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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사랑이신 예수님 - 요한일서 3장 16절
      무엇이 참 사랑일까?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십자가의 사랑이다. 십자가가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많은 방법 가운데 십자가를 택하셨을까?   본문을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을까?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시작부터 이 문제에 부딪쳤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시고 계실 때, 마귀가 다가와서 돌덩이를 떡덩어리로 만들어 보라고 요청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러자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곳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보이라고 요청했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시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예수님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무례한 일이요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라는 것이다.   인간의 자만심, 과시욕을 자극하는 마귀의 유혹은 광야에서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중에도 계속해서 다가왔다. 사람들은 줄곧 기적을 요구했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한다”(누가복음 11장 29절)라고 책망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이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만세 전부터 계획된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아셨기 때문에 표적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와 사랑으로 구원을 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예수님에게 마지막 시험이 있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마태복음 26장 37~38절을 보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셨다. 얼마나 마음이 힘이 들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을까?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는 문제를 앞에 놓고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잔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아버지의 뜻이 변함없음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무수히 많은 사랑의 증거를 보여 주셨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책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자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목숨을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셨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최고의 묘약은 사랑이다.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신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며,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고 계신다(로마서 5장 5절). 그러므로 성령을 받고,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독자들이 되시기 바란다. /세계로부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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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30
  • 방전된 몸으로 대문 나서지 마라 - 사도행전 1장 1~5절
      눈이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 인생에 눈이 크게 달라질 때가 있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이다. 한 가지 어려움을 만났을 뿐인데, 내 주변 풍경이 전부 빛 잃은 회색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때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힘내라는 말이 와닿지 않는다. 너무 지치면 모든 풍경이 절망이 된다.   그때 필요한 것은 충전이다. 하나님은 지쳐 있는 엘리야에게 다른 이야기를 안 하신다. 충전부터 시켜주신다. 지쳐 쓰러져 잠든 엘리야. 눈 떠보니 숯불에 구운 떡이 있었다. 먹고 또 잠에 든다. 자고 일어나니 또 먹을 것이 있다. 지쳐서 방전된 엘리야. 일단 충전부터 시켜 주신다. 방전된 몸으로 대문을 나서면 안 된다. 일단 충전부터 해야 한다.   방전된 스마트폰을 켜는 방법. 전원 버튼 계속 누르기가 아니다. 충전기 꼽고 내려놓기이다. 충전되어야 켜진다. 의지보다 중요한 것이 충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다. “예루살렘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성령으로 충전하라. 방전된 몸으로 대문 나서지 말고, 골방에 들어 앉아 성령으로 충전하라. 충만하게 살아라”   그래야 사고 나지 않는다. 그래야 주저앉지 않지 않는다. 제자들도 예수님 따르려던 의지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목숨까지 바치겠다며 장담했다. 의지는 대단했다. 그런데 금방 무너져 버렸다.   지속적으로 은혜를 충전하며 가는 사람은 쉽게 주저앉지 않는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어려운 일 찾아올 테니, 미리 영적으로 충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흘려듣는다. 기도하지 않고 잠든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때, 모두 부인하고 도망간다. 예수님 따르겠다는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방전된 영성으로는 내 결심 지키지 못한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어주심을 기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을 부어 줄 테니 사모하면서 기다려라. 더는 방전된 몸으로 신앙생활 하지 마라.   신앙생활 하는 동안 평탄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픔도 있고 갈등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을 만난다. 그때도 주저앉지 말고 전진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는 신앙되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 하님이 부어주실 은혜를 기대 것이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의 삶을 폭탄으로 부르셨다. 불발탄으로 끝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채워짐이 폭발력을 만든다. 우리가 은혜로 충전될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가족들의 삶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지체들의 공통점이 있다. 기도하는 이들이다. 그렇게 사랑의 화약이 채워지고, 은혜의 화약이 채워지게 된다. 그러니 집에서도 사랑이 폭발하고, 은혜가 폭발한다. 내 감정 줄어들고 말씀이 앞서게 된다.   채우는 삶은 믿음의 선순환 삶이다. 주일에 찬양하고 말씀 들으며 은혜로 채운다. 그러면서 한 주간 가정에서 삶의 터전에서 승리한다. 그 맛을 아니까, 또 은혜의 자리로 나온다. 그러면서 점점 삶이 은혜로 채워진다. 폭발력 있는 믿음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주일 예배에 부르신 이유가 있다. 은혜로 충전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더는 방전된 몸으로 살면 안 된다. 더 이상 은혜 없이 살면 안 된다. 한 모금 물 가지고, 한 주일 살겠다고, 고집 피우면 안 된다. /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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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4
  • 믿음은 물음표가 아니라 느낌표다 - 본문 : 사도행전 1장 6~11절
      인생을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해야 한다.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유명한 철학자에게 물었다.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철학자는 대답 대신 질문을 바꾸어 주었다. “어떤 사람이 부자입니까?” 철학자의 대답은 “이 나라에서 제일 부자는 만족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였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부자 되는 방법을 묻는다. 어디에 투자해야 되는 지 묻는다. 얼마나 돈을 많이 가져야 되는지 묻는다. 질문이 잘못됐다. 부자가 무엇인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많이 가져서 부자가 아니라 만족해서 부자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잘 사는 방법을 묻기 전에 잘 사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을 만들기 때문이다. 질문을 잘못하면 평생 질문만 하는 ‘물음표 인생’이 된다. 성도는 물음표 인생이 아니라 답을 알고 있는 느낌표 인생이 되어야 한다.    오늘 말씀 속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한다. “예루살렘은 언제 회복됩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으니 큰일을 하시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질문이 잘못되었다. ‘언제 회복되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회복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진정한 회복은 예루살렘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다. 예루살렘의 회복보다 영혼의 회복이 더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된 제자들은 늘 물음표의 삶이었다. “언제 됩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느낌표 인생이었다. 질문이 아니라 실행하는 삶이었다. 언제 회복되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실천하라고 얘기하신다.    믿음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약 2:17).    위대한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힘을 길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여야 한다. 문명은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때, 그리고 그런 횟수가 많아질 때 진보해왔다.”라고 말했다.    성장하는 인생은 무엇인가를 꾸준히 해나가는 인생이다. 질문만 하는 인생이 아니라 질문이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제자들이 해야 할 실천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었다. 우리 삶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원래 의지가 약하다.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다. 시간이 많은 사람은 없다. 허비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삶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아서 그렇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인생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장 8절)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이 잘 못 됐다. 바르게 사는 삶은 무엇인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다. 질문을 잘못하면 질문만 하는 물음표 인생이 된다. 성도는 물음표 인생이 아니라 실천하는 느낌표 인생이 되어야 한다.    인생은 질문이 중요하다. 그러나 질문하는 이유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대로 살기 위해서다. 그대로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행동하는 인생이 되길 축복한다. /행복한나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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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십자가만 자랑하라 -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당신은 지금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근대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를 설립한 조지 워싱턴의 일화이다. 그가 장군으로 있을 때 정부에서 사절단이 온 적이 있다. 워싱턴을 만난 관리는 그가 국민을 대표할만한 훌륭한 애국자라며 좋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워싱턴은 날카롭게 대답했다. “그런 말은 내게 아무런 기쁨을 주지 않습니다. 한마디만 말하십시오. 당신은 지금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좋은 말로만 차려 놓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몸으로 표시된, 즉 생활로 구체화된 제사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이다.    갈라디아서 6장 말씀을 보면 거짓 교사들은 핍박을 면하고 할례를 받은 자들의 수를 늘리며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고 싶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한 사실이 나온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만 자랑했다.   바울과 같은 신앙을 품기 위해선 사리분별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거짓 교사들이 할례를 강요하고 바울의 가르침을 공격했던 이유는 그리스도 십자가 때문에 초래되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율법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진리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였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안위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천박한 위선일 뿐이었다. 교회에 은밀히 침투한 거짓 교사들과 잘못된 가르침에 속지 않으려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지혜가 있어야 한다.    역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바른 가르침으로 무장한 교인들이 있을 때, 교회 안에 거짓 교사와 거짓 가르침은 설 자리를 잃는다. 바른 교사와 거짓 교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이나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영광은 받으려 하면서 박해는 피하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고 다른 길,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모색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결단코 자기 백성으로 영접하지 않으신다.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는지 점검해 보자. 너무 많은 종교적 행위들에 가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지 못한다면 속히 치우고 덜어낸다.    이를 잘 따르기 위해선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흔적을 마음속에 가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할례의 흔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 곁에 살아계시며 말씀을 전하셨던 예수님의 흔적이다. 바울에게 예수님의 흔적이란 예수님께 충성한 결과로 받은 핍박의 흔적이며, 고난의 상처였다.    우리에게는 어떤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가. 혹시 예수님의 흔적이 아닌 세상의 흔적으로만 가득하지는 않는가. 겉으로 드러나는 혈통이나 할례가 진정한 믿음의 표시가 아니듯, 외적인 직분이나 성취가 믿음의 표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 혼자 고통 받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 받은 징계는 그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것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이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질병과 가난과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선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교회 안의 가정들도 다들 문제를 갖고 어려움도 있고 고민도 있다. 진정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자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무릇 사도 바울과 같이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파주시교회시협의회 회장, 파주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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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2
  •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 누가복음 17장 11~19절
      코로나바이러스의 재확산이 심상치 않다. 수도권과 충청권이 지금 걱정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그제 전 세계에서는 하루 최다 확진자가 나왔다. ‘조용한 전파’가 특성인 이 바이러스 때문에 혹여 나도 확진자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코로나 19 확진을 받은 한 환자가 음압병실에서 작성한 글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나는 코로나 19 확진자입니다”라는 제목의 이 글은 여섯 살과 백일이 갓 지난 두 아이를 둔 엄마의 글이다. 회사 동료로부터 감염된 남편이 병원으로 이송된 날 새벽, 아무 증상이 없던 자신도 감염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음성이었다.   며칠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자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고난 속에서 느낀 감사에 대해 고백하기 시작했다. “저랑 남편이 양성임에도 우리와 가장 가까이 붙어 지낸 아이들이 음성임에 감사합니다. 긴급 상황에서도 친정엄마가 아이들을 돌봐주실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격리 상태로 입원할 수 있는 병실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새벽 시간에도 감염을 막기 위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빠르게 확인한 보건소 직원분들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인 누가복음 17장 11~19절에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한 한센병 환자 이야기가 나온다. 열 명이 고침을 받았는데 예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한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돌아와 감사한 이 한 사람에게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포하셨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치유는 이 한 사람에게만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마리아 출신 한센병 환자는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즉 감사의 찬송을 드렸다.   그리고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사가 곧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는 선포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감사를 곧 믿음과 동의어로 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를 은밀히 내세우는 거짓 감사가 아니라 나를 겸손히 비우는 진정한 감사는 세상에 속한 것을 거룩하게 만들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장 6절)라고 했다.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살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염려라는 말은 그 어원처럼, 우리의 마음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려는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고 내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바울은 염려를 기도로 바꾸라고 말한다. 염려 대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말한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장 6~7절)라고 확언한다. 또 바울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에베소서 5장 4절)라고 권면한다.   감사는 이 고통스럽고 힘든 코로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다. 감사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충분히, 아니 더 많이 느끼게 한다. 감사는 내 존재를 열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포용이다. 그렇게 감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주권이 여러분에게 머물며 이 고난을 이겨나가는 충만한 한 주가 되시길 바란다. /이화대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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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야곱과 함께 하신 하나님 - 창세기 28장 10~22절
      성경은 신앙과 체험이 담긴 한편의 신앙고백이다. 성경에는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진솔한 고백이 담겨있다. 오늘 말씀에는 야곱의 광야의 어려움 가운데 신앙을 깨닫는 장면이 실려 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장자권리를 사서 멋지게 살아 보고자 했었다.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려고 하였지만, 이 일로 인해 자신의 기대와 다른 큰 위기가 찾아왔다. 창세기 27장 45절 말씀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야곱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야곱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가야만 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러한 처지에는 함께 하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꿈속을 헤매는 야곱을 깨우시고 새로운 삶을 깨닫게 하셨다. 창세기 28장 16절 말씀이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은 자신의 처량한 처지 가운데 꿈 꿀 수 없었던 함께 계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놀라운 삶을 하나님께 요청한다. 창세기 28장 20-22절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여 주시고, 이 여행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을 주셔서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시면 여호와를 저의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내가 기둥처럼 세운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자신의 삶을 지켜주시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셔서 정말 돌아오게 된다면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창세기 35장 9절 말씀을 보면 야곱이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돌아올 때 다시 만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나온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은 야곱이 바라던 삶이 비로소 회복되게 해주셨다. 그 삶의 자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의 자리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돌아오고 싶어 했던 복의 자리에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고백한다. 시편1편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의인의 삶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고 심판이 와도 견딜 수 있다”   하나님은 야곱의 삶에 함께 해주셨다. 하나님은 야곱이 있는 모든 곳에서 그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지켜주셨다. 우리의 삶에도 함께 계신 하나님과 함께 견고히 설 수 있길 기도해 본다. 교회는 삶의 어려움을 견디고 바람을 이겨낼 수 있는 피난처와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 이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의인들의 모임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야곱처럼 자신의 삶을 자리를 행복의 자리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삶이 가능한 것은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을 때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0-06-19
  • [금주의 말씀] 거울인생과 거룩인생 - 본문 : 레위기 19장 2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 소설은 천재 문학가 괴테를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이자, 핵폭탄이었다. 특히 청년들에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시대 젊은이들의 마음을 문학적 장치를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의 슬픔이 베르테르라는 인물을 통해 시대의 슬픔이 되었다.    괴테가 수려한 글을 통해 감정을 매만질 수 있었던 이유로는 어린 시절 겪었을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당시 청년들의 연애에 관한 내면적 감정들을 세심하게 다루면서 읽어주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후기, 전기수라는 직업이 있었다. 소설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는 직업이다. 당대 삼삼오오 짝을 이루며 많은 이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점을 보면 많은 인기가 있었다. 뛰어난 전기수는 현장의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다. 소설을 읽어주면서 단순히 재미난 이야기를 건네주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그 시대 백성들의 기쁨과 아픔을 읽어주었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 이 영화도 주목을 받았다. 여성들의 마음을 잘 읽어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은 시어머니와 함께 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할 정도였다. 지금 사회는 공감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공감이 자본이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주는 구절이 있을까? 하나님의 마음 상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일까? 바로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거룩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코데쉬’라는 말은 ‘잘라냄, 분리함’을 의미한다. 원래 거룩은 하나님께만 있는 성품으로서 모든 피조물과 완전히 구별되심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되신다.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구별됨을 추구하는 것이 ‘거룩’이다.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구체적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성경은 레위기다. 레위기에서도 핵심이 되는 19장의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면 전부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철학적인 관념이 아니다. 일상적인 지침들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은 ‘지식적 앎’이 뿐 만이 아닌 ‘현실적 삶’을 나누는 교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인생은 두 가지다. 거울인생과 거룩인생이다. 거울인생은 거울에 비춰진 ‘나’만 보며 사는 인생이다. 삶의 기준이 거울로 보이는 자신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관심이 오직 ‘나’에게 있다. 매일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결핍들을 채워나간다. 누가 나의 감정들을 알아주거나 읽어주지 않으면 때론 화도 낸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거룩인생이 있다.   거룩인생은 거울 속 자신이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며 사는 인생이다. 삶의 기준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있다. 일상의 관심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한 삶을 사는 이들은 매일 성경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지금 부족한 것을 느끼며 부족한 것들을 기도하며 채워나간다.   누가 나의 감정들을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하다. 인생의 목적이 ‘거울 속의 나 보기’가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 보기’이기 때문이다. 매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다. 하나님과 일상의 행복을 누리면서 영원을 사는 인생이다. /반석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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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6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이까 - 본문 : 시편 13편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편 13편 1절)   ‘어느 때까지이니이까’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모든 것을 해보았지만 섣부르게 희망을 발설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과 절망의 상황 속에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 속에도 이런 절망을 경험할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순간. 그저 먹먹한 마음과 멍한 감정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시간이 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이런 절망의 시간이 새로운 희망의 도래와 출현을 꿈꾸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신앙 안에서의 구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으로 살아온 듯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죽음 앞에 한 줌의 먼지로 소멸된다. 그제야 인간은 깨닫는다.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란 뜻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여정과 생명의 종착역은 창조주이며,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섭리라는 것이다. 이런 섭리를 가슴 깊이 새겨 놓을 때, 우리는 인생의 고난과 역경 앞에서 덜 당혹해한다. 고통의 시험을 지혜롭게 넘어설 수 있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편 12편 2절)   시편 기자의 솔직한 탄식은 계속된다. 거듭되는 영혼의 번민과 마음의 근심. 동시에 구원을 갈망하는 기도를 드린다. 시편 기자의 기도는 성숙된 기도이다. 아픈 마음을 있는 그대로 대면한다. 하나님께 기도한다.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지나친 자기 연민과 슬픔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한다. 나만 슬프고, 나만 아프다는 고립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굴절된 자기 연민은 더 큰 소외와 상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편 12편 3절)   시편 기자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한다. 눈이 밝아진다 것은 현상을 굴곡 없이 인식한다는 뜻이다. 바라봐야 할 것을 바라보고, 버려야 할 인식의 찌꺼기는 내려놓는 건강한 시선을 의미한다. 기도는 우리에게 이런 투명한 시선을 허락해 준다. 동시에 가야 할 길을 보게 하며 버려야 할 마음을 내려놓게 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편 12편 6절)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는 다시 마음을 부여잡는다. 회복의 주체를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둔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의지하여 다시 찬양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이 기도는 맹목적은 희망이 아니다. 지난 시간 속에서 경험된 구원의 하나님,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찬양이다. 그렇다. 삶의 역경과 어려움이 왔을 때, 지난 시간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보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회상해보라.   지금 우리는 “어느 때까지이니이까”란 탄식을 하나님께 드리고 지난 시간 잘못된 인간의 욕망을 성찰해야 한다. 나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로 여기고 함께 연대하며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견디며 나아갈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좋은나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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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4
  • 코로나와 예배의 회복 - 사사기 6장 25~27절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혼란과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코로나가 끼친 영향 중에 좋든 싫든 가장 많이 접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교회의 예배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권고에 따라 현장예배에서 온라인 영상예배로 많은 교회들이 변화를 꾀했다. 두 주간의 거리두기 캠패인이 끝나고도 사회는 교회에 온라인 영상예배를 희망하는 분위기다. 부활절을 맞는 많은 교회들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현장예배로 점차 돌아서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코로나19가 지속되는 한 현장예배에 대한 사회의 불만은 계속해서 터져 나올 것이다. 실제로 500명이 모이는 예배당에서 코로나 방역기준을 적용해서 자리를 배치한다면 100명 밖에 앉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가 교회의 과제이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끌어안고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같은 예배는 어떻게 드려져야 하고 과연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신령한 예배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기드온이 살던 시대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에 의해 압제당하던 때였다. 하나님께서는 농사꾼인 기드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명령하신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주저하던 기드온은 결국 하나님이 보여주신 표징을 보고 순종을 결심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주신 첫 번째 미션은 아버지가 관리자로 있는 바알신당의 석상을 헐어버리고 아세라 목상을 깨트려서 그 나무와 칠 년 된 수소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난감한 명령이었다. 아버지가 관리자로 있고 온 친족과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섬겨오던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깨트리고 찍어버리는 일은 생명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버지를 대적하는 일이요 이 마을의 공공의 적이 되는 모험이다. 이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결단한 기드온은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마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고자 우상의 단을 과감하게 헐어버린다.   여호와께서는 기드온을 보호하신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 누구도 그의 영혼과 육체를 해칠 수 없다. 이제 기드온은 나팔을 불어 소집한 이스라엘의 용사들을 데리고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연합군을 맞아 승리의 전쟁을 치른다. 겁많은 농부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우상 숭배자에서 진정한 예배자로의 인생의 회복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올바른 예배에서 시작되었다.    인생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에서부터 출발 됨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주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예배하는 자리에 설 때에 그는 인생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 바른 예배, 신령한 예배, 주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자가 되려면 먼저 내 안에 있는 우상과 악한 것들을 깨트리고 찍어 버려야 한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왕 되심을 선포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노래해야 한다.    주님이 없는 예배는 예배일 수가 없다. 오프라인 예배냐 온라인 예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냐를 물어야 한다. 예배당이라는 건물 안에서 드려야 주님이 받으시는가? 아름답고 웅장한 예배당 자체도 또 다른 우상이 되고, 내게 신령한 예배라는 착각을 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이제 질문하자. 우리의 예배에 주님의 임재가 있는가? 당신의 예배 공동체에서는 진정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왕으로서 다스리고 계시는가?/예수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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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9
  • 미스바로 모이라 - 본문: 사무엘상 7장 1~12절
      세상 종말이 되면 막을 수 없는 병으로 수많은 자들이 죽는다. 작금의 세계 모든 민족이 전무한 ‘신종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크나큰 죽음의 공포로 세계의 경제, 외교, 문화, 종교가 큰 위기를 맞고 대처할 방법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지만, 과학을 맹신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과 정부는 위기극복에는 매우 미미한 힘을 보여주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과학만능, 정보사회, 최첨단을 자랑하는 나라정부, 회사도 속수무책으로 망연자실로 당하고만 있는 현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위기 앞에서는 하나님 앞에 모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미스바로 모이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참된 회개를 통해서 국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모여서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로 모든 죄악을 버려야 한다. 사무엘 선지자는 모든 백성들에게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라”(3절)라고 강력하게 이방신들을 버리라고 외치고 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최상의 방법은 모든 백성들 중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모든 죄들을 먼저 제해야만 참된 회개가 될 수 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시는 더러운 죄들을 버리고 미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참된 회개는 이제까지 행했던 죄악 된 행실을 증오하고 그 모든 죄악 된 행실들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단절시키고 영원히 결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그 모든 악한 길에서 떠나 주님의 부르심과 성결케 하심에 기꺼이 응답하는 것이다.   둘째로 나의 삶의 방향을 여호와께로 향하는 것이다. 3절 말씀에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 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던 모든 죄악된 것들 이방신과 세상과 타협하고 저질렀던 창조질서들을 부정하고 인간들이 하나님의 지위를 탐했던 모든 부정, 부패, 비리, 구습과 관습, 전통, 적당주의, 불순종, 인본주의, 사치, 음란등등 지금 국난을 당한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은 미스바에 모여서 회개하며 부르짖으며 세상과 짝하며 적당하게 살며 자위했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회복되어야 할 신앙 양심 회복, 진리에의 절대순종, 신앙 인격 회복, 구원받은 자로서의 인격적인 행동, 사고, 실천,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셋째로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3절 말씀에서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 향하여 그만 섬기라”라고 외친다.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메시지이다. 백성들이 애굽의 고역에서 부르짖고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면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잊고 가나안의 신들을 함께 섬기고 혼인하고 그들의 풍습을 따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온갖 바알, 아세라 신들과 목석의 우상들을 섬기면서 영적으로 깊이 타락하게 되었다.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열방과 민족이 주를 찬양하여 주의 긍휼하심의 은혜가 이 땅을 덮어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는 세상을 만들어야만 한다. /예장 합동개혁측 총회장, 유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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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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