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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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2
      여섯째 날(5), 먹거리를 정해주신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에게 원복음을 주신 후에 인간과 그가 창조하신 모든 동물에게 필요한 먹거리를 정해주셨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1:29)고 말씀하셨고, 인간 이외의 모든 동물에게는 “모든 푸른 풀”(כָּל־יֶרֶק עֵשֶׂב: 콜 에레크 에셰브)을 식물로 주셨다(1:30). 하나님이 ‘오클라’(אָכְלָה: 먹거리)를 정해주시니 인간과 각 동물은 그들의 먹거리를 찾아 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그가 창조하신 인간과 모든 동물의 생명 활동에 가장 필요한 에너지를 식물이 만든 유기물 섭취를 통해 획득하도록 섭리하셨다. 동물의 유기물 섭취 과정을 현대 생물학에서는 metabolism(신진대사, 물질대사 또는 대사)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이하 인간을 포함한다)의 물리적 구조는 약 70%의 물을 제외하면, 세 가지 생화학적 유기물 분자-아미노산, 탄수화물, 지질-와 극소량의 무기물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에 지구에는 무기물밖에 없었다. 생물이 살아가는 생태계는 유기물이 없으면 만들어질 수 없다. 하나님이 서둘러 식물계를 먼저 만드신 것도 광합성을 통하여 무기물을 유기물로 바꿔야 할 필요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식물의 몸체도 물론 유기물로 만들어져 있다. 초기 지구의 유기물은 대개 식물의 광합성 작용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처음에 생겨난 식물의 몸체는 하나님이 만드신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생물이 물질대사를 통해 생명활동에 필요한 영양소와 에너지를 얻는 형태를 보면, 식물은 무기물질을 섭취하여 광합성 작용으로 자기에게 필요한 고분자 화합물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독립영양체다. 그러나 동물은 섭취한 먹거리에서 고분자 화합물을 분해하여 저분자 화합물질로 바꿨다가 다시 자기에게 필요한 고분자 화합물로 바꾸는 종속영양체다. 물질대사 과정에는 이화작용(異化作用 catabolism)과 동화작용(同化作用 anabolism)이 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유기 화합물의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화작용은 먹거리에서 고분자 화합물을 섭취하면, 소화기관에서 분해하여 생명활동에 필요한 저분자 화합물인 영양소를 얻고, 찌꺼기는 다시 밖으로 배출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탄수화물, 지질, 단백질과 같은 큰 유기물 분자를 단당류, 지방산, 아미노산과 같은 작은 단위로 분해한다. 동화작용은 이화작용을 거쳐 획득한 저분자 화합물을 자기에게 필요한 단백질이나 핵산과 같은 고분자 화합물로 다시 바꾸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세포의 증식 등에 필요한 분자들을 합성하기 위해 복잡한 효소 반응이 일어난다. 식물의 광합성과 동물이 아미노산으로 단백질을 합성하여 자가 세포의 유지와 성장, 그리고 생명 활동에 필요한 유기물 분자를 제조하는 물질대사의 방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각 생물의 생명 정보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각 생물에게 주신 생명 정보는 각 세포 안에 있는 DNA와 RNA에서 발현되고, 각 세포는 DNA를 복제하여 새 세포에 공급한다. 생명 정보는 그런 과정에서 물리적으로 생겨나는 DNA 변이를 수선하는 기능이 있으며, 자손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리보솜에 있는 RNA는 DNA의 지시에 따라 단백질을 만든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RNA 유전체만 가진 바이러스는 자체 내에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바이러스는 반드시 다른 생물의 세포에 침투해서 그 생물의 DNA에 역전사를 통해서만이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고, 자손을 증식시킬 수 있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각 생물의 생명 정보인 DNA 구조와 기능을 알게 되면, 생명 정보가 물질의 화학작용으로 저절로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적 무신론을 반박할 수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모세 시대의 문자주의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을 반론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수행하는 일도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0-08-10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10. 보수주의적 개혁주의 신앙 사상: 세대주의적 견해 대신 개혁신학적 창세기 해석 수용   고봉은 복음주의적 개혁주의 신학의 노선으로 초교파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1948년 야간신학교인 대한신학교(현 안양 대학교)를 세워 “헌신 전도자 양성을 지속했다. 장로교단의 분열과정에서 독자 노선을 택하여 더 이상 주류 교단과 목회자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어 부득히 대신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김치선 목사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혼란 가운데 1951년 5월 30일에 열렸던 총회신학교 이사회에서 교수로 결정되었다. 1961년 총회신학교를 떠나기까지 총신에서 구약학을 가르쳤다. 원용국교수는 “예과 학년 때는 에스겔서 강해였고, 본과 학년때는 소선지서 강해”였다고 회고하고 있다.(원용국, “김치선 목사와 나,” 「신학지평J 13 (2000), 3.). 현재 그의 강의 원고들이 남아 있는데 구약과 관련하여, 구약사 강의안, 예레미야서 강의안, 소선지서 강의안의 권이 남아 있고 출판된 『구약사기(舊約史記)』. (서울: 복음세계사, 1955)가 남아 있다.   고봉은 구약학 교수이면서도 「신학지남」이나 다른 학술지에 구약에 관련된 글을 전혀 기고하지 않았다. 그는 1954년에서부터 1960년까지 「신학지남」에 4편의 글을 기고하였는데,신약학과 조직신학에 속하는 글들이었다. 1954년부터 1955년에 걸쳐 “그리스도의 4초상(肖像)”,“기독교의 본질,” “기독교란 무엇인가?(설교)"를 계속적으로 발표하였고,1960년에 “복음의 진수에 대한 도전자들”이란 글을 기고하였다. 이 논문은 1960년도에 출판된 『복음의 진수』의 내용 요약과 도전자들을 첨부한 내용이었다. “그리스도의 4초상(肖像)”은 신약학 논문, 나머지 3논문들은 조직신학 논문이었다. 고봉은 1961년 총신을 떠난 후 대한신학교에서 보수적 정통개혁신학을 주도적 이념으로 가르쳤다.   고봉은 달라스 소재 복음주의신학교(달라스신학교의 옛 이름)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였고 모세오경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을 썼고 1935년 귀국 당시 복음주의신학교 등 미국 보수주의 신학교와 교회에서 지배한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여 기독교 복음의 근본진리를 수호하는 보수주의적 개혁신학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완전 축자 영감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신체적 부활과 재림, 지옥의 실재성, 사탄과 귀신의 실재성 등 성경적 근본진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를 이해하고 수용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건과 인간 운명이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스코필드의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를 받아들이지 않고 개혁신학의 구속사 중심의 성경해석을 수용하였다. 고봉은 그의 저서 『구약사기』에서 구약성경을 세대주의적 7세대(무죄 세대, 양심 세대, 인생 정치의 세대, 약속의 세대, 율법의 세대, 은혜의 세대, 천년왕국 세대)로 구분하지 않고 구속사적으로 나눈다. 그것은 1) 원시시대(창 1-11 장) 2) 족장시대(창 12-13장) 3) 이스라엘 민국시대(출애굽14 장 -삼상장) 4) 왕국시대 (삼상8장, 역대하 성문서 선지서 대부분) 5) 무정부시대 이 시기는 다시 (1) 포로 시대 (2) 귀국 시대 (3) 중간 시대의 세 시기로 나누고 있다.   고봉은 한국 장로교 정통신학의 역사적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을 수용하였고 당시의 자유주의 사상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참가와 협력을 신앙의 타협과 동화라고 비판하였다. 고봉은 구약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스코필드의 세대주의 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독론적 구속사적 해석을 일관되게 하고 있다. 창세기 3장 15절을 원복음(최초의 은혜 언약이며 메시아 약속)으로 해석하고, 그리스도의 의로 믿음으로 구원 얻는 구속사적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인류 중에 한 가족을 하나님이 선택하사 당신이 우주에 주인이 되시며 구원자 되심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 가족으로 하여금 세계 만방과 만민을 구원하실 이는 오직 독일무이하신 삼위일체니 하나님뿐인 것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손을 통하여 구주되신 그리스도를 보내시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봉은 대한신학교에서는 구약학과 신약학과 조직신학을 강의하였는데, 그의 조직신학 강의 내용은 화란 개혁주의 출신의 미국 신학자 벌코프(Berkhof)와 답네(Dabney)의 미국 남북 장로교의 개혁신학에 일치한다. 고봉의 조직신학 총론은 3장에서 6장까지의 내용은 답네 총론 가운데 7장부터 12장까지와 상당히 겹치고있다. 특히 답네의 조직신학을 많이 참고한 것은 고봉이 미국 남장로교회가 세운 고베중앙신학교 졸업생이기 때문이다. 고봉의 신학서론은 벌코프 조직신학과 남장로교의 답네 의 조직신학 서론을 주로 이용하여 총론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고봉의 신학 사상은 근본주의 신학이라고 하기 보다는 개혁신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고봉은 벌코프와 답네의 신학을 우리 상황에 맞게 가져다 놓았다. 고봉의 부흥신학을 보면 부흥이란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의 부흥이라는 것을 피력하는 데서도 그의 부흥 신앙사상이 인본주의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 절대주권의 개혁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고등 비평의 역사비평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는 정통개혁신학이었다.   고봉은 함경도 출신이었으나 동향인 김재준, 송창근이 신정통주의 신학노선과는 달리 길선주, 박형룡, 박윤선으로 이어지는 정통 보수주의 신학을 견지하였다. 그는 성경과 신조의 관계에 있어서 ‘성경이 신조 규범성이 된다’는 정통 보수주의 사상을 천명하였다; 성경은 ‘규범을 주는 규범’(norma normans)이요 신조는 ‘규범화된 규범’(norma narmata)이다. 고봉은 신학과 신조의 상호보완을 언급하였다: “신학은 신조를 무시할 수 없고 신조는 신학을 갖지 아니할 수 없다. 이 둘이 완전히 서 있을 때 기독교는 생명이 있고, 또한 신학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고봉은 박형룡과 친분도 있었다. 그가 성공적으로 목회하는 중 박형룡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에서 박형룡은, 고봉에게 자신이 일본으로 건너 올 것이니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1938년 일본이 신사참배 강요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고봉은 이러한 박해를 피하여 중국으로 피신하였다가 그 곳보다는 일본이 더욱 안전하다는 소문을 듣고 일본으로 피신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고봉은 자신이 사는 집에서 몇 집 건너에 집을 마련하고 그곳으로 박형룡의 가정을 안내했다. 이 때로부터 고봉은 일본을 떠나기 전까지 박형룡과 한 집안 식구처럼 가까이 지냈다. 고봉이 동경신숙중앙교회애서 메구로 교회의 사역지를 옮겼을 때 박형룡도 고봉이 목회하는 메구로 교회에 출석하였다.   11. 복음만 전파하는 초교파의 제3의 장로교 신학 사상: 보수적 개혁신학   1948년 8월 고봉의 주도(主導)로 '대한신학교(現, 안양대학교)'가 '장로교 야간 신학교'라는 이름으로 남대문 교회당에서 개교하게 되었다. 초대 교장에 평양여자신학교 교장을 지낸 윤필성 목사가 취임하였다. 신학교 설립은 300만부흥전도운동의 일환이었으며,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대한신학교의 교훈은 ‘주님께 충성, 타인에게 겸손, 자신에게 진실’이었다.”   이듬해인 1949년 1월 서울 서소문구(현 중앙일보사 근처)에 건물을 얻어 신학교를 이전한 후 고봉 자신이 친히 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그 다음 해인 1950년 1월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대한신학교(大韓神學校)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피난 시절 대한신학교는 부산과 제주에 분교를 설립하고 계속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분교장으로는 윤필성, 이환수 목사가 각기 임명되었고 얼마 후 부산중앙교회의 노진현 목사가 부산분교의 분교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952년 9월에 문교부로부터 4년제 신학교 인가를 받게 되자 고봉은 인가된 대한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53년 7월에 휴전협정이 이루어지자 1953년 9월에는 부산분교와 제주분교를 서울로 복귀시켰다. 1961년 〈대한예수교 성경장로회〉 (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총회)를 조직하고 대신교단의 초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62년 서울중앙교회(현 청파중앙교회) 목사로 시무하고 1965년에는 대한신학교명예교장이 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가 남산의 대한신학교 땅을 빼앗아 그 자리에 KBS TV 방송국, 중앙정보부 건물을 지어버린 것이다. 학교를 빼앗긴 고봉은 난감해하다가 반(反)WCC단체인 ICCC(국제기독교연합)의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총재를 만나 한국에서 성경장로회를 창립한다는 조건으로 용산구에서 신학교 건물을 매입했다. 이후 ICCC와의 계약 내용에 따라 1961년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를 설립하고 초대총회장에 오르게 된다.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는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이하 예장대신)으로 개칭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가 극심한 분립 과정을 겪는 동안, 예장 대신은 순전히 김치선 목사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단이라 예장 계열 교단 중 분립 과정과 상관 없는 자생 교단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1970년 성경장로회가 탈퇴하여 교단이 없어지려 한 위기를 겪는다. 그 후 고봉은 더 이상 외국의 선교비를 받지 않고, 한국 내의 자본으로 대한신학교 중흥의 길을 나서게 되었는데, ‘한국인에 의해, 한국인의 돈’으로 대한신학교 건물을 세우려고 했다. 나름 ‘한국인의 힘으로 세워진 자생교단’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게 된다. 대신 증경총회장과 현 안양대학교(구대한신학대학교) 학장 등을 역임한 이의완 목사는 1975-76년도에는 당시 합동 통합으로만 분리되는 한국교회 현실에서 순수 대신 출신 후학인 고창곤(함양), 강경원(가례), 이재호 목사(하동), 이병부(부산), 이재봉 목사(남해 상주) 등으로 지방으로 직접 파송해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그는 그때 30여 개 교회에 선교비를 개인적으로 지원해가면서 학교와 교단을 지켜온 분이다. 교단 설립자는 김치선 목사이고 이의완 목사는 대신교단의 이름이 지금까지 있게 한 대신교단을 키워주신 교단지도자로 평가받는다(대신총회, 김치선 목사가 세웠고, 이의완 목사 지키고, 성장 디딤돌. 신현기 목사 “대신교단 30여개 남았을때, 매달 백불씩 후원으로 지켜낸 산증인”, 뉴스에이).   고봉이 세운 대한신학교는 다음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처음부터 야간신학교로 출발하였다. 북에서 내려 온 사람들 중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주의 일에 헌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낮에 일하지 않고는 생계를 이을 길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고봉은 이들이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도록 하기 위하여 대한신학교를 야간 신학교로 운영하였던 것이다. 둘째, 이 신학교는 처음부터 지적인 추구보다는, 복음 전도를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라는 점이다. 학교에서 가르쳤던 과목들은 고차원적인 학문성을 추구하는 과목보다는 복음전도와 성도 양육을 위하여 실질적으로 필요한 과목들이었다. 고차원적인 신학 교육보다는 순수한 성경공부와 전도 운동을 위주로 교과가 편성되었는데, 거기에는 심지어 영농법과 침술법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셋째, 이 학교가 초교파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학교의 강사진은 초기부터 장로교인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감리교회의 변홍규 박사를 비롯한 다수의 타교단 출신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초교파적인 이유로는 3가지를 들 수 있다. ① 대한신학교가 300만 구령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학교였다. 3천만의 십일조 300만 구령운동은 실로 거국적이었고, 당연히 초교파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② 고봉이 열정적인 복음운동가였다. 유일한 관심사는 신학의 성향보다는 민족의 복음화에 있었다. 복음전도를 위하여 누구든지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초교파적이었던 것이다 ③ 당시 초교파는 복음주의와 동일시되는 때였다. 아직 자유주의 신학이 크게 부각 되지 아니했으므로 교파적으로 복잡하지 아니하였다.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나누어졌을 때 그는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제3의 길을 걸었다. 이 제3의 길은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이었다. 고봉이 세운 대신 교단과 대한신학교는 오늘날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을 대변하는 신학의 전당과 교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맺음말   고봉은 오늘날 신학계와 교계에 큰 지식의 강단신학자로서 보다는 개혁신학 정신을 설교한 목회자와 교회지도자로서 복음주의적 개혁신학의 실천, 회개와 논물과 기도를 그의 목회와 신학교 강의에서 하나의 화신(化身)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한국교회에서 강단 신학자라기 보다는 눈물의 선지자요 한국의 예레미아로 더 각인된 것이다.   고봉은 300만구령운동을 지속하면서 그는 신학도들에게 "2만 8,000여 우물을 파는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오늘 여러분이나 내가 할 일은 이 우물 파는 사업이다"라고 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설교했다. 민족복음화를 필생의 과제로 삼고 ‘300만 구령운동, 2만 8,000 동네에 우물을 파라’는 그의 열정에서 그의 복음주의적인 개혁신학이 가장 목회실천적인 부흥신학적으로 구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 모든 것 다 준다 해도 나는 30명 양(羊)을 바꿀 수 없다. 나는 평생 선한 목자 되기 원한다.”라는 그의 고백처럼 고봉은 참으로 목자의 삶을 살았다. 그의 묘비에 쓰여진 성구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다”(히 11:38)가 그의 신앙적 열정과 헌신을 말해준다. 고봉의 확고한 삶의 중심에는 예수. 성경. 교회가 있었다. 그에게는 눈물의 기도와 열심, 겸손, 사랑이 따라다녔다. 고봉은 강단 신학자라기 보다는 민족 복음화를 최초로 제창한 기독교 선구자요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교단)과 대신신학교를 세운 개혁신학정신의 지주로 자리매김한다.   이은선이 고봉의 예레미아 성경주석에 대한 훌륭한 논문에서 밝힌바 같이 그의 구약학 강의안은 성경의 완전 영감성과 무오성을 믿는 신학적 태도에서 만이 아니라 학문적 우수성에 있어서 귀하게 평가받고 있다. 이제 복음주의적 개혁신학의 구약학자들이 고봉의 구약학자로서의 위상과 공헌을 밝혀내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끝)   ◇고봉이 설립한 대한신학교의 명맥을 잇고 있는 대신총회신학연구원(학장=이종전박사)   대신총회신학연구원 http://daeshints.org/  정통신학 이어가는 대신총회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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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0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20
      (사단법인)한국작은도서관협회 소속으로 독서 동아리를 통해 국내외에 기독교 독서리뷰를 널리 전하고, 독서운동과 작은도서관을 운영하고 계시는 송광택 목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항상 곁에 계셨던 주님을 기억한다고 말한다. 송목사의 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교회를 다니셨기에 그가 살던 집에는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가지고 오신 손때 묻은 작은 성경과 찬송이 있었다. 찬송가는 실로 묶인 무곡 찬송가였는데, 어머니는 특히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써>라는 찬송을 즐겨 부르셨다. 젊은 시절에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에서 그 찬송을 제일 많이 불렀다. 송목사는 고등학교 시절, 참고서 하나 마음대로 살 수 없었고, 학원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고3 시절을 붙들어 준 짧은 이야기가 있었다. 스파르타의 소년들은 짧은 창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훈련을 받을 때, 짧은 창을 가지고 긴 창을 가진 자를 이길 수 있어야,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라고 말이다.   1971년 2월 어느 주일 아침, 송목사는 일신교회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일신교회는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때에 안길옹 목사님이 개척한 교회였다. 예배 시간 오래 전부터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기에 발이 저려 왔으나, 꾹 참고 두 시간 이상을 그 자세로 예배를 드렸다. 담임목사님은 누가복음 19:1-10을 본문으로 하여, <지나가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셨다. 말씀의 요지는 2천 년 전에 여리고를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아침에도 우리 앞을 지나가신다는 것이요, 우리 각 사람이 그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설교 후에 회중은 조용히 묵상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날 송광택은 정직한 기도의 첫 마디를 생각해 내려고 끙끙거렸다. 이제 막 입을 열어 “만일...”이라고 기도 첫마디를 입 밖으로 내놓으려는 순간, 정말 순간이었다. 그의 망가지고 상처 난 영혼 깊은 곳을 향해 큰 꾸지람의 소리가 임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이 무엇이냐?” 그의 부끄러운 내면이, 가장 약한 부분이 그대로 노출되고 지적당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엄중한 책망의 말씀은 차갑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까지 접해본 적이 없는 ‘거룩한 무게’를 지닌 사랑의 음성이었다. 그 책망의 말씀이 광택의 영혼에 임하는 순간, 그의 안에서 그 무엇인가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거의 동시에 그는 고백하고 있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님.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그 분의 사랑.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그에게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감히 고백한다. 그 순간 빛을 경험했다고 말이다.   그 후 송광택은 신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971년 10월 24일 세례를 받은 그는 이미 성경을 공부하고 그 말씀을 전해야한다는 소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1973년 총신대학교 신학과에 합격했지만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수중에는 교통비도 없었다. 이모저모로 궁리하다가 손목시계를 들고 전당포를 찾아갔다. 시계를 맡기고 천 원을 받고 그 길로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동태를 샀다. 동태장사를 한지 십여 일이 지났을 때, 그는 “동태를 사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학비를 보태 주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이 동태를 사는 사람은 복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동태를 사는 분이 복을 받으라고 ‘복(福)동태’ 라고 이름을 붙였다. “복동태 사려”라고 외치며 골목골목을 다닐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동태 장수가 아니라, 복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기분이었다, 송목사는 책사랑에서 독서운동으로, 80년대 말 한 신학교에서 독서모임 <글사랑>, <코람 데오>를 조직하였다. 그 모임을 통해 독서의 신앙적 의미를 조금씩 인식하면서 독서회원들의 책사랑은 뜻을 같이하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 일종의 독서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는 13년간 독서지도사 과정을 운영하기도 했다(2004-2016년).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 기독서적들도 읽으며 책의 주인공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발자취들을 통해 교훈을 삼고 자신도 후대에 물려 줄 수 있는 그릇으로 성장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독서와 인문 관련 책들을 계속 적으로 읽어야 한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이다. 바로 지금이 기독교 지성의 책임이 매우 큰 시대다. 내 손 가까이 책을 둔 영적 지도자들이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음을 인식하고, 성경과 인문학 서적들을 즐겁게 읽으며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같이하는 독자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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