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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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기고] ‘차별하는’ 차별금지법
      서충원목사(샬롬누리영광교회 담임)   퀴어이론에 근거한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와 이성애자 사이의 평등을 양성평등과 인종평등과 같은 차원에 두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양성평등이나 인종평등에 적용되었던 차별금지를 성소수자의 인권에 적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양자는 전혀 다른 범주이기 때문에 이 논리는 엄청난 법적 질서의 혼란을 가져온다. 성차별 인종차별에서는 강자와 약자가 나뉘고 강자에 의한 약자의 차별이 이루어진다. 과거 가부장제 사회에서 강자 남성이 약자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한 것은 허용되었지만 지금은 보편적으로 부정된다. 백인우월주의 사회에서 약자 흑인이 강자 백인에 의해 억압, 차별당하는 것 역시 보편적 이성에 의해 비난을 받는다. 그런데 기독인들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도 강자로서 약자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것으로 비난을 받아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현대사회에서 이슬람을 제외하고서는 종교간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즉 어떤 종교가 타종교를 억압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기독교 국가가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나 사상을 억압하고 차별하여 불이익을 준다면 기독교가 차별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종교간에는 다원주의를 인정한다. 국가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각 종교는 타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 그렇다 해도 기독교 신자는 불교를 반대하고 비판할 수 있고 불교 신자도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면 동성애를 정상으로 보는 퀴어이론은 어떤가? 비판해도 되는가? 물론이다. 동성애를 정상이라 주장하는 퀴어이론은 오늘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나 불교와 마찬가지의 하나의 상대적인 신념으로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 동시에 이에 대한 비판 역시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 동성애를 악으로 보는 기독교입장이 맞는지 동성애를 선으로 보는 퀴어이론이 맞는지에 대해 보편적인 이성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만일 국가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동성애를 불법화한다면 이것은 차별이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동성애를 죄라 하고 자신의 신앙에 근거하여 자신의 공동체에 동성애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이다. 교회나 기독교단체에서 스님을 직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정당하듯이 동성애자를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이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은 보편적 이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급진적 현대 이데올로기를 보편적 윤리로 둔갑시켜 종교적 다양성과 자유라는 현대의 기본가치를 거슬러 기독교 신앙을 차별하고 억압한다. 오늘날 서구국가들에서 퀴어이론이 지배이데올로기로 부상하면서 기독교신앙을 불법화하는 것은 이슬람국가나 공산국가에서 기독교신앙을 불법화하는 것과 동일하게 종교의 자유라는 기본인권에 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이다. 종교는 현대 민주국가들에서 차별과 평등과 인권의 이슈가 아니다. 종교는 다원주의와 관용과 자유를 상호간 인정하면 되고 보편적 도덕과 정의에 협력하면 된다. 동성애를 옹호한다 해도 서로 이성과 도덕에 근거하여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다. 그런데 서구에서처럼 종교가 차별금지법에 의해 통제되면 종교나 사상들이 서로 대화할 수 없는 적으로 화하고, 시대의 주류 가치를 거스르는 기독교신앙은 차별받고 억압된다. 차별을 금지하기 위한 차별금지법이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의 기독교 신앙을 차별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난다. 서구사회는 아마도 기독교가 타종교나 다른 사상을 박해한 역사적 과오를 속죄하는 의미에서 이런 퇴행이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는 서구가 지향한 자유, 평등 가치와 모순된 행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 없음을 경험한 자로서 온갖 차별을 반대한다. 지금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것은 서구의 흐름에 편승한, 보편적 도덕성을 거스르는 성소수자이데올로기의 전횡을 방지하고, 관용과 평화의 민주국가로 나아가고자 함이다. 우리나라가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장소가 되길, 교회가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각오하고 자유와 평화의 통로로서 소명을 감당하길 소망한다.
    • 오피니언
    2020-08-03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7. 목회 설교를 병행한 실천 신앙의 신학자   고봉은 일제하에서는 일본 동경에서 1930년-1944년 엘리트 목사로서 한인교회를 성공적으로 목회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국내에서 교회와 신자를 대상으로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도달한 상황이라 자신도 우상숭배에 대한 강요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곧 바로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양아버지 영재형 선교사가 시무하고 있는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고봉은 고베에서 산호중앙교회(神戶中央敎會)를 개척하여 일본 교민들을 위한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다. 고봉은 일본 고베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영재형 선교사와 함께 차별과 냉대를 받는 교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31세 나이로 고배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일본에서 소외받고 무시받으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던 교민들이 교회에 몰려 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의 압제 속에 있는 모국이 멀지 않아 하나님의 역사로 해방될 것이라고 기독교 신앙을 민족 신앙으로 설교하였다. 고봉의 개척교회에 신자들이 날로 늘어나고 지역에서 교회 평판이 좋았다. 그는 1939년 40세의 나이로 동경의 대형 한인교회인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의 청빙을 받아 새로운 목회환경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고봉은 신주쿠중앙교회에서 영감으로 준비된 설교와 뜨거운 눈물의 기도로 청교도적 분위기로 교회를 이끌었다. 이 교회는 처음에는 작은 교회였으나 미국 유학갔다 온 신학박사가 목사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몰려와서 일본 전역에서 한인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신주쿠중앙교회는 일본 전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가 되었고 조선인 유학생만 2백명 모이는 조선인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회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었다. 이곳 동경신주쿠중앙교회 목회에서 고봉은 학문과 신앙이 역동적으로 결합된 목회적 전성기요 그의 생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안양대학교 50년사』, 안양대학교 출판부, 1998, 56). 그러나 이곳에서 일본에서의 목회 사역의 한계를 느낀다. 조국이 아닌 이국에서의 목회는 영원한 일자리가 아니고 일제에 압제당한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봉은 단지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 만을 돌본 것이 아니라 양아버지인 영재형 선교사와 함께 재일교포의 선교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재일동포를 위한 순회목사 자격으로 일본의 쓰시바 · 큐슈 · 훗카이도오 · 가라후도 등지의 교회들을 돌봤으며, 1939년 동경의 잇찌(一致)신학교 강사를 겸했다.   고봉은 동경 신주쿠중앙교회 목회에서 두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내선일치 명목으로 일본어로 설교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둘째는 고봉의 절대적인 인기를 질투하여 담임목사직을 강탈하려는 자들이 생긴 것이다 조국 사랑을 강조하였던 고봉은 일본인들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어느 날 난데없이 들이닥친 일본 경찰들에 의하여 연행되어 신주쿠(新宿)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사상범으로 구속되어 그곳에서 수개월이 지나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가 있었다. 이 일 후 고봉은 동경신주쿠중앙교회에서의 사역에 대한 커다란 회의와 실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고봉은 자기 자리를 탐내는 자들에게 교회를 양보하고 동경신숙중앙교회에 있으면서 개척하였던 메구로(目黑)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게 된다. 다음 해인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령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 즉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었다. 1942년 8월 솔로몬 군도가 미군에 의하여 공략된 후 전세(戰勢)가 일본 쪽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고봉은 해방의 날이 가까웠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는 1944년 3월 일본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고 귀국하였는데 당시 그는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하자마자 당시에는 서울역 앞에 위치하여 한국의 관문이었던 남대문교회의 청빙을 받아 6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그는 이 교회에 부임한 뒤부터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1944년 당신의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새벽기도회를 쉬고 있었는데 고봉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서울에서는 처음 시작된 새벽기도회였다. 이처럼 열심 있는 기도와 은혜로운 설교로 인하여 남대문교회는 점점 그 교세가 확장되었고 마침내 남한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남대문교회에서의 그의 눈물 목회는 그를 한국의 예레미아 혹은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릴만큼 그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감동적으로 나타났다.(김치선 저, 최선 역, 『김치선 박사의 모세와 오경』(선교횃불, 2015), 297) 그는 신학자로서 목회사역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목회 설교를 병행하여 한평생 목회 사역에 동반되는 설교를 놓지 않았다. 그의 설교 특징은 18세기 영국 뉴잉글랜드의 개혁신앙의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통한 부흥, 성령의 비상한 역사를 통한 교회의 회개와 갱신, 성도의 삶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김명혁은 그가 고봉의 설교에서 받은 은혜를 간증하고 있다: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김치선 목사님께서 담임하시던 창동교회(후에 대창교회로 개명)에 다녔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어디든지 쫓아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는데 서울의 감각산과 관악산은 물론 대구의 주암산까지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김명혁, “추천사: 한국교회에서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와 같은 영적 거목이 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12.).   8. 자유 민주주의 사상   고봉이 전개한 3백만명 전도운동은 큰 진전을 보았는데 그에 의하여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를 비롯한 70여명 이상의 목사가 참여하는 3백만명 부흥전도회가 결성되었으며, 전국 2만 8천 동네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70여명의 목사가 선교목사로 전국에 파송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다. 복음은 반공 및 자유 사상으로 무장되어 파송 받은 선교목사들은 실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들은 공산 게릴라들의 잦은 출몰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지역까지도 거침없이 가서 전도를 하였다. 그러던 중 몇몇 전도자들은 공산 게릴라들에 의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사건은 공산당은 나라에 위협이 된다는 사상을 각인하였다.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한 김구(金九)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에 출석하기 위해서 비서진들에게 한국 최고의 목사를 알아보라고 했는데 비서진은 남대문교회 김치선 목사를 추천했다. 이렇게 해서 김구 가족은 남대문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다. 김구는 고봉의 예레미아와 같은 눈물의 설교에 운혜를 받았다. 김구는 1주일에 한번 고봉을 경고장으로 초청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예배를 드렸다. 김구는 매일 남대문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고봉은 남대문교회에서 김구를 만나 민족복음화운동을 함에 있어서 해방 직후 이념의 대결이 심했던 시대에 명백하게 자유민주주의 로선을 택했다. 김구는 고봉에게 정치에 입문할 것을 종용했으나 자신은 목회자라고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한국은 1920년대 소련 볼세비키 혁명에 영향을 받은 이동휘 계열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침투되었다.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장악하고자 했으나 자유 민주주의 지도자 김구의 지도력에 의하여 제어되었다. 해방 이후 이들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지령을 받으면서 남한에 인민공화국을 세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고봉은 공산주의를 막는 일이 한국을 살리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고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남한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복음과 아울러 자유민주주의를 천명하면서 민족복음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고봉은 통일 방식에 따른 김구와 이승만의 갈등에 의하여 어려움도 겪었다. 김구는 아들 김신(金信)의 결혼식 때에도 그 주례를 고봉에게 부탁하였다. 이러한 김구와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이승만 쪽에서는 언제나 고봉을 요주의 인물로 설정하고 그를 감시하였다. 심지어 한 번은 형사들이 새벽 한 시에 고봉 집에 들이 닥쳐서 그를 인천구치소로 연행하였다가 풀어준 일도 있었다. 이처럼 조국의 광복과 그로 인한 정치적인 대립은 고봉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봉이 6.25 전쟁시 교인들을 피난시키지 않고 먼저 자신이 피난했다는 사실을 들어 그가 남대문교회 사임의 이유로 보고 비난하기도 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봉이 먼저 피난한 것은 그가 투철한 반공사상과 이북출신으로 공산주의의 잔혹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 그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엘리트 목사였기 때문에 공산당에게 잡히면 처형 대상 1호나 포섭 이용 대상 1호였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반공주의자들은 즉결로 처형했고 이용가치가 있는 자들은 사상전향을 미끼로 공산당 선전에 이용했다. 공산당이 1950년 6월 서울로 진군했을 때 친북 사상을 가진 한상기 장로는 고봉에게 기독교연맹 가입을 권유했다고 한다: “목사님 교회로 갑시다. 북에서 '기독교 연맹'이 내려왔는데 교회만은 자기들의 지배하에 예배 보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기별이 왔습니다. 목사님들을 해하지 않겠답니다. 그러니 도망 다니시지 말고 서울로 갑시다." 한상기 장로의 말에 대하여 김치선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안됩니다. 내가 내려가면 반드시 잡히게되고, 기독교연맹에 가입하게 되니 그렇게 되면 나는 또 한 번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됩니다. 지금 비상시에 잡힐만한 사람들은, 때를 기다리고 숨어 있어야 합니다. 나는 기독교연맹에 가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 동조하여 공산당이 될 수가 없습니다."(김의선, 고봉 김치선 목사의 생애, 金致善, 1899-1968, http://blog.daum.net/rfcdrfcd/15974672). 이에 대해서 한상기 장로는 다시 한 번 서울로 내려갈 것을 청했다: “목사님, 사태는 다 기울어졌습니다. 이제 한 주일만 지나면 적화통일이 됩니다. 우리나라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수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이제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어서 교회로 갑시다." 그러나 고봉의 태도는 강경했다: “아닙니다. 나는 끝가지 숨어 있다가 잡히면 순교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한상기 장로는 하는 수 없이 산을 내려갔다고 한다. 고봉은 공산주의의 실체와 기독교 연맹의 역할을 알고 있었고 그가 서울로 내려가서 기독교 연맹에 가입하였다면 그는 그의 말처럼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고봉은 몸을 피하여 무사히 전란(戰亂)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9. 회개를 강조한 개혁파 부흥 신앙 사상   고봉은 청교도 개혁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와 19세기 구학파를 좇아서 부흥운동을 추구하였다. 고봉의 신앙 사상에서 부흥 신앙이 중요하다. 그의 부흥운동은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역사를 인정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개 설교가 그 시대의 인본주의 사조에 맞서서 첫 번째 대각성운동(first great awakening movement)을 일으킨 것처럼 고봉 역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한 인간의 철저한 회개를 강조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죄인이 회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인간 삶의 본질적인 변화, 성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일제 신사참배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하였다. 1952년 4월 18일 대구중앙교회에서 “전쟁 중의 부흥”에서 “오늘 여러분 나부터 더러운 일본 우상에게 절하던 자입니다.” 1961년 8월 6일 인천교회에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됨이로다“라는 설교에서 자신의 신사참배를 고백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아버지를 생각지 않고 미소가라바이에게 참배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나이까?...” 1962년 “고멜을 보라”라는 설교에서 신사참배 죄를 고백했다: “...나도 고멜과 같이 내 남편 주님을 버리고 일본 신사에 가서 그것들과 음행을 범하였습니다.”(김치선, “고멜을 보라,”(호 3장), 『김치선 박사의 설교모음집』(II), 211-212.)   고봉은 1952년 7월 10일 계성중학교 채플에서 행한 “한국의 장래”라는 설교에서 한국의 장래는 하나님이 주실 부흥운동이라고 하였다. 부흥운동이란 첫째 회개운동, 둘째, 기도, 셋째 하나님 말씀 순종, 넷째,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봉은 진정한 부흥이란 회개와 갱신을 통한 회복이라고 보았다. 고봉은 참된 부흥은 인간의 프로그램과 인간의 열심있는 기도와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참된 부흥은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땅 아래로 일방적으로 임하는 신령한 사건이다.   한국전쟁 후 고봉이 남대문교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창동교회를 개척했을 때 미국 소재 순복음교단은 한국에 교단을 창립하고자 열정적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고봉에게 접근하여 순복음 교단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고봉은 이를 거절하고 장로교 전통의 회개와 기도와 말씀 실천을 통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에서도 개혁신앙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고봉의 신앙 사상을 알 수 있다.(계속)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0-08-03
  • 개그맨 유재석, 여성위생용품 전달
      지파운데이션(대표=박충관)은 지난 23일 개그맨 유재석씨가 보낸 후원금으로 저소득 여성청소년 500명에게 생리대 키트를 제작해 지원 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제작된 생리대 키트는 6개월 분의 생리대와 여성청결제, 찜질팩, 생리대파우치 등 생리기간 동안 사용할 제품과 여성청소년에게 필요한 기초화장품, 손소독제, 응원메시지가 적힌 손 편지로 구성되었으며, 전국 49개 지역아동센터를 통해 500명의 저소득 여성청소년에게 지원됐다.   지파운데이션  박충관대표는 “유재석씨의 후원으로 저소득 여성청소년들에게 생리기간에 필요한 생리대, 여성청결제 등 다양한 물품을 지원 할 수 있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앞으로도 저소득 여성청소년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지파운데이션은 2016년 깔창 생리대 파동이후, 몸의 변화와 마주한 소녀들이 부족한 생리대로 인해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도록 생리대 키트를 지원하는 ‘한 뼘 더 자란 소녀에게’ 사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생리대 키트를 지원받은 여성 청소년은 “매번 생리대를 구매할 때마다 금액이 저렴하지 않아 부담이 매우 컸는데 감사드린다”며, “보내주신 편지를 읽고 제가 소중한 존재인 걸 깨닫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개그맨 유재석씨는 그간 저소득 미혼모, 코로나19 취약계층 등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기부금을 쾌척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에 힘을 보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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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반
    2020-08-03
  • 아트설교연구원 원장 김도인목사
      “코로나19의 종식을 기다리기보다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는 목회 교육 방법을 모색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는 김도인목사(사진).   〈설교는 글쓰기다〉와 〈설교자와 묵상〉 등 설교 역량을 함양하는 데에 도움을 제공하는 저서로 유명한 김도인목사는 설교 전문가로서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방법을 연구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미래를 대비한다면 새로운 부흥의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목사는 “여러 중대형교회에서 유튜브를 비롯해 설교 영상을 올리면 많은 이들이 이를 시청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다른 교회들도 코로나19 확산 이후로 따라하는 형국이지만, 큰 효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며, “이는 영상 편집 기술을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엮긴 결과물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설교는 교육이며 교육은 유익하고 짜임새 있는 언어 구성을 근간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이다”고 분석했다. 이어 “단순히 유명세가 있어 설교 영상에 사람들의 이목이 몰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교인들이 찾아 듣는 설교는 무릇 복음과 현실의 깊이를 두루 갖추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여닫을 수 있는 매력이 함양되어 있다”며, “이러한 설교는 부단히 글을 다루고 읽으며 보고 쓰는 습관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만 키울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사회와 교회는 이러한 교육을 하지 못한 점이 분명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포스트 코로나를 두려워하기보다 새로운 기회로 삼는 이들이 많아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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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20-08-03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19
      ㈜삼성전자에서 수주를 받아 전자 회로판을 설계하고 제작하여 국내외 주요업체에 공급하는 대전전자를 경영하시는 이윤하대표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해외 선교와 국내 방송선교에 매진하여 (재)세계복음화협의회와 ㈜국민일보가 주관하는 선교인 국민대상을 수상하였고, 세계로부천교회의 장로로서 코로나19 정국이 지속되어 경제 상황이 녹록치 않는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전파 사역에 힘껏 동역하고 있다.   이윤하 대표는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가난한 가정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무려 한 집에서 10식구가 살았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을 겪은 지 몇 년이 안 되었기에 가족의 끼니는 꽁보리밥, 옥수수, 감자가 주식의 전부였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서울로 가려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그 심정을 가지고 사촌 누나의 집으로 상경하여 지인의 소개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정말 열심히 주야로 일하고 성실히 살았으며 지금의 아내 김여라 권사를 만나 결혼을 하여 딸(애란)과 아들(응주) 두 자녀를 둔 가장이 되었다.   1981년 부천시 심곡동에 전세 2백만 원으로 집을 얻어 이사를 하였는데 집 바로 앞에 심곡제일교회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이들을 교회부설 선교원에 보내더니 자신도 교회가 좋다고 등록하여 열심히 다녔다. 이윤하 대표는 그때만 해도 교회를 비판하였기에 아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야단치고 핍박을 하였지만 그의 아내는 그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고 전도하려고 노력하였다. 열심히 기도하며 새벽 제단을 쌓았는데 남편이 교회를 안 나가니 꼭 한 번만 우리아이들 재롱잔치에 가자고해서 할 수 없이 따라갔다. 그는 교인들이 친절하게 반겨주며 교회에 나오라고 해서 못이긴 척하며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이 없던 그는 예배를 드리면 졸음이 쏟아져 예배 시간은 거의 졸다 오곤 하였다.   1985년 회사에서 우수사원 기술 연수차 일본으로 해외 출장을 보내주었다. 그 시기만 해도 대만과 일본의 전자회로기판 기술을 우리나라는 따라 갈 수가 없었다. 일본서 보고 느낀 대로 우리도 일본처럼 협동화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창업을 결심하여 어렵게 동업을 시작하였다. 직장동료와 둘이서 1986년 11월 25일 창업을 하였고, 박신환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첫 예배를 드렸다. 회사를 시작할 때 2천만 원으로 공장을 건축하였고 모든 기계와 집기는 전부 중고로 구입했다.   개업을 하고 일을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나도 거래처가 없어서 심각하게 어려운 와중에 동업하던 친구가 프레스에 손가락 3개가 절단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급히 병원에 치료를 해야 되는데, 동업자도 사업자등록증에 이윤하 대표 외 1인으로 되었기에 산재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때 담임목사가 오셔서 기도해주시고 특히 병원장하고 친분이 있으셔서 부탁하여 병원비를 할인받았다. 이윤하 대표는 그 일을 계기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야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이윤하 대표는 교인들하고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주일오전 예배가 끝나면 집으로 가기 일쑤였고 신앙생활은 그것이 전부였다. 1991년 동업하던 친구가 나가면서 대진전자를 그대로 인수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돈을 조금 벌자 이대표는 교만과 욕심으로 교회생활보다 사회에 치중하여 방황하며 살던 중 1994년 엄청난 시련을 만났다. 그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원인 모르는 화재가 발생하였다. 많은 장비와 원자재, 사무실 집기, 종이 한 장도 못 건지고 모두 소실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대표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십니까? 그 때 담임목사님께서 소중한 권면을 해주셨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십일조 생활도 하고, 앞으로는 하나님께 절대 순종으로 믿음생활을 바르게 하라고 사랑으로 말씀했다.   이런 아픔과 시련의 과정에서 이대표는 담임목사님의 기도와 성도들의 따뜻한 손길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 후로 목사님께 순종하며 성도들과 함께 믿음생활을 열심히 하여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나니 사업장도 주님의 은혜로 번창하여 인천광역시 남동공단으로 이전하였고 삼성전자 1차 등록업체로 선정되어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   한번은 담임목사님과 태국 치앙마이 김한신 선교사의 선교지를 함께 가게 되었다. 선교지에 도착하여보니 그곳은 중국 실향민이 사는 산족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선교사의 헌신과 희생에 감동되어 현지 성도들을 위해 교회를 세우기로 작정하였다. 교회건축 할 땅을 구입하기 위해 목사님과 기도하고 선교비를 보내주었고 원주민 교회를 완공하여 입당예배를 드리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이윤하 대표는 장로임직을 받고부터는 성도의 리더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위해 청지기의 자세로 열심히 믿음생활을 위해 늘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며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이윤하장로는 “담임목사님과 같은 비전과 꿈을 가지고 다니엘 기도의 군병으로 충성할 것이며, 민족복음화가 되는 그날까지 열심히 전도와 희생을 할 것이다”고 고백한다. 또 “하나님이 세워주신 교회와 담임목사님과 함께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고 십자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선교인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며 간증한다.   지금까지 이윤하대표가 신앙과 사업을 통해 걸어왔던 그의 발자취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독자들도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천국의 면류관을 생각하며 섬기는 교회와 직장과 사업장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혹시 다가와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혼구원을 위해 매진하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 오피니언
    • 칼럼
    2020-08-03
  • 「제2의 이스라엘민족 한국인」 저자 현용수박사
    “왜 하나님은 아시아권 중에서 한국보다 복음을 먼저 받아들였던 필리핀교회, 중국교회 및 일본교회보다 한국교회를 그토록 사랑하시고 더 많이 사용하시는가? 그리고 왜 많은 이들이 20세기부터 한국민족을 제2의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는가? 그 이유는 교회가 급성장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많아져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많아졌기 때문이고, 사역적 측면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계선교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제2의 이스라엘 민족 한국인〉 저자 현용수박사(사진).   한국과 이스라엘의 유상성에 관해 현박사는 “두 민족 모두 가장 작은 나라이면서 초강대국에 둘러싸였다. 수많은 침략과 처절한 수모를 당했지만 현재까지 생존했다”며, “두 나라 모두 1948년에 건국했다. 건국이념이 신본주의 국가다. 짧은 기간에 세계적인 나라가 되었다. 이스라엘이나 한국도 하나님을 열심히 믿을 때 번영했고 그렇지 못했을 때는 이방나라에 업신여김을 당했다. 이것은 두 나라와 두 국민의 상관관계가 그만큼 많다(깊다)는 것을 뜻한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도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인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너희들은 다른 민족들과 확연히 다른, 하나님의 제2의 선민이라는 신본주의 정체성을 세워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이것은 한국인의 자존감을 높여주게 되었다. 한국인은 유대인과 많은 유사점이 있었을 때는 하나님이 많이 사용하셨지만 그 유사점이 없어지는데도 계속 사용하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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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20-08-03
  • 송희순 목사가 답하다
      빚 얻어 산 땅을 ‘경로당’부지로 쾌척, 주민들 마음문 열어 ‘쉼터’와 ‘피트라인’사업은 BMW사역과 해외선교의 디딤돌   “목회자는 빚 속을 걸어가는 겁니다. 빚이 빛이 될 때 비로소 목회의 보람을 찾는 거겠죠. 교인도 없고, 땅도 없고, 건물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을 보여주신 하나님 한 분 의지하고 ‘예수마을’을 꿈꾸며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무료급식’을 시작했습니다.”   충남 논산에서 논산목민교회를 섬기고 있는 송목사는 부임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17년 전 신학교 졸업 반이었을 때 여자의 몸으로 혈혈단신, 그것도 깜깜한 밤중에 대전에서 논산까지 거미줄이 난무한 단칸방 사택에 도착했다. 송목사의 목회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래도 무지랭이같은 자를 사용하시려고 보내 주심에 무한 감사했다고 한다.   ‘예수마을’을 만들기 위한 일념으로 송목사는 목회시작부터 8년 동안을 한결같이 ‘따스한 밥상’으로 가난한자, 병든 자, 굶주린 자 등 소외된 이웃들을 섬겼다. 당시 하루에 80명씩 밥을 먹였을 정도라고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때는 논산이 다른 지역에 비해 빈촌이었고 구 도심지였다.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황무지 같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한 송목사는 “뜻밖의 화재로 교회가 불타 없어지고, 교인들로부터 사기를 당하고, 돈을 떼이고,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 의지하며 달려 왔더니 하나님께서 자립의 길을 열어 주셨다”고 말했다.   믿음으로 행하는 “행동파”라고 자신을 소개한 송목사는 목회 초기에 교회를 다시 일으키고자 ‘논산목민교회에 오시면 인생이 바뀌고 팔자가 바뀝니다’라는 전도 문구를 시내버스에 광고를 해서 논산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이 버스광고 때문에 한때 지역 내 다른 교회들로부터 표적이 되기도 했다”라고 밝히며 “‘팔자’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 때문에 이단이라는 비난도 듣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가 홍보되어 부흥에 도움이 되었다”고 추억했다. 송목사는 목회와 힐링 비즈니스를 겸하고 있다. 사업을 통해 선교자금을 마련,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태국 등 동남아시아 선교를 하고 있다. 직접선교, 협력선교, 현지인선교 사역들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다. 불교국가인 태국 ‘메쏘시’라는 지역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설립했고, 이제는 지도자 양성을 위해 대학교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 라오스에는 큰빛선교센터(Big Light)라는 전기기술학교를 세워 기술을 가르치며 선교하고 있다. 지방의 왠만한 중형교회에서도 해낼 수 없는 사역을 논산목민교회가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해외선교 사역은 첫째는 주님의 은혜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비즈니스 툴’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사업을 하다 보니 고용창출 효과로 다소나마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고, 성도들에게는 물질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즈니스는 목회의 훌륭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부연했다.   처음에는 목사가 왠 사업이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꾸준히 목회와 비즈니스를 병행한 결과, 지금은 사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전도되고 있다”라며 “사업이 목회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큰 힘이 된다는 것과 전도·선교의 훌륭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국교회의 ‘롤 모델’이 되고 싶다”고 강조 했다.   교회 심방과 행정은 부교역자들을 훈련시켜 그들에게 맡기고 송목사는 설교에만 전념하고 있다. 비즈니스를 하기 위한 모험이었지만 결국 교회 부흥으로 이어져 성공한 셈이다.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느냐고 묻자 “그와 정반대다. 사업을 하면서 사람들과 상담을 많이 하다 보니 현장목회가 되어 설교 자료가 더 풍부해진다”고 했다.   목회 초기에 가장 어려웠던 점에 대해 송목사는 “물질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솔직히 그것 때문에 어렵지는 않았다. 교인을 가장한 ‘꾼’들이 교회에 들어와 그들에게 돈을 떼이고 사기까지 당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정말 목회를 포기할 뻔했다”며, “그러나 그들을 법적으로 고소를 하거나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겠지’하는 믿음으로 견뎠다. 그런 어려움 때문에 비즈니스를 하는 계기가 되어 전화위복이 됐다”고 회고했다.   또 “어렵게 전도하고 양육해서 십일조를 내는 교인이 되었는데, 대형교회의 순환버스 운행으로 그 편리함 때문에 교인을 빼앗겼을 때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며, “이러한 일이 발생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큰 교회들의 버스운행이 중단돼야 한다”고도 역설했다.   송목사는 기도하고 믿음으로 빚을 얻어 어렵게 산 땅을 2010년도에 ‘경로당’부지로 마을에 기부하면서 동네인심을 얻었다. 자연히 주민들 사이에서 교회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고 소문이 나면서 부흥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가난한 교회에서 주민들에게 희생하는 모습을 보고 ‘시’에서도 감동을 받고 이후 지역발전 도시재생사업을 교회중심으로 확장하기도 했다. 지금은 어엿한 자립교회로서 빚이 빛이 되어 지역사회를 환히 밝히고 있다.   비즈니스미션포월드 선교회(약칭 BMW선교회)는 지난 5월, 송목사가 세계선교를 위해 야심차게 조직한 선교단체다. 10년 전부터 꿈꾸던 것을 마침내 현실로 이룬 것이다. “저와 관계되어 발생한 직업이라면 그들에게 수입의 십분의 일을 선교비로 내어 놓도록 하고 있다”라고 밝힌 송목사는 “그러한 재원들이 모여 다양한 전도를 가능케 하고 있다”고 전했다.   힐링 비즈니스는 ‘쉼’(Shwim)터 사업과 ‘피트라인’(Fit Line)사업이다. 쉼터 사업은 교회내부공간 또는 카페, 커피숍 등의 작은 공간에 이동용 찜질방을 설치하는 것이다. 찜질방은 내부는 물론, 외부까지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내뿜는 것으로 알려진 적삼목을 사용하여 만들고 있다. 그룹 소모임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찜질방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손님도 늘어나고, 교제를 통해 전도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 넣을 수 있다. 피트라인(Fit Line)은 건강기능식품 사업이다. 두가지 사업 모두 고객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특히 식품사업은 송목사 자신이 직접 체험을 하고 교인들로부터도 효과를 입증 받아 시작했다고 한다.   피트라인(Fit Line)에 대해 송목사는 “독일에서 수입하는 건강기능식품을 가지고 사업을 하고 있다. 고객에게 맞는 1:1 맞춤식 상담을 통해 몸에 맞는 최적의 조합으로 제품 구성을 해 드리다 보니 반응이 좋다”면서 “수년 동안 식품을 판매했지만 단 한 건의 클레임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품에 대한 효과를 묻자 “효과는 높은 재구매율이 입증해주고 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고 되물었다.   마지막으로 송목사는 “아직도 많은 목회자들이 목사가 사업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고 “사업이 목회의 에너지가 되어 물질의 ‘빚’이 복음의 ‘빛’으로 변할 때 목회는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찬란한 천국의 ‘상급’이 될 것이다”고 말하면서 경험을 통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송희순목사는 대전 출신으로 대전신학교를 졸업했다.          
    • 오피니언
    • 인터뷰
    2020-07-31
  • 파키스탄서 여아 납치 시도사건 발생
      인터내셔널 크리스천 컨선(대표=제프 킹)은 지난달 22일 동 단체 사무실에서 파키스탄 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밝히고, 파키스탄 내 기독교인 박해가 심각해지고 있다고 알렸다.   동 단체는 이날 발표를 통해 파키스탄 내 극단주의자들의 활동이 이어지고 있지만, 무력 분쟁 가능성을 염두한 파키스탄 정부의 방치로 인해 어떠한 제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달 초 파키스탄 펀자브주 사디가바드 기독교 밀집지역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아스람 마시와 노렌 비비의 가택을 침입, 딸을 대상으로 하는 납치를 시도하는 일이 발생했다. 마시흐와 그의 가족은 무함마드 이르판이라는 남성을 중심으로 침입한 12명의 침입자들에게 격렬한 공격을 받았으며 침입자들은 딸을 납치한 후 강제 결혼 등을 시도하려 한 경황이 포착됐다. 납치에 실패한 침입자들은 아스람 마시를 구타했으며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게 방해했다.   비비는 “그는 거리에서 종종 내 딸을 놀리고 이동하려는 것을 방해했지만 우리는 항상 무시했다”며, “결국 이르판은 우리 집에 강제로 들어가 딸을 납치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했다. 이에 부상을 입은 우리 가족을 공격해 구타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이르팡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며, “의료진은 우리 가족을 비롯해 이들에게 부상을 입은 이들에게 의료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인터내셔널 크리스천 컨선 관계자는 파키스탄에서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가 발생하더라도 사법적 제재가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에게 법적 보호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마티아스 페툴라국장(인터내셔널 크리스천 컨선 옹호국)은 “무슬림이 대다수인 파키스탄에서는 법원이 정부 법률 대신 이슬람 법에 근거한 결정을 내리라는 폭도들에게 지속적으로 압력을 받고 있다”며, “극단주의자들이 인구 면에서는 소수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나라에서 주요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다. 판사가 기독교 여성을 옹호하는 판결을 내리면 이 사람들은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군중 폭력을 선동하고 그곳의 기독교인들을 공격한다. 그리곤 판사를 협박하기 위해 법원에 나타난다”고 말했다.   미국 국제종교자유위원회에서 발표한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파키스탄에서 매년 1,000명에 달하는 여성과 소녀들이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되고 있으며, 이들 중 다수는 납치, 결혼, 강간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해당 현상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있다.   페툴라국장은 “파키스탄에서 기독교인이나 힌두교인을 비롯해 파키스탄에 거주 중인 소수민족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신성모독에 관한 법률이다”며, “파키스탄의 신성모독법이 종교적 소수자들과의 개인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악용되는 경우가 많아 수십 명이 신성모독죄로 수감된다”고 강조했다.
    • 교계종합
    • 일반
    2020-07-31
  • 미 연방대법원서 예배제한 청원 기각
      미국 연방대법원(대법원장=존 G. 로버츠)은 지난달 24일 동 법원에서 예배 모임에 관한 네바다주 제한 조치 해제 청원을 기각하고,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행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이날 판결을 통해 코로나19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예배 모임의 자유보다 생명 보호의 가치를 우선하는 네바다주의 행정 조치가 미국 헌법의 정신에 합치하다고 보고 이같이 판결했다.   갈보리 채플 데이턴 밸리 교회는 영세 사업장에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한 채 수용인원의 50%만을 실내에 들일 수 있도록 하는 네바다주 규제 조치를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법원에 항소했다.   현재 네바다주는 모든 종교 시설의 수용인원 한계에 상관 없이 최대 50명만을 수용하도록 조치한 상태이다.
    • 교계종합
    • 일반
    2020-07-31
  • 폼페이오장관, 낙태 반대입장 밝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가 지난달 23일 패밀리리더십 회담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낙태를 인권으로 규정하라는 국제적 압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신의 섭리에 근거해 결정을 내리려고 노력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폼페이오장관은 “낙태는 인권이 결코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우리의 권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미국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전 세계에 기조를 세우며 노력해왔다. 이러한 일환으로 우리 행정부는 다른 정권들이 그러했듯 태아의 권리를 옹호해 왔다. 낙태는 결코 인권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폼페이오장관은 국무부가 보건복지부와 함께 지난해 9월 제74차 유엔총회를 앞두고 전 세계 20개국을 동원해 유엔 문서에 적혀있는 낙태 찬성 문구를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냈다고 전하기도 했다. 성명에는 브라질, 폴란드, 사우디아라비아, 콩고민주공화국 등이 함께했다.   당시 트럼프대통령은 유엔 총회 의원들에게 “낙태를 반대함으로써 무고한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과 결정은 존중되어야만 한다”며, “낙태를 허용하기 위해 모든 국제 사회가 합의하고 있는 권리는 없으며, 국가 차원에서 낙태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거나 촉진할 의무도 전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교계종합
    • 일반
    202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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