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0-18(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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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 시편 61편
      갈릴리는 가난한 곳이었다. 남쪽에 위치한 사마리아나 유대 지방과 비교해 빈곤한 곳이었다. 가난의 이유는 로마의 수탈 때문이었다. 로마제국은 세금 징수를 통해 주민들을 약탈했다. 이에 저항하면 공개처형인 십자가형으로 탄압했다. 이 갈릴리가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다. 그리고 그가 공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이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적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났다. 생긴 것이 수금을 닮아 구약성서에서 ‘긴네렛’(민수기 34장 11절, 여호수아 13장 27절)이라고 불린 이 바다는 신약성서에서 ‘게네사렛’(누가 5:2) 혹은 ‘디베랴’(요한 6:1)라고 불렸는데, 이 바닷가에 있는 항구인 가버나움, 게네사렛, 막달라, 디베랴, 거라사 등이 바로 예수님의 주요 사역지였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바로 이러한 갈릴리 지역에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라는 복음을 선포하며 시작됐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실 때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 4장 19절).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았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도 곧 배와 자기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은 갈릴리의 급속한 해체 속에서 무언가 거룩하고 참된 새 삶에 대한 깊은 갈망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 중 아무도 감히 골고다 언덕을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처형 이후 그들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죄를 찾을 수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일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그들은 깊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삶의 한 가운데에 이미 있던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때 그들에게 부활의 소식이 들려왔다. 예수님이 자기들을 갈릴리로 부르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놓고 온 그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본회퍼목사의 이 심오한 말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세상의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에서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인이 된 세계’에서 성의 영역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이제 사람들에게 종교는 삶의 여러 요소 가운데 한 가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본회퍼 목사는 오늘날 이렇게 변두리로 밀려난 성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온 세계의 한 가운데에서, 중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고 싶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주일 아침 11시부터 12시까지만, 그리고 교회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의 현장 그 한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타자를 위한 존재’이듯, 그리스도의 교회도 ‘타자를 위한 교회’가 되어 세상 안에서, 세상의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주의 천사가 우리에게 이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갈릴리로 가라. 우리 삶의 현장, 주님의 십자가가 우뚝 서 있는 이 세계의 중심으로 힘차게 나아가자. 주께서 세상 끝까지 여러분과 동행하실 것이다.     /이화대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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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8
  • ‘만일’을 넘어 서서 - 마태복음 4장 8~11절
      마귀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지극히 높은 산에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게 한 후, 자신에게 절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마귀의 이 시험은 출발부터 잘못됐다. 마귀는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는데, 천하만국이 마치 자기 것이나 되는 것처럼 말했다. 이게 마귀의 특징 중 하나이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이라 한다. 하나님 신앙의 출발점은 바로 이것이다.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주인임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마귀가 주인인 줄 잘못 알고 마귀 앞에 무릎을 꿇는다. 여기서 우상숭배가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왕은 정말 훌륭하다. 그는 비록 여호와의 성전을 짓지 못하여 섭섭했지만, 아들 솔로몬이 지을 수 있도록 은금보화와 건축자재를 준비하고 하나님께 모든 주권이 있다고 고백한다. 많이 아는 사람이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는 것, 아주 강한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 대단히 많이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빈털터리임을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본문에는 프로스퀴네오 즉 경배하다란 단어가 2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마귀에게 경배하는 경우에 한 번, 하나님께 경배하는 경우에 한 번 사용된다. 결국 마귀를 경배할지 하나님을 경배할지 인간은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마귀 경배와 하나님 경배는 방향과 구조, 내용이 전혀 다르다. 마귀는 영광만 보게 한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게 하고 재물을 보게하며 권력과 지식의 영광을 누리도록 종용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광만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눈은 영광의 뒤편 어두운 그늘에 앉은 자들을 보신다. 웃는 이들 뒤에서 우는 사람들, 이긴 자들 뒤에서 슬퍼하는 패배자들의 눈물을 보신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발로만 보신 게 아니라 압제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모세를 통해 해방시키셨다. 하나님의 눈은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이웃을 침략한 일제를 보신 게 아니라 그 아래 신음하는 우리 민족을 보시고 광복을 주셨다. 예수님 또한 영광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을 보셨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면 영광을 함께 누릴 것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면 어떤 고통이 따르는지 사실대로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 고난이 있다면 왜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인가. 그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일’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귀는 언제나 ‘만일’이라는 조건부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만일’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비록’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을 경배할 때 ‘만일’이라는 조건을 버려야 한다. 마귀를 경배하는 사람들은 만일 복을 주면 섬기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더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루마니아 공산 독재체제 아래 투옥되어 고난당했던 리차드 범브란트목사는 만일의 기도가 아닌 비록의 기도를 드렸다. 언제까지라도 이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인으로 살다 천국의 예배자가 되길 희망한다.             /영락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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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5
  • 고집부리지 말고 순종하라 - 요나 1~2장
      하나님께서 요나를 찾아오시어 임무를 하나 주신다. 니느웨로 가라. 가서 회개하라고 외쳐라. 말씀에는 짧게 되어있지만 이랬을 거 같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다른 데도 아니고 어떻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라고 하십니까. 그냥 죽게 내버려 두자’라고 했을 것 같다. 그리고 요나는 도망간다. 하기 싫어서.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욥바로 갔다. 요나의 뜻은 분명하다. ‘하나님 저 앗수르 놈들은 우리 민족을 괴롭게 하는 정말 잔인하고 나쁜 놈들입니다. 그냥 죽는 게 낫습니다. 나는 거기 안 가겠습니다’ 요나의 머릿속에는 고집과 자기 의가 있어 하나님이 틀렸고 자기가 맞는다는 생각이 있다.   어쨌든 요나는 뱃삯을 내고 배를 탔다. 그런데 풍랑을 만난다. 이 풍랑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다. 사공도 선장도 난리가 났다. 그런데 요나는 배 객실에서 자고 있었다. 이건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이다. 요나는 지금 이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기 때문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하지 않는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거 못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도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집부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서 화해하라고 하시는데 내가 그냥 고집부리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미운 마음에 내가 고집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   계속해서 요나는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물에 던져진다. 요나가 물에 떨어지자 바로 태풍이 멈췄다. 그리고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신다. 요나는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풍랑이 일 때 바로 회개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나는 자기 고집 때문에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그러다가 물에 던져지고 삼일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고 나서야 회개한다.   교인은 고집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이다. 고집을 부리면 나만 피곤하다. 다윗은 반대이다. 고집 없이 바로 무릎 꿇는다. 나단 선지자가 우리야와 밧세바의 일을 지적하니까 바로 회개한다. 그런데 요나는 고집을 부린다. 대개 고난은 죄 때문에 온다. 요나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죄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명령하셨는데 도망갔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하는데 억울하다고 하소연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순종이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사랑 베풀기를 원하신다. 지금 당장이라도 니느웨에 가겠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죽도록 충성하겠나이다. 이런 대답을 원하시는데 이상한 말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다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뜻을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이 잘 모르면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주시기도 하고 꿈으로도 알려주신다. 지금은 기록된 말씀과 설교자들을 통해서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나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알았으면 아는 것에서 끝이 아니라 순종해야 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고집 부리는 게 아니라 고집을 꺾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원수 갚는 것보다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용서하고 안아주기를 원하신다. 내 고집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예장 합동개혁측 총회장-유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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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04
  •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빼자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군가 많이 배웠고 훌륭한 교양을 쌓고 옷을 잘 차려 입었어도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가 기독교인이라 해도 그의 속에는 아직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죄의 본성 때문에 하는 것 하나가 남을 비판하는 것이다.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하게 수군수군하며 남을 비판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그렇게 찬성하지 않는다. 도리어 말을 가급적 많이 하지 말라는 입장이다. 잠언 21장 23절은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고 했다. 잠언10장 19절에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3가지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아야한다. 남을 비판하면서 우월감에 사로잡히거나 남다른 쾌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비판하는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비판은 비판을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열지 않는다. 비판은 사람의 마음을 더 굳게 걸어 잠그게 한다. 마음을 냉랭하게 한다. 방어적으로 만들고 다시 공격적으로 만든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다 똑같다는 것이다. 다른 성품이나 기질이라고 해서 그 것이 완벽한 것이 아니다. 서로 비판하기 보다는 서로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마음은 교만하지 않는다. 도리어 겸손하다.   내 눈 속에는 들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들보는 한옥과 같은 집에서 지붕을 떠받치는 굵고 긴 나무를 말한다. 남을 비판하는 그 사람의 눈에는 들보가 있고, 비판을 받는 사람의 눈에는 티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변한 후에야 남을 변화시킬 수 있다. “자신을 바꾸는 일부터 했더라면 이어서 가정을 바꾸고, 마을을 바꾸고, 더 나가서 나라를 변화시켰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누가 알겠느냐? 세상까지 변화시켰을지”맞는 말이고 성경적으로 봐도 옳다. 랍비는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달았다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나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자질 혹은 덕목이 몇 가지가 있다. 비전, 혹은 목표, 카리스마, 통찰력, 전문 지식, 열정 등등의 것들이 지도자에게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모범이 되는 것이다. 지도자로서 다른 모든 자질을 갖추었더라도 모범이 되지 못하면 아무도 그를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내 눈에서 들보를 빼는 것은 내가 먼저 변하는 것이다. 내 문제를 고치는 것이다. 내가 똑바르고 선명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눈 속에 들보와 같은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먼저 치료받는 것이다. 혹은 나쁜 습관이나 행실을 고치는 것이다. 내 문제를 고치지 않으면 그것들은 계속 내 생각과 삶에 영향을 미친다. 과거는 현재의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많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들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이 지금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을 때, 예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것을 주님에게 내 보여 드리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셔야 한다. 예수님의 보혈로 덮고 닦아서 해결될 아픔과 상처가 있다. 또는 나의 망가진 마음의 한 구석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신림소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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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26
  • 기쁨이 차고 넘치게 - 시편 19편 1절~10절
      1년 24절기 중에 지금은 열네번째 절기인 처서를 지나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로 한참 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9월부터는 교회력으로 창조절이 시작되었다. 전통적인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로 이어지지만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성령강림절 절기가 너무 길고, 하나님과 관련된 절기가 없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9월 첫 주부터 창조절 절기를 만들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모두 기리는 균형 잡힌 교회력을 지키고 있다.  한편 창조절기를 새롭게 만듦으로써 우리 신앙고백의 근원이 되는 창조신앙을 되돌아보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창조질서를 회복하려는 교회의 의지를 담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후 변화와 그에 따른 전 지구적 생태 위기는 전 인류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더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이다.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창조로 시작해서 창조로 끝난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창세기는 ‘혼돈과 공허, 깊은 어둠에서 새로운 질서와 빛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시작하고,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로 마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창조와 구원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바로 모든 구원의 메시지는 창조와 창조 사이에서 흐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를 바라보고, 계속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때 우리는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시편의 저자는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간다”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이 자연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만나며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그 영광이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창조자의 숨결과 말씀이 온 세상 끝까지 번져간다고 노래하고 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시인처럼 느끼고 노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하나님은 아니 계신 데가 없고, 모든 존재와 사건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래서 우리가 잠시 멈추어 서서 그 존재의 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 우리의 관심과 자기중심적인 자아를 잠깐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몰아닥치는 일과 바쁜 일상에서도 우리는 잠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멈추어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 또한 자연을 지그시 바라보시며 하늘의 뜻을 읽어 내셨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서 예수님의 삶과 믿음의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느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통해 무조건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고, 걱정 근심에서 해방되고 참 자유와 진정한 삶의 의미인 영생을 얻으셨던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들으시고 깨달으시기 바란다. /생명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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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15
  • 치유의 십자가 - 마가복음 15장 21~39절
      십자가의 의미가 퇴색해가고 십자가가 조롱받는 이 시대에 우리는 힘써 십자가를 전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노래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하며 살자. 십자가는 상징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생명이고 영적 실체이다. 신앙생활의 비법이고 왕도이다. 그러나 오늘 무엇보다도 치유하시는 십자가를 전하고자 한다. 십자가는 치유하는 은혜이다. 주님께서 민수기 21장에 나타나는 놋뱀의 사건, 그 이미지를 사용하셔서 처음으로 직접 자신이 십자가에 달릴 것을 말씀하시는 대목이다. 십자가는 어떤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고 능력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이 스스로 상처를 입으신 치료자이다. 주님은 우리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인생의 고통을 친히 당하시고 맛보신 분이다. 그래서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다. 주님이 당하신 모진 고통과 아픔은 조목조목 우리의 치유와 연결된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아신다. 그렇다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무엇인가.   먼저는 육체적인 고통을 겪으셨다. 주님께서 채찍질 당하실 때 그의 온 살점은 찢어지고 뜯겼으며 가시관은 머리 피부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고통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사형 틀이었기 때문이다. 고통당하실 이유가 없는 그분이, 죄도 없는 주님이 말이다. 바로 나 때문에, 내 죄 때문에. 우리가 치유 받게 하기 위해서 그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므로 담대히 선언한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치유함을 얻는다.    둘째로는 정신적인 고통을 겪으셨다. 이 고통은 엄청난 내적인 고통이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오히려 구체적으로 말한다. 공생에 사역 속에서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에서 주님은 수없이 조롱받고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멸시의 눈초리 모욕과 수치심,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까지 조롱하는 마음의 상처를 너무나 심하게 받으셨다. 주님도 맘이 아프셨다. 죽을 만큼 아프셨고 쓰리셨다. 그런데도 십자가에 오르신 이유는 못나고 망가지고 병들고 상처받은 채로 정신적 공황과 무너짐 속에 아프게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이 시간 누구든지 마음이 아픈 사람은, 십자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치유되고 회복될 줄 믿는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고통을 겪으셨다.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는데 이 외침은 시편 22편 1절 말씀을 그대로 되뇌신 것이다. 왜 주님은 운명 직전의 그 결정적인 순간에 이 시편의 말씀을 생각하시고 그 고통스러운 입술을 열어 외치셨을까. 바로 그때 주님은 영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고 아버지가 자기를 외면하시는 것 같은 고통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그러신 것이 아니신가 싶다. 내 인생에서 내 사업에서 내 자식들에게서 떠나셨는가. 진정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세상으로부터도 내팽개쳐진 것 같은 상한 감정, 두려움이 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영적인 고통이 올 때, 신앙의 회의가 생길 때, 마음이 메말라서 쩍쩍 갈라질 때, 그냥 그 자리에 머무르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들기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믿음이 회복되고 예배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찬송이 터질 것이고 눈물이 회복될 것이다. 병이 치료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그 모진 고통들을 다 당하시고 그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치유의 십자가이다.  /하늘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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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9-09-06
  • [금주의 말씀] 맡겨야 할 근심, 해야 할 근심
    ▲ 이재영목사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에 이렇게 정의했다. “하고 싶은 일을 조금 못하고 입고 싶은 옷을 가끔 못 입는 정도의 재산에, 한 사람한테는 이기고 두 사람한테는 지는 정도의 체력, 반만이 손뼉을 치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현대인들 가운데 플라톤이 정의한 행복에 공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행복이 무엇이겠는가? 행복은 무엇인가를 완전하게 갖추어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은 실제로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다. 세잎 클로버의 꽃도 ‘행복’이다. 많은 사람이 행운을 찾기 위해 일상의 행복을 짓밟는 경우가 많다. 결국 행운을 잡으려고 하는 것도 행복하기 위한 것인데, 이미 주어진 행복을 밟아 버리고 행운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불행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근심이다. 근심이 가득한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사람이 하는 근심은 다 똑같은 근심이 아니다. 맡겨야 할 근심이 있고 해야 할 근심이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바울이 말씀하는 첫 번째 근심은 세상 근심이다. 세상 근심은 육신적인 근심을 말한다. 세상 근심은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파괴하는 쓰레기와 같은 것이다. 생활하다 보면 쓰레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쓰레기는 버려야 한다. 아무리 욕심쟁이, 구두쇠라도 쓰레기는 내다 버린다. 만약 쓰레기를 집에 그냥 두면 온 집안에 악취가 진동하게 된다. 우리가 계속 마음속에 근심이 있으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잠언 17장 22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 곧 세상 근심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육체까지 병들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세상 근심은 우리가 해야 할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야 할 근심이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근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근심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두 번째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세상 근심은 하나님께 맡겨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머리 싸매고 해야 한다.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생명을 다해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어떤 근심을 말씀하는 것인가? 그것은“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생기는 거룩한 근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더 잘 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교회를 잘 섬기고 부흥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께 더더욱 헌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이런 근심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세상근심은 우리를 죽이는 근심이기에 기도로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를 살리는 근심이기에 의도적으로 해야 한다.  /대구 아름다운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8-29
  • [금주의 말씀] 기도해야 하는 이유
    기도는 말과 함께 시작되는 것 같지만 사실 감정이나 본능과 함께 시작된다. 본능은 살고 싶고, 먹고 싶고, 잘되고 싶은 거다. 목사인 나 자신도 기도하면서 ‘내 신앙은 왜 이렇게 유아적인가 왜 나는 이렇게 부족한 것이 많아서 요구가 많은가?’ 종종 스스로를 책망하게 된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죽음에 사로잡힌 상태일 수 있다. 본능적인 욕구마저 없어진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드러내고 개방하고 자기의 현재를 모습을 인정하고 여는 것이다. ‘나 이런 문제 있어! 기도해줘!’ 때로 중보기도를 부탁할 때는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야 할 때도 있다.  오늘 말씀 1절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라고 한다.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먼저 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묶여 있는 그 문제에서, 눌려있던 어둠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라는 말씀이 조금은 부담스럽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용사로서 또는 믿음의 장수로 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장수하면 우리는 마치 총 맞은 동료가 쓰러져서 신음할 때 총탄을 뚫고 동료를 부둥켜안고 총탄을 헤쳐 나올 수 있는 특수요원을 연상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리더가 된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이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영적 전투는 항상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특수요원을 만들기 전에 먼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를 원하신다. 게릴라를 훈련시킬 때 왁자지껄한 시장에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인적이 없는 산에도 풀어놓는다. 그러면 뱀 잡아먹고 나무뿌리 캐 먹고 살아남아야 한다. 산속에서는 훈련을 포기하거나 다른 사람이 구해주길 바랄 수는 없다. 내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이것은 환자그룹에서 의사그룹으로 태어나는 과정이다. 이런 연단을 통과하기 위해 기도는 필수다. 이렇게 기도는 생존본능으로 시작되지만, 이 연단은 내가 먼저 일어나는 훈련이다. 빛을 발하며 남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일어나야 하는 과업이 먼저 성취되야 한다.    기도가 지속된다면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자기를 살피게 된다. 기도를 통해 어둠에 눌려 패잔병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다윗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며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시42:4)라고 자신을 탓하며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기도를 했다. 기도는 입고 있는 누더기를 벗겨 내는 것이다. 기도는 내가 축복의 자녀임을 알게 해 준다. 기도하면서 숨겨져 있는 것들이 드러난다. 숨겨져 있는 좋은 것, 나쁜 것들이 드러난다. 기도는 드러냄이다. 기도할 때 현재의 내가 누구인가를 말한다. 기도할 때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표현되어 나온다. 기도할 때 자신의 긍정적인 것 뿐 아니라 자신의 부정적인 것도 본다. 기도할 때 현실을 인정하게 된다. 기도할 때 나에 대한 하나님의 지지와 인도를 경험한다. 기도할 때 내가 떠밀리기보다 이끌려 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어떻게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없을까 궁금해 한다. 그러나 기도해 보면 기도가 정말 신앙생활하기 가장 편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이사야 60:2) 어둠이 땅을 덮었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렸다. 세상이 너무 어둡다.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거대한 계획 보다는 내가 먼저 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어둠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음하고 있는 것은 아니가?  신음하는 그 자리에서 나부터 일어나야 한다. 내가 일어나면 내 주위가 살아난다. 나부터 일어나야 한다.  /양지평안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8-12
  • [금주의 말씀] 호미와 낫의 기호학
    ▲ 허태수목사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에 식물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식물을 가꾸기 위해 땡볕에서 호미를 든다. 또한 우리는 식물을 위해 낫을 든다. 모든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식물을 가꾸기 위해 우리는 낫을 들고 덤불을 벤다. 우리는 호미와 낫이 주는 ‘이형동질’의 기호학을 문화의 디엔에이로 축적하며 살아왔다. 일찍이 문맹자를 놓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했다. 낫은 곧 인간의 ‘질화’이다. 단순한 공산품이거나 혹은 사물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었던 것이다. 낫이 날카로운 칼날을 지니고 있지만 사람을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없는 것은 그 모양이 ㄱ자처럼 구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낫을 잘못 휘두르다가는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이나 정강이를 찍는다. 생김새만 안으로 구부러진 게 아니라 그 칼날 역시 안쪽으로 나 있어서 남을 공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그러나 유목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는 서구사회의 농기구는 날이 밖으로 서 있고 그 모양새도 일자다. 창처럼 꼿꼿하다. 그러므로 서구의 농기구들은 금세 무기로 전환할 수 있는 공격 형태를 하고 있다. 유목이란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쟁기를 금방 무기화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서양의 낫은 죽음의 신이 들고 다니는 상징물이자 사람의 목을 베는 흉기였다. 옛 소련의 깃발에 새겨진 낫과 망치처럼 생활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민중들의 혁명수단인 무기로서의 공격성을 보이는 거다. 그러나 우리네 호미와 낫은 무기로서의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는 데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즉 칼이나 창의 끝을 구부리고 밖으로 선 날을 안으로 세울 때 비로소 농부의 연장, 낫과 호미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이 농기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보라! 서양 사람들은 보통 칼을 쓰듯이 안에서 밖으로 내미는 데 비해서 우리는 거꾸로 밖에서 안으로 감아 잡아당기지 않는가. 낫을 안으로 구부리고 그 날 끝을 덜 밀면 곧 호미의 모양이 된다. 자기 가슴으로 향해 있는 칼날, 이 철학적이고 기호학적인 것이 바로 낫이며 호미다. 그래서 호미질을 세게 하면 자신의 발을 찍게 된다. 안으로 구부러져 있는 호미의 생김새는 지평선으로 확산해가는 도발적 힘이 아니라 안으로, 뿌리로, 자기 자신으로 끝없이 응집해 들어오는 힘이다. 낫은 호미의 반대어가 아니다. 살생의 모든 무기가 곡식의 생명과 인간의 목숨을 공궤하는 도구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기호다. 설령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래도, 그 낫이 파랗게 날이 서 있어도, 남을 해치기보다는 자신에게 더 위험한, 그래서 남에게 사용하는 병장기가 아니라 나와 너의 목숨을 도모하는 상생의 도구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식물, 곧 모든 생명을 보듬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인간적 능력들과 힘을 다른 생명을 위해 사용해야만 한다. 제 생명 보존하기 위해 감사히 대해야 마땅한 다른 생명들을 파괴하는데 우리의 ‘낫’을 휘두른다면 그 칼날은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는 엄중하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보시기에 참 아름답다 하신 그 다른 생명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겸허히 자연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중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우리가 귀한 자녀이듯 하늘의 날고 기는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소중한 피조물들이기 때문이다. 각성하고 회개함으로 교회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길 기도한다. /춘천 성암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8-11
  • [금주의 말씀] 우리 신앙의 현주소는?
      이 세상의 문화를 주도하는 강력한 두 사조가 있다. 기독교사상이 바탕인 헤브라이즘이라는 신본주의와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근간으로 하는 헬레니즘이라는 인본주의, 곧 구속사와 세속사라는 상충 되는 흐름이다. 그리고 인간 안에도 가인과 아벨로 대별되는 두 혈통이 존재한다. 인류 최초의 문명은 에덴동산의 발원지 중 하나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이 문명을 주도한 혈통이 가인의 후예들인데 그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높은 성을 구축한다. 대조적인 삶을 보여준 아벨의 혈통을 이은 셋의 후예들이 있다. 성경은 누가 누구를 낳고 얼마를 살다가 죽었다는 기록뿐이지만, 이들 안에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믿음의 씨앗이 심겨 있었고 때가 되니 그 씨가 발아 되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세기 4장 26절)는 싹으로 나온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이름을 불러 말을 건다”란 뜻인데 오늘날로 말하면 공적 신앙고백을 하면서 찬양과 기도가 곁들여진 형식을 갖춘 예배를 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아담이 그토록 고대했던 여자의 후손은 민족적으로는 유대인으로, 혈통적으로는 셋 계통으로, 사상적으로는 헤브라이즘을 통해 세속화로부터 그들을 보존하신 후 마침내 성령잉태로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구원을 완성하셨다. 구원과 함께 심판을 단행하심으로(창세기 6장 7절) 사랑과 공의도 보여주셨다. 이 홍수심판의 위기에 대해 창세기 6장 1~2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원인분석을 했다. 셋의 후예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가인의 후손들과 혼합되어 타락함으로 홍수심판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노아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 당시도 그렇고 오늘날의 위기 역시 타락한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타락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성경적이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도 진리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사사기 21장 25절) 살려는데 있다.  믿는 자들이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망각하고 방기하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된다.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해야 하며 빛은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을 밝혀야 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착한 행실로 건덕을 이루며 영광을 돌려야 한다. 현재 우리가 처한 정치, 경제, 외교적 위기도 의인 열 명이 없어서이다. 세상과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로마서 8장 19절)고 했다. ‘나타나기’가 영어성경엔 ‘manifestation’인데 이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해 완전히 회복 된 의인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신령한 성도(로마서 8장 14절)들의 출현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2~28절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고,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회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예고한다. 당초 하나님의 섭리가 복원되는 카이로스의 때로서 이런 자격조건에 가장 부합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일본의 경제도발과 열강의 각축장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고 해방시켜줄 또 다른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담이 기다렸던 여자의 후손, 모든 피조물들이 고대했던 메시아, 신구약 성경의 중심 주제, 인류 역사의 분기점인 B.C와 A.D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영화롭게 섬길 의인 열 명이 필요하다.  /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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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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