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8-09(화)

교회/목회
Home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실시간뉴스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자 (눅20:45~47)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누가복음 20: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본문은 스스로를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부분이 참으로 많다.  겉으로는 그럴싸하지만 그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아시는 주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내 주변에 삼가 해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끊어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내가 다른 이들에게 삼가 해야 할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믿음의 관계를 세워가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군중으로 사는 자(45) 모든 백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성경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45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목소리는 모두에게 들려지지만 참된 진리는 오직 제자들에만 전달되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시며 많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들에 대해서 보상을 요구하지만 불법을 행한 것뿐이라 말씀하신다.   구원의 은총부터 그 받은 구원을 잘 유지하며 완성하기까지 정말 필요한 것은 참 제자로서 일대일의 온전한 관계이다.   대중이 아닌 제자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일상속에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나가는 영적인 능력을 소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둘째:자기를 위해 사는 자(46) 서기관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위한 도구로 율법을 이용할 뿐이었다.   서기관들이 원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고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자신들만이 입는 특별한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다. 또한 서기관들이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에 앉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고, 좋아 해야 할 자리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주신 것을 깨우치게 하고 가르치는 자리여야 했다.   하나님의 맡겨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보다는 그 일 때문에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환경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 이들을 멀리할 뿐 아니라 내가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한다.   셋째:위선으로 사는 자(47) 서기관들은 실제로는 하나님이 긍휼이 여기며 보살피라고 명령하신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파렴치한 행위를 하지만 겉으로는 길게 기도하며 거룩한 척을 하고 있다. 과부의 재산을 갈취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길게 나올 수 있는가?   정말 힘없고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삶을 살면서도 보란 듯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증거이기에 그의 기도는 외식하는 기도가 될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이 절대 듣지 않으시는 기도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고 책망하시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 때의 사람들의 모습을 열거(딤후3:1~4)하면서 가까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돌아서야 할 자들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며 결론적으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고 권면한다.   인생을 살아보면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큰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깨닫는 교훈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깨어 있고, 영적으로 민감하다면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기 이전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관계를 맺어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8-09
  • 모두가 전적으로 죄인이다(롬3:9~20)
        사람들은 인간의 상태에 대한 세 가지 견해 중에서 하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첫째, 인간은 조금 부족할 뿐이고 날로 좋아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입장이다. 둘째, 인간이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시각이다.    셋째, 성경의 견해이다. 인간은 완전히 부패했으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견해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서 긴 논증을 했다.이방인들의 뻔뻔스러운 탐욕과 불의함을 지적했고,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의로운 삶을 산다고 여기는 이들의 위선적인 불의함을 증거했다.   또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의 자기 자신과 그들 속에 나타나는 불의함을 지적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그룹을 지적한 이유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짓는다는 것이 아니다. ‘아래 있다’는 것은 어떤 세력 아래에 정복되어 있고, 지배당하고 있고,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다.   이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일도 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다. ‘없다’는 단어가 계속 반복된다. 하나님과의 접촉점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모습과 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죄 아래에 있는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렇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죄 아래 있는 상태를 고발하면서 구약 곳곳에 예언되어 있다고 말한다. 매우 의도적이다. 사도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 번 강조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구약 말씀을 인용한다.   인간은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거룩하시며 심판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사도 바울 당시 이교도들은 바벨론과 헬라 그리고 로마의 수많은 이방신을 두려워 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데,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다.   죄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복음은 기쁜 소식이요, 놀라운 소식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죄 아래 있는지를 철저하게 깨닫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고, 심판을 주시는 것이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 아래 있고, 심판 아래 있다는 것과 동등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를 멸망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는 것이 목적이다.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 목적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죄 아래 있는 우리를 은혜 아래로 변화시키는 하나님 은혜의 통로이다. 십자가 앞에 나가지 않는 것은 죄 아래 있다는 실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 진리이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모두 완전히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온누리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8-01
  • 악인의 특징 (눅20:19~26)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악인들의 모습은 시편 1편을 기준으로 보면,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 있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기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으며(4절), 심판을 견딜 수 없고(5절), 그 길은 망하게 될 것(6절)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들은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악인이라 특정 지을 수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이나 의도는 어떤 누구보다도 악한 사람들이었다.    본문을 통해 각자 자기의 속사람을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19~21)  악인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도 예수를 잡고자 했지만 백성들이 두려워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다(19절).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오히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21절)로 간교하게 접근한다.   악인들은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할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바울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며 악인들의 모습을 열거하다가 제일 마지막에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8)고 단언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방법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목적이 불의하다(22~25)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22절)라는 질문이 예수님에게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옳다 그르다고 말씀하기보다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5절)고 하시는데 이유는 가이사의 것도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도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 가르치면서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13:7)고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인 동시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삶을 잘 살아내야 할 책임이 있다. 정말 궁금한 것이 아닌 불의한 목적을 가지고 원하는 대답을 원기 위해 질문을 하는 것이야 말로 악인들의 특징이다.   셋째:침묵으로 끝난다(26)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다. 악인의 계획은 치밀하고 빈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빠져 있기에 언제나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려는 하만은 왕의 조서까지 받고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자신의 집에 오십 규빗이나 되는 장대를 세워 놓았지만 결국 그 장대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하만 자신이 달리게 된다(에7:8).   성경은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잠24:1)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침묵할 존재가 아니라 나의 삶에 행하신 놀라운 일들은 소리 높여 찬양할 수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악인들의 모습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이 소망이 있는 것은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고 말씀하시며,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7)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넓은 품에 안기는 축복을 누리며 살자.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8-01
  • 그리스도와 함께 (눅19:28~40)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세상은 무슨 일을 하고, 어느 자리에 있는지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신다.   그렇기에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축복을 받은 자들이다.    성경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하면 나의 인생이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있으며, 그 길을 함께 가는 믿음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은혜 가운데 이어갈 수 있는지 깨닫고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세워가는 일꾼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말씀 안에서(28~32)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관계에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방식에 대해 주저하지 않으셨는데 이미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와 눈을 뜨면 바뀌는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으로 삼으며 살아야 한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권면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다.  둘째:순종 안에서(33~36)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준은 순종하는지를 통해서 판명된다.   두 명의 제자 이름과 나귀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관심은 누구인지가 아니라 얼마만큼의 순종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시기 때문이다. 사울왕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게 되는 이유도 순종하기 않았기 때문이다(삼상15:22~23).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나귀의 주인이 제자들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순종을 하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축복의 경험은 다른 이들이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진정한 순종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는 말씀처럼 순종을 넘어 복종의 단계까지 이르러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   셋째:찬양 안에서(37~40)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에 대한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예수님이 군중들의 찬양을 그치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찬양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더욱 선명하게 알기 원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알지 못하면 바리새인들처럼 딱딱한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는데 오늘날도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40절)는 예수님의 책망은 찬양하지 않는 것은 돌보다도 못한 인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고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찬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이자 사명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며 찬양이 입술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함께 말씀 안에서, 순종 안에서, 찬양 안에서 사는 것에 익숙해져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는 고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축복의 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7-25
  • 매일 경험하는 구원 (눅19:1~10)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을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고 말씀하신다.   만약 의인을 찾아 상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 근처에 갈 수도 없기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고 명령한다.   새 사람을 입고 주신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결단하여 구원받은 자로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축원한다.  첫째:진심으로 행동하라(1~4)  삭개오는 세리장이며 부자였는데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   그저 호기심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다가갈 수 없을 때 포기하고 돌아갔겠지만 돌무화과 나무에서 올라가서라도 보고자 하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깊은 아픔이 배여 있는 행동이다. 이러한 진심어린 마음이 담겨 있을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고 말씀하신다.   간사함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으로 내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심이 얼마나 담겨져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둘째:기쁨으로 순종하라(5~7)  예수님은 많은 군중들이 아닌 돌무화과에 메마른 마음으로 올라가 있던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뿐 아니라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다. 양 아흔 아홉 마리 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예수님은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개의치 않으셨고, 삭개오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성경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기쁨이 충만할 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매일의 삶에서 구원 받은 자의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면 그 음성에 즐거워하며 순종하는 인생이 되어야 함을 명심하자. 셋째:스스로 결단하라(8~10) 삭개오는 예수님이 먼저 명령하시지 않았음에도 할 일을 선포하고 있고, 예수님은 그 집에 구원이 임하였을 뿐 아니라 삭개오를 통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성취되었음을 말씀하신다.   삭개오가 재산을 나누어 주겠다고 선언한 것은 자신의 풍요로움이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2:17~18)고 말씀하고 있다.   믿음이 바로 서 있다면 행함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는데 은혜는 받았지만 아무 결단도 헌신도 없이 그저 더 많은 것들만 채워 달라고 요청만 하는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자.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권면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여 받은 구원을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다.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협하며 구원의 기쁨을 빼앗아 가려고 혈안이 되어 주변을 맴 돈다. 반복되는 일상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이 내가 이루어가야 할 구원의 순간임을 기억하며 날마다 받은 구원을 경험하는 시간들을 살아내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7-18
  •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가? (눅18:18~30)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은 이 땅의 삶을 살면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교훈한다.   성경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고 말씀하고 있으며,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며 고백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마주하는 오늘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임을 말씀을 통해 다시금 깨닫기를 축원한다.    첫째:할 수 있는 것(18~21)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을 얻으려면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질문할 때 예수님은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20절)는 이미 알고 있는 율법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해야 한다. 바울은 마지막 때에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일상적인 삶의 모든 순간에 능력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으로 주어졌고 그것을 지키며 사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기본기가 갖추어져 있어야 성장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할 수 없는 것(22~27)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들이 반드시 있다.   교회 생활 잘하고 말씀대로 살면 되지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믿음과 혹은 영생을 얻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성경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신4:24)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이유는 빼앗기지 않고 잘 지켜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전적으로 내어 드리기 위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자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  셋째:해야 하는 것(28~30) 베드로의 질문은 교만함이 아니라 헌신한 자의 당당한 자세임을 깨닫게 되며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이러한 당당함임을 느끼게 된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고 자신 있게 선포하고 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은 부끄러워 숨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도전이 될 수 있는 귀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눅12:8~9)고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제자의 당당함이 오늘 이 시대에 교회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다.  베드로는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0~11)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가르쳐 주고 있다.   마르다처럼 세상의 많은 일에 분주하여 중요한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중요한 것은 하나라고 할지라도 붙잡고 놓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7-11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눅18:1~8)
    길목교회 주재훈목사    본문은 예수님이 기도의 자세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이다.   너무나도 중요한 기도에 대해서 정작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기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은 그저 자신의 감정을 쏟아 놓고, 한풀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실제적인 역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해서 기도는 한다고 하지만 얼마나 올바른 기도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지 각자의 기도의 모습을 점검해 보기 바란다.  첫째:항상 하는 기도(1)  기도의 핵심은 “항상”(1절)에 있기에 일상의 모든 순간이 바로 기도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나의 모든 순간에 변함없이 기도하는 것이며 항상 기도하기 때문에 낙심의 마음을 품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주치는 일상의 삶에서 낙심하게 되는 이유는 문제가 생기면 그 때가 되어서야 기도하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12:23)라 선포하며 기도를 쉬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문제 때문에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항상 기도하기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모든 환란을 능히 이기고도 남는 힘을 공급받는 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확신의 기도(2~5)  과부는 재판장의 성품이 어떻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귀찮도록 찾아간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는 하지만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이심이라”(요일5:14)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다스리시고 주관하고 계신다.  확신으로 기도하지 못할 이유를 단 한 가지도 찾을 수 없는 분이시다. 기도는 한다고 하지만 응답의 확신도 없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 바란다. 셋째:포기하지 않는 기도(6~8)  기도에 대한 비유의 결론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절)라 내리시는 이유는 기도의 응답이 포기하지 않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고 말씀하신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인데 의심을 품고 사는 자는 포기하는 일에 익숙하다. 포기하지 말아야 함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으로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노라”(사41:9)고 말씀하셨다.   기도의 응답이 이 땅에 호흡이 있는 동안에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며 주님 앞에 서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솔로몬이 백성들을 잘 다스릴 지혜를 간구할 때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왕상3:10)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기도가 응답을 받게 된다. 반면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고 분명하게 깨우쳐 주신다.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그 기도가 나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응답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가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7-04
  • 한 걸음만 더 (눅17:11~19)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은 나병이라는 질병이 있지만 그 발걸음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들을 통해 교훈하신다.   하나님은 믿음 안에 걸어가는 자들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3,8).   말씀을 통해서 나는 어느 곳을 향해 발걸음을 딛고 살고 있는지 돌아보기를 바라며 그 길이 과연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는지 점검해 보고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면 옳은 길로 돌아서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소망의 한 걸음(11~13)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먼 곳에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과 할 수 있는 것에 소망을 두고 움직이는 사람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열 명의 나병환자는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환경은 언제나 녹록하지 않다. 충분히 좌절하게 할 만한 환경이며, 소망의 마음의 조차 품을 수 없게 하는 현실의 문제들에 붙들려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믿음 안에 있을 때 소망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7:7)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오늘 우리들의 고백으로 삼으며 매 순간 내 딛는 발걸음은 절망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향한 걸음이 되어야 한다.  둘째:순종의 한 걸음(14~16)  열 명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고 하셨다. 그런데 이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제사장들을 만나기도 전에 나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가 오늘 우리의 삶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순종하며 따르기 전에 내 생각과 경험이 앞서기 때문이다. 엘리사를 찾아왔던 아람군대 장군 나아만의 기적은 순종에 있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왕하5:1~14).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을 경험하기 원하면서도 그 기적의 통로인 순종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하나님은 먼저 순종을 할 수 있는 자인지 점검해 보시고 통과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감사의 한 걸음(17~19)  아홉 명도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다 있었을 것이며, 자신들의 병이 회복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마음 또한 분명하게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감사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19절)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구원을 선포하셨다. 구원을 받기 위한 출발점은 바로 ‘감사’이다.   성경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라 명령한다. 그 문에 들어가고, 그의 궁정에 들어가는 자격은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지만 궁극적인 완성은 감사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기 바란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10:23)고 고백한다.   시편 기자는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시119:133)라고 간구하고 있다.   매일 나는 어디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가?   작은 한 걸음이라 할지라도 썩어질 세상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믿음의 한 걸음을 내 딛고 사는 인생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6-27
  • 명품을 좋아하시죠?(딤후1:1~5)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품을 좋아한다. '명품'이란 말은 해외에서 '럭셔리'로 불리는데, '럭셔리'란 사치품, 호화품의 뜻이 있다. 우리나라에 럭셔리 브랜드들이 들어올 때 어감이 좋지 않아 거부감을 들게 할 것을 우려해 <명품>이란 단어로 바꾸었다고 한다. 기업의 마케팅전략인 셈이다. 원래 명품은 장인들이 수제로 만든 값어치 있고 희귀한 제품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명품을 몸에 지녔다고 해서 사람이 존귀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명품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부부가 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도록 하셨고, 만물을 다스리라 명하셨다. 이 다스림은 곧 가정에도 적용된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와 자녀를 잘 다스려야 하는데 이 다스림이 정치(政治)이다. 아내에게도 다스림의 역할과 책임이 크고 중요하다. 아내는 윗어른, 시댁의 모든 식구, 남편과 자녀의 관계에서 정치를 잘 하여야 한다. 따라서 정치가 중요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믿음의 가정, 온 식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부부가 함께 이루어가야 할 가정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이전의 시대에는 가장(족장)이 제사장 역할을 수행하였다.) 행복한 가정은 경건한 신앙의 명문가, 신앙의 명품가정을 이루어가는 데 있다.   자자손손 부모의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계승(계대)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된 부모로서 하나님의 앞에 인정받는 믿음의 자녀로 키워야겠다는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1)자녀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 2)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 이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의 성공보다 신앙의 승리자, 하나님 앞에 서 게 될 그 날에 하나님 앞에 칭찬 받는 신앙의 성공자로 서게 되는 것이 소원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딤후 1:3절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딤후 1:5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말씀한다. 이처럼 위대한 인물의 배경에는 어머니의 영향을 입었다. “아이의 요람을 흔드는 어머니의 손을 세계를 흔드는 어머니의 손과 같다.”   하우스는 잠만 자는 곳으로 가정이 될 수 없다. 건강한 가정을 이루는 길은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 세우는데 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 신앙의 명문가, 신앙의 명품가정을 세워가는 일에 힘을 다하여 가족해체의 위기를 극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127:1).   목회자란 것, 그 자체가 귀한 명예가 아닌가!(?) 작든 크든 장이란 직이 귀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무엇을 빛내는 일에 온 힘과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인지 답은 명확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두 가지 모두를 가지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이 같은 마음으로 총회를 섬겨왔고, 목회 정신으로 삼고 오늘에 이르러 목회 일선에서 퇴역을 앞두고 있다. 목회에서 퇴역하는 마당에 나의 퇴역사는 사무엘의 퇴역사로 대신한다. /천호동원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6-24
  • 복음과 하나님의 진노(로마서1:1~32)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상태를 진단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며, 그 불의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복음을 깨달을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는 ‘본질적인 완전함’입니다. 대상에 따라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합니다. 그것을 ‘본질적으로 완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악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본질적인 완전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죄와 악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고, 죄와 악이 있으면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예측 가능합니다. 철저히 이성적입니다. 오로지 죄와 악에 대해서만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죄와 악에 대해서만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죄와 악에 대해서 분노하실까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신론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사람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만 존재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광대하시며, 영원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분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고, 모두 이해할 수 없고, 초월해 있고, 모두 알 수 없는 영역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나면 우상이 반드시 출연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결코 중립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어떤 것을 섬기고 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으면 우리의 생각이 허망해지고, 어두워지며, 결국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진노가 세 가지 채널로 나타났습니다. 마지막 날 궁극적으로 폭발하듯 나타나는 진노가 있습니다. 매 순간 우리 삶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통해 나타나는 진노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내버려두심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정욕대로 살도록 더러움에 내버려 두시니 그들은 서로의 몸을 욕되게 했습니다”(24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대로 내버려 두셨다, 정상적인 관계를 비정상적인 관계로 바꿨다, 순리를 역리로 바꾸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며 위반하였다”(26~27절). “더구나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하찮게 여기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타락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28절).  ‘내버려 두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악을 행하게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진노의 한 모습입니다. 그 자체가 징벌입니다.    우리가 두려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단어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의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마음으로 인하여 온갖 죄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불의, 악행, 탐욕, 악의, 질투, 살인, 다툼, 악독, 분쟁,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부모를 거역, 우매함, 배역함, 무정함, 무자비 등입니다.     악은 새로운 죄를 계속 만들어내고, 악을 행하는 법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구원의 감격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앞에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불의로 진리를 막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받아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온누리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6-2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