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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7.0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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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기천교수.jpg▲ 소기천교수
 
예수말씀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가 그 스승 위에 있지 않다. 그러나 잘 훈련을 받을 때, 모든 이가 그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안타깝게 이 시대의 사표가 되는 참된 스승을 찾고 있다. 맹인이 구덩이에 빠진다는 표현을 오늘에 적용한다면, 맹인이 맨홀에 빠진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런 비유적인 예수말씀은 아주 재치 있고 내러티브적인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이다.

이 말씀을 신학교 교수는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으로 흘려버리지 말고 귀담아 들어야 한다. 흔히 신학교의 40대 교수는 갓 배운 실력을 자랑하느라 자기도 잘 모르는 신학을 가르친다고 한다. 50대는 아무 쓸데없는 신학을 가르친다고 한다. 60대는 기억력이 감퇴하여 생각나는 신학만 가르친다고 한다. 우스갯소리치고는 너무나도 안쓰러운 이야기이다. 이런 무책임한 신학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교 교수는 총장에게 책임을 돌리고, 총장은 교단에게 책임을 돌린다. 다시 말해서, 교단이 갈등하고 분열되고 심지어 정치적으로 금권선거가 판을 치니까 그 어려움이 신학교에 고스란히 밀려온다는 치졸한 변명이다. 그러나 정작은 그 반대이다. 대부분 서구신학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신학교의 교수가 동성애를 지지하고, 제3의 성이란 이념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서 인권에 동조한 나머지 급기야는 사회적 젠더까지 인정하면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가 둘 다 맨홀에 빠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잘못된 이념과 신학을 신학생에게 가르치니까,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독약을 먹이는 셈이다. 이런 신학생이 교회현장에 나가서 10년 후에 교단을 어지럽히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참담함으로 인해서 신학생도 자신의 이념으로 무장하고 있기에 갈라디아 6:6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는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오히려 스승을 고발하고 징계를 요구하는 일까지 다반사가 되어 버렸다. 신학교는 이런 고발과 징계 요구를 나무라기보다는 지지하고 해당 스승을 일사천리로 징계하는 일에 보직교수들과 이사들이 앞장서고, 이런 신학생을 신학교에 보낸 학부형과 소속 교회의 담임목사는 이런 패륜을 나무라기는커녕 자기 자식의 장래와 목회가 막힐까봐 애써 쉬쉬하고 심지어 두둔하기까지 하는 현실이 참으로 암담하다.

바울은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면하기도 한다. 디도서 4장을 읽어 보라. 특히 3절에 명시된 것처럼,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있는 것이 오늘의 어지러운 신학생의 모습이다. 신학생은 자기가 몸담고 있는 신학교와 교단을 불신하고 저마다 일그러진 이념 단체나 이념으로 무장한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신학의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오늘 신학교가 처한 현실이다. 예수말씀은 ‘훈련을 잘 받을 때 제자가 스승과 같이 될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권면한다. 여기에 중요한 전제가 있다. 제대로 된 스승이 먼저 있어야 한다. 우리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이 있듯이, 곧 신학교가 먼저 바로 서야 신학생이 훈련을 잘 받고, 그들이 공급되는 교회와 교단이 새로워진다는 순서이다. 

교수나 총장은 더이상 교회에게 핑계를 돌려서는 안 된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부족함에 용서를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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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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