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댓글 0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밴드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기사입력 : 2019.05.21 11:26
  • 프린터
  • 이메일
  • 스크랩
  • 글자크게
  • 글자작게
소기천교수.jpg▲ 소기천교수
 
황금률에 이어서 예수께서는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였다면,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까지도 그들에게 …하지 않느냐? 그런데 만일 너희가 너희 형제들만 사랑하면,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말씀으로 차별화를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황금률을 일반화하여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예수말씀의 진가를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 것처럼, 이 말씀도 예수사랑이 지닌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예수말씀이 세리와 이방인을 멸시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고 두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던지는 질문은 예수말씀이 지닌 수사학의 특징 하나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곧 상 받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자기들끼리만 사랑하고 이익을 나누어 갖는 이른바 자기중심적 사랑은 이기적이기에 아무런 보상도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는 말씀은 수사학적으로 청중들의 반감을 불러오는 화법이다. 이 말을 연거푸 함으로써 예수께서는 이웃을 외면하고 자기 사람만을 챙기는 인간의 일그러진 일상적인 사랑에 충격을 주신다.

예수께서는 사랑이 인종, 혈연, 지연, 학연, 지역 등을 넘어서 편만하게 모두에게 나아가야 갈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한 율법사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읽어보라. 어느 특정인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계와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사랑이다. 누구나 자기 몸을 사랑하지만, 일반적으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고작해서 이웃이 ‘세리’와 ‘이방인’처럼 자기들끼리만 형제라고 생각하고 나누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상을 받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

이슬람의 형제사랑은 단편적이고 자기 종교만을 감싸는 배타적인 사랑을 꾸란이 노골적으로 두둔하면서 ‘우리는 모두 무슬림’이라는 말이 이슬람교에서 흔하게 쓰인다. 이 말대로 무슬림은 집단 종교적 세력화를 도모하려고 철저하게 타 종교를 등한시한다. “이교도의 목을 쳐라‘는 말이 꾸란에 빈번하게 나오는데, 복음서에 나오는 이방인들에 익숙한 성도들은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지만, 사실 꾸란에서 이교도는 기독교인들을 가리킨다. 철저하게 기독교를 배제하고, 말살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단 한 명이라도 이슬람 사회에서 기독교 개종자가 나오면 명예살인까지도 일삼는 것이 이슬람의 일그러진 형제 사랑이다.

이슬람의 성전 곧 거룩한 전쟁이라 일컫는 지하드를 아름답게 미화하는 이슬람 학자들이 있지만, 이는 분명한 거짓 선전이다. 이슬람의 지하드가 아름다운가? 결코 아니다. 지하드의 어원인 아랍어 ‘자하다’는 ‘분쟁’이라는 뜻이다. 물론 ‘전쟁’을 뜻하는 아랍어는 지하드가 아니라 ‘키탈’이나 ‘하브’가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지하드에는 군사적 의미가 강하다. 이슬람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무력이나 군사적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지하드이다. 이런 무서운 폭력적인 지하드가 이슬람의 형제 사랑으로 둔갑하여 타 종교를 철저하게 배격한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오늘의 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16)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