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2-05(목)

교회/목회
Home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실시간뉴스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성경의 잣대란 무엇인가
      창세기 1장은 성경 육십육권의 잣대다. 창세기 1장을 열지 못하면 성경은 열리지 않는다. 또한 창세기 1장의 내용은 비유와 상징이다. 문자 그대로 읽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한 데도 문자 그대로 읽고 현상의 천지만물로 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는 천지만물을 창조한 6일이 아니라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를 통하여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의 의도하신 계획대로 양육하는 과정이다. 사람의 마음 땅을 계몽하고 개간해 나가므로 하늘들과 하나로 결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 첫째에서 여섯째 시기는 하나님의 잣대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본체이다. 이 잣대가 적용되지 않으면 성경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잣대가 없이 성경을 문자대로 읽고 해석을 하기 때문에 혼란만 더해질 수밖에 없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인 첫째시기에서 여섯째 시기는 숨겨진 비밀의 계시이다. 혈과 육으로는 이 비밀을 열 수 없다. 하나님의 잣대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와야 이 계시의 비밀이 활짝 열려지게 되어 있다. 첫째에서 여섯째시기 안에서 사람의 마음 땅의 무저갱의 얼굴들이 깨뜨려져 죽고 생명으로 살아나게 된다. 그리하여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세워지고 신령한 몸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왕국인 천국이 완성되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해 놓으시고 그대로 방치시켜 놓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끌어 올리셔서 하나님처럼 다시금 재창조를 계속해 나가게 하신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을 세우시고 이 지식의 빛을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문자화 시킨 것이 성경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영의 지식을 그대로 전하면 인간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현상을 인간이 늘 접하면서 익히 알고 생활해 가기에 그 자연현상의 내용들을 비유와 상징으로 들어서 영의 지식을 문자화 시키신 것이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은 인간의 속사람을 위해서 세우신 것이다. 사람의 마음 땅에 본래적으로 자리 잡고 있던 육의 속성들을 잘라내고 깨뜨려 예수와 연합된 한 몸이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영과 육이 분리 되는 것이 죽음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 땅에 본래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육의 속성들을 잘라내고 깨트려서 소멸시키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이다. 인간의 마음 땅에 본래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육의 속성인 혼돈과 공허와 무지를 하나님의 지식의 빛으로 계몽하고 잘라내고 불태우게 되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이 생명으로 부활되는 것이다. 창세기의 결론이 요한계시록이다. 따라서 계시록도 창세기의 맥을 열지 못하면 마무리할 수가 없다. 사복음서도 인간의 마음 땅에 가득 차있는 무지인 어두움의 지옥에 갇혀 안주하고 있는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에게 창세기 1장을 삶속에 적용시키라고 주신 내용이다. 일평생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어두움인 무지를 죽이고 소멸시켜 생명의 부활을 해나가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아픔과 고난이 따르는데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만 믿으면 죽어서 자동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는 허구를 버려야 한다.   /한국히브리신학연구원학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2-04
  • 원통함이 찾아올 때 - 사무엘하16장 5-12절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황당하고 절망적일 때가 있었다면 언제였는가? 다윗은 오늘 가장 비참하고 원통함이 넘치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은 예루살렘 성을 내어주고 머리를 풀어헤친 체 맨발로 울면서 신하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그런데 그때 사울의 먼 친척격인 시므이란 자가 다윗의 일행을 쫓아오면서 돌을 던지고 다윗을 저주했다. “..피를 흘린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 셨도다...”(7-8절)   지금 아들과의 전쟁을 피해 도망가는 것도 다윗은 한없이 부끄럽고 참담한데 베냐민 지파사람으로 정치적 입지가 다른 시므이는 다윗이 사울의 피를 흘려서 그 죄 값을 받는다고 비난한다. 다윗은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피해갔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의 생명을 취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울왕의 옷깃을 베고 나서도 괴로워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심복 아비새장군이 나서서 시므이의 목을 베게 해달라고 청원했지만 다윗은 허락하지 않았다.   11-12절“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다윗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과거에 저질렀던 자신의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사울가의 피를 흘렸다는 그 저주를 묵묵히 감수하다 보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감찰하시고 자신의 원통함을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는 믿음을 피력하고 있다. 아직 다윗은 건재하고 다윗의 휘하 장군들은 충성스럽지만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헤치지 못하도록 엄히 명령하였다. 시므이를 향한 분노와 원통함이 일어날 때 다윗의 마음도 흔들렸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 따라 시므이를 용서하였다. 시므이를 용서한 다윗의 모습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용서하신 예수님을 미리 예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속옷을 제비뽑고 있는 군병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늘 아버지에게 기도했다.   눅23: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제비 뽑을 새” 예수님은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창조하신 피조물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신다. 그리고 자신의 속옷을 나누려고 제비뽑는 군병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많은 이들이 용서가 힘들기에 미움과 증오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오늘날 적폐청산을 외치면서 그것이 마치 공정과 정의의 실현인양 외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진정 그것이 주님의 정의인가? 우리 예수님은 조건을 따지지 않고 죄인들을 용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일만달란트 빚진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용서받은 것처럼 이웃과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야 함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일만 달란트 용서받은 나는 오늘도 일백데나리온 빚진자를 언제까지 움켜쥐고 정의를 외칠 것인가? 보복의 악순환이 있는 한 결코 사랑과 정의의 나라는 요원하다. 우리 예수님의 마음으로 불편한 내 이웃들을 조건없이 용서하는 한해의 끝자락이 되기를 소망한다. /예수품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1-20
  • 믿음의 방주를 만들라 - 창세기 6장 9~22절
      〈강물의 세기〉의 윌슨은 강을 거슬러 헤엄치는 자가 강물의 세기를 안다고 했다. 우리도 시대와 역행하여 더욱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노아 당시의 사회는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극한 문란 상태에 있었다. 우리는 오늘 주시는 말씀 속에서 이 시대를 향한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시 사람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즉 노아를 선택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노아는 즉시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노아를 조롱하고 비판하지만, 그는 끝까지 순종했고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구원을 받았다.   노아는 믿음으로 산 사람이다. 노아의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다. 방주를 만들 때 노아 혼자만의 생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믿음으로 순종했다. 하나님은 방주를 이렇게 지으라고 말씀하셨다. 장이 300규빗, 광이 50규빗, 고가 30규빗, 총 4,300톤급의 큰 배이다. 높이만 5층 아파트 이상이고, 길이가 150m의 엄청난 큰 배이다.  이렇게 큰 공사를 노아의 가족 8명이 해냈다. 노아 생애의 목적은 방주를 짓기 위한 것이고, 그것은 그의 삶의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영원한 생명의 길을 항해하기 위한 믿음의 방주를 만들길 바란다.   노아는 인내로 순종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말씀한 창세기 6장 14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너 자신을 위해 지어라”이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서, 너와 네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 만들라는 것이다. 참된 행복은 참 소망을 바라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다. 노아에게 120년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고 짧은 시간이었다.    이렇듯 우리의 삶도 노아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을 위해서 열정을 다해 살다가 한 세상이 지나갈 수 있어야 한다. 방주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듯이 우리의 영적인 삶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노아가 보여 주었던 인내를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따르고 실천해 체화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희망이다. 비록 미천하고 연약한 나는 홀로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누구라도 능히 이룰 수 있는 무지갯빛 미래가 노아에게 약속됐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삶이 의로운 삶이라는 것을 믿길 희망한다.   노아는 축복의 결말을 보았다. 신앙은 끝까지 결말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99%보다 마지막 1%가 가장 힘든 것이다. 남은 1%를 순종하고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1%가 채워지기까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리고 성도 마지막 회까지 돌고 성을 향해 외쳤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문둥병자 나아만이 일곱 번 몸을 요단강에 잠근 후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 응답이 없다고 중도에 포기하지 말길 바란다. 피곤하다고 주저앉지 마시고 끝까지 인내하면 반드시 축복의 응답이 있다. 지금은 노아의 시대처럼,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님의 재림 직전의 시대이다. 그리고 방주는 오늘날 교회를 의미한다. 이 마지막 때에 노아처럼 온 가족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승리하는 인생이 되길 바란다. /나돌섬선교회 회장, 사랑의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1-13
  • 천국도 지옥도 진짜 있다 - 로마서 13장 11~14절
      교회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고 여기고 서로 사랑하며 또 예수 십자가 그 구원의 진리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확실하게 맘속으로 믿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이다.   어머니 뱃속 태아에게 ‘얘야 너는 이제 곧 새로운 세상에 태어난단다. 그것은 지구라고 하는데 해와 달과 별들이 하늘에 있고 산과 바다와 나무와 날아다니는 새와 물고기와 짐승이 있으며 또 아버지가 있고 언니, 오빠, 동생 여러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는 가정이라는 것이 있단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단다’라고 말한다면 뱃속 아기의 반응은 어떠할까. 상상해 본다면 첫째로 “날 웃기지 마세요. 그런 세상이 어디 있을라구. 나는 여기가 좋아요. 어머니 자궁 속 물침대에 떠 있는 삶이 얼마나 좋다구요”, 둘째는 “아니 그게 정말이요? 정말 그런 세계가 있을까요? 거짓말 마세요. 나는 할 수 있는 한 그냥 이곳에 오래 살겠어요” 세번째 대답은 “아 정말 지구라는 세계가 있군요. 엄마 뱃속이 전부가 아닌 걸 몰랐네요. 그렇다면 그곳에 나갈 준비를 해야지요. 그날은 손꼽아 기다리겠어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이 땅에서의 삶은 이와 비슷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가야 할 곳을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그 길도 보여 주시고 계신다. 그런데 이에 대한 태도가 가지가지 다르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복음에 무관심 혹은 적대적이다. 다른 사람들은 회의주의자가 되어 반신반의하며 회개하고 주님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복 많은 사람은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살다가 무사히 지구를 떠나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지옥은 확실히 있이다. “정말 지옥이 있을까? 지옥 같은 소리하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천국도 지옥도 확실히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천국을 준비하시기 위해 약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 천국에 올라가셨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6·25사변이 난 이후로 잿더미가 되었었지만, 우리는 이 땅을 50년 만에 이렇게 아름다운 땅과 도시로 개발·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천국은 이 지상보다 수천, 수만 배로 아름다운 것이고 모든 아름다운 것이 다 예비된 곳이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 하나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사람이 자기 목숨과 무엇과 바꾸겠는가? 이제 우리를 데리러 오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이루실 때가 가까웠다. 로마서 13장 11절로 14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벌, 영광과 수치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놀랍고 아름다운 천국을 예수 믿은 사람은 이미 획득했고 끝까지 순종과 정결한 마음으로 이 구원의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때가 가까웠고 주님 오실 날이 눈앞에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고 마지막 심판도 있다. /하늘문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1-08
  •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 - 마가복음 3장 14-15절
      사람이 무언가를 만들 때 목적을 가지고 만든다. 망원경과 현미경은 각각 존재하는 목적이 다르다. 사람보다 완전하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아무런 목적과 생각 그리고 계획 없이 우리를 만드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어쩌다 우연히 이 지구라는 별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고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존재 목적을 찾아야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못 찾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찾아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반드시 있다.   우리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또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내가 거기서도 전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일을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의 관심사는 영원구원이다. 한 영혼을 구원시켜 아들과 딸이 되게 하는 것이 큰 목적이다. 육신의 배고픔보다 중요한 것이 영적인 목마름이 강하신거다. 영적인 목마름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게 내 양식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은 영혼 구원이랑 전도이다.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받게 하시고 배부르다 하셨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도 같은 목적이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과 세상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 이유는 이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만나게 해주셨다고 믿어야 한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할 것이다. 세상에 잡동사니 자랑보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우리를 통해 귀신이 떠나가기를 원하신다. 마가복음 5장에 힘이 쎈 귀신이 등장한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바들바들 떨더니 예수님이 명령하시니까 귀신이 도망가고 동네 사람들은 겁을 먹는다. 동네 사람들이 달려들어도 제압하지 못하던 귀신이 든 사람을 제압해서 그렇다. 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태복음 10장 1절)’ 더러운 귀신을 쫓는 권능을 주시고 내쫓으라고 하신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귀신들린 사람을 제자들이 못 내쫓는 상황이 나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화를 내시며 귀신을 쫓아내고 제자들은 묻는다. 기도 외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기도하는 교회가 될 때 귀신들은 두려워 떤다. 기도가 없으면 모든 것이 감동이 안 된다. 우리에게도 귀신을 쫓는 능력이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있기를 원하신다. 순서상으로는 이게 첫 번째이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은 이 말씀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은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하려고 하는 것이다. 일본의 아베총리는 트럼프에게 아부를 잘하고 그것이 아베총리의 위상을 높인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하신다. 세상에서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을 좋아하시지만 예수님이 더 좋아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신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친구들하고 함께하는 시간보다 더 좋았다. ‘시몬과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섬기더니’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갖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점점 늘려가자.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공부하는 시간을 늘려가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행복한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예수비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1-01
  • 믿음은 소리없는 외침이다 - 히브리서 11장 4절
      깊은 강물은 소리 내지 않는다. 시냇물은 졸졸 소리 내며 흐른다. 소리 내는 시냇물은 힘이 없다. 낙엽이나 종이배를 띄울 뿐이다. 반면 깊은 강물은 큰 배를 띄운다. 소리 없는 강물이 더 깊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꽃은 말이 없다. 향기로 말할 뿐이다. 나비나 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흔들리는 몸짓으로 유혹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비와 벌은 찾아온다. 향기 때문이다. 사람도 향기가 있다. 인품이다. 인품은 나무와 닮았다. 소나무 같은 사람이 있다. 한글학자 최현배선생의 호는 외솔이다. 소나무같이 변함없이 한글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사람들은 선생을 존경한다. 향나무 같은 사람도 있다. 자기를 찍는 도끼에 향을 묻힌다. 죽어 향기를 남긴다. 그래서 힘 있는 자를 부끄럽게 만든다. 매화 같은 사람도 있다. 매화는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오늘날 돈 때문에 정신도 팔고 양심과 믿음도 파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매화 같은 사람은 돈에 흔들리지 않는다. 정신을 곧게 하고 믿음을 지킨다. 사람들은 비웃고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조롱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인정한다. 유한양행 창업자 고 유일한 회장이나 고 장기려 박사 같은 분이다.   믿음은 삶이다. 신실한 믿음은 ‘나는 믿음이 있노라’ 말하지 않는다. 떠드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진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삶으로 보여줄 뿐이다. 여리고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라. 엿새 동안 말없이 하루 한 번 돌았다, 성 위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지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돌았다.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았다. 말 없는 순종이다. 순종한 후 외치니 성이 무너졌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믿음은 말이 없지만 세상의 그 어떤 소리보다 하나님 앞에 크게 들린다. 하나님은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믿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기 때문이다. 그때 인생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길이 열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요란한 말들이 아니라 소리 없는 믿음이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벨의 믿음은 말이 없다. 제사가 열납되었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가인은 말이 많다. 소리가 크다. 하나님께 대들기 까지 한다. 결국 동생을 죽이고 만다. 오늘날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아벨이 있고 형식적으로 예배하는 가인이 있다. 교회 밖에선 현대 아벨은 믿음으로 살며 말없이 이웃을 섬긴다. 소금과 빛이된다. 현대 가인은 “나는 교회 장로다, 권사다. 목사다” 자랑한다. 자기를 알아달라는 것이다. 종교 스펙이다. 사람들은 알아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스펙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시기 때문이다.   믿음은 소리 없는 외침이다. 그 외침이 큰 울림을 준다. 국민일보에 나온 간증이다. 어떤 목사님 부부가 있었다. 사모가 40세에 임신을 했는데 진단결과 태아가 다운증후군인 것을 알았다. 충격을 받았다. 둘째 아이도 뇌병변 1급 장애였기 때문이다. 의사는 낙태를 권유했다. 목사님 부부는 갈등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그 아이는 지금 초등학생이 되었고 지능지수는 4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목사님의 믿음은 큰 외침이 되었다. 당시 낙태 수술을 진행하던 산부인과 의사가 큰 도전을 받고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벨은 죽었지만 그의 믿음은 살아서 지금도 외치고 있다. 하나님은 아벨을 믿음의 명예전당에 기록하셨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가정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소리 없는 외침이 되길 원한다. /장유소망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0-23
  •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 시편 61편
      갈릴리는 가난한 곳이었다. 남쪽에 위치한 사마리아나 유대 지방과 비교해 빈곤한 곳이었다. 가난의 이유는 로마의 수탈 때문이었다. 로마제국은 세금 징수를 통해 주민들을 약탈했다. 이에 저항하면 공개처형인 십자가형으로 탄압했다. 이 갈릴리가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다. 그리고 그가 공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이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적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났다. 생긴 것이 수금을 닮아 구약성서에서 ‘긴네렛’(민수기 34장 11절, 여호수아 13장 27절)이라고 불린 이 바다는 신약성서에서 ‘게네사렛’(누가 5:2) 혹은 ‘디베랴’(요한 6:1)라고 불렸는데, 이 바닷가에 있는 항구인 가버나움, 게네사렛, 막달라, 디베랴, 거라사 등이 바로 예수님의 주요 사역지였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바로 이러한 갈릴리 지역에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라는 복음을 선포하며 시작됐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실 때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 4장 19절).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았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도 곧 배와 자기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은 갈릴리의 급속한 해체 속에서 무언가 거룩하고 참된 새 삶에 대한 깊은 갈망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 중 아무도 감히 골고다 언덕을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처형 이후 그들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죄를 찾을 수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일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그들은 깊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삶의 한 가운데에 이미 있던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때 그들에게 부활의 소식이 들려왔다. 예수님이 자기들을 갈릴리로 부르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놓고 온 그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본회퍼목사의 이 심오한 말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세상의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에서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인이 된 세계’에서 성의 영역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이제 사람들에게 종교는 삶의 여러 요소 가운데 한 가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본회퍼 목사는 오늘날 이렇게 변두리로 밀려난 성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온 세계의 한 가운데에서, 중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고 싶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주일 아침 11시부터 12시까지만, 그리고 교회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의 현장 그 한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타자를 위한 존재’이듯, 그리스도의 교회도 ‘타자를 위한 교회’가 되어 세상 안에서, 세상의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주의 천사가 우리에게 이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갈릴리로 가라. 우리 삶의 현장, 주님의 십자가가 우뚝 서 있는 이 세계의 중심으로 힘차게 나아가자. 주께서 세상 끝까지 여러분과 동행하실 것이다.     /이화대학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0-18
  • ‘만일’을 넘어 서서 - 마태복음 4장 8~11절
      마귀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지극히 높은 산에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게 한 후, 자신에게 절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마귀의 이 시험은 출발부터 잘못됐다. 마귀는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는데, 천하만국이 마치 자기 것이나 되는 것처럼 말했다. 이게 마귀의 특징 중 하나이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이라 한다. 하나님 신앙의 출발점은 바로 이것이다.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주인임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마귀가 주인인 줄 잘못 알고 마귀 앞에 무릎을 꿇는다. 여기서 우상숭배가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왕은 정말 훌륭하다. 그는 비록 여호와의 성전을 짓지 못하여 섭섭했지만, 아들 솔로몬이 지을 수 있도록 은금보화와 건축자재를 준비하고 하나님께 모든 주권이 있다고 고백한다. 많이 아는 사람이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는 것, 아주 강한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 대단히 많이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빈털터리임을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본문에는 프로스퀴네오 즉 경배하다란 단어가 2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마귀에게 경배하는 경우에 한 번, 하나님께 경배하는 경우에 한 번 사용된다. 결국 마귀를 경배할지 하나님을 경배할지 인간은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마귀 경배와 하나님 경배는 방향과 구조, 내용이 전혀 다르다. 마귀는 영광만 보게 한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게 하고 재물을 보게하며 권력과 지식의 영광을 누리도록 종용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광만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눈은 영광의 뒤편 어두운 그늘에 앉은 자들을 보신다. 웃는 이들 뒤에서 우는 사람들, 이긴 자들 뒤에서 슬퍼하는 패배자들의 눈물을 보신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발로만 보신 게 아니라 압제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모세를 통해 해방시키셨다. 하나님의 눈은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이웃을 침략한 일제를 보신 게 아니라 그 아래 신음하는 우리 민족을 보시고 광복을 주셨다. 예수님 또한 영광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을 보셨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면 영광을 함께 누릴 것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면 어떤 고통이 따르는지 사실대로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 고난이 있다면 왜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인가. 그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일’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귀는 언제나 ‘만일’이라는 조건부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만일’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비록’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을 경배할 때 ‘만일’이라는 조건을 버려야 한다. 마귀를 경배하는 사람들은 만일 복을 주면 섬기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더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루마니아 공산 독재체제 아래 투옥되어 고난당했던 리차드 범브란트목사는 만일의 기도가 아닌 비록의 기도를 드렸다. 언제까지라도 이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인으로 살다 천국의 예배자가 되길 희망한다.             /영락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0-15
  • 고집부리지 말고 순종하라 - 요나 1~2장
      하나님께서 요나를 찾아오시어 임무를 하나 주신다. 니느웨로 가라. 가서 회개하라고 외쳐라. 말씀에는 짧게 되어있지만 이랬을 거 같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다른 데도 아니고 어떻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라고 하십니까. 그냥 죽게 내버려 두자’라고 했을 것 같다. 그리고 요나는 도망간다. 하기 싫어서.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욥바로 갔다. 요나의 뜻은 분명하다. ‘하나님 저 앗수르 놈들은 우리 민족을 괴롭게 하는 정말 잔인하고 나쁜 놈들입니다. 그냥 죽는 게 낫습니다. 나는 거기 안 가겠습니다’ 요나의 머릿속에는 고집과 자기 의가 있어 하나님이 틀렸고 자기가 맞는다는 생각이 있다.   어쨌든 요나는 뱃삯을 내고 배를 탔다. 그런데 풍랑을 만난다. 이 풍랑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다. 사공도 선장도 난리가 났다. 그런데 요나는 배 객실에서 자고 있었다. 이건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이다. 요나는 지금 이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기 때문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하지 않는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거 못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도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집부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서 화해하라고 하시는데 내가 그냥 고집부리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미운 마음에 내가 고집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   계속해서 요나는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물에 던져진다. 요나가 물에 떨어지자 바로 태풍이 멈췄다. 그리고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신다. 요나는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풍랑이 일 때 바로 회개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나는 자기 고집 때문에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그러다가 물에 던져지고 삼일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고 나서야 회개한다.   교인은 고집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이다. 고집을 부리면 나만 피곤하다. 다윗은 반대이다. 고집 없이 바로 무릎 꿇는다. 나단 선지자가 우리야와 밧세바의 일을 지적하니까 바로 회개한다. 그런데 요나는 고집을 부린다. 대개 고난은 죄 때문에 온다. 요나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죄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명령하셨는데 도망갔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하는데 억울하다고 하소연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순종이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사랑 베풀기를 원하신다. 지금 당장이라도 니느웨에 가겠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죽도록 충성하겠나이다. 이런 대답을 원하시는데 이상한 말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다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뜻을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이 잘 모르면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주시기도 하고 꿈으로도 알려주신다. 지금은 기록된 말씀과 설교자들을 통해서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나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알았으면 아는 것에서 끝이 아니라 순종해야 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고집 부리는 게 아니라 고집을 꺾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원수 갚는 것보다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용서하고 안아주기를 원하신다. 내 고집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예장 합동개혁측 총회장-유향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10-04
  •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빼자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군가 많이 배웠고 훌륭한 교양을 쌓고 옷을 잘 차려 입었어도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가 기독교인이라 해도 그의 속에는 아직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죄의 본성 때문에 하는 것 하나가 남을 비판하는 것이다.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하게 수군수군하며 남을 비판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그렇게 찬성하지 않는다. 도리어 말을 가급적 많이 하지 말라는 입장이다. 잠언 21장 23절은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고 했다. 잠언10장 19절에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3가지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아야한다. 남을 비판하면서 우월감에 사로잡히거나 남다른 쾌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비판하는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비판은 비판을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열지 않는다. 비판은 사람의 마음을 더 굳게 걸어 잠그게 한다. 마음을 냉랭하게 한다. 방어적으로 만들고 다시 공격적으로 만든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다 똑같다는 것이다. 다른 성품이나 기질이라고 해서 그 것이 완벽한 것이 아니다. 서로 비판하기 보다는 서로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마음은 교만하지 않는다. 도리어 겸손하다.   내 눈 속에는 들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들보는 한옥과 같은 집에서 지붕을 떠받치는 굵고 긴 나무를 말한다. 남을 비판하는 그 사람의 눈에는 들보가 있고, 비판을 받는 사람의 눈에는 티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변한 후에야 남을 변화시킬 수 있다. “자신을 바꾸는 일부터 했더라면 이어서 가정을 바꾸고, 마을을 바꾸고, 더 나가서 나라를 변화시켰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누가 알겠느냐? 세상까지 변화시켰을지”맞는 말이고 성경적으로 봐도 옳다. 랍비는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달았다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나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자질 혹은 덕목이 몇 가지가 있다. 비전, 혹은 목표, 카리스마, 통찰력, 전문 지식, 열정 등등의 것들이 지도자에게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모범이 되는 것이다. 지도자로서 다른 모든 자질을 갖추었더라도 모범이 되지 못하면 아무도 그를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내 눈에서 들보를 빼는 것은 내가 먼저 변하는 것이다. 내 문제를 고치는 것이다. 내가 똑바르고 선명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눈 속에 들보와 같은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먼저 치료받는 것이다. 혹은 나쁜 습관이나 행실을 고치는 것이다. 내 문제를 고치지 않으면 그것들은 계속 내 생각과 삶에 영향을 미친다. 과거는 현재의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많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들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이 지금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을 때, 예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것을 주님에게 내 보여 드리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셔야 한다. 예수님의 보혈로 덮고 닦아서 해결될 아픔과 상처가 있다. 또는 나의 망가진 마음의 한 구석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신림소망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9-2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