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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24:15~18)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수 24:15~18 )   신앙은 독자적입니다. 개인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 중요합니다. 강요할 수도 없으며 또 강요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의사에 의해서만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의 동생들은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조차 그 아들 예수를 이해함에 있어 그 차원을 달리한 것을 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여자여!’라고 한 것은 유대 나라의 풍습으로 어머니의 존칭입니다. 우리말로 한다면 ‘어머님!’하고 존대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내용에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시고 마태복음 12장 48~50절에 보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예수님은 분명한 선을 긋고 계십니다.   신앙은 연대성이 없으며 따라서 책임도 없습니다. 롯과 롯의 처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모두 나왔지만, 구원의 길에서 롯의 처는 제외되었습니다. “마지막에 이러한 때가 오리니 너희는 롯의 처를 기억하라.” 예수님께서 되새겨 주신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그대로 둔다, 두 사람이 자리에 누웠으나 하나만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둔다, 두 사람이 맷돌을 가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둔다는 말씀은 곧 구원과 신앙은 별개의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18장 20절에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밝히 말하고 있듯이 신앙은 독립적이며 결코 연대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으로 돌아오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5장 19절에 예수께 와서 크게 은혜받은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나를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큰일이 어떻게 네게 이루어졌는가를 네 가정 식구에게 알려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게 이루어진 이 큰일, 이 엄청난 감격을 내 가정, 내 식구에게 전해야 합니다. ‘인간 최악의 죄는 무관심’이라고 버나드 쇼는 말했습니다. 내가 이제 구원받아서 새 생명을 얻었는데 이 사실을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 나의 가장 사랑하는 남편에게 전하지 않고 어찌 나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세리장 삭개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를 향한 열정이 그를 뽕나무 위에 오르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뽕나무에 가까이 가셔서“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네가 나무에 오르는 그 열심도 좋지만 나와 오늘 네 집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잘 믿는 사람, 그는 자기 가정을 돌아보며 온 가정의 구원에 힘쓰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가정의 믿음에는 연대 책임이 있습니다. 등불을 켜서 온 집에 비추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는 더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가정에 무관심한 자,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이며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귀한 생명이며, 가장 위대한 구원이며,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기 때문에 책임 있게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은 분명한 약속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정에서 시작되고, 가정에서 자라가고, 가정에서 열매 맺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 분포도를 보면, 출석 교인 중 85% 이상이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설혹 중간에 쉴 수도 있고 해이해질 때도 있지만,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대부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남은 15%는 신앙과는 관계없는 생활 환경에서 나 혼자 믿음을 갖게 된 것인데, 이 경우에 완전한 믿음을 갖기까지 퍽 어려운 고비를 많이 겪는 것을 봅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은 가졌으면서도 그것을 소화하기에 시간이 걸리고 자기 마음의 갈등을 거쳐야 한다고 하면,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다고 하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유산인지 모릅니다. 참으로 큰 복입니다. 가정은 작은 천국입니다. 밀레의 유명한 「만종」은 오늘날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데, 거기에는 가정 행복의 세 요소가 모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일하는 즐거움, 함께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생활하는 즐거움,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의지하여 기도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값진 것입니다.   사랑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은 크리스천 생활 속에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믿음의 성장도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소망의 즐거움도 분명히 가정을 통해서이지만, 더욱 소중한 것은 사랑의 대화입니다. 집(house)과 가정(home)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집이란 부모, 자녀, 형제들이 하나의 삶을 위해 모여 있는 한 울타리라는 의미이지만, 가정이라 하면 그 속에 사랑의 대화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범적인 신앙의 가정은 몸이 하나요 마음도 하나요 신앙이 하나입니다. 그곳에 참된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여호수아는 말하기를, “지금 작정하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으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으니 오늘 택하라. 지금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다짐하십시오. 이스라엘 사람은 여호수아의 권면에 즉각 응답하여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하고 철저하게 스스로 자율적으로 결단했을 때 하나님 앞에 복 받는 이스라엘 민족 국가를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의한 신앙의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길만이 나와 내 집이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받는 길입니다.   “오늘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목사. 전 한국기독교부흥협 대표회장·한강교회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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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3
  • 별이 사라진 밤하늘 아래에서 하나님을 만나다(창세기 32:24-32)
      사람은 살아가면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쌓아두게 된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회고한다. 몸과 마음에 끊임없이 상처를 쌓아둔 세월이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에서 이러한 상처들은 시간적으로는 ‘밤’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에는 중요한 ‘밤을 맞이한 이야기’가 두 번 등장합니다. 한번은 형 에서의 추격을 피해 브엘세바로 향하던 야곱이 벧엘에서 밤을 지새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고향으로 되돌아오던 야곱이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적막한 광야에서 밤을 홀로 맞이하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이다.   고향으로 되돌아오고 있던 야곱은 자기의 형 에서가 두려워 먼저 사자를 보내어 상황을 살피게 한다. 그런데 이 사자들이 전해온 소식은 그다지 전망이 좋지 않았다. 불면의 밤을 보내던 야곱은 결국 한밤중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을 자신보다 앞서 먼저 보낸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창대한 복에 대한 약속을 자신의 것으로 움켜잡기 위해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야곱은 사막의 밤하늘 아래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지금, 홀로 고독하게 별이 사라져버린 밤하늘 아래 서 있다.   야곱의 인생에 등장하는 중요한 ‘밤을 맞이한 이야기’인 벧엘과 브니엘의 이야기는 사실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벧엘은 해가 지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되고, 브니엘에서는 해가 뜨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야곱은 그 이름의 뜻처럼 움켜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사람이었다. 움켜잡는 것을 위해서라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었다. 움켜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야곱은 자기자신을 지키기 위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움켜쥐기 위해 누군가와 항상 다투고, 누군가에게 위협을 주며, 누군가에게 위협을 느끼며 살아온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 32:24). 두려움과 번민에 사로잡혀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정체불명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밤’은 위협적인 것들이 출몰하는 시간이다. 알 수 없고 불확정적인 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밤’이라는 시간은 징조와 사실이 드러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깊은 밤하늘 아래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자신의 부질없는 몸부림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가 폭로된다. 이 이야기는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이야기가 아니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겨루어 이기는 인생을 살아왔지만 두려움 속에서 기나긴 밤을 홀로 지새우고 있는 야곱이라는 사람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다”(창 32:31)는 성경의 보도처럼 이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그의 인생을 밤을 지나 아침을 맞이한 인생으로 변화시킨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 모두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지만, 야곱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밤’은 고단하고 괴로운 시간이다. 하지만 ‘밤’은 모든 것들이 가려진 그 시간 속을 가로질러 거침없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이다. 그 밤하늘 아래에 여러분들이 만일 홀로 서 계신다면, 하늘에 펼쳐진 별들 가운데 두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기억하시길 바란다. /향기로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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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9
  • 위기의 풍랑을 만날 때(마가복음 4장 35절부터 41절)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상치 않은 위기를 만날 때가 있다. 전 세계는 지금 ‘코로나 19’라는 위기를 만났다. 사람들은 위기를 만나면 두려움과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인생의 어떤 위기를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이사야 41장 10절).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로 위기는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말씀을 마치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자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 예상치 않은 큰 광풍이 일어났다. 점점 풍랑이 심해지고, 배가 좌초될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와 같이 예상치 않는 때에 문제와 위기의 풍랑이 다가와서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위기가 있다고 해도, 그 위기 가운데 인생의 배에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에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위기의 풍랑을 우리와 함께 통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있었다. 예수님은 광풍이 불어서 배에 물이 들어오는데도 주무시고 계셨다. 예수님은 위기 가운데도 평안을 잃지 않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고 주무실 수가 있었을까? 예수님은 아무리 위기가 다가와도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자신을 돌보고 계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살았다(마태복음 11장 28절). 그러니 아무리 풍랑이 다가와도 평안하게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도 다가오는 위기를 하나님께 맡기고, 평안을 가지고 살아가자.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평안을 가지고 살아가자.   셋째로 다가오는 위기를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 예수님은 주무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시자마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바람을 꾸짖으셨다!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라고 외치셨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세차게 불던 바람이 그치고 갈릴리 바다가 아주 잔잔하게 된 것이다(마가복음 4장 39절). 예수님이 배에서 주무시고 있었던 이유는 피곤해서 배에서 주무시기도 했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그 순간에 제자들이 믿음으로 위기의 풍랑을 이기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권세를 주셨다. 믿는 사람에게 따르는 표적의 권세를 이미 제자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다를 향해 명하면 바다도 그들에게 순종할 것이다. 문제를 향하여 명령하고 대적하면 거센 풍랑이 있는 바다도 건너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생에 다가오는 위기의 파도가 잔잔해지고 위기의 광풍이 멈추게 된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 아뢰고 기도하고, 믿음으로 위기의 문제를 향하여 선포하고 외쳐야 한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마가복음 4장 35절)”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건너가자면 건너가지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이 주신 믿음의 권세를 가지고 어떤 풍랑의 위기가 다가와도 그 위기를 이기며 건너갈 것을 믿어야 한다.  /여의도순복음하남교회 담임목사, 하남시기독교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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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5
  •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라(다니엘 6장 10절부터 13절)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순서가 엉클러지면 어떻게 되는가?법의 순위가 어떻게 되는가? 수많은 법규들 중에서 사회질서유지 및 이해관계 규율을 위해 어떤 법을 우선적으로 적용해야 하는지, 법 내용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에는 어떤 법규를 먼저 해석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정한 순서와 법칙이 존재한다.    법 적용의 원칙은 상위법 우선의 원칙, 특별법 우선의 원칙, 신법우선의 원칙, 법률불소급의 원칙이 있다. 실정법상 상위의 법규는 하위의 법규에 우월하다는 상위법 우선의 원칙이 있다. 일반법과 특별법이 충돌할 때는 특별법 적용이 일반법에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특별법 우선의 원칙이 있으며, 법령이 새로 제정 또는 개정되어 법령 내용의 충돌이 생겼을 때는 신법이 구법에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신법 우선의 원칙이 있고,  새로 제정 또는 개정된 법률은 그 효력을 가지기 이전에 발생한 과거의 사실에 소급하여 적용할 수 없고 장래에 한하여 적용된다는 법률 불소급의 원칙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법 적용의 원칙은 어떻게 될까? 국가, 사회의 질서에 있어서 법 적용의 원칙이 있듯이 영적 생활도 이와 동일하다. 신앙생활, 영적 생활에도 법 적용의 원칙이 있다. 일상생활과 영적 생활과 상충될 때, 갈등 구조가 발생할 때, 이해관계의 대립이 있을 때, 어떤 법 적용을 할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 말씀으로 신앙의 행위와 본분에 유일의 최 상위 법칙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영적 상위법, 즉 최고단계의 법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곧 성경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법전이다. 이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정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정경을 확정하여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입에서 자신의 말씀을 내셨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만이 정경이 될 수 있다. 정경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앙생활에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바로 예배하는 일이다.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것이 상위법인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다. 원활한 교제, 소통을 나는 삶을 살았는데, 범죄한 아담과 하와로 인해 이 관계가 깨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관계 회복의 일을 하셔야 했다.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를 만들어 가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셨다.    본문의 스토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첫 번째로 생각할 것은 사람의 명령과 하나님의 명령이며,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사람의 의무와 하나님의 의무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일반적인 일과 특별한 일이다.   다니엘은 왕의 명령과 자신의 신앙 행위에 있어 무엇을 따랐는가? 다니엘은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 결과 사자 굴, 그 현장에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고, 기적을 행하셨다. 다니엘이 왕에게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라고 말한다. 이 같은 다니엘의 신앙행동은 생명을 내건 행동이었다.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더 귀히 여겼다. 다니엘은 무엇이 더 귀한 것이며,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  무엇이 더 가치 있는 일인지 알았기에 생명도 내놓은 신앙의 의지를 꺽지 않았다. 이것을 어리석다. 무모하다 할 수 있을까? 정말 멋지고 용기 있는 신앙이 아닐까?/동원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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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참 소망과 고난(벧전 1:3-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 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3-6).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시련인가, 축복인가?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성도가 육신의 생활의 삶을 살기 때문에 오는 고난이 있다. 회개하여 천국시민이 되었으나 아직은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서 살기때문에 다시 악의 세력으로 끌어내리려는 사탄의 시기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둘째, 성도가 성숙한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오는 고난(연단)이 있다. 성도로 하여금 더욱 성숙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으로서 고난이 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7-9).   셋째, 성도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스스로 받는 고난이 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1).   베드로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0-21).   요한 크리소스톰은 안디옥 태생의 교부로 주후 4- 5세기에 걸쳐 활약한 대 설교가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왕후 유독시아의 미움을 사 유배 길을 떠날 때에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말하였다.   그는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저가 내 목숨을 찾는다면 죽어 줄 것이니 이 생명은 주님이 주셨음이요, 저가 내 소유를 다 빼앗는다해도 불만이 없을 것은 본래 가지고 온 것이 없음이니라. 저가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같이 될 것이요, 구덩이에 던지면 예레미야같이 될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같이 될 것이요, 매로 때리면 사도 바울같이 되리라. 아무 두려움이 없도다.    내가 당하는 모든 사건, 모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높임을 받을 것이요, 나는 그 환난 중에 주시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니라!” /강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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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큰 복 받는 신앙인의 감사(눅17:11-19)
      유월절 7주 후에 지키는 칠칠절, 오순절. 첫 열매를 거둔다 하여 초실절(출34:22),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열매를 수확한 것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가르치기 위해 주신 명령이다. 오순절은 애굽에서 나온지 50일째 되는 날이기에 명명했고,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날(출19:16)이다. 그 날에 법을 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새롭게 출범하는 특별한 의미이다. 또 신약에서는 오순절에 성령을 주심으로 초대교회가 탄생했다.   맥추절이 가나안 땅에 첫 열매를 거둔 것,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나라의 신령한 첫 열매를 거둔 영적 추수와 같다. 오순절에 성령을 주심으로 예수 안에서 교회가 탄생하고 중생한 영적 열매를 주의 창고인 교회에 끌어들이는 영혼 추수이고, 맥추감사절을 통해 넘치는 감사의 축복, 축원이다.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행복지수를 높여 행복한 삶을 살게 한다. 성도들은 불신자들보다 더 행복지수가 높아야 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로(갈5:22-23)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모두에게 풍성하게 베풀며 사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행복할 수 있음은 죄 사함 받고 영생의 보장을 주님께로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님은 죄로 인해 고통가운데 지친 우리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셔서 삶을 풍성하고 행복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세상에 오셨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지금 이 모습 이대로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다” 감사한 만큼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행복은 소유에 정비례하기 보다는 감사에 정비례한다. 감사한 만큼 삶은 풍요롭고 행복, 감사 생활을 풍성하게 하므로 가장 복된 인생, 또한 감사는 성공과 승리의 삶을 보장해준다. 인생의 성공, 승리에 있어서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 아무리 절망적인 현실에 부딪쳐도 그 사실(사건)에 대해서 즉, 그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며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인데 감사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사할 수도 있고 불평할 수도 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2:14)   감사 생활에 풍성하고 적극적이 되어 인생을 성공하며 복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 감사조건을 찾아서 하라. 감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하며 찾아야 한다. “나의 주된 인생관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연습하는 것이다. 감사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되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표현하라.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11:17)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고 구속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감사 기도를 드리므로 찬양함으로 예물로...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사하는 감사를 베풀고 풍성하게 표현하므로 큰 복을 받고 성공적인 성도로 새로워지기를 축원한다. /유향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7-30
  • 나사로가 보여준 신앙(요11:35-40)
      신앙이란 말을 가장 의미 있게 표현해주는 단어는 무엇일까? 일단은 사랑 신뢰 의지 순종 충성 헌신 전심 등과 같은 말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본문의 나사로는 우리에게 신앙이란 곧 주님과의 진한 우정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성경엔 나사로라 이름하는 사람이 둘이 나온다. 하나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요,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다. 이 중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은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이 생각하는 기적의 통념을 깨고 나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만 천하에 증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사건은 시간상으로는 유대인의 최고 명절인 유월절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고, 거리상으로는 예루살렘을 지척에 둔 베다니 마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영적인 것과 천국과 기적을 믿지 않는 제사장(사두개인) 그룹에게는 매우 곤혹스런 사건이었다. 당시 제사장들이 벌이던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전횡과 수탈은 대다수의 유대 민중들에게 큰 분노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나사로의 부활사건은 사두개인들의 불안한 리더십에 치명타를 가하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제사장(산헤드린 공의회의 사두개파 그룹)들은 예수님 살해계획을 세우게 된다. (요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결국 가룟유다가 그들의 음모에 희생양이 되어서 예수님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팔아 넘겼고, 그 이후에 예수님의 사형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유월절 직전에 제사장들은 저들의 악한 뜻을 이룰 수가 있었다.      남아있는 역사기록에 의하면 제사장들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제거해서 우환의 싹을 제거하려고 했는데, 이런 첩보를 입수한 나사로는 급히 구브로(현, 키프러스) 섬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     사실 나사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오해를 받아 온 인물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나 사랑하시고 나흘 만에 부활시켜주기까지 하셨는데, 그렇게 큰 은총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이 그 참담한 고난을 당하고 비참하게 죽는 동안에 코빼기 하나 안 보였냐는 것이다. 적어도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라고, 잘못한 게 없는 분이라고 군중들 앞을 막아서며 변호라도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나사로가 처했던 전후사정을 모른다면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이겠지만, 그러나 나사로는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임을 증거 해주는 몇 안 되는 핵심증인이었기 때문에 그에겐 우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유대 땅을 떠나서 가장 가까운 지중해 섬인 구브로(현, 키프러스)로 피신한 나사로는 남부의 라나카 지역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평생동안 주님을 증거하며 복음사역에 충성하다가 그 역시도 주님의 뒤를 따라 순교자가 되었다. 이러한 나사로의 행적은 라나카에 있는 나사로 기념교회에 생생히 보존되어 있다. 교회 지하에 있는 무덤엔 나사로의 석관이 있는데, 흉하게 부수어진 관뚜껑은 죽어서까지 고난을 당하던 나사로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의 험난했던 사역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의 석관 옆면에 새겨진 글귀다. 거기엔 헬라어 대문자로 ‘필리오이’(나의 친구라)라고 쓰여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나의 친구라’는 말을 들었던 인물은 나사로가 유일했으며, 그래서 나사로는 이 말씀을 평생의 자랑으로 축복으로 생각하면서, 그도 또한 예수님에게 신실한 친구가 되려고 죽기까지 노력했던 것이다.      이런 나사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신앙의 의미는 ‘주님과의 우정’이다. 친구 사이의 우정은 때로 가족이나 부부관계도 넘어서는 숭고함이 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우정과 사랑을 잊지 않고서 끝까지 의리를 지킨 나사로의 삶은 오늘날 줏대 없이 흔들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교훈과 깨우침을 주고 있다. 신앙은 우정이다. 내 친구되신 우리 주님과의 뜨거운 우정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휘경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7-12
  • 울게 하소서!(요엘 2장 17절)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은 1959년 총회에서 WCC 가입 문제를 놓고 갈등하였을 때, 오직 순혈적인 보수신학 하나 지키려고 분리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교단의 적통성과 법통성은 우리가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단의 선진들은 현실적으로는 허허벌판 황무지로 나와야 했다. 그리하여 나무 한 그루 살지 않고, 풀 한 포기 살지 않는 허허벌판 광야 같은 곳에서 기도의 눈물을 뿌리며 교단을 일구었다. 전국의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기도의 제물을 바치며 총신대를 세우고 총회회관을 세워서 오늘날 한국의 장자교단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장로교단을 이룬 것이다.   우리는 선진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헌신과 기도의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 신명기 32장 7절에서도 역대의 연대를 기억하라고 하지 않는가? 역사가 토인비 역시 「역사의 연구」에서 “한 민족이나 국가를 망하게 하려면 그 역사를 먼저 지워버리라”고 했다. 그만큼 지나온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어느 때부턴가 교단이 희생과 헌신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기도와 영성 운동보다는 정치가 앞서게 되고, 교조적인 교단이 되어 갔다. 그 결과 교권 싸움을 하며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 사랑과 처음 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격을 잃어버리니까 하나님을 등지며 예배가 타성화되고 신앙이 매너리즘에 빠져 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더러운 떡을 제단에다 올려놓고 병든 것과 눈멀고 다리 저는 짐승을 제사의 제물로 드린 것이다(말 1:7).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누군가 성전 문을 닫아버리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겠는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필자는 코로나 상황에서 이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였습니다. “혹시 코로나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이렇게 비난받고 문이 닫혀 버린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격, 예배를 향한 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닌가. 하나님은 이런 매너리즘에 빠진 예배가 역겨워서 누군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것은 아닌가”.   코로나19 팬데믹은 끝이 안 보이고, 우리가 노력하면 할수록 예배 회복의 길은 더 멀어지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우리가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 요엘서 2장을 보면 제사장들이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기도하지 않았는가?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욜 2:17)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밖에 없다. 우리가 먼저 울어야 한다.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운다는 말은 강단에서 운다는 말이다. 우리가 강단에 엎드려 울어야 한다. 지금 이렇게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우리의 잘못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를 위해서 눈물을 훔치는 기도를 하자. 그리고 우리는 교단 선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제105회 총회에서 허락을 받고 전국목사장로기도회 때 총회공로훈장 수여식을 하게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총회장, 새에덴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7-11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모습(로마서 7:21-23)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우리의 의를 자랑하는 것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않다. 우리 의는 우리의 구원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죄인인 우리가 우리를 무엇인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직 구원의 길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히 만물의 왕 되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그리고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선물하신 신앙이고, 믿음이다. 그곳에 우리의 의, 힘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함으로 지키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마음과도 반대가 되는 우리의 판단하는 행동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고난의 아이콘인 욥의 이야기가 있다. 사단은 하나님께 허락을 구하고 욥을 시험한다. 그로 인해 욥은 아프고, 친구들이 떠나고, 가족들이 떠나고, 주변 환경이 점점 더 극한으로 어려움에 달했다. 그 때, 고통스러운 상황이 너무 서운한 나머지 그들이 자신을 번뇌케 하고 열 번이나 학대 했다고 대놓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욥을 종이라 표현하시면서 제사장으로서의 고귀한 임무를 부여하셨다.(욥 42:7~10) 그것은 자신을 괴롭히고, 아프게 했던 친구들에 대한 화해와 용서, 바로 사랑이다.   그 때 욥은 너무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순종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한 용서였다.    우리가 욥같이 용서를 행할 때 우리를 기쁘시게 받으실 줄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대한 우리의 순종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한 사람도 받으실 것이다. 용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육체적 고난과 정신적 모멸감을 항상 생각해 보자. 십자가의 그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희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내 삶의 주인이 마치 나인 것처럼 해서는 것은 안 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명,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그 십자가에서 처절히 죽임을 당하셨다. 그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예수님처럼 매사에 순교적인 자세로 살아야 한다.   어머니 마리아가 손수 짜서 입혀드린 세마포 옷을 군병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을 때, 수많은 군중 앞에 알몸이 되셔서 수치를 당하실 때를 생각하면 무엇이든지 이겨내실 수 있다. 주님은 자신의 본질을 희롱당하는 고통도 감내하셨다.   우리는 주님이 고통가운데 보여주신 사랑과 고통을 이겨내시는 모습을 통해 세상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품고 용서하고 사랑을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 때 그 빛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될 줄 확신한다. /샘터마을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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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1-07-02
  • 레위 지파의 헌신 성경(민 1:47~54)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년 이월일일에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남자를 계수하게 한다(민 1:1~3). 이는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생활 곧 교회생활이 악한 영들과의 전쟁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앙은 영적 전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라 고 말씀한다. 레위는 ‘연합된 (자)’를 의미하며 족장 야곱과 그의 아내 레아 사이의 셋째 아들(창 29:34)로, 이스라엘 중 그의 이름을 지니는 지파의 창시자이다. 레위는 형 시므온과 연합하여 누이동생의 치욕을 갚기 위해 세겜 성에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제 삼일에 고통 할 때에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와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칼로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왔다(창 34:24 이하). 그리고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로 양과 소와 나귀와 들에 있는 것들과 세겜 성의 그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했다(창 34:27 이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야곱은 죽기 전에 시므온과 레위에게 그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중에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5~7).   이렇게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저주 받은 레위 지파를 하나님은 계수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출 32:8~9).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5~29).   오늘 설교 제목은 레위지파의 헌신이다. 바로 이 헌신 때문에 계수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 편에 서있었다. 이 헌신이 저주를 축복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들의 흩어짐은 온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하는 경우가 되었다. 레위의 자손들은 성전을 섬기는 자가 되었으며 제사장 직무를 맡았다(출 2:1 이하, 6:20; 신 33:8~11).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택하여 모든 가정의 장자를 대신하는 당신의 기업으로 삼으신 것이다(민 3:11~13).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헌신이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헌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좋은교회 담임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1-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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