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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8.0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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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은 이제 결혼할 젊은이들이 없다. 가물에 콩 나듯 젊은이가 한두 명 있다 해도 결혼할 생각을 않는다. 내가 처음 목회를 시작하던 70년대 후반이나 80년대에는 한 해에 열 번은 혼인 주례를 했다. 어디 주례뿐인가! 아이 낳으면 이름도 지어야 하고, 백일과 돌, 초등학교 갈 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나와 취직을 할 때까지, 그야말로 한 인생을 풀 케어했었다. 그게 목회에서 누리는 또 하나의 보람이며 기쁨이었다.

지난주 토요일에 동네 청년의 혼인예식 주례를 섰다. 한 교회에 40여 년 있다 보니 교인이 아니라도 동네사람들의 혼사나 장례에 불려간다. 

“옛날 어른들은 치마나 두루마기의 옷고름이 길었다. 긴 것은 비단 옷고름뿐만이 아니었다. 머리카락도 길었고, 수염도 길었고, 치마에 달았던 장식도 길게 늘어뜨려야 했다. 아름다운 여자를 말할 때 요즘처럼 얼굴이나 몸매를 말하지 않고 ‘머리가 삼단 같다’고 하거나 ‘탐스런 머릿결’이라고 했다. 긴 수염은 어른다움, 기백과 기품, 권위, 남성다움의 상징이었다. 긴 옷고름은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여유’였다. 마음의 여유였고 삶의 여유였고 생각의 여유였다. 옷고름, 머리카락, 수염의 길이는 생각이나 판단이나 마음이 길이었다. 

그런데 산업근대화가 되면서 긴 옷고름도, 수염도, 머리도 짧게 잘랐다. 기계에 옷고름, 머리카락, 수염이 휩싸이면 안 되니까 그런 것이다. 산업사회는 길게 생각할 수 없는 시대였다. 빨리빨리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짧아진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이렇게 변화된 산업 환경에 따라 길었던 것들을 짧게 자르다보니 그만 우리의 옷고름이 의상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나 삶에서도 가위로 무자비하게 싹둑싹둑 잘렸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긴 옷고름을 잘랐다는 말은 우리의 여유를 잘랐다는 말과도 같다. 생각, 말, 행동과 의식의 여유를 잘랐다는 말이다. 

이는 느긋하고, 여유 있게 불 때서 밥하고 뜸들이고 누룽지를 긁을 줄 알던 민족이 조급하고, 성급한 사람들로 바뀌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른들도 그렇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급하게, 짧고, 얕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이시대의 젊은이들을 비유하길, 엘리베이터라고 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확 밀려들어가고, 확 쏟아져 나오는 것을 빗댄 말이다. 연애도 빨리빨리 하고, 이별도 빨리빨리 한다. 뭐든 빨리 결정하고 빨리 결단 낸다. 마음의 여유와 삶의 깊이를 잃어버린 것이다. 긴 옷고름을 싹둑 잘라 버린 탓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긴 옷고름이 달린 한복을 입고 생활하라거나, 머리카락을 다시 길게 기르고 지하철을 타고 집안 살림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신랑의 턱시도가 긴 것처럼, 신부가 긴 옷고름의 한복이나 웨딩드레스를 입듯이 마음속에 긴 옷고름 하나 장만 하라는 말이다. 이제부터는 성급하고, 짧고, 얕게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치 입안에 큰 눈깔 사탕하나를 물고 그게 다 녹을 때를 기다리듯 긴 호흡으로 살라는 것이다. 결혼은 입안에 넣은 눈깔사탕을 와드득 와드득 깨물어 먹는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남들이 살아가는 것과는 다른 은밀한 여유를 갖는 것, 그것이 그대들의 결혼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주례 없는 셀프웨딩을 한다니 나의 저 ‘주례의 말씀’도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춘천 성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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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결혼, 긴 옷고름 하나 장만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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