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라르에 의하면 복음서는 또 하나의 신화가 아니라, 신화를 죽이는 텍스트다. 지라르는 마침내 신화의 수수께끼를 ‘해독’했다.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도 자신의 구조주의 인류학의 관점에서 신화를 해독하려고 했지만, 지나치게 신화를 언어구조주의적으로 파악하다보니 신화가 은폐하고 있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알아채지 못했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신화는 곧 언어다. 그는 신화를 언어학의 관점에서 해독하려고 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의 강한 영향으로 언어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오이디푸스신화를 해독하려고 했지만, 오이디푸스를 지라르처럼 은폐된 희생양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지라르의 저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변증>의 2부의 제목은 「신화의 수수께끼」이며 3부의 제목은 「십자가의 승리」이다. 지라르에 의하면 기독교는 ‘신화의 계몽’이며, 신화가 은폐하고 있는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계몽’이기도 하다. 신화가 집단폭력의 ‘수동적인 반영’이라면, 유대-기독교는 희생양과 모방적이고 폭력적인 군중을 만들어내는 집단 장치에 대한 ‘적극적인 폭로’다.
지라르는 신화는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 「복음서는 신화적인가?」라는 논문에서 지라르는 “세계의 신화들이 복음서를 해석하는 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복음서가 신화들을 해석하는 방법을 계시한다”고 말한다. 옛날부터 이교도 옹호자들은 복음서의 장면과 신화의 장면들의 ‘유사성’을 내세워 ‘기독교의 특이성’을 부정해 왔다. 디오니소스, 오시리스, 아도니스와 같은 반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연상케 하는 집단 형벌을 받았다. 이런 폭력은 사회의 무질서가 절정에 달하거나 질서 자체가 아예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데, 그 뒤에는 일종의 ‘부활’인 그 희생양의 당당한 재등장이 이어진다. 이 희생양은 다시 질서를 세우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신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신격체로 격상된다.
창세로부터 은폐되어온 희생양 메커니즘에 관해 “이런 인류학적 진실이 밝혀지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꼭 필요했다. 그것은 성령의 선물이다. 십자가만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내림으로써 희생양의 무고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 사회학적 초월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참된 초월을 성령론적 차원에서 찾는다. ‘십자가의 해석학’이 ‘신성한 폭력’을 폭로하고 전복시키고 치유한다.
지라르에 의하면 박해의 문서로서 신화는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은폐하고 있다. 복음서는 이러한 박해의 문서인 신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복음서는 또 하나의 신화로서 읽혀지기도 한다. 박해의 문서인 신화와 계몽의 문서인 복음서가 구분 없이 이해되어왔다. 지라르에게 있어서 복음서는 신화의 문자적인 정반대다. 십자가에 달리신 자의 수난에서는 신화와 정반대의 것이 발생했다. 예수의 ‘처형의 신성화’는 발생하지 못했다.
지라르는 “나의 작업은 십자가의 인류학을 위한 하나의 노력이며, 이는 정통 신학을 복원시키는 것이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모든 연구들은 십자가의 인류학을 제시함으로 신학자들을 돕는 것에 헌신되어 있다”고 말한다. 또 “종교적 상대주의는 다른 상대주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형이상학적 확신이다”고 그 동안 풍미했던 종교다원주의와 문화상대주의적인 담론들을 비판한다.
어거스틴의 사상과 지라르의 분석 사이에는 유사성이 존재한다. 그는 자신이 말해야 하는 것의 3/4이 이미 어거스틴의 사상에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지라르는 자신의 이론의 가장 잘 알려진 핵심들은 이미 성경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자신은 ‘일종의 주석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교 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