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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이까 - 본문 : 시편 13편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편 13편 1절)   ‘어느 때까지이니이까’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모든 것을 해보았지만 섣부르게 희망을 발설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과 절망의 상황 속에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 속에도 이런 절망을 경험할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순간. 그저 먹먹한 마음과 멍한 감정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시간이 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이런 절망의 시간이 새로운 희망의 도래와 출현을 꿈꾸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신앙 안에서의 구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으로 살아온 듯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죽음 앞에 한 줌의 먼지로 소멸된다. 그제야 인간은 깨닫는다.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란 뜻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여정과 생명의 종착역은 창조주이며,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섭리라는 것이다. 이런 섭리를 가슴 깊이 새겨 놓을 때, 우리는 인생의 고난과 역경 앞에서 덜 당혹해한다. 고통의 시험을 지혜롭게 넘어설 수 있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편 12편 2절)   시편 기자의 솔직한 탄식은 계속된다. 거듭되는 영혼의 번민과 마음의 근심. 동시에 구원을 갈망하는 기도를 드린다. 시편 기자의 기도는 성숙된 기도이다. 아픈 마음을 있는 그대로 대면한다. 하나님께 기도한다.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지나친 자기 연민과 슬픔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한다. 나만 슬프고, 나만 아프다는 고립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굴절된 자기 연민은 더 큰 소외와 상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편 12편 3절)   시편 기자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한다. 눈이 밝아진다 것은 현상을 굴곡 없이 인식한다는 뜻이다. 바라봐야 할 것을 바라보고, 버려야 할 인식의 찌꺼기는 내려놓는 건강한 시선을 의미한다. 기도는 우리에게 이런 투명한 시선을 허락해 준다. 동시에 가야 할 길을 보게 하며 버려야 할 마음을 내려놓게 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편 12편 6절)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는 다시 마음을 부여잡는다. 회복의 주체를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둔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의지하여 다시 찬양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이 기도는 맹목적은 희망이 아니다. 지난 시간 속에서 경험된 구원의 하나님,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찬양이다. 그렇다. 삶의 역경과 어려움이 왔을 때, 지난 시간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보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회상해보라.   지금 우리는 “어느 때까지이니이까”란 탄식을 하나님께 드리고 지난 시간 잘못된 인간의 욕망을 성찰해야 한다. 나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로 여기고 함께 연대하며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견디며 나아갈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좋은나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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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4
  • 코로나와 예배의 회복 - 사사기 6장 25~27절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혼란과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코로나가 끼친 영향 중에 좋든 싫든 가장 많이 접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교회의 예배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권고에 따라 현장예배에서 온라인 영상예배로 많은 교회들이 변화를 꾀했다. 두 주간의 거리두기 캠패인이 끝나고도 사회는 교회에 온라인 영상예배를 희망하는 분위기다. 부활절을 맞는 많은 교회들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현장예배로 점차 돌아서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코로나19가 지속되는 한 현장예배에 대한 사회의 불만은 계속해서 터져 나올 것이다. 실제로 500명이 모이는 예배당에서 코로나 방역기준을 적용해서 자리를 배치한다면 100명 밖에 앉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가 교회의 과제이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끌어안고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같은 예배는 어떻게 드려져야 하고 과연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신령한 예배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기드온이 살던 시대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에 의해 압제당하던 때였다. 하나님께서는 농사꾼인 기드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명령하신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주저하던 기드온은 결국 하나님이 보여주신 표징을 보고 순종을 결심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주신 첫 번째 미션은 아버지가 관리자로 있는 바알신당의 석상을 헐어버리고 아세라 목상을 깨트려서 그 나무와 칠 년 된 수소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난감한 명령이었다. 아버지가 관리자로 있고 온 친족과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섬겨오던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깨트리고 찍어버리는 일은 생명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버지를 대적하는 일이요 이 마을의 공공의 적이 되는 모험이다. 이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결단한 기드온은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마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고자 우상의 단을 과감하게 헐어버린다.   여호와께서는 기드온을 보호하신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 누구도 그의 영혼과 육체를 해칠 수 없다. 이제 기드온은 나팔을 불어 소집한 이스라엘의 용사들을 데리고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연합군을 맞아 승리의 전쟁을 치른다. 겁많은 농부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우상 숭배자에서 진정한 예배자로의 인생의 회복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올바른 예배에서 시작되었다.    인생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에서부터 출발 됨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주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예배하는 자리에 설 때에 그는 인생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 바른 예배, 신령한 예배, 주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자가 되려면 먼저 내 안에 있는 우상과 악한 것들을 깨트리고 찍어 버려야 한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왕 되심을 선포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노래해야 한다.    주님이 없는 예배는 예배일 수가 없다. 오프라인 예배냐 온라인 예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냐를 물어야 한다. 예배당이라는 건물 안에서 드려야 주님이 받으시는가? 아름답고 웅장한 예배당 자체도 또 다른 우상이 되고, 내게 신령한 예배라는 착각을 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이제 질문하자. 우리의 예배에 주님의 임재가 있는가? 당신의 예배 공동체에서는 진정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왕으로서 다스리고 계시는가?/예수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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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9
  • 미스바로 모이라 - 본문: 사무엘상 7장 1~12절
      세상 종말이 되면 막을 수 없는 병으로 수많은 자들이 죽는다. 작금의 세계 모든 민족이 전무한 ‘신종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크나큰 죽음의 공포로 세계의 경제, 외교, 문화, 종교가 큰 위기를 맞고 대처할 방법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지만, 과학을 맹신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과 정부는 위기극복에는 매우 미미한 힘을 보여주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과학만능, 정보사회, 최첨단을 자랑하는 나라정부, 회사도 속수무책으로 망연자실로 당하고만 있는 현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위기 앞에서는 하나님 앞에 모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미스바로 모이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참된 회개를 통해서 국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모여서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로 모든 죄악을 버려야 한다. 사무엘 선지자는 모든 백성들에게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라”(3절)라고 강력하게 이방신들을 버리라고 외치고 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최상의 방법은 모든 백성들 중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모든 죄들을 먼저 제해야만 참된 회개가 될 수 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시는 더러운 죄들을 버리고 미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참된 회개는 이제까지 행했던 죄악 된 행실을 증오하고 그 모든 죄악 된 행실들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단절시키고 영원히 결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그 모든 악한 길에서 떠나 주님의 부르심과 성결케 하심에 기꺼이 응답하는 것이다.   둘째로 나의 삶의 방향을 여호와께로 향하는 것이다. 3절 말씀에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 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던 모든 죄악된 것들 이방신과 세상과 타협하고 저질렀던 창조질서들을 부정하고 인간들이 하나님의 지위를 탐했던 모든 부정, 부패, 비리, 구습과 관습, 전통, 적당주의, 불순종, 인본주의, 사치, 음란등등 지금 국난을 당한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은 미스바에 모여서 회개하며 부르짖으며 세상과 짝하며 적당하게 살며 자위했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회복되어야 할 신앙 양심 회복, 진리에의 절대순종, 신앙 인격 회복, 구원받은 자로서의 인격적인 행동, 사고, 실천,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셋째로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3절 말씀에서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 향하여 그만 섬기라”라고 외친다.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메시지이다. 백성들이 애굽의 고역에서 부르짖고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면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잊고 가나안의 신들을 함께 섬기고 혼인하고 그들의 풍습을 따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온갖 바알, 아세라 신들과 목석의 우상들을 섬기면서 영적으로 깊이 타락하게 되었다.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열방과 민족이 주를 찬양하여 주의 긍휼하심의 은혜가 이 땅을 덮어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는 세상을 만들어야만 한다. /예장 합동개혁측 총회장, 유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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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2
  • 참된 예배 - 이사야 1장 11~16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한국 교인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길게 지속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묻게 된다. 교회 문이 닫혀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던 일들은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제시대에도 그랬고, 공산당이 남한을 점령했을 때에도 교인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으나, 그때에 믿음의 선진들은 그 모든 상황들과 탄압을 잘 이겨냄으로서 믿음의 유산을 우리들에게 남겨주었다.   오늘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사태는 종교 탄압도 아니고, 바이러스의 더 큰 확산을 막기 위한 모임 방지이기 때문에 현재를 살고 있는 한국 성도들은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우리가 행해야 할 바를 찾는 데에 혼란스러울 수 있다. 믿음의 선진들이 여러 가지 정황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이겨냈듯이 우리들도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예배드리러 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책망하는 말씀이 이사야 1장에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닐까? 스스로 돌아보면서 이 시기를 극복하기 원한다.   (이사야 1장 1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1장 12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 이니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적으로 마음 없이 제물을 가지고 성전을 출입했다. 이에 하나님은 “너희가 보이러 오는 예배”는 “마당만 밟고 가는 헛된 예배”라며 책망을 하셨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으로 드려야만 한다.   (이사야 1장 13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사야 1장 14절)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많은 예배를 드리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드려지는 많은 예배가 무거운 짐이 되어 하나님이 지기에 곤비하였다”고 하신다. 우리 스스로의 예배를 점검해보자. 이런 예배와 제물은 주님이 받으시지 않고 기도의 응답도 없다고 하신다.   (이사야 1장 15절)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이사야 1장 16절)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우리의 믿음의 모습들을 뒤돌아보고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자. 사사기 1장 18절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우리의 어떤 잘못이라도 돌이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모아 먼저 우리의 손을 씻는 회개의 기도를 함으로 참된 예배를 회복하는 길이 유일한 해결이다. 하나님께 우리의 예배를 올바로 회복시킬 때 하나님의 손 아래서 담대함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사사기 1장 19절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우리의 예배가 회복될 때 누리는 평안함이다. 이런 은혜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우리 모두 기도하자./베들레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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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 도전에는 마침표가 없다 - 마태복음 14장 22~33절
      ‘르상티망’이라는 말이 있다. 르상티망은 프랑스어로 원한이나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이 반복되어 마음속에 쌓인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고급 프렌체 레스토랑 갈 필요 없어, 파스타 체인점이면 충분해. 다들 명품을 왜 그렇게 좋아할까? 퀄리티는 거기서 거긴데, 난 보세가 좋아” 언뜻 보기에는 이 말은 겸손한 발언처럼 들리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은 ‘르상티망’에 사로잡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르상티망은 철학에서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강자에 품는 시기심을 말한다.   철학자 니체는 르상티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열등감을 노력이나 도전으로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대신 열등감의 원천인 ‘강한 타자’를 부정하며 자신을 긍정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 갈 필요 없어 파스타 체인점이면 충분해”라고 하는 발언에는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은 격식 높은 음식점이며 그곳에서 식사하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다’라는 가치관을 뒤엎고 싶은 르상티망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르상티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 르상티망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변명만 한다는 것이다.   도전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실패라고 생각하는가? 도전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포기다. 무엇인가에 대해 도전하다 보면 실패도 할 수도 있다. 실패는 도전했기 때문에 경험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이룬 사람들을 보면 실패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한두 번 실패를 경험한 것이 아니다. 수없는 실패를 경험했다. 그들은 동일하게 이런 말을 한다. “실패했기 때문에 다시 도전할 수 있었고 결국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실패는 또 하나의 큰 도전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새로운 것에 도전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볼튼도 이런 말을 했다. “살면서 미쳤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면 너는 단 한 번도 목숨 걸고 도전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도전하는 것은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전에는 마침표가 없기 때문이다.   물 위를 걷지 못한 베드로를 향해서 사람들은 믿음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베드로를 바라볼 수도 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도전이었다. 상식을 깨는 베드로의 도전이었다.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가감하게 발을 내디뎠다. 도전하였다. 그는 물 위를 걸었다. 비록 그가 바람을 보고 바다에 빠지기도 했지만, 바다 위를 걷는 데 성공한 최초의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베드로가 도전하지 않았다면 물 위를 걷지 못하였을 것이다. 배에는 베드로 외에 다른 제자들도 있었다.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와 같이 도전하지 않았다. 도전하지 않았기에 물 위를 걷는 기적을 경험할 수 없었다. 도전에는 마침표가 없다. 도전에는 이 만큼이면 됐다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도전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다. 도전하면 나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영적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영적 도전을 해야 한다. 믿음의 도전을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우리 상황에서는 도전이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 돼서 따르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도전에는 마침표가 없다. 끊임없이 도전하라.  /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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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1
  •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 - 사도행전 11장 26~30절
    당신은 하나님 앞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안 믿는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향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인이 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사람을 이야기할까.   첫째로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 11장 26절 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라고 말씀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인들이 비로소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는 말씀이 있다. 그렇다면 안디옥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을까. 말씀을 보았더니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배우고 깨닫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1장 25절 말씀을 보면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사람들의 부흥된 모습을 보고 고향 다소에 있던 사울을 찾아 데리고 와서 1년간 안디옥에서 가르친다. 그랬더니 그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배움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가 생명의 주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에 대해서 믿을 줄 알아야 한다. 예수 믿으면 내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 믿으면 사망에서 영생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에 대한 메시야적 신앙을 정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다니지만 그래서 직분도 장로도 되고, 권사도 되고, 안수집사도 되지만 교회는 다니지만 이러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냥 교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 말씀을 배워, 그것을 통해서 예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시고, 그 믿음을 통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받은 은혜를 전할 줄 알아야 하며 흘려보낼 줄 알아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사도행전 11장 27절과 28절 말씀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이 일로 29절과 30절을 보면 제자들이, 안디옥교회의 교인들이 힘을 다해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는 말씀이 있다. 쉬운 일이 아니다. 물질적으로 안디옥교회도 어려운 처지에 있다. 그러나 형제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어렵다고 할 때, 힘들다고 할 때 이방인으로서 그 유대인들과 친분관계는 없지만, 예수의 사랑이 필요한 곳이라고 한다면 그곳에 복음의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부조하기로 작정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한 곳. 그곳에 복음에 대한 신앙이든, 물질이든,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필요한 것이라 한다면 실천해서 공급해줄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참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주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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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6
  • 하나님께서 일을 하게 하신다 - 출애굽기 35장 30~35절
      “모두 다 가지세요” F.B. 메이어박사는 한때 그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어렵고 과도기적인 시기에 봉착했던 적이 있다. 그는 완전히 지치고 낙담하여 자기 서재에 앉아 있었다. “나의 사역에는 열매가 없어. 그리고 나한테는 영적인 힘이 부족해” 그는 중얼거렸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자기 옆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메이어박사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네 인생의 열쇠들을 내게 주렴” 그 목소리가 너무도 생생하여 메이어박사는 주머니에서 한 다발의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그리스도는 그 열쇠를 보고 실망한 듯이 말씀하셨다. “이것들이 다니?” “네, 주님. 제일 작은 방 열쇠 하나를 제외하고는 이것들이 전부입니다” “네가 모든 방 열쇠를 다 맡길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나는 어느 열쇠도 받을 수 없어” 순간 메이어 박사는 주님이 자신에게서 완전히 떠나려 하신다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돌아오세요, 주님! 그리고 제 인생의 열쇠들을 모두 가지세요!”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항상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그와 동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본문을 보면 우리가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하게 하시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7번 나온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 7번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 하셨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금값만 600억 원 정도 들어가는 성막 계시를 받고 완성하였다. 모세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하시고”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하게 하시고”의 역사를 이루려면 세 가지가 주어져야 한다.   일꾼을 주셔야 한다. 모세는 자기가 계시 받았다고 자기가 일꾼을 모집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지명하여 모세에게 붙여 주셨다. 그리고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셔서 모세에게 붙여 주셨다. “하게 하시고”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일꾼을 붙여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을 보내 주셔야 한다.   물질을 주셔야 한다. 엄청난 일을 하면서도 물질이 남아서 그만 가지고 오라고 모세가 광고할 정도였다. 이 물질이 어디에서 난 것인지 성경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애굽기 12장 35~36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금은 패물을 받았을 때 자기들의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시내산에 왔을 때 하나님은 성막 건축을 명하셨다. 그들은 소유주가 아니라 운반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다 드렸다. 그만 가지고 오라고 할 정도로 드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는 사용주이지 소유주가 아니다.   성령을 주셔야 한다. 30절에서 브살렐을 지명하시고 31절에서 성령을 주셔서 “하게 하시고” 역사를 이루셨다. 하나님은 성령 받은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부르시고 나서 성령을 주셨다. 하나님은 할 줄 아는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부르시고 나서 할 줄 알게 하셨다. 하나님은 기술 있는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부르시고 나서 성령을 주셔서 기술이 있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지명하시고, 바울을 지명하시고, 베드로를 지명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주셔서 하게 하셨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다. /파주사랑의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0-02-21
  • 그 열매로 알리라
      본문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매 없는 나무를 빗대어 당시에 선지자로서 신앙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말만 무성하고 ‘실천 없는 신앙’을 비판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말로만 하는 신앙’, ‘실천 없는 신앙’은 무엇이고 또 주님이 원하시는 ‘실천하는 신앙’은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니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의 뜻은 말로만 떠드는 신앙인을 뜻한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주여 주여 하지 않는다.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지목하는 대상은 늘 믿는 자들을 향하고 있을 때가 많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민족이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도다고 하신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믿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더 올바른 신앙으로의 고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곧이어 예수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불법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뒤따르는 말씀이다. 왜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이러한 행위를 불법이라고 하실까 궁금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그 답을 말씀해 주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들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오히려 양의 옷을 입고 노략질하는 것으로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선지자들의 행위를 불법으로, 거짓된 선지자들로 규정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에 그치지 않으시다. 마태복음 23장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비판하고 있다. 이들 역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로 활동하고 대우받던 자들이다. 그들에 대해서도 말만 하고 행치 않는다고 비판하며 맹인이라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신앙의 맹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버지의 뜻은 신앙인으로서 ‘경건성과 존귀함’을 갖추는 일이다. 이것은 개인의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9절에서는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형제사랑 할 것을 얘기하고 있다.   지금의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지금의 한국교회는 예전의 청렴함과 경건성을 잃어버렸다. 교회는 교인 불리기에 급급하여 양육이 없고 건물주가 되는 것에 혈안이 되어 노략질을 일삼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물질과 정치 권력으로 물들어 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어쩌면 삶을 판을 통째로 바꾸는 일이며 삶의 뜻과 목표를 전면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또한 물질과 자본이 주인이 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은 거꾸로 세상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꾸짖는 대상이 특히나 신앙 지도자라는 부분에 있어서 우리 목회자들은 더욱 자기 성찰에 집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회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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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2
  • 주가 쓰시는 사람 - 본문 : 누가복음 19장 30~31절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는 한 번도 사람이 타 보지 않아 아무 경험도 없어 어떻게 사람을 태워야 할지도 몰랐을 것이다. 사람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동물을 길들일 때 동물들은 답답해서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펄쩍펄쩍 뛰면서 참을성도 없다. 이런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기에 너무나도 부족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귀를 타셨다.   또한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는 어린 나귀로 기록되어 있다. 어린 나귀는 한 사람 태우기 벅찼을 것이다. 어리기에 힘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며 몸도 작고 경험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런 나귀를 보는 사람들은 나귀를 무시할 턱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쓰셨다. 어리다고 낙심하고 반대로 나이 많다고 실망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다윗도 어렸지만 쓰셨고, 요셉도 어렸지만 쓰셨다. 사무엘도 어렸지만 쓰셨고, 디모데도 어렸지만 쓰셨다.   예수님은 매여 있던 나귀를 풀어 쓰셨다. 나귀는 사람들이 매어놓고 있었는데 이는 많은 이들이 부정적인 생각이나 의심, 무지와 같은 잘못된 생각에 매여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사람은 잘못된 생각에 매이고, 돈이 없다 돈이 매이고, 권력에 매이고, 건강에 매여 있다. 그렇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 가지고 일어나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지금 여러 가지에 매여 있다 해도 하나님이 풀어서 쓰실 테니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나귀는 영어로는 바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귀 같은 놈 그러면,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바보라도 쓰신다. 고린더전서 1장 26~29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구절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너무나 어리석고 비참한 사람은 사람들의 멸시와 질타를 받으며 천대 속에서 음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삶 속에선 사람이든 사회든 희망을 아무리 찾더라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자신의 참된 사역을 위해, 인간의 눈이 아니라 진리의 눈으로 사람의 참된 가치를 꿰뚫어 보신다.   나귀는 체구가 작고 못생겼다. 말과 나귀는 비교해 보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몸도 작고 못생겼다. 이와 달리 말은 정말 멋있고 잘 달리며 힘이 세다. 그러나 나귀는 너무 못 나고 어리숙하기만 한다. 말은 적토마니 천리마니 그런 이름은 있어도 나귀는 천리나귀라는 말은 없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못 생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힘 하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마저 사용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말 타고 가지 않으시고 나귀 타고 가셨다. 수많은 나귀 가운데서 예수님께 선택받은 나귀처럼 우리 또한 귀히 쓰임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부족한 이라도 자신의 위업을 위해 쓰신다. 그가 어리더라도 쓰시고 매여도 쓰시며 어리석어도 쓰신다. 우리 모두 쓰임 받기 위해 왕 되신 예수를 태우고 온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귀한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시기 바란다.  /조기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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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0
  • 마태교회 사람들 - 마태복음 5장 38~48절
      마태교회를 세워나가던 신앙공동체는 유다-로마 전쟁이라고 하는 최악의 고난을 겪고 나서 그 때 발생했던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했던 이들이다. 자신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더 근원적으로 변혁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고,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새롭게 탈바꿈할 수 있으며, 조상들이 지켜온 계명과 율법을 완성하는 것을 바로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던 이들이다. 이들은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써 악을 점차 줄여 나가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다. 사소한 말다툼이나, 무례한 언어와 행동이 큰 피해를 주는 사건과 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을 일깨워서 서로 존중하는 삶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폭력을 사랑으로 바꾸려는 모험을 실행한다.   주인과 종 사이에서, 때로 지배국가의 권력자가 식민지 백성을 다루면서 생기는 폭력에 대하여 마태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상대편의 마음에 남아 있는 양심을 일깨우려고 했던 것이다. 분쟁을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옳은가를 근원적으로 묻고 있고, 로마가 식민지 백성을 억압하고 또 폭력적인 방식으로 다루면서 과연 문명국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고소해서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고대에 속옷은 여러 벌이었고, 가난한 사람에게 겉옷은 한 벌이었다. 겉옷은 밤에 몸을 따뜻하게 하는 이불이 되어 주고, 물건을 옮길 때는 보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돈 많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하자 속옷을 저당 잡으려고 한다. 그럴 때 이 가난한 사람이 이제 겉옷까지도 내어 준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렇다. 이 가난한 사람은 입을 옷이 없어지고 더운 뙤약볕과 추운 밤을 안전하게 보낼 수가 없다. 인간이 누려야할 최소한의 휴식과 잠자리조차 보장받을 수 없게 되고, 벌거벗었기에 인간으로서의 자존심마저 무너지게 된다. 공적인 재판이 인간을 이렇게 만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구약의 율법에서 모세도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명령하고 있다.   진정 옳은 재판은 악덕 고리대금업자를 설득해서 가난한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도록 하는 것 아니겠는가? 가진 자가 가난한 사람의 속옷마저 빼앗도록 하는 재판이 모두 행복한 사람다운 세상을 만드는 재판인가? 합리성의 이름으로, 또는 법조문을 들이대면서 가난한 자의 모든 것을 탈탈 털어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를 말씀은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세상은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는 명예가 수여되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수치를 감내해야 했다. 그런 세상에서 이러한 자비의 행동들은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식민지 백성에게는 자존감을 높여 주었고, 남을 지배하는 인간들의 양심을 새롭게 만들어 주었다. 권력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다스리는 것, 관대함을 통해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은 보통 당시 신의 아들이라 불린 지배자들에게 요청되던 덕목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였던 마태 교인들은 힘없고, 박해당하고, 멸시당하면서도 지배자들에게 요구되는 이런 덕목을 자신들이 해 내고 있다. 불의를 불평 없이 참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하기를 실천한다. 우리도 이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썩어가는 세상을 새롭게 하고, 어두운 세상을 비춰야 한니다. 예수님은 여덟 종류의 행복한 사람을 말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 /생명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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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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