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1-21(화)

전체기사보기

  • 김영한박사의 역사적 예수 시리즈
    역사적 예수의 독특성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이 감히 부르지 못했던 하나님을 "압바"(Aββα, abba, 아버지)라는 가장 친근한 호칭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아버지 호칭은 복음서에서는 150회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다. 12세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축제에 부모와 같이 와서 없어져 버렸는데 부모가 근심하여 찾다가 성전에 있는 그를 발견하였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라고 질책한다. 이에 대하여 소년 예수는 독특한 문장으로 대답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소년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압바”(abba)라는 호칭은 독특하다. “내 아버지 집”이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집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인 하나님의 전을 말한다.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는 그의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지칭할 때 어느 누구도 부를 수 없는 친근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하신 예수의 마지막 말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었다. 유대교 문헌에 정통한 독일의 신약학자 여호야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압바”(abba)라는 단어는 역사적 예수가 친히 쓴 아람어라고 밝히고 있다.   I. 구약에서의 하나님 아버지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 토기장이와 진흙, 주관자와 복종자의 관계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집단적인 내지 비유적인 의미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처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시편 저자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에 비유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유대인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호칭으로 부르기를 꺼려하였고, 다른 편으로는 아버지 호칭을 집단적인 의미 내지 비유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유대교의 하나님 “아버지” 호칭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는 새로운 의미, 즉 신약적인 독특성을 부여하였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족관계로 표시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부자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부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유대의 전통적 사상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히 설명해 준다. 예수의 아버지 호칭은 유대교가 의미하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부자(父子)관계로 끌어 올리는 혁명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그것은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와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더 이상 주인과 종 사이의 비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자녀에 대해 베푸는 아버지의 무한한 긍휼과 인자에 대한 신뢰가 담겨져 있다. 예수는 자기와 우리의 관계를 친구 관계로 격상시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예수는 우리의 친구요, 우리는 예수의 친구로서 예수를 통하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예수는 맏형이여 우리의 그의 형제로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   II. 호칭 "압바"(Abba)의 함축성   나사렛 예수가 사용한 하나님에 대한 “압바”(아람어로는 abba, 아버지)라는 호칭은 유대교적인 하나님 상(像)의 틀을 깨뜨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예레미아스는 당대의 유대교 문헌을 연구한 후에 “유대교 기도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압바’라고 언급한 유비를 전혀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구약 전체는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성을 강조하고 야웨와의 친밀성을 두려워하고 피하고자 한데 반해서 예수는 일상적으로 하나님을 아주 친근한 용어로 불렀다. “아버지” 호칭은 다음의 함축성을 지닌다.   1.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깊으신 관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와 같이 보살피신다. 우리에게 의식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부모가 자녀들의 의식주를 돌보아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기본을 돌보아 주신다. 예수는 어떤 조건을 제시하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근본적인 신뢰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소박한 믿음을 말한다. 예수는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시고 계신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예수는 하나님이 무섭고 벌을 주시는 재판관이 아니라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시고 마련해주시는 부모보다 더 사랑과 자비로써 우리를 보살피시는 분이라고 가르치신다.   2. 자녀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하나 하나를 눈동자 같이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는 세밀한 사랑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과 같다고 예수는 설교하신다. 그 양을 찾으면 목자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며 집에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눅 15:6)라고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3.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계: 직접성과 단순성을 나타낸다.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이다. 단지 형식이나 의식(儀式)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직도 종교적 차원이다. 하나님은 자유스러운 마음,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와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애원하는 심령에서 나오는 자녀의 소박한 기도를 들어 주신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나님께 기도하고 요구하는 데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직접성과 단순성이 요구된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자식이 아버지 앞에서 주저한다면 그것은 참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앙의 자연스러운 관계로 나타내고 계신다.   4. 자녀의 고통에 함께 하시는 분, 하나님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시고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고통은 율법적인 인과응보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징계로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통에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는 겸손해지고 우리의 인생은 더욱 깊어진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묻는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유대인들에 의하면 질병은 죄의 결과이다(요 5:14). 맹인의 경우는 그 부모의 죄의 결과로 보아야 했다. 예수는 대답하신다: “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맹인은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는 예수의 말씀에 따라 씻고 밝은 눈을 가지게 되었다(요 9:7). 맹인은 보게 됨을 통하여 그를 치유한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맹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간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자녀인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우리를 그 분의 원하시는 그릇으로 만드신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이 세상의 고통과 박해에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이다. 이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5. 아버지로서 자녀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은 구약의 율법학자들이 생각했듯이 그의 자녀에게 단지 준엄한 재판관이나 율법 집행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어느 계명을 지켰는지 보시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가졌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보신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예수의 설교는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탕자의 비유)(눅 15장)에서 나타난다. 탕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라고 아버지에게 참회의 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게의치 않고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사실 자체를 기뻐하신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품꾼의 하나로 받아들라고 돌아온 아들을 즐겨 맞이해주시고 잔치상을 베풀어주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비유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훈해 주고 있다.   6.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한 형제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한 형제가 된다. 여기에는 백인, 황인, 흑인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없으며,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가 없으며, 권력자와 서민의 차이가 없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고 인종이란 진화가 빚어낸 적자생존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형상에 따라서 지음을 받은 창조의 작품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아바지 되심 앞에서 모든 인종 계층의 구별이 사라진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하나님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진화론적 인간관은 인간을 자연과정이나 만물과 다름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았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동등하며 자연보다 존귀하다고 본다. 형제 자매가 아버지 앞에서 하나인 것처럼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나의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6).   III. 예수의 영 안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부성(父性)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부성)이란 나사렛 예수에 대한 믿음 안에서만 계시되고 그 안에서 호칭되어진다. 혈과 육이라는 자연적인 관계로는 정립되지 않는다. 요한은 다음같이 증언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오늘도 예수를 믿고 그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아들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같이 증언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압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압바”(abba,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오늘날에도 신자인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친히 “압바!”라고 불렀던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압바”라고 불렀던 역사적 예수의 실재에 대한 연속성을 체험하게 된다.(끝)  
    • 신학/선교
    • 신학
    2020-01-21
  • 스데반돌봄사역원 원장 배현숙사모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기 위해 존재한다. 이를 실천하고자 초대교회는 이웃돌봄에 매진했다”고 말하는 배현숙원장(스데반돌봄사역원·사진).   배원장은 ‘우리가 돌보면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란 표어를 바탕으로 스데반돌봄사역원을 통해 교회 주변에서 어려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돌보고 치유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이웃돌봄 사역의 중요성을 한국교회에 전하고자 교육 사역에도 힘쓰고 있다.   돌봄 사역 지도자 강습회를 통해 이웃사랑의 정신을 교회에서 실천하도록 교육하고 있다고 전한 배원장은 “예수 그리스도께 평생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이웃 사랑과 실천이다.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반쪽에 불과하다”며, “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이들이 주변에 많은데 교회가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돌보고 치유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지난 20일부터 2박 3일간 진행한 강습회에 많은 이들이 참석해 이웃돌봄의 중요성과 활동 방법 등을 전수받았다”며, “지난해에는 예장 통합측과 MOU를 체결하여 여러 차례 교육을 진행했으며 다가오는 2월 24일 부산 영도구에 있는 땅끝교회에서 지도자 강습회를 진행할 예정이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사회에서 이웃을 향한 마음이 사라지고 각박해지고 있다”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을 이웃에게 진정성을 갖추어 나눌 때 이 사회가 이전보다 더 나은 공동체로 변화하리라 생각한다”고 마무리했다.
    • 오피니언
    • 인터뷰
    2020-01-20
  • 요한선교단 대표 김동진목사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랑의 편지이다. 우리는 말씀을 연애편지를 읽듯 한자도 빼먹지 않고 끝까지 반복적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 영혼 속에 각인시키는 것이 암송이다”고 말하는 김동진목사(사진).   성경통독을 시작하게 된 이유에 대해 김목사는 “30년 전 한 지인이 성경통독을 통해 알콜중독을 극복하고 새 삶을 사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경험이 있다”며, “그때 성경통독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고, 30년간 쉬지 않고 성경통독을 해왔다. 목사로서 성경을 통독하고 암송하는 방법을 여러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수많은 기적체험을 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김목사는 “한번은 화곡동 88체육관에서 3천 명이 모여 성경통독을 한 적이 있었다”며, “그때 40년간 앞을 보지 못했던 정하준권사가 눈을 뜨고 앞으로 보게 된 이적을 경험했다. 그 외에도 암이 치유되거나 다른 크고 작은 질병들이 고치심을 받는 것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과 감사함을 느끼곤 했다”고 회상했다.   마지막으로 오는 27일 마석답내교회에서 있을 ‘구정 특별 신학성경통독’에 관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성경만 가지고 오면 참여할 수 있다”며, “95세 참여자는 베드로전·후서, 요한 1·2·3서, 유다서, 디도서, 빌레몬서 전체를 암송하고, 78세 참여자는 시편 1~20편 전체를 암송한다. 한 초등학생 참석자는 요한복음 1~3장 전체와 시편 120~135편 전체를 암송할 예정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말씀을 암송할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참여해서 은혜와 도전을 받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 오피니언
    • 인터뷰
    2020-01-20
  • 세계선교협의회 조경호회장 취임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제30회 정기총회가 14일 오전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들레헴성전에서 열렸다.   KWMA 신임회장 조경호목사는 “KWMA 30주년을 맞이해 우리가 새로운 팀워크를 이루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어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KWMA와 한국교회를 통해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시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것이다”며, “올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우리 목숨을 내놓고 기꺼이 협력하고 동역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어 법인이사 김문훈목사, 운영이사 박동찬목사, 법인이사 김의경목사가 각각 ‘한국교회 선교 활성화와 세계선교 연합과 협력’ ‘2020년 실천하는 한국선교’ ‘북한복음화와 대한민국의 안정’을 위해 합십기도를 인도하고 법인이사 신동우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회무처리 순서에는 2019년 사업보고 및 감사, 결산, 세계선교대회 후속대회 결산 보고가 진행되고 2020년 조직안이 통과됐다. 직전 이사장 이영훈목사에 이어 신임 이사장으로 이규현목사가, 전 회장 이규현목사에 이어 신임 회장으로 조경호목사가 취임했다.   이외 진재혁목사가 케냐 선교사로 파송되면서 법인이사를 사임하고, 김형배, 한진환 홍사진 운영이사가 추가됐고, 정책위원으로는 조샘 인터서브코리아 대표, 최현미 OM 대표가 사임, 유기남 알타이선교회 대표, 김재형 한국WEC국제선교회 대표가 추가됐다. 회원교단으로는 그리스도의교회협의회가 추가, 회원단체로는 국제학생회(ISF), 세선회가 사임하고 GBS선교회, 파우아교육협력재단, 파워오브굿, 선교통일한국협의회, 실로암선교센터, 랜드마커미니스트리 등이 새로 가입해 세계 선교사역에 박차를 가하기로 다짐했다.   KWMA는 작년 12월 사무실을 기존 가산동 사옥에서 지리적으로 좀 더 유리하고 방송 사역과 연결성이 좋은 서울 노량진 CTS 기독교TV 회관 9층으로 이동한 만큼, 올해 상호 협력과 연합 정신으로 남은 과업 추진에 진력하기로 했다. 기존 가산동 사옥은 KWMA DR(디아스포라 난민·Diaspora-Refugee)센터로 활용해 국내외 미전도종족선교를 활성화할 예정이다.   KWMA 사무총장 조용중목사는 “선교의 연합, 협력 정신을 좀 더 고취하고 선교 허브로서 역할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본부 장소도 노량진으로 이전했다”며, “또한 기존 이주난민사역의 중요성을 알리고 실질적 모델로서 DR센터를 운영하는데, 미전도종족인 이주난민사역을 위해 한국교회가 더 많이 신경 써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 교계종합
    • 연합단체
    2020-01-20
  • 감사절의 현대적 의미(1)
      시편 136:25-26  25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6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구약성경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3대 절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무교절이요, 또 하나는 칠칠절이요, 그리고 오늘날 추수감사절과 같은 수장절이 있었습니다. 이는 가을 추수 후에 과일, 올리브, 포도를 수확하여 절기를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 지켜 내려온 것으로 전 세계가 즐거운 감사축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드려지는 추수감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국의 청교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국교회가 15세기, 16세기를 걸치면서 구교와 신교의 피어린 투쟁이 계속 되었습니다. 구교의 부정과 타락을 규탄하고 성경에 근거한 칼빈주의 신앙의 교회를 정화하려 할 때 이들을 가르켜 청교도란 별명을 붙어주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억압 앞에서 칼빈주의자들은 영국 국교의 박해를 피하여 신앙과 자유를 찾고자 1620년에 청교도들이(9.6)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남자 78명, 여자 24명, 합계 102명이 서반아 사람 콜롬버스가 1492년에 발견한 높은 땅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순례자의 선조(Pilgrim Father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북부 버지니아에 상륙하지 않고 뉴잉글랜드주의 프리마드에 상륙했기 때문에 거주지역의 식민회사로부터 새로운 입주허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들 순례자들은 무법자가 나타나 혼란을 야기하지 않을까 염려해서 상륙전에 메이플라워로 계약을 작성하였습니다. 그들이 버지니아주에 상륙하지 않고 동해안의 프리마드에 상륙한 것은 하나님의 큰 섭리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버지니아 주에 상륙했다면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박해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르스타란 장로가 그들의 종교적 지도자가 되고 윌리암 브래드포드가 처음의 행정관이 되었습니다.    상륙한 처음 해 겨울에 기후의 상이한 조건과 영양부족으로 50명이 가까운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봄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결실의 가을에는 감자와 옥수수, 밀 등의 추수 물을 수확하여 추수 잔치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 후 1623년 당시 행정관인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감사절을 지킬 것을 선언하여 전 지역에 이 제전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1789년에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11월 26일을 감사절로 정했습니다. 그러다가 1864년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 의하여 11월 셋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킬 것을 선포하여 그 후 오늘에 이르도록 전 미국의 경축일로 지켜오는 가운데 근래에 와서는 전 세계적으로 즐거운 감사축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0-01-20
  • 직장선교연합서 신임원 선출
    한국기독교직장선교연합회가 주대준 신임 이사장, 손영철 신임 대표회장 취임식을 열고 새로운 리더십과 함께 2020년 직장선교를 위한 새 각오를 다졌다.   동연합회와 세계기독교직장선교연합회, 한국직장선교대학, 직장선교사회문화원, 한국기독교직장선교목회자협의회는 2020년 신년하례예배 및 한직선 이사장·대표회장 이취임식 및 직장선교 대상 시상식을 지난 11일 서울 중구 남대문교회(담임=손윤탁목사)에서 진행했다. 이 자리에는 이사회, 고문 및 지도위원, 실행위원과 전국 42개 지역연합회 및 44개 직능연합회 리더 160여 명이 참석했다.   주대준 신임 이사장은 청와대 경호차장 및 카이스트(KAIST) 부총장, 선린대 총장, CTS 인터내셔널 회장을 역임했으며 한직선 회장으로 2차례 유임하여 3년간 헌신했다. 현재 콩코디아 인터내셔널 유니버시티 이사장, 세직선 대표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이사장은 “오늘날 직장선교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사명이다”며, “40주년을 한해 앞두고 이땅의 직장선교의 지경을 넓혀나가도록 합력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온고지신 옛것을 익혀 그것을 미루어 새로운 것을 더 안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며, “39년간 한직선의 핵심가치인 직장선교 기본강령과 실천강령을 기본으로 4차 산업혁명시대를 선도하는 선교전략을 잘 세워 대한민국을 넘어 글로벌 직장선교의 모델이 되도록 지혜와 힘을 합쳐나갈 것이다”고 당부했다.    이를 위해 “2020년을 기점으로 전국 100개 도시 지역연합회, 100여 개 직능선교회의 목표를 가지고 복음의 지경을 넓히고 세계로 도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손영철 신임 대표회장은 한전 영동·영흥화력 신우회장과 한직선 이사 및 총괄본부장을 작년까지 역임하고, 현재 국제한인경제협력회 과학기술위원장, 선한목자교회(GSM) 한국후원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교계종합
    • 일반
    2020-01-20
  • 세계터미널선교회 대표 조창래목사
      세계터미널선교회 대표 조창래목사는 오는 30일 영락교회에서 발기인 모임을 갖고 모세전도단과 여호수아전도단 활성화를 위한 활동에 들어간다.   이번 모임을 소개한 조목사는 모세전도단의 취지에 대해 “은퇴는 교권과 신학을 넘어 민족구원의 사명으로, 모세의 지도력으로 옮겨가는 사건이다.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칠 수는 없다. 세상은 ‘은퇴’를 인생의 끝으로 보지만, 믿음에는 은퇴가 없다”며, “주여! 주님과 만난 첫사랑의 장소, 갈보리로 가겠다고 선포해야 한다. 첫 신앙・첫 믿음・첫사랑을 회복해야다”고 강조했다.   또 여호수아전도단을 소개하며 “세상의 건달들도 의리가 있다. 하물며 우리는 바울에게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이다. 이제 바울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 때이다”라며, “양화진에 잠든 선교사들의 소원은 ‘한민족의 복음화’였다. 5천만 민족전도 프로젝트, 3천 교회개척은 선교사들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것이다”고 말했다.   특히 “바울의 소원은 자기 민족인 유대인의 구원이었다. 바울 복음의 완성은 바로, 3백만 디아스포라 선교사와 ‘한세유이(‘한민족은 세계로, 유대인은 이스라엘로! ‘알리야운동=이스라엘 귀환’)’를 바탕으로 한 ‘하이엘’을 통하여 성취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아무리 큰 교회도 작은 교회들이 무너지면 순차적으로 다 무너지게 되어있다. 현재 한국에서 출석 성도의 수가 500명 이상인 교회는 2,600여 개라고 들었다. ‘민족구원’의 귀한 사역에 먼저 대교회가 나서 준다면 참으로 좋겠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모든 교회와 성도 또한 기쁨으로 3천 명의 목회자를 세우는 데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이밖에도 조목사는 하티크바 2020 구국기도회를 위해 각 교단 대표의 사모와 단체장 사모들을 한자리에 모아 당일 영락교회에서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조목사는 “수년 전부터, 목회자 사모들이 연합구국기도회를 가지면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사모로 조직된 귀한 공동체들이 있고, 교단적으로도 수많은 사모 모임이 있다”며, “민족구원도 통일한국도 세계인의 구원도 사모님들의 눈물 어린 기도 때문에 가능하다. 진정한 교회부흥은 사모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남자들은 아무리 좋은 계획이 있어도 ‘연합’에는 서투른 편이다. ‘뜻은 좋네, 그래도 쉽지는 않을 텐데?’ 하면서 계획 짜는 데 1년, 교단 동의를 얻기까지 1년, 모이는 데 1년이 걸린다”며, “이러다 보니 정작 실행하려고 보면 시기를 놓치는 때가 많다. 어떤 좋은 계획도 먼저 사모가 나서지 않으면 실행되기까지가 쉽지 않음을 본다”고 설명했다.   특히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위기를 보면, 위기 앞에서는 강해지는 것이 어머니이다. 이 시대는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사무엘이 필요하다. 사모들이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를 위해 울 때,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과 같은 영적 지도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고 주장했다.
    • 신학/선교
    • 국내선교
    2020-01-20
  • [선교사 통신] 선교사 추방에 리더쉽 혼란 가중
    T국의 교회들은 조금은 혼란한 상황 속에 있다. 얼마전의 한국 선생님 한 분이 순교하신 일들을 비롯해, 계속되는 외국인 지도자들의 추방으로 인해 많은 공동체에서 급하게 현지인 리더쉽들이 세워지고, 추방되지 않은 곳에서도 여러 상황에 대비해 현지인들로 리더쉽이 꾸려지고 있다.    그로인해 물러난 지도자들과 새로운 현지 리더쉽들의 대립이나, 새로운 리더쉽과의 갈등으로 따로 교회를 개척하는 등의 모습들이 새어나오고 있다. 이런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그분은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믿으며, 어려움을 통해 더욱 견고해지는 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할 때이다.   수양관은 여름부터 11월까지 계속되는 손님맞이로 바빴다. 현지인 뿐만 아니라 자국에서 모임을 갖기 어려운 주변의 국가들의 지체들도 이곳에서 모임을 갖는 것을 보며, 수양관이 사용되어짐에 감사할 뿐이다. 또한 기도와 영성 사역을 계속 준비하며, 아침마다 있던 기도모임을 오후에까지 확대하며 곧 수양관에 올 지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순서들을 하나씩 준비하고 있고, 내년 2월에는 영성 세미나도 준비중에 있다. 이 사역들을 함께하기 위해 작년부터 꾸려진 팀이 우리 눈에는 여전히 부족하게 보이고, 일이 더디게 진행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한 걸음을 함께 내딛으며 그 분의 일하심을 구할 뿐이다.   12월 중순에는 한국 순회상사의 복음사관학교에서 단기팀이 왔다. 이곳에서 맞는 첫 단기팀이기에 긴장과 흥분 속의 1주일을 지내며, 겸손히 일손을 돕고 현지 교회를 섬기며 기도를 쌓는 복음으로 무장한 용사들로 때를 따라 공급하는 신실하신 그분의 은혜를 다시 경험하게 되었다.   지난 여름에는 바울 회사의 전체 수련회로 인해 고국을 한달 반정도 다녀갈 기회가 있었다. 소중한 동역자들과의 만남과 수련회 참석은 우리가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와 목적을 다시 깨닫게 해 주었고, 새로 충전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로운 생명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아기의 소식에 함께 계획했던 일정들이 어긋나게 되었지만 늘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주님의 계획을 신뢰한다.    T국과 한국 중 어디에서 출산할지 고민하던 중 모든 것이 낯선 진료 및 출산 환경으로 스트레스가 심해져, 아이와 산모를 위해 고국에서 출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시간동안 수양관을 비우기 어려워 남편 이싼은 T국에 남고, 아내 인지와 아이들만 한국에 돌아가 지내기로 결정되어, 12월 중순부터 한국과 T국에 떨어져 지내고 있다. 이싼은 3월 첫 주로 예정된 출산일에 맞춰 2월 말에 한국에 와 5월 초에 모두 함께 T국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간구했듯이, 우리도 세월이 흐를수록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지금도 우리에게 베푸신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 더 깨닫게 되기를 기대한다.  /신00·이00 중동T국선교사
    • 신학/선교
    • 해외선교
    2020-01-20
  • [쉽게 배우는 한의학 7] 건선의 치료약은 어떤 종류를 사용하는가?
      지금까지 잘 낫지 않고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건선은 환자 ‘개개인의 면역기능’의 교란이 주원인이며, 여기에 유전, 환경, 음식적인 부분이 더해져서 발병 확률을 높인다는 설명을 했으며, 건선의 종류 및 치료방법과 지나치게 만연하여 오남용하는 대표적인 약물인 스테로이드제의 부작용과 피부에 좋다는 비타민 D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건선의 치료에 사용되는 외용약의 종류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고, 스테로이드제의 부작용에 대하여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1)Calcipotriol(상품명, 다이보넥스) 건선 치료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다이보넥스(calcipotriol)는 건선 치료약제로 미국 FDA의 승인을 받은 비타민D 유도체로 0.005% 농도의 크림, 연고, 용액의 세 가지 형태로 사용된다. 하지만 국소 도포 후에 가려움증, 화끈거림, 발적, 광과민성이 발생할 수 있으며, 장기간 사용하면 피부가 얇아지거나 피부 건조증이 생길 수 있다.   (2) Tazorac(상품명, Tazarotene) Tazarotene은 건선, 여드름, 일광에 의한 광노화의 치료제로 미국 FDA의 승인을 받은 비타민A 유도체이며 0.05%와 0.1% 농도의 젤과 크림형태로 사용된다. Tazarotene은 각질형성 세포의 증식과 분화를 조절하여 항염증 작용을 수행하여 건선 치료에 효과를 나타낸다.   (3) 타르와 타르 유도체 콜타르, 안스랄린, LCD(Liq uor carbonis detergens)와 같은 타르 유도체는 세포분화를 억제하는 작용을 가진 국소도포제의 하나로 건선의 치료에 사용되지만, 피부 자극 증상이 있을 수 있으므로 짧은 시간 사용한 후에 잘 씻어 주어야 한다.   (4) 프로토픽과 엘리델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하여 비스테로이드제인 엘리델이나 프로토픽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제제도 부작용이 있다. 이들은 간찰부 건선이나 피부가 얇은 부위에 주로 사용되지만, 피부 자극이나 피부를 찌르는 듯한 증상이 생길 수 있으며, 이 증상은 사용 후 수 일 동안 지속되기도 하지만 전신 흡수는 잘 생기지 않는다.   체내에서 정상적으로 분비되는 부신피질호르몬인 스테로이드제는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고, 불가피하게 스테로이드제를 사용한다고 해도 항상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은 또한 아니며, 잘못 사용하거나 지나치게 많은 양을 사용할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이므로, 참고해서 정확히 사용하여야만 한다.   스테로이드제의 신속하고 강력한 효과에 대해서는 이견을 가질 수 없겠지만, 그 신속한 효과의 매력에 빠져서 빠르고 강력한 치료만 찾다 보면, 나의 피부는 어느새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고 더구나 전신의 여러 부위에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에서야 후회하면서 스테로이드제의 사용을 중지하려고 하지만, 탈스테로이드의 반응은 의외로 크고 심각해서 그 고통은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고, 그래도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스테로이드제는 이렇게 신속하고 강력한 효과가 있지만, 반면에 그 부작용도 아주 심각하여 스테로이드제를 흔히 ‘양날의 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치료 방법의 선택은 환자 자신의 선택이므로 그 책임도 혼자서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스테로이드제의 부작용은 체내의 정상적인 부신피질호르몬 분비기능이 퇴화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부신피질호르몬의 기능이 사라지는 것이다. /경희신창한의원 원장
    • 오피니언
    • 칼럼
    2020-01-20
  • [실로암] 건강한 교회문화
      요즘 날로 기독교가 극우화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본다.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기독교는 왜 이렇게 극우화되고 있는 것일까. 교회의 극우화는 어쩌면 기독교 논리가 향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렇다면 기독교가 지향하고 있는 논리는 무엇인가에 내 관심이 쏠렸다.   교회가 극우화 성향으로 치닫는 원인은 눈에 보이는 프랙티컬한 요소들, 즉 정치, 경제, 자본의 원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사상적으로 극우적이다. 우리가 우파와 좌파를 경계지을 때 보통 ‘자유’가 그 중심에 있다. 물론 우파가 ‘자유주의’라는 경제 패러다임을 필두로 ‘자유’라는 개념을 우파의 개념으로 가로챘지만 여전히 좌파는 ‘자유’를 지향하고 우파는 ‘자유’에 경색되어 있다.   내가 말하는 ‘자유’란 모든 흐름에의 개방성을 의미한다. 지면의 하이어라키, 즉 높이라는 포텐셜 에너지를 조작하면 수로를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물의 흐름은 이미 계획된 포텐셜 에너지에 의해 제약된다. 이러한 자유의 통제와 제약으로부터 하나의 조직이 구성되고 그 조직이 지향하고 있는 통제된 포텐셜 에너지의 총양과 분포를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 우파의 핵심 기조이자 대부분의 기독교분파들 논리의 핵심이다.   그러나 좌파는 이미 기획된 흐름을 자유롭게 풀어 헤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조직된 포텐셜 에너지를 자유롭게 해방시켜야만 하며, 그 때 우선시 해야만 하는 작업은 높이라는 지면의 위계질서를 평면의 수평구조로 전환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직구조를 수평구조로 전환하면 이제 물의 흐름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물론 어떤 이는 ‘순수평면’을 상상하고 물이 멈추어 썩어버릴 것이라 말하지만 곡률=0의 평면을 우리는 실증적으로 도저히 구현할 수 없다. 엔트로피=100의 무질서는 국소적으로, 양태적으로만 성취되며 현상계는 늘 곡률과 포텐셜 에너지, 그래서 흐름과 운동으로 가득차게 된다. 기독교는 이러한 자유로운 흐름을 통제하고자 한다. 통제의 제일원인으로 항시 신을 제시한다. 우리가 왜 구질서를 따라야만 하는가라고 묻기 시작할 때마다 기독교는 “그것이 신의 뜻이다. 신의 명령이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언제나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위계상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 신을 들먹거렸고, 이러한 습성이 아예 기독교 자체 내에 내재되어 이제는 자신의 위치를 점유하려는 욕망을 신에게 투사한다는 간단한 자기반성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듯 하다.   그러나 나는 이내 이러한 기독교의 모습은 단지 로마에 의해 제국화되고, 가톨릭에 의해 교조화 된 기독교일 뿐이라는 것에 생각이 이르렀다. 우리가 신을 예수를 통해 보기에 기독교인이라 불리고 있는 것이 일리가 있다면, 이러한 기독교는 결코 그 어떠한 위계질서도 보존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지 우리를 멈춰있게 하지 않는다.   예수가 그토록 거부하려 했던 경직된 율법주의는 잘 통제된 시스템이었고, 당시 유대인들의 자유를 말살하는 감옥과 같은 구조였다. 잘 조직된 위계질서에 의해 조작된 포텐셜 에너지에 자유를 불어넣는 것, 사람들이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생각하는 것에 자유를 불어넣는 것, 그것이 예수의 뜻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기독교의 기본정신은 아닌 것일까.   /연세대 신학과 일반대학원 재학생
    • 오피니언
    • 칼럼
    2020-01-2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