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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기와 우연이 있는 인생(전도서 9장 11절)
    전도서 9장 11절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시기’는 성경에 ‘에트’라고 하며, 이는 ‘어두움의 시간’을 말한다. ‘우연’은 성경에 ‘페가’라고 하며, 이는 ‘충돌’을 말한다. 인생에 있어서 어둠 속에서의 충돌을 말씀한 것인데, 둘 다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서 사람은 누구도 자기가 이것을 주관치 못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전도서 9장 12절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데 이 세상은 사람의 힘보다 월등한 ‘큰 임금’이 있어서 이 죄인 된 세상에 매우 견고한 ‘흉벽’을 쌓아 놓은 것을 말씀하셨다.   전도서 9장 14절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라고 기록됐다. ‘흉벽’이란, 성경에 ‘마쪼드’라 하며 이는 ‘짐승’을 잡기 위해 펼쳐 놓은 ‘그물’이란 것과, 전쟁에서 사용하는 군수용의 뜻도 있어서 그 견고함이 매우 강하다. 그 누구도 이 흉벽에 잡히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 이때에 성읍의 한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이 성읍을 구했으나, 이 사람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   전도서 9장 15절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라고 기록됐는데 이 멸망당할 성읍을 구한 가난한 지혜자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고 자기의 공의를 베푸시사 우리를 자녀삼아 그 멸망의 흉벽과 상관없게 해 주신 것이다.   2021년 올해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분들이 이 불행한 흉벽에서 자유하고, 시기와 우연이, 어둠 속에서의 충돌이 없는 행복한 인생을 사는 이들이 많기를 바란다.   전도서 9장 16절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절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참된 지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동안 사람들 사이를 거니시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시어 많은 이들에게 변화를 이끌어내셨지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같이 사회적인 입지가 공고한 이들에겐 변화가 미미한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 예수의 말씀은 빈자의 지혜로 들릴 수밖에 없었으며 그렇기에 스스로 참된 지혜자의 말을 듣지 못한 채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호통을 치는 우매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세상적 가치로 말씀을 판단하지 않고 참된 지혜를 전하는 지혜자로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마태복음 16장 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요한복음 8장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대한예수교오순절성회 총회장·만수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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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14
  • 익숙함에서 탈출하라 (요한복음 2장 13~17절)
      심리학 용어 중에 ‘지식의 저주’가 있다. 지식의 저주란, 내가 알고 있는 바를 전하면 상대방도 100% 이해할 거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태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심리학 박사인 엘리자베스 뉴튼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의 저주는 누구도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불행하게도 모든 이가 가지고 있다.” ‘지식의 저주’는 한마디로 익숙함에서 온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익숙한 것이 남에게도 익숙할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낯섦과 익숙함이 교차한다. 낯섦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함으로 변한다. 낯설었던 것이 익숙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도자기 만드는 것을 처음배우는 사람에게 도자기를 빚고 굽는 모든 것은 낯설다. 시간이 지나 도자기 만드는 실력이 늘어서 처음 가졌던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맛은 어떤 맛일까? 어머니의 손맛 아닐까? 그런데 과연 어머니가 해준 것이 제일 맛날까? 물론 음식을 정말 잘하시는 어머니셨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손맛이 최고의 맛으로 느끼는 것은 익숙함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해준 음식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편안함을 준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 하지만 익숙함은 우리를 나태하게 만든다. 안일주의에 빠지게 한다. 안주하게 한다.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을 잊어버린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가 없어서 채찍을 들고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양과 소를 다 성전에서 쫓아내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과 상을 엎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치셨다. 예수님은 잘못된 줄 알면서도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익숙함에서 탈출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변화하기 위해서다. 성장하기 위해서다. 익숙함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 성장할 수 없다.   부산 수영로교회 이규현목사는 〈그대 느려도 좋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겨운 나를 만나고 쉽지 않다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나를 새롭게 하려면 나를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익숙한 나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밀어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을 두려워하는 나를 이겨야 한다. 새로운 세포가 생성되지 않는 생명은 이미 죽은 것과 같다”   이규현목사는 나를 새롭게 하려면 나를 낯설게 만들라고 한다. 익숙한 나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밀어내라고 한다. 익숙함과 결별을 두려워하는 나를 이겨야 한다고 말한다. 변화되기를 원하는가? 성장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익숙함과 결별해야 한다. 익숙함에서 탈출해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익숙함에서 탈출해야 한다. 신앙에는 됐다가 있어서는 안 된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그냥 탈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에다 믿음이 더해져야 한다. 데일 카네기는 이런 말을 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내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가만 들고 있으면 바람개비는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바람개비를 잡고 달리면 그 속에 바람이 일어나 바람개비는 돌아가게 된다. 익숙함을 탈출하는 것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을 써야 한다. 가만히 있는 다고 익숙함을 탈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개비를 잡고 달려가는 용기를 내야 한다. 믿음의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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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23
  • ‘없음’이 아니라 ‘있음’에 주목하라(사도행전 3장 1~10절)
      이 세상에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이에 반해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도 사람이 있다. 사람이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비교의식 때문이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부모나 형제나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결국 열등감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에 주목하면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에게 있는 것을 주목하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자오스린의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 보면 이런 글귀가 있다. “왜 항상 행복하지 않을까? 우리가 바라는 것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행복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오스린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정곡을 찌르고 있다. 자오스린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남보다 행복해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베드로와 요한은 정해진 기도시간인 제 구시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다. 이들은 본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지체장애인은 한 푼 얻을까하여 구걸했다. 베드로는 지체장애인에게 자신을 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사도행전 3장 6절)   베드로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것을 생각했다. 주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생각했다.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은 없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의 이름’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가장 큰 능력이다. 세상 사람들은 은금이 능력이라고 말한다. 권력이 능력이라고 말한다. 지식이 능력이라고 말한다. 세상이 말하는 능력으로는 한 번도 걸어 보지 못한 장애인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장애인을 일으켜 세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내게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생각할 때 많다. 하나님 앞에 없는 것을 핑계 되며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는 온갖 핑계를 다 되면서 응할 수 없다고 한다. 보낼만한 자라를 보내라고 한다.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애굽기 4장 2절)고 물으신다. 모세의 손에는 양을 치던 지팡이가 있었다.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신다.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니 뱀이 되었다. 모세가 다시 뱀의 꼬리를 잡았을 때 뱀은 지팡이로 변했다. 모세는 자신의 ‘없음’을 핑계 삼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있는 것을 사용하였다.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들린 것은 양을 치는 지팡이였다.    코로나 19로 인해 온 세계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가운데 우리는 ‘없음’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없는 것 빼고 다 가진 사람이다. 있는 것 빼고 다 없는 사람이다. 어디를 주목하느냐는 우리의 몫이다. ‘없음’에 주목하면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다. 좌절하게 된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건강이 약한데 건강에만 집착하면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주목해야 한다. ‘있음’에 주목하면 만족할 수 있다. 감사할 수 있다. ‘없음’이 아니라 ‘있음’에 주목하기를 축복한다./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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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9
  •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 - 디도서 1장 12~16절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악한 사람들은 마치 디도서에 기록된 그레데인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레데인 선지자는 자기 동족에 대해서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로 살고 있고, 악한 짐승처럼 잔인하게 살고 있으며, 성실하게 일하기보다는 자기 배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레데인들의 삶의 모습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이 시대 악한 사람들의 삶 가운데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지금 세상은 악한 거짓말쟁이들이 뿌리는 가짜뉴스로 인해서 혼란 가운데 있다. 거짓말쟁이는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상대에게 그것을 사실로 알도록 왜곡하는 사람이다. 오늘 스마트폰 영상시대가 도래하면서 누구라도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쉽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기회가 공공의 선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활용되면 참 좋을 텐데, 자신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얻기 위한 악의적인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어 문제이다. 우리는 진짜뉴스와 가짜뉴스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가짜뉴스인데도 진짜처럼 미화되고, 진짜뉴스인데도 가짜처럼 왜곡하기 때문이다. 진짜뉴스를 가려내려는 진실함의 열정보다 자신의 이익과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가 기준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가짜뉴스가 진짜뉴스를 가짜뉴스라고 주장하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삶의 최선이라 여기는 사람들로 인해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고난의 심연 가운데 있다. 밀림의 야수들은 자기보다 약한 동물들을 잡아먹고 생존하지만,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를 않는다. 배가 고프면 잡아먹고, 배가 부르면 더 잡겠다는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야수들은 나중에 배가 고플 것을 대비해서 미리 잡아놓는 법이 없다. 그런데 약육강식의 경쟁에 익숙한 사람들은 먹고사는 충분한 환경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비축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으니 악한 짐승보다 더 잔인한 셈이다.   바울은 그레데인들의 실상을 증언한 그레데인 선지자의 말이 참되다고 말하면서, 디도에게 악한 사람들을 엄히 꾸짖으라고 충고하고 있다. 만일 디도가 그레데인처럼 악하게 살고 있었다면, 바울이 디도에게 악한 사람들을 꾸짖으라고 했을까? 디도의 악이 악한 사람들의 악과 별 차이가 없었다면, 아니 디도의 악이 오히려 더 컸다고 하면, 바울은 디도를 먼저 꾸짖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디도는 분명 악한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디도에게 악한 사람들을 단단히 꾸짖으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과연 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의 말씀으로 받으려면, 우리는 분명 세상의 악한 사람들과 차별화된 삶을 살고 있어야 할 텐데, 그리 자신 없는 것이 우리의 부끄러움이다. 저는 이 말씀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대한다.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인정에 머물지 않는다. 믿음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때문에 모든 인간은 서로 형제자매라는 것, 때문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형제자매인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책임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이때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분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연세의료원 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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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0-10-27
  •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자 - 창세기 37장 1~11절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냉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 일세 악을 선케 만들고 모든 소망 채우는 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 오래 참았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위해 저희들 오래 참고 있었네”(찬송가 373장)   세상 모든 사람들은 너나없이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그 대상이 누구든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와 자부심의 근거와 존재 의미를 느끼게 되며 자랑스럽고 보람된 삶을 살게 된다.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교인들입니다. 죄인으로 목적도 정함도 없이 정처 없이 살다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는 하루살이 같고 벌레 같은 우리를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천국의 후사가 되게 하셨으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을 어디서 찾아보겠는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받을 수 있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들 이어야 하느냐 하면…… 믿음의 선진 요셉의 생애를 통해 은혜되기를 소원한다.   첫째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어야 한다. 야곱의 아들로 태어난 요셉은 어려서부터 형들의 시기와 질투의 희생물이 되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서 13년 동안이나 주인에게 충성하고 주인의 신뢰를 얻어 집안 전체의 살림을 도맡아 관리하는 가정 총무가 되었다. 그러던 중 주인마님의 유혹을 받았으나 뿌리치고 오히려 억울하게 성폭행범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사랑하셔서 고난 가운데서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돌보셨다. 이처럼 요셉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그가 고난 속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난을 당할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지켰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인들도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말씀에 근거한 믿음을 끝까지 굳건히 지켜나가면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로마서 4장 5절, 히브리서 11장 5절).   둘째 믿음으로 행함의 사람이어야 한다. 요셉은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그의 말씀대로 살기에 힘썼던 사람이었다. 그는 육체의 정욕과 물질의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강한 유혹을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결코 범죄 하지 않겠다는 굳센 믿음으로 죄에 빠지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의롭게 사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요셉의 믿음을 행함으로 지키는 것을 보시고 그를 사랑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교인들도 말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신명기 6장 2절, 야고보서 2장 25~26절).   셋째 믿음으로 복음전파의 사람이어야 한다. 요셉은 믿음과 행함을 통해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항상 그와 함께하심을 나타냈다. 요셉은 옥에 갇힌 죄수들에게나 심지어 지엄한 바로 왕 앞에서도 권능의 하나님을 전하고자 하는 요셉을 사랑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땅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어지는 기회를 살려 복음을 전하는 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로마서 10장 15절, 고린도전서 9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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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5
  • 절망은 희망의 시작이다 - 고린도후서 1장 8~11절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마침내 아들이 사막 한가운데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아들아! 힘을 내거라. 머지않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다시금 길을 갔다. 이게 웬일인가? 사막 한가운데 무덤이 있는 게 아닌가? 그걸 보자 아들은 절망 가운데 주저앉았다. “보세요, 아버지! 이 사람도 우리처럼 가다가 죽은 거예요. 가다 죽으나 여기서 앉아 죽으나 마찬가지예요.”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을 이렇게 격려했다. “아들아, 여기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동네가 멀지 않았다는 증거란다. 힘을 내거라” 결국 아버지 말씀대로 마을이 나타났고, 거기서 안식을 취하게 되었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사막의 무덤’과 같은 혹독한 시련을 만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사막의 무덤’ 가운데서 아버지처럼 희망을 발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들처럼 절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막의 무덤’을 만날 때 절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절망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도 할 때가 있다. 코로나19라는 상황이 많은 사람들을 절망 가운데 몰아넣고 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가운데 큰 어려움을 만났을 때 절망을 하는 것일까?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려운 상황이 계속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은 무수한 끝에서 시작을 반복하는 여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끝은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또 다른 출발점이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끝이라고 하시기 전 까지는 아직 끝이 아니다. 우리의 끝은 또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희망의 시작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린도후서 1장 8~9절)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바울에게 왜 하나님은 이런 환난을 주시는 것일까? 왜 이런 절망을 주시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희망 시작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절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무능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계 앞에 절망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절망은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한다. 자신의 무능함이 증명되었다면 그 무능함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출발한다. 하나님의 향한 믿음의 출발이 희망의 시작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절망은 희망의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사람도 있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사람들은 절망 속에 희망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포자기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 믿는다고 할지라도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절망이 절망으로 끝날 수도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고 했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바로 절망이다. 사단은 끊임없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절망하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 시작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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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6
  • 코로나 극복을 위해 힘써 기도하자 - 사무엘하 24장 18~25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 사회는 지금 전례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확진자 한 사람을 치료하는데 거의 5천만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여기에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해 수많은 의료인들이 고생과 수고를 다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비용과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는 삼복더위에도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한다. 지하철에서도 거리에서도 마스크는 이제 일상이 돼버렸다.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이렇게 우리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부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다. 다윗왕이 이스라엘의 인수조사를 실시했다.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면에서 본다면 인구조사는 통치의 기본이다. 정확한 인구를 알아야 군인도 뽑고, 세금도 부과할 수 있는 것이다.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했는데,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다. 그런데 영적인 면에서 보자면 다윗왕의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불신하는 조치였다. 다윗은 스스로 이를 깨달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셨다. 결국 전염병이 내려졌고, 죽은 자가 7만이나 되었다. 방역이나 소독의 개념이 없었던 고대시대에 전염병은 많은 사람에게 혹독한 공포의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전염병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무서운 재앙이다. 전염병이 발생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어떻게 했냐는 것이다. 다윗은 선지가 갓이 명한대로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 성경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25절)고 기록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전 세계적 재앙 앞에서 우리는 다윗과 같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기도하기에 힘써야 한다. 먼저 방역의 최전선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는 의료진을 위해 기도하자.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도 전신 방역복을 입고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의 노력에 우리는 정말 감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을 위해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고 응원해야 한다. 병원과 의료체계는 일반은총의 영역이다. 하나님은 국가와 정치시스템을 통해 사회를 통치하게 하신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서 국가와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병원과 의료시스템을 통해서 병을 막고 사회와 개인의 건상을 유지하게 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병에 걸렸을 때 기도하면서 병원에 가 치료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최전선에서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한국교회를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일부 교회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길 위해 기도해야 한다. 어떤 교회처럼 국가의 방역체계에 도전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전도의 문이 닫히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방역에 최선을 다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기도하면서 행동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지는 것이다. 힘을 다해 코로나 극복을 위해 기도하자. /목포서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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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1
  • 영적지도자는 단순해야 한다 - 창세기 14장 1~16절
      삶이 단순해야 한다. 삶에서 가장 단순해야 할 것은 생각이다. 생각이 단순해야 삶이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삶의 시작은 지금이다. 곧 지금을 말하는 오늘 하루다.   생각이 단순해야 한다. 삶이 단순해야 한다. 하루가 단순해야 한다. 무엇보다 단순해야 할 것은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이 단순할 때 하나님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럼 단순한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단순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만을 사랑해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단순함이 답이다. 단순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복잡해지는 순간 세상에 눈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삶이 단순하다.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 왕 등, 네 왕에게 잡혀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카 롯을 구하려 전쟁터로 갔다. 아브라함이 단순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롯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사람은 때론 바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바보가 아니다. 사랑의 마음이 클 뿐이다. 사랑하면 단순해진다. 한 사람만 본다. 사랑할까와 사랑하지 말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래! 사랑하자’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아내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결혼하기로 결정했는데 진짜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 남자에게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나가를 고민했다. 그 때 깨달았다. 복잡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복잡하다는 것은 갈등이 시작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갈등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답 대신 혼란만 가중된다.   삶은 단순해야 한다. 신앙생활도 단순해야 한다. 단순할 때 답을 찾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통일 왕국을 세운 다윗 왕도 단순했다. 자신에게 문제가 발생하자 단순하게 하나님만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만 찾았다. 단순한 사람이 다윗이 한 고백이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편 16편 1절)   지진이 발생하면 단순해진다. 살길만 찾았다. 난생처음 오사카 전철역에서 지진을 경험했다. 그때 사람들 행동은 단순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건물 밖으로 뛰었다. 나도 따라 뛰었다. 살기 위해 단순해졌다.   불이 나도 마찬가지다. 불난 곳에서 피해야 한다. 불이 없는 곳으로 뛰어야 한다. ‘코로나19’로 전염에 취약해졌다. 전염에 강해지려면 단순해야 한다.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한다. 마스크를 쓸까 말까를 고민하면 안 된다.   가장 단순해야 할 사람은 영적 지도자다. 예수님, 아브라함과 바울과 같은 영적 지도자는 단순하다. 그들이 단순한 것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단순함이다.   영적 지도자인 아브라함이 롯을 살리는 것에 단순했다. 예수님도 하나님 사랑하는 것에 단순했다. 십자가의 죽음을 망설임 없이 택했다. 바울도 하나님을 위한 헌신에 단순했다. 하나님을 위해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장 31절)고 했다.   찰스 두히그는 〈1등의 습관〉에서 ‘탁월한 팀들의 공통점’을 이야기한다. 훌륭한 팀을 만드는 것은 팀원이 아니라 ‘규범’이란 것이다. 훌륭한 팀은 규범이 있듯이, 영적 지도자는 지침서가 있어야 한다. 그 지침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 한 분으로 단순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으로 단순해야 한다. 하나님과 연결통로인 말씀으로 단순해야 한다. 단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순하게 사랑하신다. 오늘 하루의 삶, 단순하게 살았는가란 질문에 ‘예!’ 라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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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1
  • 헤세드 : 하나님의 사랑 - 로마서 8장 28절
      8월 15일 0시를 기준으로 전 세계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는 약 1,174만 명, 사망자는 54만 명을 넘었다. 우리나라도 코로나의 재확산이 심상치 않다. 여러 나라에서 이미 예를 갖춘 경건한 장례식은 옛일이 되었다. 생명의 허망함과 덧없음이 무겁게 공기를 짓누른다. 지금은 슬픔과 불안과 상실의 시대이다. 기도만 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명령만 하시면 고통이 간단히 사라질 수 있다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것은[코로나바이러스는] 어느 날... 기적처럼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요행을 바라는 것 같다. 순진한 신앙이다. 하지만 성서의 신앙은 맹목적 확신이 아니다. 막연한 기대도 아니다. 한결같은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께서 모든 고통과 악 속에서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내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이다. 본문 말씀과 같이 하나의 주술로 오해되는 구절도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고 말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은 바울이 처음 한 말이 아니다.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스토아 철학 사상가인 플루타르코스의 말이다. 그가 이 말을 처음 했을 때 그 안에는 기계적 낙관주의가 숨어 있었다. 이 말은 본래 스토아 철학가들이 세상의 악을 설명하려고 고안한 말이다. 즉 세상의 모든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또 개개인의 좋아함이나 싫어함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이성’의 작용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불행이나 악도 결국은 보편적으로 선한 명분에 봉사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운명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바울이 반대했다. 바울은 만물 속에서 역사하면서 선한 결과를 지향하는 존재는 보편적 이성이라는 우주적 원리도 아니고 운명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구절에서 참 주어는 ‘모든 것’(panta)이 아니다. ‘합력하다’(synergei)라는 동사의 주어는 하나님이다. ‘모든 것’은 오히려 목적어이다. 이 구절의 올바른 해석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 속에 역사하여 선을 이루어가신다’이다. 세상 사물과 일들이 이렇게 저렇게 서로 조화를 이루어 요행히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의 섭리와 의지 속에서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오늘 부른 개회 찬송가 66장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독일 개신교인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 중의 하나인 좥다 감사드리세좦는 유럽의 30년 전쟁(1618~1648) 중에 마르틴 린카르트목사가 기도 시로 작사한 것이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워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여기서 말하는 ‘옛날부터 주신 복, 이제와 영원히 선물로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이 바로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 헤세드이다. 이제는 변치 않으시는 주 하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말로 할 수 없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다. 우리의 소망은 다른 구원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 있다.  /이화대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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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1
  • 이 시대 쓰임을 받으라 - 사도행전 3장 1~10절
      21세기는 영성이 강한 자를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하늘의 능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성령 충만하면 말에도, 찬양에도, 기도에도, 사역에도 능력이 나타난다. 오늘 이 시간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큰 능력이 흘러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오늘 우리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을 본다. 그는 40여년을 한 번도 일어나 걸어보지 못했다. 나면서부터 서서 걷지 못하는 사람(사도행전 3장 2~3절)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래서 그는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의 표본이다. 서서 걷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다. 노동력이 없으므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다. 그래서 구걸하고 있다. 그에게서는 희망, 기쁨, 은혜, 사랑, 기적, 같은 단어를 떠올릴 수가 없다. 그는 누구에게도 쓰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사도행전 3장 6~7절). 누가 40여 년간 한 번도 서지 못하는, 누가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쳤는가? 베드로와 요한인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도구였고, 그를 일으켜 세워 뛰고 달리게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만이 문제의 해답이시고, 예수님만이 우리를 쓰임 받는 존재로 바꾸신다. 예수님은 죄가 많아 쓰임 받지 못하던 수가성 여인을 크게 쓰임 받는 전도자로 세우셨고, 이스라엘 백성의 미움의 대상이었던 삭개오를 귀히 쓰임 받는 사람으로 바꾸셨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인 무디는 가난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아 성경을 읽기도 힘들었고, 말도 어눌한 구두 수선공이었다. 그런 그가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크게 쓰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람들에게 짐만 되었던 40년 된 병자를 예수님은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꾸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 베드로와 요한은 어부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쓰임 받는 사람으로 만드셨다.   로렌 커닝 햄 박사는 1971년 국제 전도단의 설립자이다. 그런데 그가 21세기에는 한국을 쓰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한국에 왔다. 한국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한국 기독교 인구가 겨우 250 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였다. 경제적인 어려운 나라가 어떻게 세계 선교를 감당할 수 있을까? 1996년 25년만에 다시 한국에 와서 놀랐다. 경제적인 발전과 일천만 기독교인들은 세계선교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역사의 소망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나 자신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다른 이들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천문학자들은 높은 언덕에 있어도 하늘에 그의 시선이 있다. 항해사는 바다에서 항구에 그의 시선이 있다. 천국을 향해가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우리 믿음의 주인이시요, 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   한 사람이 바뀌면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 사람인 내가 변하면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세상이 변한다. 우리도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심으로써 변화되어 가정, 직장, 사회,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쓰임 받는 사람으로 영광돌리시기 바란다./파주시교회시협의회 회장, 파주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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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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