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2-02(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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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도에 대하여 (마6:5~15)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유대인의 3대 의무 가운데 두 번째인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기도는 유대인들에만 중요한 의무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들에게도 믿음의 핵심적인 의무이다. 흔히 기도를 영적 호흡이라고 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강조한다. 신앙생활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기도라면 온전한 기도의 자세를 가진다는 것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한다는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각자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자세로, 무엇을 붙들고 기도하는지 돌아보며, 참다운 기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마음가짐(5~6)  우선 참다운 기도의 자세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기도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예수님은 “회당과 큰 거리”(5절)와 “골방”(6절)을 비교해서 말씀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도의 장소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말씀을 깊게 묵상하면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회당이나 거리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은 다니엘이 그랬던 것(단6:10, 13)처럼 하루에 세 번씩 시간에 맞추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5절)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마음에는 기도가 목적이 아니라 보여 지는 것을 좋아 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도의 자리는 무엇인가 보여 주어야 하는 자리가 아니다. 보여 지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기도는 오늘 예수님의 지적처럼 회당과 큰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정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기도의 자리, 하나님께만 보여 지고, 그것이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 좋아질 수 있는 참다운 기도의 사람으로 살길 간절히 축원한다.  둘째:방법(7~8)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것을 좋아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중언부언 하지 말라’(7절)고 하신다. ‘중언부언하다’는 ‘바톨로게오’로 원어의 뜻을 보면 ‘말더듬이’이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로 마치 말을 더듬듯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좋은 예가 구약에 있는데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불을 내리는 대결을 벌이는 바알의 제사장들은 아침부터 한낮에 이르기까지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만 주구장창 외친 것과 같은 것이다(왕상18:25~29).   예수님은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중언부언의 개념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말을 많이 해야 제대로 기도 한다는 생각(7b)까지 포함시키신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8절) 앞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어떤 방법을 가지고 기도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을 가지고 기도하느냐에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형식과 장소에 따라서 우리는 지혜롭게 기도를 해야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내용(14~15)  기도는 하나님의 지체인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덮고 가리는 것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도구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진정으로 덮어주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기도가 있을 때 온전한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가운데 온전해진 마음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다른 사람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기도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근거하여 잘못을 가려주고, 허물을 용서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들은 나와 관계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어떤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는가?   특별히 본문처럼 나와 좋지 않은 관계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가?   그러므로 기도는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인정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내 중심에서 다른 이를 바라볼 수 있는 내용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기도는 장소의 문제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우리는 보여 지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하는가? 또한 기도는 방법의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가 기도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응답받는 기도는 그 내용 또한 중요하다. 화해와 용서, 하나 됨과 일치가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저 내 개인적인 문제만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회개와 용서가 이루어질 때 하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진다. 각자 자신의 기도를 점검해 보자.   우선 기도를 한다는 전제아래(기도 안하면 말해 무엇하겠느냐) 나는 정말 온전한 기도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이 한 주간, 말씀 가운데 참다운 기도의 자리에 머물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11-27
  • 구제에 대하여 (마6:1~4)
    길목교회 주재훈목사  구제와 기도, 금식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지켜야 할 거룩한 3대 의무였다.  유대인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다른 것을 몰라도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거룩하게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 정확하게 지적하실 뿐만 아니라 분명한 원칙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에 합당한 경건의 모습이 삶에 배여 있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 네가 돌아서라”(딤후3:5)고 분명하게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사는 자를 말한다. 교회에 그저 출석만 하고, 의무감으로, 형식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변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오늘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참된 변화의 출발점에 서길 간절히 축원한다.  첫째:원칙을 분명히 정하라(1)  온전한 구제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원칙이 분명해야 한다. 매일의 삶 속에서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사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하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간단명료한데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다. 선한 행위들은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적이어야 하며, 착한 행실로 자기 자신을 선하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본문은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이 목적을 두고 하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 경고하신다(1절). 착한 행실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그 행실의 동기에 주목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상을 받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착한 일을 행할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상을 받고, 누리게 되는 것이다.  둘째:목적을 분명히 하라(2)  온전한 구제가 되기 위해서 둘째로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예수님은 구제의 자세를 말씀하실 때, “만일” 또는 “혹시라도”라는 하시지 않는다. 즉 구제는 내가 여유가 되고, 능력이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를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부는 행위로 말씀하신다(2절). 어찌보면 합리적이고, 평등한 조치라고 여겨진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이런 저런 눈치 볼 필요 없이 그저 나팔 소리 나는 곳에 가서 아쉬운 소리하지 않고 자존심을 세우면서 구제금을 받으면 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행위는 선할지 모르나 나팔을 불어대는 그들의 동기는 절대 칭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지극히 세상적이고, 자기 만족을 위한 선행도 그 상은 있으며 예수님은 그 불순한 의도 때문에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받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사람들에게도 영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거기가 끝이다. 나머지 상급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은밀함으로 하라(3~4)  온전한 구제가 되기 위해서 셋째로 은밀함이 필요하다. 동기가 순수하다면 그 방법도 순수해야 하는데 순수함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은밀함이다.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3절)고 할 정도로 은밀함에 대해 강조하신다. 은밀함은 죄를 지을 때만 선택하는 행동이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할 때에 취하여할 믿음의 자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구제의 은밀함이 우리의 삶에 깊게 자리 잡기 위해서 우리들은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까?   우선은 동기가 순수한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습관이 될 때까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선한 행실이 이 땅의 상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은밀하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도록 끊임없이 의식하며 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드러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까? 고민하는 자만이 하늘의 상을 받는 은밀한 자리에 머물게 된다.   구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 분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이라는 마음이 있다면 당연한 의무가 구제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인자가 올 때 그 우편에 있는 이들을 향해 자신이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도움의 손길이 되었다고 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칭찬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구제에는 반드시 상이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상을 받을 것인지, 하늘에서 상을 받을 것인지 분명하게 선택하고 구제하는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 한 주간 각자의 삶에서 은밀하게 하늘의 상을 쌓는 축복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11-20
  • [금주의 말씀]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전1:2~8)
      나무가 크게 자라려면 뿌리가 땅속 깊이 튼튼하게 박혀 있어야 하고, 샘의 물이 항상 넘치게 흐르려면 물의 근원을 바로 찾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활 속에 감사의 생활을 잘하려면 그 근원을 잘 찾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아름다운 교제 속에 생활하여 바울은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감사 생활은 그 기초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관심과 초점은 하나님께 두고 그로 인하여 드리는 감사야말로 참 감사이며 마르지 않고 샘물처럼 항상 솟아나는 감사의 생활이 될 것입니다.   역사(役事)라는 말은 활동한다. 일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활동하고 일하는 동기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보수 때문에, 어떤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믿음의 감격 속에 내 몸을 드려 일하고 활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의 감격 속에 일할 때 그 일은 기쁨과 감사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생활 중에 겪는 육체적 아픔 중에 가장 큰 고통은 해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여인은 이 고통을 지나 어머니가 됩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 고통을 기억하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내게 이러한 고통을 주었다고 그 자녀를 미워하는 어머니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녀를 기르노라면 힘들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지만 그것이 절대로 누적이 되지 않는 것도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들어도 그곳에 사랑의 수고가 있어 능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은 감사의 기도를 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감사와 기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환란 가운데도 감사와 기쁨의 생활로 이길 수 있는, 감사 생활의 비결은 성령의 기쁨입니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5:8).술과 성령이 대조적으로 비유된 것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술은 일시적입니다. 순간적입니다. 초대 교회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보고 술 취한 사람 같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그 마음이 기쁨에 넘치게 됩니다. 이는 일시적이 아니요 영원한 것이며, 영생으로 이끄는 근본적인 기쁨의 원천입니다. 기쁨이 우리 마음에서 샘솟게 하는 성령은 어떻게 받습니까?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예수를 믿는 그 시간부터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고 그 성령이 없으면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습니다.   성령 안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입니다. 의는 죄사함 받은 기쁨이고, 평강이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우리에게 오는 기쁨이며, 희락은 사랑의 기쁨입니다.   믿음의 소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뿐 아니라 각처에 퍼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문의 내용은 간증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과 믿게 된 경위, 믿은 후 변화 받은 생활에 대한 간증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는 전도가 바로 믿음의 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감사의 생활은 오늘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 항상 내일로 향하는 생활 속에 이루어져야 하며 이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차원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한강교회 원로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11-14
  • [금주의 말씀] 믿음으로 산다는 것 (단6:1~9)
    길목교회 주재훈목사  다니엘은 주어진 삶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믿음으로 사는 것에 정의를 내려 보라고 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며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고 분명하고 말씀하고 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아무것도 없지만 이미 받은 것으로 사는 삶으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미 그들의 삶을 통해 증명했다. 다니엘도 이처럼 믿음의 삶을 살아낸 증거로 오늘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인물이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나는 과연 내게 주어진 일상의 순간들을 믿음으로 살아내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인정받음(1~3)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첫째로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사는 자다. 다니엘은 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어도 믿고 쓸 수 있는 신뢰받는 이였다. 심지어 오늘 본문에 보면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3절)할 정도로 다니엘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음을 보게 된다.   다니엘이 이처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다니엘이 정치적인 능력이나 탁월한 처세술, 뛰어난 행정력 때문이라면 그를 대치할 만한 사람은 그 큰 나라에 너무나도 많았을 것이다. 다니엘의 가장 큰 장점은 다니엘 자신이 아니라 다니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8~29)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치며 살면 세상에서 버림을 받지만 나를 통해 하나님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삶을 살면 나도 그 하나님 안에서 인정받으며 귀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허물없음(4~5)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둘째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서 허물을 찾을 수 없는 자다. 대적자들은 전국에 120명의 고관들을 세워 통치하게 하고(1절), 그들을 관리하는 세 명의 총리 가운데 다니엘이 포함되는 것(2절)까지는 받아들이고 용납할 수 있었지만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가장 높은 자리에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는 것(3절)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니엘을 끌어내릴 명분을 찾고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하는데 성경은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4절)고 말씀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함은 다니엘처럼 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에 맞추어 적당히 타협하고, 눈을 감고 넘어가는 삶을 살기에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믿음이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다니엘의 모습은 작은 실수 하나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 살기에 더욱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되어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셋째:신뢰받음(6~9)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셋째로 대적하는 이들조차 신뢰할 수밖에 없는 자다. 대적자들은 왕의 법령을 통해 술책을 쓰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법령은  30일만 그 효력이 유효하다는 것이다(7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0일이면 충분히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은 왕이 내린 조서와 관계없이 다니엘은 분명히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니엘의 삶은 대적하는 자들에게도 신뢰감을 주고 있었다는 감동을 받게 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처럼 불신앙의 사람들에게조차 예상 가능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10절).   다니엘은 대적자들의 신뢰에 변함없이 믿음의 모습으로 화답했다. 내 믿음은 얼마나 예상 가능한 드러내며 살고 있는가? 너무나도 예측이 불가능한 신앙이라고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신뢰받는 자의 모습으로 살기 바란다.  믿음은 마음속에서서 생기기 시작하며 그곳에 자리 잡고, 성장하고 자라지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속에 있는 것이 다니엘처럼 일상의 모든 순간에 보여 지며 이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되어야 한다.   야고보 사도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내게 보이리라”(약2:17~18)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믿음은 그저 땅 속에 꽁꽁 숨겨 두어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 아니라 나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밝히 드러나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자의 온전한 모습이다.   이번 한 주간 어느 곳에 있든지, 때론 사자 굴에 던져지는 다니엘처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 앞에 서게 된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승리하는 인생이 되길 간절히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11-14
  • [금주의 말씀] 돌이켜서 찬찬히 보라(출애굽기 3장 1절에서 5절)
      구약성경의 수많은 인물 중 한 명만 꼽으라면 모세다. 한 가지 사건을 찾으라면 출애굽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염원인 구원의 실행자요, 삶의 기준인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인물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본다. 모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나이 사십의 이집트 왕자로서 용기를 내어 고난받는 이스라엘 동족 편을 들었지만 돌아온 건 살인자의 오명이었고, 그것으로 모세 인생의 화려함은 종지부를 찍었다.   모세 자신도 이제 젊은 날의 꿈을 접은 채 별 희망도 없이 그저 소시민으로 삶을 마감하려는 그때 모세의 인생이 뒤집혔다. 지팡이 하나 들고 이집트 제국 파라오에게 당당하게 맞서 이스라엘의 노예 생활을 끝장내고 자유와 해방을 쟁취했다.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 먼 모세의 두 가지 인생은 호렙산에서 결정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이 중요한 장면에서 많은 화가가 불타는 떨기나무와 신발 벗는 모세를 중요한 소재로 삼았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출 3:2~3)   건조한 광야에서는 가끔 자연 발화가 일어나기에 불붙은 나무가 아주 낯선 광경은 아니다. 그래서 저만치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처음에 모세는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나무가 계속 불붙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가던 길을 돌아와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 것이 전환점이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표시(계시)는 명백할 수도 있지만, 얼핏 보면 잘 모르는 때가 더 많다. 신앙은 우리가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을 하나님의 계시를 포착하는 힘이다. 지금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나의 일상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절실하다. 그러면 인생이 바뀐다. 역사가 뒤집힌다.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초점을 모아 내 안과 밖을 성찰해야 할 이유다.   지금 우리가 정말로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다. 신앙인에게 관찰의 힘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누구나 다 아는 모습으로 오시지 않기 때문이다. 호렙산 떨기나무에 붙은 불이 누가 봐도 신비한 것이었다면 모세가 처음에 그냥 지나치려고 할 리가 없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불인가보다 했다가 나무가 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서 다가갔다가 하나님을 만났고 그 만남이 모세 인생과 이스라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님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나님은 아주 일반적이고 흔한 모습으로 오신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는데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주님을 찾으려고 관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러면 구원은 없다. 그래서 관찰은 곧 구원이다.   지금은 하나님을 미친 듯이 찾아야 할 때다. 분명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셨는데 내가 무심해서 그냥 지나친다면 아무런 변화나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지나쳤다 가도 다시 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모세는 처음에 떨기나무를 무심코 보았다가 다시 관찰하고 확인하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인생과 역사를 새로 썼다.   오늘 우리 몸과 영혼의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자.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지나쳐버리지 않도록, 혹시 지나갔다가도 되돌아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모든 감각을 살려내자. 내 삶에 분명히 계시지만 우리의 죄악으로 잘 볼 수 없는 주님을 발견하기 위해 지금은 우리가 일부러 고독해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영성이다./주민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11-07
  • [금주의 말씀]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하라(히브리서 12장 28절)
      오늘 우리는 온 세대가 모여 ‘감사’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이 감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8절은 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지에 대해 짧지만 강력하게 알려줍니다. 세 가지 동사로 정리해 봤습니다. “알자, 받자, 섬기자” 과연 무엇을 알고 받고 섬기라는 것일까요?   첫째, ‘알자’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어떤 것일까요? 다니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을 봤습니다. 환상 가운데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자 같은 분’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 한 나라를 주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나라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은 성도들이 그 받은 선물에 즐거워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주님이 주신 선물을 사람들이 모른다면 어떻게 할까요? 이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 줄 생각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삶을 회복하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흔들리지 않는 나라’ 천국, 그리고 그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받자’ 입니다.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은혜로 받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미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내 수고의 결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또 우리에게 주신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선물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너무나도 놀라운 것입니다. ‘천국’은 인간이 생각하는 그 어떤 곳보다 아름다운 곳이며, 그 어떤 것을 상상하건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엄청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감사와 찬양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일에 감사하고 감탄하고 감격해서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마땅히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할 감사가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사랑을 알고, 은혜로 받은 이들에게서 당연하게 나와야 하는 반응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섬기자’ 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마땅하게 보여야 하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12:28)     여러분, ‘이로 말미암아’입니다. 천국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은혜임을 받아들인 자라면 그로 인해 당연하게 이렇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게 됩니까?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너무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그 아들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그 엄청난 희생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하나님은 완전히 증명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내가 알고 내가 받았습니다. 은혜를 베푼 이가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우리의 감사가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행함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순종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선물로 받은 것임을 묵상하기 바랍니다./나눔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11-07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기도에 대하여 (마6:5~15)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유대인의 3대 의무 가운데 두 번째인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기도는 유대인들에만 중요한 의무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들에게도 믿음의 핵심적인 의무이다. 흔히 기도를 영적 호흡이라고 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강조한다. 신앙생활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기도라면 온전한 기도의 자세를 가진다는 것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한다는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각자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자세로, 무엇을 붙들고 기도하는지 돌아보며, 참다운 기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마음가짐(5~6)  우선 참다운 기도의 자세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기도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예수님은 “회당과 큰 거리”(5절)와 “골방”(6절)을 비교해서 말씀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도의 장소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말씀을 깊게 묵상하면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회당이나 거리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은 다니엘이 그랬던 것(단6:10, 13)처럼 하루에 세 번씩 시간에 맞추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5절)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마음에는 기도가 목적이 아니라 보여 지는 것을 좋아 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도의 자리는 무엇인가 보여 주어야 하는 자리가 아니다. 보여 지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기도는 오늘 예수님의 지적처럼 회당과 큰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정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기도의 자리, 하나님께만 보여 지고, 그것이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 좋아질 수 있는 참다운 기도의 사람으로 살길 간절히 축원한다.  둘째:방법(7~8)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것을 좋아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중언부언 하지 말라’(7절)고 하신다. ‘중언부언하다’는 ‘바톨로게오’로 원어의 뜻을 보면 ‘말더듬이’이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로 마치 말을 더듬듯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좋은 예가 구약에 있는데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불을 내리는 대결을 벌이는 바알의 제사장들은 아침부터 한낮에 이르기까지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만 주구장창 외친 것과 같은 것이다(왕상18:25~29).   예수님은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중언부언의 개념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말을 많이 해야 제대로 기도 한다는 생각(7b)까지 포함시키신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8절) 앞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어떤 방법을 가지고 기도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을 가지고 기도하느냐에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형식과 장소에 따라서 우리는 지혜롭게 기도를 해야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내용(14~15)  기도는 하나님의 지체인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덮고 가리는 것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도구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진정으로 덮어주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기도가 있을 때 온전한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가운데 온전해진 마음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다른 사람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기도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근거하여 잘못을 가려주고, 허물을 용서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들은 나와 관계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어떤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는가?   특별히 본문처럼 나와 좋지 않은 관계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가?   그러므로 기도는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인정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내 중심에서 다른 이를 바라볼 수 있는 내용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기도는 장소의 문제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우리는 보여 지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하는가? 또한 기도는 방법의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가 기도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응답받는 기도는 그 내용 또한 중요하다. 화해와 용서, 하나 됨과 일치가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저 내 개인적인 문제만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회개와 용서가 이루어질 때 하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진다. 각자 자신의 기도를 점검해 보자.   우선 기도를 한다는 전제아래(기도 안하면 말해 무엇하겠느냐) 나는 정말 온전한 기도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이 한 주간, 말씀 가운데 참다운 기도의 자리에 머물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11-27
  • 구제에 대하여 (마6:1~4)
    길목교회 주재훈목사  구제와 기도, 금식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지켜야 할 거룩한 3대 의무였다.  유대인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다른 것을 몰라도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거룩하게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 정확하게 지적하실 뿐만 아니라 분명한 원칙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에 합당한 경건의 모습이 삶에 배여 있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 네가 돌아서라”(딤후3:5)고 분명하게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사는 자를 말한다. 교회에 그저 출석만 하고, 의무감으로, 형식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변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오늘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참된 변화의 출발점에 서길 간절히 축원한다.  첫째:원칙을 분명히 정하라(1)  온전한 구제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원칙이 분명해야 한다. 매일의 삶 속에서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사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하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간단명료한데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다. 선한 행위들은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적이어야 하며, 착한 행실로 자기 자신을 선하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본문은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이 목적을 두고 하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 경고하신다(1절). 착한 행실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그 행실의 동기에 주목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상을 받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착한 일을 행할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상을 받고, 누리게 되는 것이다.  둘째:목적을 분명히 하라(2)  온전한 구제가 되기 위해서 둘째로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예수님은 구제의 자세를 말씀하실 때, “만일” 또는 “혹시라도”라는 하시지 않는다. 즉 구제는 내가 여유가 되고, 능력이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를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부는 행위로 말씀하신다(2절). 어찌보면 합리적이고, 평등한 조치라고 여겨진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이런 저런 눈치 볼 필요 없이 그저 나팔 소리 나는 곳에 가서 아쉬운 소리하지 않고 자존심을 세우면서 구제금을 받으면 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행위는 선할지 모르나 나팔을 불어대는 그들의 동기는 절대 칭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지극히 세상적이고, 자기 만족을 위한 선행도 그 상은 있으며 예수님은 그 불순한 의도 때문에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받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사람들에게도 영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거기가 끝이다. 나머지 상급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은밀함으로 하라(3~4)  온전한 구제가 되기 위해서 셋째로 은밀함이 필요하다. 동기가 순수하다면 그 방법도 순수해야 하는데 순수함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은밀함이다.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3절)고 할 정도로 은밀함에 대해 강조하신다. 은밀함은 죄를 지을 때만 선택하는 행동이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할 때에 취하여할 믿음의 자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구제의 은밀함이 우리의 삶에 깊게 자리 잡기 위해서 우리들은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까?   우선은 동기가 순수한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습관이 될 때까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선한 행실이 이 땅의 상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은밀하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도록 끊임없이 의식하며 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드러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까? 고민하는 자만이 하늘의 상을 받는 은밀한 자리에 머물게 된다.   구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 분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이라는 마음이 있다면 당연한 의무가 구제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인자가 올 때 그 우편에 있는 이들을 향해 자신이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도움의 손길이 되었다고 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칭찬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구제에는 반드시 상이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상을 받을 것인지, 하늘에서 상을 받을 것인지 분명하게 선택하고 구제하는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 한 주간 각자의 삶에서 은밀하게 하늘의 상을 쌓는 축복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11-20
  • [금주의 말씀]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전1:2~8)
      나무가 크게 자라려면 뿌리가 땅속 깊이 튼튼하게 박혀 있어야 하고, 샘의 물이 항상 넘치게 흐르려면 물의 근원을 바로 찾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활 속에 감사의 생활을 잘하려면 그 근원을 잘 찾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아름다운 교제 속에 생활하여 바울은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감사 생활은 그 기초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관심과 초점은 하나님께 두고 그로 인하여 드리는 감사야말로 참 감사이며 마르지 않고 샘물처럼 항상 솟아나는 감사의 생활이 될 것입니다.   역사(役事)라는 말은 활동한다. 일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활동하고 일하는 동기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보수 때문에, 어떤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믿음의 감격 속에 내 몸을 드려 일하고 활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의 감격 속에 일할 때 그 일은 기쁨과 감사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생활 중에 겪는 육체적 아픔 중에 가장 큰 고통은 해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여인은 이 고통을 지나 어머니가 됩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 고통을 기억하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내게 이러한 고통을 주었다고 그 자녀를 미워하는 어머니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녀를 기르노라면 힘들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지만 그것이 절대로 누적이 되지 않는 것도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들어도 그곳에 사랑의 수고가 있어 능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은 감사의 기도를 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감사와 기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환란 가운데도 감사와 기쁨의 생활로 이길 수 있는, 감사 생활의 비결은 성령의 기쁨입니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5:8).술과 성령이 대조적으로 비유된 것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술은 일시적입니다. 순간적입니다. 초대 교회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보고 술 취한 사람 같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그 마음이 기쁨에 넘치게 됩니다. 이는 일시적이 아니요 영원한 것이며, 영생으로 이끄는 근본적인 기쁨의 원천입니다. 기쁨이 우리 마음에서 샘솟게 하는 성령은 어떻게 받습니까?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예수를 믿는 그 시간부터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고 그 성령이 없으면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습니다.   성령 안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입니다. 의는 죄사함 받은 기쁨이고, 평강이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우리에게 오는 기쁨이며, 희락은 사랑의 기쁨입니다.   믿음의 소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뿐 아니라 각처에 퍼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문의 내용은 간증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과 믿게 된 경위, 믿은 후 변화 받은 생활에 대한 간증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는 전도가 바로 믿음의 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감사의 생활은 오늘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 항상 내일로 향하는 생활 속에 이루어져야 하며 이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차원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한강교회 원로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11-14
  • [금주의 말씀] 믿음으로 산다는 것 (단6:1~9)
    길목교회 주재훈목사  다니엘은 주어진 삶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믿음으로 사는 것에 정의를 내려 보라고 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며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고 분명하고 말씀하고 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아무것도 없지만 이미 받은 것으로 사는 삶으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미 그들의 삶을 통해 증명했다. 다니엘도 이처럼 믿음의 삶을 살아낸 증거로 오늘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인물이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나는 과연 내게 주어진 일상의 순간들을 믿음으로 살아내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인정받음(1~3)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첫째로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사는 자다. 다니엘은 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어도 믿고 쓸 수 있는 신뢰받는 이였다. 심지어 오늘 본문에 보면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3절)할 정도로 다니엘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음을 보게 된다.   다니엘이 이처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다니엘이 정치적인 능력이나 탁월한 처세술, 뛰어난 행정력 때문이라면 그를 대치할 만한 사람은 그 큰 나라에 너무나도 많았을 것이다. 다니엘의 가장 큰 장점은 다니엘 자신이 아니라 다니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8~29)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치며 살면 세상에서 버림을 받지만 나를 통해 하나님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삶을 살면 나도 그 하나님 안에서 인정받으며 귀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허물없음(4~5)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둘째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서 허물을 찾을 수 없는 자다. 대적자들은 전국에 120명의 고관들을 세워 통치하게 하고(1절), 그들을 관리하는 세 명의 총리 가운데 다니엘이 포함되는 것(2절)까지는 받아들이고 용납할 수 있었지만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가장 높은 자리에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는 것(3절)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니엘을 끌어내릴 명분을 찾고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하는데 성경은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4절)고 말씀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함은 다니엘처럼 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에 맞추어 적당히 타협하고, 눈을 감고 넘어가는 삶을 살기에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믿음이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다니엘의 모습은 작은 실수 하나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 살기에 더욱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되어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셋째:신뢰받음(6~9)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셋째로 대적하는 이들조차 신뢰할 수밖에 없는 자다. 대적자들은 왕의 법령을 통해 술책을 쓰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법령은  30일만 그 효력이 유효하다는 것이다(7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0일이면 충분히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은 왕이 내린 조서와 관계없이 다니엘은 분명히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니엘의 삶은 대적하는 자들에게도 신뢰감을 주고 있었다는 감동을 받게 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처럼 불신앙의 사람들에게조차 예상 가능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10절).   다니엘은 대적자들의 신뢰에 변함없이 믿음의 모습으로 화답했다. 내 믿음은 얼마나 예상 가능한 드러내며 살고 있는가? 너무나도 예측이 불가능한 신앙이라고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신뢰받는 자의 모습으로 살기 바란다.  믿음은 마음속에서서 생기기 시작하며 그곳에 자리 잡고, 성장하고 자라지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속에 있는 것이 다니엘처럼 일상의 모든 순간에 보여 지며 이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되어야 한다.   야고보 사도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내게 보이리라”(약2:17~18)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믿음은 그저 땅 속에 꽁꽁 숨겨 두어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 아니라 나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밝히 드러나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자의 온전한 모습이다.   이번 한 주간 어느 곳에 있든지, 때론 사자 굴에 던져지는 다니엘처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 앞에 서게 된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승리하는 인생이 되길 간절히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11-14
  • [금주의 말씀] 돌이켜서 찬찬히 보라(출애굽기 3장 1절에서 5절)
      구약성경의 수많은 인물 중 한 명만 꼽으라면 모세다. 한 가지 사건을 찾으라면 출애굽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염원인 구원의 실행자요, 삶의 기준인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인물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본다. 모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나이 사십의 이집트 왕자로서 용기를 내어 고난받는 이스라엘 동족 편을 들었지만 돌아온 건 살인자의 오명이었고, 그것으로 모세 인생의 화려함은 종지부를 찍었다.   모세 자신도 이제 젊은 날의 꿈을 접은 채 별 희망도 없이 그저 소시민으로 삶을 마감하려는 그때 모세의 인생이 뒤집혔다. 지팡이 하나 들고 이집트 제국 파라오에게 당당하게 맞서 이스라엘의 노예 생활을 끝장내고 자유와 해방을 쟁취했다.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 먼 모세의 두 가지 인생은 호렙산에서 결정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이 중요한 장면에서 많은 화가가 불타는 떨기나무와 신발 벗는 모세를 중요한 소재로 삼았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출 3:2~3)   건조한 광야에서는 가끔 자연 발화가 일어나기에 불붙은 나무가 아주 낯선 광경은 아니다. 그래서 저만치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처음에 모세는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나무가 계속 불붙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가던 길을 돌아와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 것이 전환점이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표시(계시)는 명백할 수도 있지만, 얼핏 보면 잘 모르는 때가 더 많다. 신앙은 우리가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을 하나님의 계시를 포착하는 힘이다. 지금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나의 일상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절실하다. 그러면 인생이 바뀐다. 역사가 뒤집힌다.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초점을 모아 내 안과 밖을 성찰해야 할 이유다.   지금 우리가 정말로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다. 신앙인에게 관찰의 힘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누구나 다 아는 모습으로 오시지 않기 때문이다. 호렙산 떨기나무에 붙은 불이 누가 봐도 신비한 것이었다면 모세가 처음에 그냥 지나치려고 할 리가 없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불인가보다 했다가 나무가 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서 다가갔다가 하나님을 만났고 그 만남이 모세 인생과 이스라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님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나님은 아주 일반적이고 흔한 모습으로 오신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는데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주님을 찾으려고 관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러면 구원은 없다. 그래서 관찰은 곧 구원이다.   지금은 하나님을 미친 듯이 찾아야 할 때다. 분명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셨는데 내가 무심해서 그냥 지나친다면 아무런 변화나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지나쳤다 가도 다시 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모세는 처음에 떨기나무를 무심코 보았다가 다시 관찰하고 확인하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인생과 역사를 새로 썼다.   오늘 우리 몸과 영혼의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자.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지나쳐버리지 않도록, 혹시 지나갔다가도 되돌아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모든 감각을 살려내자. 내 삶에 분명히 계시지만 우리의 죄악으로 잘 볼 수 없는 주님을 발견하기 위해 지금은 우리가 일부러 고독해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영성이다./주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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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3-11-07
  • [금주의 말씀]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하라(히브리서 12장 28절)
      오늘 우리는 온 세대가 모여 ‘감사’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이 감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8절은 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지에 대해 짧지만 강력하게 알려줍니다. 세 가지 동사로 정리해 봤습니다. “알자, 받자, 섬기자” 과연 무엇을 알고 받고 섬기라는 것일까요?   첫째, ‘알자’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어떤 것일까요? 다니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을 봤습니다. 환상 가운데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자 같은 분’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 한 나라를 주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나라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은 성도들이 그 받은 선물에 즐거워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주님이 주신 선물을 사람들이 모른다면 어떻게 할까요? 이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 줄 생각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삶을 회복하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흔들리지 않는 나라’ 천국, 그리고 그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받자’ 입니다.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은혜로 받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미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내 수고의 결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또 우리에게 주신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선물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너무나도 놀라운 것입니다. ‘천국’은 인간이 생각하는 그 어떤 곳보다 아름다운 곳이며, 그 어떤 것을 상상하건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엄청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감사와 찬양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일에 감사하고 감탄하고 감격해서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마땅히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할 감사가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사랑을 알고, 은혜로 받은 이들에게서 당연하게 나와야 하는 반응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섬기자’ 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마땅하게 보여야 하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12:28)     여러분, ‘이로 말미암아’입니다. 천국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은혜임을 받아들인 자라면 그로 인해 당연하게 이렇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게 됩니까?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너무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그 아들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그 엄청난 희생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하나님은 완전히 증명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내가 알고 내가 받았습니다. 은혜를 베푼 이가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우리의 감사가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행함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순종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선물로 받은 것임을 묵상하기 바랍니다./나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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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3-11-07
  • 다시 살아나리라 (겔37:1~14)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서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를 보여 주시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환상을 전해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마른 뼈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아무런 소망 없이 그저 하루하루 버티며 처절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들이야말로 누가 뭐라 해도 마른 뼈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각자 앞에 놓여 진 마른 뼈들 때문에 절망하며, 스스로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안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절망적인 현실(1~6)  다시 살아나기 위한 첫 번째는 내가 마주하는 절망적인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선지자 에스겔을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이끌어 가셨다. 그곳에 하나님은 에스겔을 세우시고 그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다. 빙빙 돌려 묻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질문에 에스겔의 대답은 무엇인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3절)이다.   우리도 내 삶의 절망적인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면 에스겔처럼 반응한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기기에 하나님의 질문에도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한 해결책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 서 있는가?   말라비틀어진 마른 뼈와도 같은 현실을 바라보면서 한숨만 쉬고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함께 바라보시며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 둘째:믿음의 선포(7~10)  다시 살아나기 위한 두 번째는 나의 삶에 믿음을 선포해야 한다.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5절)라고 대언하라고 명령하신다.   골짜기의 그 수많은 뼈들이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소리가 나고 움직이기 시작하며, 뼈가 맞아 서로 연결되기 시작하고,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여 생명을 가진 형태로 세워지게 된다.   절망에서 새로운 소망으로 변하는 것은 나의 의지와 노력, 그것을 극복하려는 피나는 열심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과감하게 선포할 때 이루어진다.   인생의 절망적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임을 명심해야 한다.   에스겔이 마른 뼈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선포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나의 절망의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을 통해 선포할 때,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셋째:분명한 약속(11~14)  다시 살아나기 위한 세 번째는 내가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자신들을 심판하셔서 마른 뼈처럼 만드셨던 분이 다시 희망을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 때문에 병 주고 약 주느냐고 투정을 부릴 수 있지만, 자신의 백성들을 아예 잊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대해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13절),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14절)라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남유다의 멸망을 선포했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마른 뼈와 같은 그들을 향해 분명하게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고 말씀하셨다.   이 약속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다. 입을 열어 선포하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눈으로 보며,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는 축복의 인생이 되길 축원한다.   매일 만나는 상황이나 조건들은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마음이나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다. 마른 뼈들만 바라보게 하는 시선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다.   다시 일어나 사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선포되고, 중심에 자리 잡아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성경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라고 말씀하신다. 나를 살리고, 내 인생을 이끌어 가시며, 그 빛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것은 세상적인 부귀영화와 성공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이번 한 주간도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각자의 입술을 통해,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는 마른 뼈와도 같은 상황 속에 선포됨으로 다시 살아나는 역사를 체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11-06
  • 성전을 허락하신 이유 (대하7:11~18)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한 성전의 공사를 다 마치고 나서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성전이오리이까”(대하6:18)라며 기도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이처럼 성전이라는 눈에 보이는 형태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본문은 성전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성전의 본질이라면, 그 자리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자리에 머물기를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 회개의 자리(11~14)  하나님이 성전을 허락하신 이유의 첫 번째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들으시는 회개의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위한 건축을 마음에 들도록 다 마치고 나서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성전을 완공한 후에 솔로몬은 여호와의 제단에 서서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대하6:40)라고 간구하며 다윗에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다.   본문은 이 솔로몬의 기도에 하나님이 분명하게 응답하시겠다는 약속해 주시고 있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 들으시는 응답받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전심으로 회개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14절)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자. 정작 중요한 회개하는 일에는 관심도 없이 그저 내가 원하는 기도의 제목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둘째: 임재의 자리(15~16)  하나님이 성전을 허락하신 이유의 두 번째는 그곳이 바로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는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야곱이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다가 환상을 보고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처럼(창28:19), 전혀 인식하지 못한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감사하며 감격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먼저 나를 만날 수 있는 곳이라 말씀하시는 곳은 성전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이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15절)라고 약속하신 성전을 사모하며 그곳에 나아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15)고 권면하고 있다. 약속을 믿고, 그곳에 함께 모이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리가 되며, 그곳이 성전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성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지만, 분명한 것은 성전에는 항상 계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 약속의 자리(17~18)  하나님이 성전을 허락하신 이유의 세 번째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새롭게 갱신되고, 맹세로 이어지는 약속의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에게 내 마음에 맞는 사람(행13:22)이라고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보다 죄가 없고,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솔로몬을 향해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한 것과 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법규를 지키면”(17절)에서 볼 수 있듯이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에 머물러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내게 주신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데 그 가운데 가장 탁월한 방법이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한 번의 제대로 된 예배를 통해서 인생이 송두리째 변화된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예배가 그래야 하며,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이 새롭게 갱신되고, 다시금 새겨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사모하는 자세로 그 임재 가운데 나아가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에게 받은 계시대로 순종하며 최선으로 성전을 짓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가 허투루 그 일에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을 이십 년 동안에 건축하기를 마치고”(대하8:1)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성전의 예전적인 기능은 다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 의미만큼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과 신앙의 방향을 짚어 보게 한다.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내가 머물러야 하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10-30
  • 금주의 말씀
    본문 요한복음 5장 2절에서 9절  이성범 목사   예루살렘 양 문 곁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 있는 다섯 행각에 많은 병자가 모여 치유를 기다리고 있다. 천사가 그 연못 물을 움직이는데, 그때 제일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이 든 낫는다는 속설을 믿기 때문이다. 그 안에 많은 병자, 시각장애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다. (3절) 많은 병자 중 유독 세 종류의 환자가 소개된다. 이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도움이 없이는 그 연못에 먼저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다. 이 남자는 38년 동안이나 병을 앓고 있다. 서른여덟 번의 진저리 나는 여름과 겨울을 고통과 질병 가운데 견뎌야만 했다. 친구도 없고 자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희망없이 누워 기적을 기다려야 했다. 해가 가고 달이 가도 더 좋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무덤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는 연못가에 누워 있었지만, 그 연못에서 아무런 혜택도 입지 못하고 긴 세월을 허비하였다. 어쩌면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한 채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익숙한 삶의 모습인지 모른다.   본문은 이 병자를 통해 38년이라는 시간을 특별히 언급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을 넌지시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38’이라는 숫자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랑했던 숫자와 연결한다. (신2:14) 38년 된 병자를 영적으로 혈기 마른 자와 같이 고갈되어 버린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보고 하나님을 떠나 고향 없이 방황하던 시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냥 시간을 헛되이 낭비한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소모한 것이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신다. 병자는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내려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대답한다. (6~7절) 38년 된 병자의 간절한 희망은 연못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다. 그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던지 낫게…” 된다는 속설을 굳게 믿고 있다. (4절)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간다는 그의 대답은 이를 확실하게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연못을 찾아오신 예수님께 그가 지금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옆에 계시다가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도록 도와 달라는 것’ 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그 기적의 연못에 전혀 관심이 없으시다. 눈길 한번 주지 않으셨다. 다만 이 병자만을 주목하여 말씀하셨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성경은 이후에 그의 삶이 뚜렷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9절) 말씀 앞에 38년 동안 가졌던 미신적 생각을 털어 버리고 일어섰다. 자신의 타락한 가치관, 과거의 생각을 다 부인하고 오직 말씀에 응답하여 새롭게 출발했다. 그리고 자기를 고친 이가 ‘예수’임을 증언한다. (15절) 그의 인생 해답은 처음부터 연못의 물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오늘도 말씀은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베데스다 행각에서 병든 모습으로 물가의 움직임만을 기다리는 방황은 계속될 것이다. /평택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10-23
  • 고백해야 하는 감사 (눅17:11~19)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평소에 감사의 제목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바람이 불고 비가 불어 닥쳐도, 변하지 않는 바위처럼, 여러분의 삶에 감사의 제목과 고백이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감사는 고백해야 하며, 입술로 고백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말씀이다.     우리의 믿음이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 더욱 견고해 지듯이, 우리가 받는 축복은 입술로 고백하는 감사를 통해 더욱 풍성해 지는 것임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모든 일에 감사의 고백이 차고 넘치는 여러분이 되길 간절히 축원한다.  첫째:은혜는 모두에게 열려있다(11~14)  나병환자에 대해서 성경은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13:46)고 율법은 정하고 있다. 이 나병환자들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는 돌을 들어 치는 것도 죄로 여기는 않는 사회의 분위기에서 그들이 마을로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록 먼 곳이지만 쫓아 왔다(12절)고 하는 것은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에 예수님은 제사장에서 너희들의 몸을 보여 주라고 말씀하셨고,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달려가다가 치유함을 경험하게 된다(14절).   이 열 명의 문둥병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를 부어 주신다.   누굴 더 사랑하시고, 편애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렇기에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또 주신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사모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진정한 은혜는 소수에게만 부어진다(15~16)   10명의 나병환자들이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님에게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고백하는 자는 사마리아인 한 사람 뿐임을 보여준다.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사람은 항상 다수가 아니라 소수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이 정말 놀라워하시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나신다. 유대인들이 하셨던 그대로 치욕을 주셨지만 믿음으로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수로보니게 여인(막7:24~30), 자신의 종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 왔다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러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7:9)는 극찬을 받은 백부장등이 좋은 예이다.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해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 속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당연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10명의 나병환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믿음으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많은 것들을 받고, 지금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얼마나 감사의 고백으로 그 앞에 엎으려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셋째:감사는 은혜를 풍성하게 한다(17~19)  한 사마리아 사람은 고백하는 감사로 다른 9명의 사람이 누릴 수 없는 더 풍성함을 소유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어 온 자”(18절)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의 사람들의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감사가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명심하고, 주신 분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가 바로 우리의 감사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집으로 돌아간 9명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사의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들도 자신들의 불치의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생각날 때마다 감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표현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지는, 즉 고백되어지는 감사가 될 때, 육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영원한 구원의 축복까지 받는 놀라운 자리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감사의 제목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그래서 우리의 삶이나 영적인 상태가 더욱 풍성해지는 은혜가 되길 축원한다.  감사와 불평은 정반대의 개념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어느 것이든 내가 선택하고 그 방향으로 가는 순간 점점 더 크게 나의 삶에 다가오며, 내 삶 전체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소의 나의 삶에서 얼마나 감사의 자세와 고백들이 배여 있는지에 대해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나병의 치유함을 받고 감사함으로 자신의 발 앞에 엎드린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고 축복하셨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반응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영역임을 기억하며, 감사의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의 축복을 누리며 살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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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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