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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가 쓰시는 사람 - 본문 : 누가복음 19장 30~31절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는 한 번도 사람이 타 보지 않아 아무 경험도 없어 어떻게 사람을 태워야 할지도 몰랐을 것이다. 사람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동물을 길들일 때 동물들은 답답해서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펄쩍펄쩍 뛰면서 참을성도 없다. 이런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기에 너무나도 부족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귀를 타셨다.   또한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는 어린 나귀로 기록되어 있다. 어린 나귀는 한 사람 태우기 벅찼을 것이다. 어리기에 힘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며 몸도 작고 경험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런 나귀를 보는 사람들은 나귀를 무시할 턱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쓰셨다. 어리다고 낙심하고 반대로 나이 많다고 실망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다윗도 어렸지만 쓰셨고, 요셉도 어렸지만 쓰셨다. 사무엘도 어렸지만 쓰셨고, 디모데도 어렸지만 쓰셨다.   예수님은 매여 있던 나귀를 풀어 쓰셨다. 나귀는 사람들이 매어놓고 있었는데 이는 많은 이들이 부정적인 생각이나 의심, 무지와 같은 잘못된 생각에 매여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사람은 잘못된 생각에 매이고, 돈이 없다 돈이 매이고, 권력에 매이고, 건강에 매여 있다. 그렇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 가지고 일어나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지금 여러 가지에 매여 있다 해도 하나님이 풀어서 쓰실 테니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나귀는 영어로는 바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귀 같은 놈 그러면,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바보라도 쓰신다. 고린더전서 1장 26~29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구절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너무나 어리석고 비참한 사람은 사람들의 멸시와 질타를 받으며 천대 속에서 음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삶 속에선 사람이든 사회든 희망을 아무리 찾더라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자신의 참된 사역을 위해, 인간의 눈이 아니라 진리의 눈으로 사람의 참된 가치를 꿰뚫어 보신다.   나귀는 체구가 작고 못생겼다. 말과 나귀는 비교해 보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몸도 작고 못생겼다. 이와 달리 말은 정말 멋있고 잘 달리며 힘이 세다. 그러나 나귀는 너무 못 나고 어리숙하기만 한다. 말은 적토마니 천리마니 그런 이름은 있어도 나귀는 천리나귀라는 말은 없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못 생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힘 하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마저 사용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말 타고 가지 않으시고 나귀 타고 가셨다. 수많은 나귀 가운데서 예수님께 선택받은 나귀처럼 우리 또한 귀히 쓰임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부족한 이라도 자신의 위업을 위해 쓰신다. 그가 어리더라도 쓰시고 매여도 쓰시며 어리석어도 쓰신다. 우리 모두 쓰임 받기 위해 왕 되신 예수를 태우고 온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귀한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시기 바란다.  /조기암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0-01-20
  • 마태교회 사람들 - 마태복음 5장 38~48절
      마태교회를 세워나가던 신앙공동체는 유다-로마 전쟁이라고 하는 최악의 고난을 겪고 나서 그 때 발생했던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했던 이들이다. 자신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더 근원적으로 변혁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고,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새롭게 탈바꿈할 수 있으며, 조상들이 지켜온 계명과 율법을 완성하는 것을 바로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던 이들이다. 이들은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써 악을 점차 줄여 나가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다. 사소한 말다툼이나, 무례한 언어와 행동이 큰 피해를 주는 사건과 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을 일깨워서 서로 존중하는 삶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폭력을 사랑으로 바꾸려는 모험을 실행한다.   주인과 종 사이에서, 때로 지배국가의 권력자가 식민지 백성을 다루면서 생기는 폭력에 대하여 마태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상대편의 마음에 남아 있는 양심을 일깨우려고 했던 것이다. 분쟁을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옳은가를 근원적으로 묻고 있고, 로마가 식민지 백성을 억압하고 또 폭력적인 방식으로 다루면서 과연 문명국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고소해서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고대에 속옷은 여러 벌이었고, 가난한 사람에게 겉옷은 한 벌이었다. 겉옷은 밤에 몸을 따뜻하게 하는 이불이 되어 주고, 물건을 옮길 때는 보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돈 많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하자 속옷을 저당 잡으려고 한다. 그럴 때 이 가난한 사람이 이제 겉옷까지도 내어 준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렇다. 이 가난한 사람은 입을 옷이 없어지고 더운 뙤약볕과 추운 밤을 안전하게 보낼 수가 없다. 인간이 누려야할 최소한의 휴식과 잠자리조차 보장받을 수 없게 되고, 벌거벗었기에 인간으로서의 자존심마저 무너지게 된다. 공적인 재판이 인간을 이렇게 만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구약의 율법에서 모세도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명령하고 있다.   진정 옳은 재판은 악덕 고리대금업자를 설득해서 가난한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도록 하는 것 아니겠는가? 가진 자가 가난한 사람의 속옷마저 빼앗도록 하는 재판이 모두 행복한 사람다운 세상을 만드는 재판인가? 합리성의 이름으로, 또는 법조문을 들이대면서 가난한 자의 모든 것을 탈탈 털어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를 말씀은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세상은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는 명예가 수여되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수치를 감내해야 했다. 그런 세상에서 이러한 자비의 행동들은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식민지 백성에게는 자존감을 높여 주었고, 남을 지배하는 인간들의 양심을 새롭게 만들어 주었다. 권력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다스리는 것, 관대함을 통해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은 보통 당시 신의 아들이라 불린 지배자들에게 요청되던 덕목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였던 마태 교인들은 힘없고, 박해당하고, 멸시당하면서도 지배자들에게 요구되는 이런 덕목을 자신들이 해 내고 있다. 불의를 불평 없이 참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하기를 실천한다. 우리도 이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썩어가는 세상을 새롭게 하고, 어두운 세상을 비춰야 한니다. 예수님은 여덟 종류의 행복한 사람을 말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 /생명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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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0-01-17
  • 성령의 동행 감격과 선한 일의 환희 - 고린도후서 5장 14~21절
      새해 새로운 시작이 가슴 벅찬 소망과 희망으로 주께 아름다운 열매를 맺혀 드리기 위한 새날로 열렸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령의 동행은 어제보다 더 나은 성화로 주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주의 제자화를 위해 벅찬 기대와 설렘으로 믿음의 행보를 하게한다.   부르심의 푯대를 향하여 복음으로 새 생명에 이르게 하는 주의 제자화가 성령의 내주 인도 역사하심이기에, 모든 것들을 견디며 믿음으로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로 승리의 행복과 감사와 감격으로 환희이리라. 주를 사랑하여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에 세상이 감당치 못할 주의 지체들의 믿음이 이웃 사랑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일에 승리의 연계이다.   바른 앎을 갖고 주를 사랑하는 복음은 힘이 솟구치고 소망이 넘쳐서 전도로 본을 보이며 살리는 일에 존재의 목적을 둔 사도들처럼 전도로 살리는 일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임을 믿고 거듭난 자들이 확산되는 구속사역에 충성 하는 행함이 선한 일로 주의 기쁨임을 증거 한다. 믿음의 역사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소명과 사명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여명의 계획들로 주의 제자화를 위해 더욱 충성하도록 실행케 하심이기 때문이다.   새 날들은 주의 나라가 확장되는 이김의 세월을 아낄 수 있도록 기도와 말씀 위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모두를 승리하게 하는 십자가 사랑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며 주님을 향해, 주님을 위해, 주님에 의한 일들에 열매 맺히길 기대하고 의탁 성령과 동행하는 사역들로 선을 이루어 드리는 날이다.   이 일에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행함있는 믿음으로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 이 땅에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임을 알고 좇게 한다. 사도바울의 증거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를 위하여 살도록 감격과 환희로 이끄심임을, 이로인해 이웃들이 돌이켜 주님의 사랑에 거하여 제자화를 위한 삶이 되도록 전도로 구원에 이르게 하고 진리 알기를 소원하며 그리 인도하실 주님께 소망을 둔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신 주님의 뜻대로 세상을 주와 화목하게 하여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게 하심임을, 또한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는 위에 있는 권세에게 굴복하라고 하시며 이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왔다고 하셨고 이 권세에 굴복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자취할 것이라 하셨다. 곧 이방인들이 복음에 순종해야 의에 이르러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지 않는 영생이기에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신을 하나님의 사자로 일컬어 이 권세가 하나님께로 나왔다고 하셨으며 사명과 소명 이 시대를 향한 이웃사랑으로 주님의 뜻을 밝히셨다(로마서 13장 1-10절).   그러므로 주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십자가 사역을 본받아 그 자취를 좇는 주의 종들로 주의 몸을 온전히 세워가는 그 이웃사랑으로 행함있는 믿음의 성화를 위해 열린 새 날들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주를 화목제물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기에 그 주님의 고귀한 십자가 사역에 더 많은 열매가 맺히도록 믿음의 힘으로 푯대를 향해 좇아가는 소망의 새 날임을…….  /미국 오이코스대 객원교수·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2-31
  • 예수 탄생, 왜 성탄일까 - 누가복음 2장 8절~11절
      이 땅의 여인들이 겪는 온갖 고난 중 해산의 고통만큼 값진 수고가 또 있을까? 둘째 아이를 해산하던 1985년, 7월의 여름을 잊을 수가 없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새벽, 산기를 느끼던 아내가 출산이 임박했음을 알리면서 진통이 시작되었다. 새벽에 찾아온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까를 잠시 고민한 끝에 집에서 출산하기로 결정하면서 여집사 한 명과 둘째를 받기로 했다. 가축이나 온갖 동물들도 자연스럽게 새끼를 낳는 것이 순리라면 인간은 더더욱 자연분만이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생명탄생의 신비를 경험하기는 했지만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위험천만한 과정이었다. 태아가 산모 몸에서 나오다 말고 마치 무엇에 걸린 것처럼 한동안 발버둥 치는데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그 후론 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여인들, 특히 산모들이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땅의 어떤 여인이든 극심한 산고를 경험하며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다 할지라도 그 출산을 우리는 ‘성탄’ 즉 거룩한 탄생이라 부르진 않는다. 세상 영웅들의 출생일, 혹은 여러 종교의 창시자가 탄생한 날도 의미부여는 하지만, 심지어 공휴일로 지정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성탄’이란 단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예수탄생만이 ‘성탄’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아주 오래전부터 예언된 탄생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탄생을 두고 근거 없는 각종 설화가 난무할 수는 있어도, 예수님처럼 수백 년 아니 그 이상의 긴 세월 속에서 본인들의 탄생이 예고되고 예언된 일은 없었다. 기원전 약 750년 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사야서를 통해서도 아기 예수님의 성탄은 이미 명확하게 예언되어 있었다.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외에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 징조와 예언은 성경 곳곳에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는 창세기에서도 예수님의 탄생은 예고되어 있을 정도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유구한 인류역사 속에서 일찍이 어느 누구의 탄생이 예수탄생처럼 미리 예고된 적이 있었는가! 아기 예수의 탄생이 성탄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동정녀를 통한 탄생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탄생은 남자와 여자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느 누구의 출생도 남녀 간의 결합이라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종교의 창시자들이나 역사의 빛나는 영웅호걸 모두가 남녀의 결합을 통해서 태어난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은 남녀의 결합 없이 태어난 유일한 분이시다.   셋째 전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탄생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마지막으로, 오직 예수의 탄생만이 성탄인 이유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실 분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 가장 해결이 어려운 문제, 아니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죽음의 문제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해결하신 유일한 분이시다. 성탄절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가슴으로 영접하면서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성탄의 복이 가득하길 기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2-18
  • 미래를 보고 현재를 살아가라 - 창세기 41장 46~57절
      ‘시계를 돈으로 살 수 없이도 시간을 살 수 없다’는 말이다. 시간은 상거래가 가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은 지나간 단 1초의 시간도 돈으로 살 수 없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시간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시간이라는 선물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중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현재밖에 없다. 과거는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다. 불행한 과거를 바꿀 수 없다. 불행한 과거는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해방돼야 한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매어서 살아가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미래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아니다.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미래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다. “인간에게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돈 벌기 위해 건강 잃어버리고 그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잃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놓쳐버리고 현재도 미래도 살지 못하는 것이다’많은 사람들이 건강은 생각하지 않고 돈을 벌고, 번 돈을 다시 그 건강을 찾기 위해서 다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미래에 대한 염려로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서 현재도 미래도 다 놓여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톨스토이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과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현재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하고 있는 일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영국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현재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든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현재가 너무나 중요하고 현재 나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분명히 맞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현재를 통해 미래를 살아가는 사람은 답을 못 찾은 사람이다. 지금 현재 어려운 환경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현재를 통해서 미래를 바라보면 답이 없다. 암울한 현재로 아무리 미래를 꿈꾸어야 봐야 행복한 미래를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고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미래는 분명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니다. 그렇기에 미래에 대해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미래를 꿈꾸어야 한다. 미래의 목표를 세워야 한다. 미래에 나의 꿈이 이루어진 모습을 생각해야 한다. 꿈을 꾸고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현재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요셉은 미래를 보고 현재를 살았던 사람이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기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구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준비해 가는 사람이다. 미래를 보고 현재를 준비하였던 지혜로운 요셉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지를 보라. 애굽백성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백성들도 살려낸다. 아버지 야곱과 그 형제와 모든 가족들을 살려낸다. 미래를 보고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만 살 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무엇보다 천국을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아름다운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2-13
  • 수원 영광제일교회 이동환목사
      소수자·약자·병자·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교회를 추구 장애들이 불편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조성이 시급   이동환목사(사진)는 30년 전에 개척된 수원 영광제일교회의 5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사역하고 있다. 이목사는 무엇보다 소수자와 약자들을 환대하여 그들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교회를 일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에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하나 둘 모여 공동체가 커져 갔고, 소수자들도 교회에 출석하여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목사는 “교회에서 환대의 정신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핵심 가치이다. 하지만 한국교회들은 소수자와 약자, 병자, 가난한 자들을 환대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약자들을 인원동원용으로만 생각하고, 온갖 차별과 편견, 배제하는 교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다. 예수께서 누구와 함께 지내셨는지를 읽는 것은 쉽지만 따르기는 어렵다”고 전했다.   동 교회에는 장애인과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여성운동가, 노숙인 상담가 등이 출석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는 약자들에 대해 항시 관심을 갖고 고민하는 이들이 동 교회로 자연스레 모여들어 함께 연대하고 있다. 이들은 소수자들이 겪고 있는 소외와 아픔의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늘 기도하며 스스로의 삶을 바치고 있다.   이목사는“특별히 성소수자에 대한 교회의 공격이 매우 거칠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선포한 이들에게 죄로부터의 해방을 늘 선언하셨는데 교회는 언제나 죄를 선포한다”며, “우리는 소수자들을 유별나거나 사회를 말세로 이끄는 죄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한명의 교인이자 하나님께서 너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섬기고 있다. 하나님께서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신다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그저 평가하지 않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목사도 7~8년 전에는 동성애를 죄라고 당연시했고, 다른 사람의 말은 전혀 듣지 않았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 후 성소수자와 인간관계를 맺게 됐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 안에 막연하게 있던 성소수자에 대한 공포심과 편견들을 발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목사는 동성애에 대한 혼란된 마음으로 기도하던 중 동성애를 죄라고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니란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목사는 “성서의 어떤 구절들은 분명히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겠지만 성서해석은 한 개인이나 집단이 독점할 수 없다”며, “성경을 읽는 다양한 시선과 관점들이 있다.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똑같이 성서를 기준으로 동성애를 죄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엇이 옳으냐를 떠나 적어도 이야기는 들어봐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타인과 더불어 사는 자세가 아닌가. 성소수자들은 분명 나와 다른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함부로 그들을 죄인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성소수자를 죄인이라고 규정하길 거부하는 우리의 모습들조차 죄라고 규정하는 기성교회 교인들의 시선이 때론 두렵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목사는 수원 영광제일교회가 그저 다수가 손가락질하고 피하고, 외면하는 이웃들과 함께 지내고 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그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섬기고 대접하고자 노력하고 있을 뿐이라고 거듭 말했다. 그럼에도 많은 다수들처럼 소수자들을 외면하고 있지 않기에, 그들을 죄인이라 정죄하지 않고 있기에 오히려 자주 다수의 기독교인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는 현실의 고충도 전했다. 소수자를 향해 돌을 던지는 이들을 향해 예수는 무엇이라 말했을까. 말씀에 답이 있을 것이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2-13
  • 성경의 잣대란 무엇인가
      창세기 1장은 성경 육십육권의 잣대다. 창세기 1장을 열지 못하면 성경은 열리지 않는다. 또한 창세기 1장의 내용은 비유와 상징이다. 문자 그대로 읽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한 데도 문자 그대로 읽고 현상의 천지만물로 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는 천지만물을 창조한 6일이 아니라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를 통하여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의 의도하신 계획대로 양육하는 과정이다. 사람의 마음 땅을 계몽하고 개간해 나가므로 하늘들과 하나로 결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 첫째에서 여섯째 시기는 하나님의 잣대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본체이다. 이 잣대가 적용되지 않으면 성경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잣대가 없이 성경을 문자대로 읽고 해석을 하기 때문에 혼란만 더해질 수밖에 없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인 첫째시기에서 여섯째 시기는 숨겨진 비밀의 계시이다. 혈과 육으로는 이 비밀을 열 수 없다. 하나님의 잣대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와야 이 계시의 비밀이 활짝 열려지게 되어 있다. 첫째에서 여섯째시기 안에서 사람의 마음 땅의 무저갱의 얼굴들이 깨뜨려져 죽고 생명으로 살아나게 된다. 그리하여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세워지고 신령한 몸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왕국인 천국이 완성되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해 놓으시고 그대로 방치시켜 놓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끌어 올리셔서 하나님처럼 다시금 재창조를 계속해 나가게 하신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을 세우시고 이 지식의 빛을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문자화 시킨 것이 성경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영의 지식을 그대로 전하면 인간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현상을 인간이 늘 접하면서 익히 알고 생활해 가기에 그 자연현상의 내용들을 비유와 상징으로 들어서 영의 지식을 문자화 시키신 것이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은 인간의 속사람을 위해서 세우신 것이다. 사람의 마음 땅에 본래적으로 자리 잡고 있던 육의 속성들을 잘라내고 깨뜨려 예수와 연합된 한 몸이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영과 육이 분리 되는 것이 죽음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 땅에 본래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육의 속성들을 잘라내고 깨트려서 소멸시키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이다. 인간의 마음 땅에 본래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육의 속성인 혼돈과 공허와 무지를 하나님의 지식의 빛으로 계몽하고 잘라내고 불태우게 되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이 생명으로 부활되는 것이다. 창세기의 결론이 요한계시록이다. 따라서 계시록도 창세기의 맥을 열지 못하면 마무리할 수가 없다. 사복음서도 인간의 마음 땅에 가득 차있는 무지인 어두움의 지옥에 갇혀 안주하고 있는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에게 창세기 1장을 삶속에 적용시키라고 주신 내용이다. 일평생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어두움인 무지를 죽이고 소멸시켜 생명의 부활을 해나가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아픔과 고난이 따르는데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만 믿으면 죽어서 자동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는 허구를 버려야 한다.   /한국히브리신학연구원학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2-04
  • 원통함이 찾아올 때 - 사무엘하16장 5-12절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황당하고 절망적일 때가 있었다면 언제였는가? 다윗은 오늘 가장 비참하고 원통함이 넘치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은 예루살렘 성을 내어주고 머리를 풀어헤친 체 맨발로 울면서 신하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그런데 그때 사울의 먼 친척격인 시므이란 자가 다윗의 일행을 쫓아오면서 돌을 던지고 다윗을 저주했다. “..피를 흘린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 셨도다...”(7-8절)   지금 아들과의 전쟁을 피해 도망가는 것도 다윗은 한없이 부끄럽고 참담한데 베냐민 지파사람으로 정치적 입지가 다른 시므이는 다윗이 사울의 피를 흘려서 그 죄 값을 받는다고 비난한다. 다윗은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피해갔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의 생명을 취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울왕의 옷깃을 베고 나서도 괴로워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심복 아비새장군이 나서서 시므이의 목을 베게 해달라고 청원했지만 다윗은 허락하지 않았다.   11-12절“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다윗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과거에 저질렀던 자신의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사울가의 피를 흘렸다는 그 저주를 묵묵히 감수하다 보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감찰하시고 자신의 원통함을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는 믿음을 피력하고 있다. 아직 다윗은 건재하고 다윗의 휘하 장군들은 충성스럽지만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헤치지 못하도록 엄히 명령하였다. 시므이를 향한 분노와 원통함이 일어날 때 다윗의 마음도 흔들렸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 따라 시므이를 용서하였다. 시므이를 용서한 다윗의 모습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용서하신 예수님을 미리 예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속옷을 제비뽑고 있는 군병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늘 아버지에게 기도했다.   눅23: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제비 뽑을 새” 예수님은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창조하신 피조물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신다. 그리고 자신의 속옷을 나누려고 제비뽑는 군병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많은 이들이 용서가 힘들기에 미움과 증오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오늘날 적폐청산을 외치면서 그것이 마치 공정과 정의의 실현인양 외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진정 그것이 주님의 정의인가? 우리 예수님은 조건을 따지지 않고 죄인들을 용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일만달란트 빚진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용서받은 것처럼 이웃과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야 함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일만 달란트 용서받은 나는 오늘도 일백데나리온 빚진자를 언제까지 움켜쥐고 정의를 외칠 것인가? 보복의 악순환이 있는 한 결코 사랑과 정의의 나라는 요원하다. 우리 예수님의 마음으로 불편한 내 이웃들을 조건없이 용서하는 한해의 끝자락이 되기를 소망한다. /예수품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1-20
  • 믿음의 방주를 만들라 - 창세기 6장 9~22절
      〈강물의 세기〉의 윌슨은 강을 거슬러 헤엄치는 자가 강물의 세기를 안다고 했다. 우리도 시대와 역행하여 더욱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노아 당시의 사회는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극한 문란 상태에 있었다. 우리는 오늘 주시는 말씀 속에서 이 시대를 향한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시 사람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즉 노아를 선택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노아는 즉시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노아를 조롱하고 비판하지만, 그는 끝까지 순종했고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구원을 받았다.   노아는 믿음으로 산 사람이다. 노아의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다. 방주를 만들 때 노아 혼자만의 생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믿음으로 순종했다. 하나님은 방주를 이렇게 지으라고 말씀하셨다. 장이 300규빗, 광이 50규빗, 고가 30규빗, 총 4,300톤급의 큰 배이다. 높이만 5층 아파트 이상이고, 길이가 150m의 엄청난 큰 배이다.  이렇게 큰 공사를 노아의 가족 8명이 해냈다. 노아 생애의 목적은 방주를 짓기 위한 것이고, 그것은 그의 삶의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영원한 생명의 길을 항해하기 위한 믿음의 방주를 만들길 바란다.   노아는 인내로 순종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말씀한 창세기 6장 14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너 자신을 위해 지어라”이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서, 너와 네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 만들라는 것이다. 참된 행복은 참 소망을 바라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다. 노아에게 120년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고 짧은 시간이었다.    이렇듯 우리의 삶도 노아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을 위해서 열정을 다해 살다가 한 세상이 지나갈 수 있어야 한다. 방주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듯이 우리의 영적인 삶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노아가 보여 주었던 인내를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따르고 실천해 체화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희망이다. 비록 미천하고 연약한 나는 홀로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누구라도 능히 이룰 수 있는 무지갯빛 미래가 노아에게 약속됐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삶이 의로운 삶이라는 것을 믿길 희망한다.   노아는 축복의 결말을 보았다. 신앙은 끝까지 결말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99%보다 마지막 1%가 가장 힘든 것이다. 남은 1%를 순종하고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1%가 채워지기까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리고 성도 마지막 회까지 돌고 성을 향해 외쳤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문둥병자 나아만이 일곱 번 몸을 요단강에 잠근 후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 응답이 없다고 중도에 포기하지 말길 바란다. 피곤하다고 주저앉지 마시고 끝까지 인내하면 반드시 축복의 응답이 있다. 지금은 노아의 시대처럼,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님의 재림 직전의 시대이다. 그리고 방주는 오늘날 교회를 의미한다. 이 마지막 때에 노아처럼 온 가족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승리하는 인생이 되길 바란다. /나돌섬선교회 회장, 사랑의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1-13
  • 천국도 지옥도 진짜 있다 - 로마서 13장 11~14절
      교회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고 여기고 서로 사랑하며 또 예수 십자가 그 구원의 진리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확실하게 맘속으로 믿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이다.   어머니 뱃속 태아에게 ‘얘야 너는 이제 곧 새로운 세상에 태어난단다. 그것은 지구라고 하는데 해와 달과 별들이 하늘에 있고 산과 바다와 나무와 날아다니는 새와 물고기와 짐승이 있으며 또 아버지가 있고 언니, 오빠, 동생 여러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는 가정이라는 것이 있단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단다’라고 말한다면 뱃속 아기의 반응은 어떠할까. 상상해 본다면 첫째로 “날 웃기지 마세요. 그런 세상이 어디 있을라구. 나는 여기가 좋아요. 어머니 자궁 속 물침대에 떠 있는 삶이 얼마나 좋다구요”, 둘째는 “아니 그게 정말이요? 정말 그런 세계가 있을까요? 거짓말 마세요. 나는 할 수 있는 한 그냥 이곳에 오래 살겠어요” 세번째 대답은 “아 정말 지구라는 세계가 있군요. 엄마 뱃속이 전부가 아닌 걸 몰랐네요. 그렇다면 그곳에 나갈 준비를 해야지요. 그날은 손꼽아 기다리겠어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이 땅에서의 삶은 이와 비슷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가야 할 곳을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그 길도 보여 주시고 계신다. 그런데 이에 대한 태도가 가지가지 다르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복음에 무관심 혹은 적대적이다. 다른 사람들은 회의주의자가 되어 반신반의하며 회개하고 주님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복 많은 사람은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살다가 무사히 지구를 떠나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지옥은 확실히 있이다. “정말 지옥이 있을까? 지옥 같은 소리하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천국도 지옥도 확실히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천국을 준비하시기 위해 약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 천국에 올라가셨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6·25사변이 난 이후로 잿더미가 되었었지만, 우리는 이 땅을 50년 만에 이렇게 아름다운 땅과 도시로 개발·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천국은 이 지상보다 수천, 수만 배로 아름다운 것이고 모든 아름다운 것이 다 예비된 곳이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 하나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사람이 자기 목숨과 무엇과 바꾸겠는가? 이제 우리를 데리러 오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이루실 때가 가까웠다. 로마서 13장 11절로 14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벌, 영광과 수치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놀랍고 아름다운 천국을 예수 믿은 사람은 이미 획득했고 끝까지 순종과 정결한 마음으로 이 구원의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때가 가까웠고 주님 오실 날이 눈앞에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고 마지막 심판도 있다. /하늘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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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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