬양하고 마음껏 기도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것이 하와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곳은 한적하고 쾌적한 날씨로, 기온이 22~26도, 밤에는 산바람 아침엔 바닷 바람으로 생활하기에 적합했다. 무엇보다 경건하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선교사님들 덕분에 검소하고 부지런한 시간을 보냈다. 새벽마다 깨어 기도하고 조깅하여 함께한 시간이 참 복되었다.    20대 시절 소속된 단체에서 제자훈련을 받을 때 오셨던 열방대학 강사님들이 여러분도 꼭 와서 보라고 했던 영적으로 충만한 세계선교의 요람이자 뿌리가 되는 열방대학을 방문하여, 예배할 수 있었다. 아내 박목사님은 20대 때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풋풋한 기억을 만날 수 있어 좋았고, 열방대학 여러 학생이 한국에 대해 묻고 Korean Prayer에 대해 물어봐 줘서 나눌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열방대학 청년들의 모습    나는 고교 시절부터 철야기도를 하며 세계 여러 나라들을 위해 오랜 기간 기도해왔는데, 평생을 헌신하여 선교하고 특히 젊은이들이 파도처럼 몰려올 것에 대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림을 따라 믿음으로 삶을 살아낸 YWAM의 로렌 커닝햄 목사님 부부와 거룩한 부르심을 잇는 수 많은 크리스천을 만나고 얼굴을 마주 대하며 서로 격려하고 얘기 할 수 행복하고 감사했다.    파도가 높을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 높은 파도가 이는 바다를 찾아 가장 높은 파고를 향해 헤엄치는 사람들이 있다. 서퍼들입니다.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파도를 찾아온다. 높은 파도를 기다린다. 그런 파도에 매료되어 삶을 즐긴다. 고난이 고난 아닌 축복으로 바뀐다. 여러분은 어떤가? 우리는 어떤 고난도 넘을 수 있는 크리스천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고난은 고통이나 짐이 아니라 축복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렇다.      예수전도단(YWAM)을 설립한 로렌 커닝햄은 환상을 봤다. 높은 파고를 일으키며 온 세계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몰려오는 것을 봤다. 두려움이 아닌 환희를 가지고, 1960년 청년선교단(YWAM)의 시작되었다. 로렌 커닝햄 목사님의 말씀이다.    "저는 세계 지도에서 파도를 보았습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갔습니다. 그리고 파도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의 파도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러 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꼭 필요한 예배, 좋은 안내자, 상쾌하고 적절한 쉼, 창조주의 아름다움과 광대함을 편히 볼 수 있어 감사했다. 나라 걱정, 교회와 외부 사역도 잠시나마 잊고 내려놓을 수 있어 잘 쉬었다.    6일간 머물렀던 제주도나 시골 같은 열방대학(Univisity of the Nations) 빅아일랜드 카일루아-코나지역은 정말 특별한 상급이었다.   세계 최대 천문대 마르나케어      한 날은 세계 최대의 천문대라고 하는 마우나케어를 찾았다. 그런데 근처에 도착하자 하필 비가 왔다. 먹구름으로 제법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방문자센터까지 가서 다시 물어보기로 했다. 나이 든 가이드는 올라가도 괜찮다고 말했다. 입장료도 없었고 사륜구동 차량인지, 내려올 때 기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만 안내해줬다. 아주 높은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와도 왜 올라가도 괜찮은지 알았다. 비구름대는 아래쪽에 있었고 위쪽은 넓고 맑은 구름대가 펼쳐졌다. 정상에 이르니 추웠지만 아주 좋은 날씨였다. 그렇구나! 대한민국의 영적 기상도 이와 같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마우나케어에서 환상적인 노을을 목격했다. 경이로운 광경이 창조주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노래하기에 족했다. 뜻밖의 풍성한 감사도 곳곳에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안석문목사는 중앙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중고등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가르쳤고, 정릉교회와 예능교회 부목사를 거쳐 2006년 아침교회를 창립했다. 어린이, 교육과 관련된 일을 줄곧 해 오다가 현재는 YP클럽의 대장과 한국교회 다음세대지킴이 연합(한다연) 상임총무로 일하고 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11-11
  •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홍석영목사   할렐루야! 오늘은 다음 주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추수감사절을 잘 준비하는 것인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대 교회의 추수감사절은 1621년 가을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국교회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지 못해 갈등을 겪던 이들은 네델란드로 이주를 합니다. 그러나 네델란드에서의 삶 역시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돈을 모아 메이플라워호를 구입하여 신대륙으로 향하게 됩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이들의 삶은 매우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1620년에 102명의 사람들이 도착했는데 첫 겨울을 지내면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44명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듬해 현지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1621년 가을 첫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도움을 준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함께 칠면조 고기를 먹으며 식사를 했던 것이 현대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1904년부터 미국과 동일하게 11월 셋째 주에 처음으로 지켜졌습니다. 이후 한국의 추수 시기에 맞추어 조정을 하게 되면서 현재는 많은 교회들이 10월 마지막 주 혹은 11월 셋째주를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추수감사절은 성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세번의 시기는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었습니다(신16:16). 이중에 초막절은 한 해 수확의 첫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키라 명령하신 세 절기 중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는 초막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고양시에 위치한 안디옥성결교회의 예배모습   첫째,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분주한 삶 가운데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몸 가짐이 조심스러워 지는 곳을 선택하라면 가장 먼저 교회를 꼽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여 하나님을 만나도록 분주한 삶 가운데 구별된 곳입니다. 다른 곳 보다 주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각 사람이 빈 손으로 나오지 말고 감사 제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아오는 자는‘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신16:17)’ 제물을 준비하여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열매가 다를 것입니다. 각자, 그리고 우리 가정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내 삶의 열매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특별한 예물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받으시고 큰 복을 더 하실 것입니다.   셋째, 함께 기쁨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아무 것도 없어 초막에 거주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을 기념하도록 하기 위해 한 주간 초막에 거하게 하셨습니다(레23:43). 그리고 이 기간에는 ‘너와 네 자녀, 노비, 레위인, 객, 고아,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부터 얻은 소득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 주변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소득이 없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있다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득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주의 은혜 가운데로 초청하십시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빈 자리가 주의 은혜로 채워 질 것입니다. 복음을 나누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5년 추수감사절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추수감사절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얻은 소득으로 힘껏 드리기 위해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주변의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며 섬기십시오. 특히 교회 믿음의 형제 자매, 목회자들과 식사라도 한 끼 나누며 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의 뜻을 실천하는 여러분의 삶의 범사에 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 안디옥성결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11-05
  • [금주의 말씀] 병목의 은혜(마가복음 5장 25절에서 34절)
       여기 한 여인이 예수님의 좋은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와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언비천리>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과 같이 내 입술에서 좋은 말이 만들어져 나가길 소망합니다. 교회자랑, 목사님자랑, 성도자랑, 새가족이 믿음이 정착하는 자랑을 할 때 동서남북에서 많은 자랑의 소문을 듣고 병목의 은혜로 교회는 차고 넘칠 줄 믿습니다.   본문에 기적을 체험한 여인은 좋은 소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 혈루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합니다.(31절)    학1:5-6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우리의 행위를 살피고 새어 나가는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학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의 좋은 소문을 내는 성도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떨어지면 물질도 나가고 건강도 잃게 됩니다.     치료함의 방법은 마태복음 3장 2절에서 세례요한이 외쳤던 말씀처럼 여인은 회개하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예배의 게으름, 기도를 쉬는 것, 불순종한 것을 회개하면 신앙 회복과 육체와 물질의 혈루증이 깨끗이 나음을 얻습니다.    2. 믿음의 기적을 일으킵니다.(27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기회와 찬스를 놓치지 않고 무리를 뚫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긍정의 마인드로 전진할 때 믿음의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옷자락을 붙잡기만 하자, 주의 전에 오기만 해도 주님은 날 만나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일으킴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9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인의 믿음처럼 우리도 믿음이 커가므로 예수님의 보혈로 몸의 질병이 말라가는 기적이 이루어지길 예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3. 병목의 은혜가 임합니다.    동서남북에서 밀려오는 축복이 내 삶 속에서 임할 줄 믿습니다. 창세기 6장 5~7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노아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120년 동안 배를 만드는 중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에도 좌지우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이 지시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의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말씀처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의 인내를 이루어 나갈 때 의로운 자로 병목의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삶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손잡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 속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영육의 질병 또한 나음을 믿고 강건함을 누리는 하나님자녀 되길 예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광명대한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10-27
  • [금주의 말씀] 감사가 답이다(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감사를 발견하고 감사를 붙들고 사는 사람은 인생의 최고봉을 붙잡은 사람입니다. 최고를 가진 사람은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작은 것들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습니다. 작은 것을 감사합니다. 순간순간 감사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감사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그동안 내가 누렸던 모든 축복들이 주님의 선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매튜 헨리는 말했습니다. ‘감사라는 보석을 지닌 사람은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도 행복하다.’   어느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감사의 보석을 갖고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된다면 무엇을 입든, 무엇을 먹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니까 기적이 일어났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기적의 원천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어려움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난 없는 인생은 없다는 말입니다. 문제없는 인생 없고, 기도 제목 없는 가정 없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은 우리 인생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예수님의 삶을 자세히 보시면, 그 말은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다면 감사하라!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낭패한 상황,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감사하니까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생명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선으로 바꾸실 것임을 믿는 믿음의 사람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인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범사 감사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잘 보여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나침반의 바늘이 아무리 흔들려도 결국은 정북을 가리키듯, 어떤 환경이나 조건도 감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고 다짐하고, 그렇게 결단하고, 매일 감사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일만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힘든 일을 만나도 우리 삶의 방향은 나침반처럼 감사라는 방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는 불행이고, 슬픔이고, 아픔이고, 실패이고, 좌절이고, 절망이지만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감사의 조건들임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더 큰 축복의 도구인 것입니다.   행복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감사의 크기라는 말이 점점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부족하여도 감사를 잉태한 자는 감사를 낳고, 풍족하여도 불평을 잉태한 자는 불평을 낳습니다. 깨닫고 나면 감사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철 들고 나면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깨달은 만큼만 감사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곤 합니다.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평범하게 지나는 일상의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고, 감사의 조건들인데,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됩니다. 어찌 보면 뒤늦게 깨닫고는 감사드리는 ‘뒷북 감사 신앙’이 아닌가, 주님 앞에 머리 숙여 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잃고 나서야 후회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리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인생은 마이너스 인생이고, 감사하는 인생은 플러스 인생입니다.   감사는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하나를 감사하면 두 개의 감사 거리를 주십니다. 가시를 감사할 때 장미꽃도 감사하게 하십니다. 제로를 감사할 때 셀 수 없는 은혜들로 채워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깊고 선하신 뜻에 아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범사에 ‘할렐루야’ 하는 은혜를 받으실 것입니다.     감사가 인생의 답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능곡중앙교회 천세봉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10-13
  • [금주의 말씀] 감사와 화해로 드리는 명절(신명기 16장 11절)
        이번 추석 명절 기간은 다른 어느때보다 날짜가 긴 것이 특징입니다. 주일을 포함해서 무려 10여일 가까운 날이 휴가처럼 긴 연휴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더 초조하고 불안하고 공허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추석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추석은 가족이 모이고, 조상을 기리며, 수확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명절이 스트레스, 갈등,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명절을 “하나님앞에서 즐거워하는 날”로 소개합니다(신 16:11). 그러므로 우리의 추석은 단순히 세속적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화해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 추석 명절은 최고의 감사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확 후 초막절에 모여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추석도 우리 삶의 열매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한해 농사를 추수하는 농부처럼 올 한해동안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신 그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한 농부가 가을에 풍년을 맞고도 “비가 너무 왔으면 어쩔 뻔했나, 햇빛이 모자랐으면 어쩔 뻔했나” 하며 불평만 했습니다. 이웃 농부가 말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 손에 곡식을 주셨잖아. 감사가 없으면 풍년도 기쁨이 되지 못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상황이 아니라 마음의 선택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속에서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추석 명절은 모든 이들과 화해하고 용서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지만, 묵은 감정과 갈등으로 인해 즐겁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은 “서로 화목하라”(롬 12:18), “서로 용서하라”(골 3:13) 권면합니다. 미국 남북전쟁 후, 전쟁터에 세워진 교회에 남군과 북군 신자가 한자리에 앉는 것을 꺼렸습니다. 목사가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한 가족입니다”라고 선포하자, 성도들이 서로 손을 잡고 화해했다고 합니다. 추석은 가정의 화해와 용서를 실천할 기회입니다.    셋째 추석 명절은 함께 나누고 섬기는 뜻깊은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16장 11절은 명절의 기쁨을 “레위인, 객, 고아, 과부와 함께” 나누라고 합니다. 우리의 추석도 가족만이 아니라 주변 이웃, 어려운 자들과 나누는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면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참된 경건이야말로 예배나 기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경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참된 기쁨은 나눔에서 완성됩니다.    우리교회는 남양주에서 청소년사랑의 밥차를 11년째 매주 금요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부유하고 넉넉한 시대에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밥을 굶고 힘들어하는 청소년들이 매주 적지 않게 찾아옵니다. 땅끝 선교지가 청소년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쩌면 그들은 배가 고픈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영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굶주려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족과 형제들, 친지들과 이웃을 돌보고 고향 교회 목회자들에게 저 멀리 타향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섬기고 나누는 것이 귀한 믿음의 실천적 자세라고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추석의 신앙적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추석은 단순한 풍습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명절이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의 화해와 사랑의 회복의 기회입니다. 나아가 이웃과 나누는 기쁨의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힘찬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9-26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금주의 말씀] 연약한 인생
    “인간은 참으로 연약하다” 골리앗을 쓰러트렸던 다윗의 고백이다. 나라의 왕이며, 온전한 신앙인, 승승장구한 강한 용사였던 다윗은 “출생에서 죽는 과정을 보니 인간이 참으로 연약하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연약함과 한계를 알기에 그는 신앙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인생이기에 신앙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여야할까? 첫째, 결단을 지킬 수 있는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신앙이 필요하다. 찬송가 작시자도 고백하듯이 내 힘과 결심은 약하여 늘 깨어지기 잘한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의롭게 살기 원하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며 살기 원하지만, 의지가 약하여 너무 쉽게 무너진다. 1절을 보면 ‘내 행위와 혀로 범죄치 않기 위하여 내 입에 자갈을 먹이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죄를 짓고 만다’고 했다. 범죄하지 않고 의롭게 살려고 때론 몸부림을 치지만 마음으로, 입술로, 행위로 범죄하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본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7절에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청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 이것이 신앙이다. 본문 12절에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소서”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는 것,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이것이 신앙이다. 다윗처럼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필요하다. 둘째, 인생은 생명을 지키는데 연약하기 때문에 신앙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유한한 인생이기에 죽음의 문제에 자유롭지 못하다.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떠나야 할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연약함 때문에 신앙이 필요하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필요하다. 본문 12절에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소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신앙이다. 질병에 약하고 늙음에 약하고 생명에 연약한 인간이 고백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연약한 인간에게 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필요하다. 셋째, 인생은 소유를 지키는 데 있어서 약하기 때문에 신앙이 필요하다. 인생은 자신의 힘으로 어느 무엇 하나 지켜낼 수 없다. 본문 6절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사람은 권력, 명예, 재물을 얻으려고 온갖 수고를 다하지만 취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 이처럼 연약한 인생이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필요하다. 본문 7절에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연약한 인생이기에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깨닫고 의지하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신앙이다. 본문 12절에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소서” 이렇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신앙이다.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는 것,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이것이 바른 신앙이다. 연약한 인생이기에 매일 매일 실패와 좌절과 낙망 속에 살아야 할까? 연약한 인생에게 찾아와 주시고 손을 내밀어 이끌어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 다윗처럼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길 소망한다.   /소망의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2-03
  • [금주의 말씀] 위기의 교회에서 극복할 문제들 - 박만배
      오늘날의 교회가 격변하는 시대변화를 깊이 성찰하고 새로운 부흥의 대안을 찾아 대응해야 한다. 지금 모든 교회가 새롭게 변화되고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 모든 이들에게 희망과 축복이 가득하도록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교회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비전을 가져야 하고 희망을 품어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날마다 새로운 각오를 다지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은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종교적 양심을 주장하는 군 입대 거부, 인권을 가장한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동성애, 동성 결혼, 가나안 교인들, 안티기독교인들, 수많은 이단들의 발흥, 모호해진 선악의 기준, 권위의 무너짐의 문제 등으로 국민적 갈등, 이를 치유해야 할 교파도, 연합기관, 교회도 분열과 갈등으로 큰 어려움으로 명명백백한 해법이 밝히 보이지 않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우리들의 처지이다. 이제는 목회자와 교회가 진리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지혜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의 빛 가운데서 살게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오늘날의 목회자와 교회, 성도들을 이렇게 진단해 보자. 첫째, 오후 6시 퇴근 현상, 고원현상, 현실에 안주하고 순응해버리는 증세, 더 이상 개척, 모험, 도전정신을 갖지 않는 조로 현상이다. 일정한 성장과 높이에 다다르면 정체되는 현상인데 성도들과 목회자들, 교회 역시 성장의 정점을 찍고 현재는 이 상태에 현상에 빠져 있다. 끊임없이 성숙해지려는 몸부림이 없는 목회자와 성도와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고 결국은 책망 받고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몸은 늙어도 믿음은 늙어서는 안 된다. 둘째로, 복음의 본질과 십자가의 능력보다는 사람의 감정과 내면을 어루만지는 비 복음과 축복주의로 성도들이 유약하여 유혹과 시험, 세상을 세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능력을 잃어가게 되는데 강단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데 귀에 듣기만 달콤한 솜사탕 같은 설교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여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무장시켜야 한다. 셋째로, 교회의 중직자들, 교회개척멤버, 교회 기득권을 가졌다고 하는 오래된 신자들, 자신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잡고 일하지 않으면 교회가 잘 되지 않는다고 자처하며 자행을 일삼는 세력들의 저항.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 사람과 사람, 부서와 부서, 기관끼리 갈등,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이러한 크고 작은 일들을 잘 상담하고 조정할 수 있는 조정자를 세워 지혜롭게, 은혜롭게 해결해 나가는 목회자의 리더십이 교회가 계속해서 주님의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넷째로, 미래교회에 대한 계획을 지금 바로 철저하게 수립해야 하고 실천해 나아가야 한다. 내일의 교회세대를 세워나가는 교회가 되어야만 교회의 내일을 보장하고 이어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나라와 교회마다 출산율 저하와 무관심으로 교회학교, 중·고등부, 대학부, 청년회가 위기에 처해있는 것은 모두가 절감하는 문제이다. 미래의 주역은 현재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다음세대들이다. 이 문제를 간과하고 소홀히 하여 준비하지 않고 실기하면 내일의 교회는 위기에 봉착하고 결국은 모두가 외면하는 빈집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목회자와 성도들, 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더욱 붙잡고 교회의 충실한 내연화를 시급히 추진하여 100년의 미래를 준비하는 실제적, 공동체적, 교회론적인 교회 세대를 세우고 이어가야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측 총회장, 유향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1-22
  • [금주의 말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 임용택목사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것을 꽃에 비유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을 보면 장미꽃처럼 아름답답고 말한다. 솔로몬은 아가서 2장 1절에서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라고 했다. 솔로몬은 사랑하는 술람미 여인을 백합화에 비유했다. 중국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을 쟈스민 꽃에 비유한다. 꽃도 아름답지만 쟈스민 향기가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이 그 꽃보다 더 아름답다. 사람은 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이다.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사람을 지으신 분이 아름답고 존귀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기에 아름답다.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 가면 ‘황소머리’란 피카소 작품이 있다. 1942년에 피카소가 낡은 자전거로 만든 작품이다. 자전거의 안장은 황소의 얼굴이 되고, 자건거 핸들은 황소의 뿔이 되었다. 작품이 만들어진 지 50년 정도 지난 후에 한 경매장에서 이 작품이 약 300억 원에 팔렸다고 한다. 지금은 돈으로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남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버린 낡은 자전거가 피카소의 손에 닿자 보물로 변했다. 오래전에 러시아에서 다 망가진 탁자와 펜 하나가 발견됐다. 어떤 사람이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창고 세일을 했는데 무려 1만 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러시아 최고의 문호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쓸 때 사용한 탁자와 펜이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건의 가치는 누구의 작품, 누구의 소유냐에 따라 달라진다. ‘황소머리’의 재료가 버려진 낡은 자전거이고, 별 볼품이 없어 보여도 피카소가 만들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로 인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가? 사람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하나님의 작품을 피카소의 작품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아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꽃보다 귀한 이유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심을 잘 안다고 고백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인간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의 주인이시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장육부를 지으셨다고 했다.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우리를 빚으셨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공장에서 나오는 상품처럼 만드시지 않았다. 인간은 공장에서 똑같이 대량으로 출시된 상품이 결코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정성을 다해 만드신 작품이다. 상품이 아니라 작품이란 말이다. 몸속의 작은 뼈 하나, 세포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만드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만드셨고 그 수를 아시는 분이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에 달려 있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면 행복하지만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면 불행하다. 자신을 걸작품으로 보는 긍정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도 긍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작품이 아니라 상품으로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하나만 제대로 깨달아도 인생이 달라진다.  /안양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1-20
  • [금주의 말씀]화해의 선물
    ▲ 이재기목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가였던 로렌스 반 데르 포스트가 들려주었던 두 형제의 이야기다. 형은 큰 키에 힘도 세고 똑똑하며 탁월한 운동선수였다. 가족들이 살고 있던 남아공의 어느 사립학교로 보내진 그는 훌륭한 학생회장이 되었다. 그의 동생은 여섯 살쯤 아래였다. 동생은 잘 생기지도 않고 유능하지도 않았으며 게다가 곱사등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출중한 재주가 있었는데 노래를 아주 잘한다는 것이었다. 동생도 형을 따라 같은 학교에 들어갔다. 하루는 한패의 학생들이 우르르 다가와 동생을 괴롭히고 놀리며 그의 셔츠를 찢어 굽은 등을 드러냈다. 형은 사태를 알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 가혹한 학생들을 맞서서 그 이상하게 생긴 곱사등이가 자기 동생이라고 밝히면서 비참한 난장판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과제를 마칠 때까지 그냥 화학 실험실에 남아 있었다. 상황을 방관함으로써 동생을 배신했던 것이다.   그 뒤로 동생은 딴 사람이 되었다. 그는 농장이 있는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했고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그 사이에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형은 군인이 되어 팔레스타인에 주둔하게 되었다. 바깥에 누워 별빛이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던 어느 밤에 그는 자신이 학창 시절에 동생에게 저지른 잘못을 깨닫게 된다. 집에 가서 동생에게 용서를 구하기 전에는 절대로 평안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그의 마음이 속삭였다. 전쟁 중이어서 매우 힘겨웠지만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남아공까지 이동했다. 두 형제는 밤늦도록 오랜 대화를 나누었고 형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고백하는 가운데 동생의 용서를 구했다. 둘은 함께 울며 끌어안았고 둘 사이의 불화는 치유되었다. 그 날 밤, 놀라운 일이 생겼다. 잠들었던 형은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풍부하고 그윽하고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동생이 다시 노래 부르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관계의 화해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필요한 가를 잘 보여준다.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노래하는 목소리를 찾을 수 있다. 혹시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용서를 구하거나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는가? 주고받은 깊은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심지어 예배보다 그것을 먼저 행하라고 권면하신다.  물론 누군가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야곱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자기 형이었던 에서를 속인 일로 인해 이 쌍둥이 형제의 관계는 심하게 틀어지게 되었다.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까지 했었다. 20년간 형을 피해 외국에서 살다가 다시 돌아오던 때 형과의 숙명적인 만남을 앞두고 야곱은 밤새 하나님과 씨름한다. 형이 400명의 부하와 함께 자기에게 오고 있다는 소식에 몸서리를 치면서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다음날 두 사람 사이에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 이야기는 화해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사역이며 선물임을 잘 보여준다. 야곱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믿음으로 화해의 은혜를 구하라. 잘못이 있다면 겸손히 고백하며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면 예수님께서 내게 하신 일을 생각하며 베풀어야 한다. 야곱과 에서에게 화해라는 은혜의 선물을 주시고 관계를 회복시켰던 하나님께서 당신의 관계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당신의 삶에 다시 한 번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리게 하실 것이다. /사랑빚는 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2-31
  • [금주의 말씀] 인생의 여정
      ▲ 최성환목사 여행을 준비하면서 손꼽아 기다리는 설렘은 즐겁다. 새롭고 낮선 환경 속에 들어가면 내가 살아왔던 것과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며 감동을 받기도 한다. 분주하게 살아가는 현지인들과 다르게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고 쉼을 얻고 있음에 감사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늦은 저녁 숙소에서는 낮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피곤함에도 새로운 것을 경험한 것에 대한 즐거움이 나에게 주는 여행의 즐거움이다.  살다보니 인생은 여행과 같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여행을 보내주셨지만, 나만을 위한 여행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이루어야 할 것을 기대하시는 여정이다. 그래서 가족을 만나고, 친구를 만났다.  최근에는 함께 여행을 계획했던 친구가 먼저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 왜 주님은 그를 먼저 데리고 가셨나를 생각해보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생의 모든 것을 그 분이 주관하시기에 해답은 찾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먼저 떠난 친구도 나를 위해 보내주신 만남의 축복이었다. 그를 기억할 때마다 함께 더 많이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가장 큰 아쉬움은 늘 함께 했으나 그에게 예수를 알려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그에게 좋은 친구였지만 정작 그에게 해 주어야 했던 복음은 전해주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참 많다. 내가 그들을 만난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는다. 우연히 만났지만 내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나를 이 땅에 보내시고 먼저 예수를 알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최근에 여행 중 만난 사람에게 교회 갈 것을 권하고, 그의 연락처를 받아 매주 SNS을 통하여 예배 참석을 확인하고 있다.    내가 이 땅에서 여정은 지속적으로 누군가를 만나며 그들에게 예수를 증거 하는 것이다.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제 곧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가야하는 인생인데,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또 다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마치 다음 여행지를 위하여 가방을 챙기듯이 나는 새로운 만남을 위하여 짧은 복음 메시지를 준비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15)  여행을 다녀와서 가까운 사람에게 여행의 행복을 말하듯이, 우리 인생의 여정을 마치고 하나님을 만나서 무엇을 말해야 할까? 달란트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표현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표현은 분명하게 평가하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인데, 오늘 로마서 14장 11~12절에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는 말씀과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는 말씀은 나의 인생 여정에 가장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나는 과연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여행의 목적에 맞게 살아가고 있을까? 2018년을 마치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의 모습이 어땠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이 땅에서의 삶에서 아쉬움 없이 그분께서 보내주신 목적에 살았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해마다 반복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고 이제는 새로운 인생여정을 준비해야 할 때다. 누구를 만나서 예수를 전하려하는 목적으로 언제 어디로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겠는가?   /사랑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2-27
  • [금주의말씀] 요셉 이야기 - 이요한목사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탄생을 얘기하면서 주목하는 한 사람은 바로 요셉이다. 우리는 먼저 그의 이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마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요셉을 창세기의 요셉과 닮은 사람으로 그린다. 첫 번째는 이들이 꿈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창세기의 요셉은 꿈의 사람이었다. 그가 꾼 꿈이나 그가 해석해주는 꿈은 거의 확실하게 이루어졌고 그의 형제들이 그를 ‘꿈꾸는 자’이라고 부르고 있다. 마태복음의 요셉 역시도 꿈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총 6번에 걸쳐서 꿈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4번은 모두 요셉이 꿈을 꾼 것이다. 두 요셉은 모두 꿈을 꾸는 사람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두번째로 창세기의 요셉이 이스라엘의 수호자였던 것처럼 마태복음의 요셉 역시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요셉은 아기와 그의 어머니의 생명을 살리고자 그들을 데리고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 창세기의 요셉은 야곱의 가정 전체를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인도했으며, 자신의 사명이‘당신들의 후손’을 이 땅에 두시려고 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두 요셉 사이에는 유사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마태가 요셉을 창세기 요셉의 완성판으로 제시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요셉이 필요했듯, 예수님의 교회를 지키고 바르게 인도하는 데에 요셉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요셉과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첫 번째로 말씀의 사람이어야 한다. 창세기의 요셉과 마태복음의 요셉 모두가 꿈과 계시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세상 지식과 경험들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하지만 요셉과 같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주목하고,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에 민감한 교인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의롭고 순결한 사람이어야 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은 안주인이었던 보디발의 아내에게 성적인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요셉은 유혹을 이겨낸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요셉은 고차원적인 순결과 의로움을 보여 준다. 마태복음의 요셉은 마리아에게 파혼을 요구할 수 있지만 아내로 맞이하였을 뿐 아니라 동침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던져준다. 이 시대는 성적 방종의 시대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결한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념하는 이날 우리는 성결한 요셉의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세 번째로 교회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이 죽는 상황 속에서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의 보호자가 되어 애굽으로 도망치고, 이스라엘로 왔다가 다시 갈릴리로 도망쳤다. 요셉은 당시 16~18세의 소년이었다. 한 소년에게 주어진 하늘의 음성이 그를 헌신자로 부르셨는데 그가 순종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무서웠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교회의 보호자로서의 사명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며 도운 이 귀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꿈의 사람이었고 순결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마리아와 예수님의 보호자가 되어 여러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셉이라는 한 청년의 말씀 순종과 성결한 삶과 희생을 통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이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말씀 순종과 성결한 삶과 희생을 통해 다시 이 땅에 오실 줄을 믿는다.  /쉐이커스 미니스트리 대표, 기쁨의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2-20
  • [금주의 말씀] 대강절을 맞이 하며
    ▲ 서충원목사 오늘 본문은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육신의 차원과 말씀의 차원, 피조물의 차원과 창조주의 차원은 혼동될 수 없다. 그러나 육신은 말씀 없이 나타날 수 없고 말씀 없이는 어떤 피조물도 존재할 수 없다. 창조주의 말씀은 모든 육체를 넘어서면서 모든 육체의 근원이시며 목적이다.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은 창조주의 영광을 반영하고 그것을 가리킨다. 보이는 피조물을 넘어 창조주 하나님을 보고 그를 알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제 말씀이 육체가 되셔서 영원한 영광을 계시함으로 육체도 이전의 육체가 아니게 된다. 말씀의 영광을 담은 육체,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다. 질그릇은 보배일 수 없고 보배의 영광을 지시하는 육체 자체를 보배와 동일시하는 것은 큰 착각이지만, 질그릇 육체를 떠나 그 보배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는다. 육체는 말씀의 영광을 담는 그릇이다. 육체는 그 안에 담긴 말씀의 영광을 보게 함으로 우리에게 이전에 주지 못한 기쁨을 준다. 우리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넘어 말씀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지향한다. 그러나 육체를 부정함 없이 오히려 육체를 매개로 하여 그 육체의 근원과 목적을 지향하고 육체 안에서 초월적 영광을 감지한다. 땅은 하늘을 지시하고 하늘의 영광을 더 깊이 알게 되면서 이 땅은 생명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제 성육신하신 아들 안에서 우리는 하늘과 땅이 입맞추고 말씀과 육체가 동화되는 계시적 현실 앞에 선다. 성육신의 비전은 교회의 비전이다. 이것이 대강절의 참된 비전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듯, 우리 안의 영적인 생명이 육체에 빛나게 되는 비전이다. 육체를 넘어서 저 하늘의 계시를 보고 사나 육체 안에 그 계시적 경험이 반사된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동료인간과 동료 피조물과의 만남의 새 근원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은 이웃사랑의 능력이 된다. 말씀은 육체가 썩어질 것임을 보여주는 거울이면서 그래서 육체의 죽음을 촉진하면서 나아가 말씀이 모든 만물의 새 창조의 능력임을 알게 한다. 이제 더는 썩어질 육체로 살지 않고 썩지 아니할 영원한 생명으로 육체를 죽음에서 건져낸다. 이제 육체 안에 사나 말씀의 능력 한 가운데서 육체의 한계를 돌파한다. 물론 여전히 육체는 육체이고 질그릇은 질그릇이지만 이제는 말씀의 능력을 담은 육체이고 보배를 드러내는 질그릇이다. 다른 이들과 동일한 한계 안에 살지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보이는 육체의 슬픔과 절망을 넘어 살게 한다. 우리는 성육신의 은혜를 입어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경험하고 있다. 이제 말씀을 육체가 되게 하라! 말씀이 여기에 계시되게 하라. 제자들의 공동체는 말씀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공동체이다. 성육신으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졌듯이 지금 교회 안에서 제자들의 죽음과 삶 안에서 하늘의 생명이 죽음의 그늘 아래 사는 이 땅에 비치고 있다. 단지 썩어질 육체를 넘어선 말씀의 능력 안에 들어간 새로운 육체, 그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육체가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경험된다. 교회는 계시적 공동체이며 세상을 비추는 빛이다. 나사렛 예수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듯 약하고 허물 많은 교회가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영광을 실제 삶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와 보라!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지 않은가? 여기에 어둠을 비추는 빛이 빛나고 있지 않은가? 현실이 절망인가? 주의 아름다움을 아는 제자들 안에 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빛이 있지 않은가? /샬롬영광누리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2-07
  • [금주의말씀] 항상 감사할 은혜
    ▲ 함정호목사 중생구원은 사죄 공로의 태를 통해서 주신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말씀대로 영원히 사망케 하는 독이요 지옥에 갈 밑천이다. “사죄”란 죄를 멸해서 무죄한 자가 되게 한 은혜다. 이는 인간의 대표이시며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대신 죽으셔서 죄의 값인 사망을 지불해 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없이 해주셨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사죄의 은혜는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서 구해주신 은혜요 죄와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능력의 은혜이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산자를 위하여 살게 하심이라’(고후 5:15) 이 중생구원은 칭의 공로의 태를 통해서 주신다. 무죄한 예수님은 “대형”으로 사죄를 “대행”으로 칭의의 은혜를 입혀 의로운 자 되게 하셨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에서 잉태하실 때부터 다 이루었다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성부의 뜻을 한 번도 어기지 않으시고 온전한 순종으로 의롭게 사셨는데 일생에 의롭게 사신 “의행”의 이력을 우리가 산 것처럼 우리에게 입혀 의롭게 하셨으니 이것이 칭의 구원이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로마서는 말한다. ‘칭의’는 하나님의 부요존귀, 권세, 영광의 은혜를 받는 자격이요. 이 칭의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받음으로 이 순종의 줄은 하나님의 만복이 오는 줄이다. 칭의를 입은 자는 그 자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 중생구원은 화친 공로의 태를 통해서 주신다. 첫 아담의 죄, 불의로 하나님과 원수되어 생명이신 하나님과 끊어져 사망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대형, 대행, 대화로서 친히 제물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으니 이것이 화친의 구원 은혜이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써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니라’ 하나님과 화친한 자되면 하나님은 내 안에 나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 된다. 화친 자로 살려면 사죄, 칭의, 화친 은혜로 자기 몸이 온전히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주님의 것으로 살아야 한다. 이같이 중생은 주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구속의 태에 진리와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새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 구원의 은혜는 중생시키는 역사를 통해주신다. 중생은 ‘다시 나다, 거듭나다’라는 말인데 부모를 통해 허용창조를 통해 낳은 육의 사람이 주님의 구속, 피의 은혜를 입혀 진리와 성령으로 신령한 사람으로 두 번째 낳은 것이다. 첫 아담은 범죄로 생명이신 하나님과 끊어져 죽던 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 중생이다(엡 2:1~10). 하나님의 영생하는 새 생명을 받아 영생할 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백성으로 하나님의 후사로, 온전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 중생구원은 만인이 다 받을 수 있는 구원이 아니요, 인간에 의해서 받는 구원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들에 한해서, 하나님의 단독적인 역사, 절대 주권적인 역사, 무조건적인 은혜의 역사로 받는다. ‘중생’은 일생중단 일회적이며, 모든 택자들에게 격차가 없이 주시는  구원이다. 중생은 신령한 사람이 출생한 것임으로 이 영의 사람이 자라 온전해가는 성화 구원의 기초이다. 이 중생은 성부 하나님의 예택 창조와 성자 하나님의 사죄, 칭의, 화친, 은혜와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로 되었다. 중생은 온전하신 성 삼위 하나님의 주신 것임으로 절대 온전한 구원이다.   /영화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1-27
  • [금주의 말씀] 종속적 동역자
    ▲ 박만배목사   세상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움직여지지만 동시에 종속적 동역자인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일꾼들을 불러 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불러 훈련시키시고 연단시켜서 자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다. 주의 일을 힘에 겹게 지치도록 하다가 탈진하고 원하는 만큼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실망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도 헤아릴 수없이 경험하며 낙심, 원망할 때도 있었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서 우리를 교훈하시고 보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새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였다. 두 번째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첫 번째 명령과 그 이후에 있었던 요나의 경험을 염두에 둔 것이다. 즉 요나가 첫 번째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실패했으나 하나님이 다시 요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아담’에게도 하나님이 다시 찾으셨다. 행위언약에서 실패하고 숨어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시어서 가죽옷을 입혀주시고 패자부활전? 두 번째 기회를 주신 하나님…?   피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이방구원의 계획이 요나의 불순종으로 지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요나 한 개인에 대한 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했지만 하나님은 기필코 ‘베드로’를 예수님을 통해 다시 찾아오시고 새 힘을 주시고 훈련시켜서 초대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큰 일군으로 데 크게 사용하셨다. 불완전한 인생이 삶의 현장에서 쓰러지고 넘어지고 하는 것은 다반사가 아닌가? 일곱 번 넘어지면 8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을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이다(욘 3:1~4) 요나는 이미 풍랑(1:11~16)과 물고기 뱃속에서(1:17~ 2:10) 하나님의 능력을 크게 경험하였다. 자연을 통한 재앙은 요나로 하여금 자신이 절대로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이 아니고는 결코 살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욘 2:9)을 철저하게 실감하고 인정하게 하였다. 지금 시대가 상황이 분위기가 현상이 도덕적, 영적 수준이 앗수르의 니느웨성의 2,800여 년 전의 시대상황과 부도덕과 윤리, 우상숭배, 황금만능, 자신이 신의 자리에서 영광 받으려는 최악의 위기의 때가 아닌가? 영적 타락의 도가 넘은 죄악이 관영한 노아시대, 롯의 때가 아닌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전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주저앉아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가? 요나의 생각으로는 될 것 같지 않은 니느웨성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살아나는 기적은 2,800여 년 전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들이다. 악독하기 그지없던 니느웨 백성들과 왕, 그리고 짐승까지도 금식하며 회개하는 역사를 하나님은 하시지 않았는가? 일어나 선포하라! 다시 한번 첫사랑의 뜨거웠던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내 힘과 방법으로만 주의 일을 하려고 했던 나를 주님 앞에 엎드리어 회개하고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영적 감각의 민감함을 회복하고 주님의 능력 앞에 마음 깊은 순종의 사명자가 되자!   나는 주님이 힘을 주시기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일어나 걸으라 내(主)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으라 내 너를 도우리… 주님은 그대를 주님의 종속적 파트너로 선택하셨다.  /합동개혁 총회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1-21
  • [금주의 말씀]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
    ▲ 조동호목사   출애굽기 31장 14~15절과 35장 2절에는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간주하고 있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와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다.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가 또 다른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로 간주되고 있어서 충격적이다. 오늘날에는 엽기적 살인자조차도 사형에 처해서는 안 된다는 사형제 폐지론이 지배적이어서 613개 토라계명들 가운데 사형시켜야 할 만큼 큰 죄로 간주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를 사형에 처하라는 계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또 토라에서 안식일을 더럽히거나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를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로 다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대교인들에게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오늘날 유대교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하라”는 계명대로 안식일을 ‘기억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는 계명대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인데, 특히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여 창조의 일을 중단하고 노예와 유배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제2, 제3으로 이어지는 해방, 곧 이스라엘의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이로써 우리는 적어도 유대교인들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이유가 사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에는 상사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고, 만일 불복종할 시에는 사살시킬 수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전시법은 부대원들의 생존뿐 아니라 국가의 존망이 걸린 비상사태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시와 같은 비상사태에 자주 처해있었다. 그 원형이 출애굽 사건이며 이들의 땅과 나라를 얻기 위한 투쟁이 멈춘 적이 없다. 이처럼 모세오경은 백성이 한 사람처럼 단결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생존을 위한 투쟁이 극심했던 상황들에서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은 유대인들에게 3천 년이 넘게 지속되어 왔다.   이러한 투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선포 이후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토에 돌아온 유대인들이 겪었던 이방인들의 핍박과 경제적 어려움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바벨론(페르시아)탈출 세대가 고토에서 겪었던 어려움은 이집트탈출 세대가 광야에서 겪었던 어려움에 뒤지지 않았고, 그로부터 2,500년 후에도 상황은 동일했다.    전시법과 같은 토라 모세오경과 613개의 계명들은, 비록 오늘날에는 유대인들조차도 죽은 법으로 여기는 것들이 수백여 개나 되지만, 유대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게 된 원동력이다.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수천 년에 걸쳐 험하게 살아온 만큼 칭송과 아울러 멸시와 천대를 받기도 한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믿음과 신념이 강했고, 확신과 희망이 강했으며, 싸움닭처럼 거칠게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은 영원성의 상징이다… 유대인은 예언의 말씀을 아주 오랫동안 보존하고 그것을 인류에게 전달한 민족이다. 이 같은 민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칭송을 받는가 하면, 10억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한다. 최근 매일 평균 17건의 반유대주의 행위들이 보도되었다고 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거나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빛과생명그리스도의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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