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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5.2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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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박병열.jpg▲ 박병열목사
 
조선 선비들이 좋아하는 그림이 있다. 절벽에 서 있는 소나무다. 절벽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소나무에서 강인한 생명과 선비의 절개를 보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는 실패의 횟수가 아니라 도전의 횟수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몇 번의 실패에는 일어서지만 수십 번의 실패나 고난을 만나면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다. 벽을 만나도 그 벽을 넘어선다.

링컨은 27번이나 크고 작은 실패를 맛보았다. 그는 넘어질 때마다 스스로 ‘나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새로 시작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며 일어나 미국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는 인생의 어떤 벽도 믿음으로 넘어설 수 있다.

중풍병자는 삼중 벽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벽은 죄책감이다.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책감은 창살 없는 감옥이다. 죄책감은 장발장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경감 자베르와 같다. 경감 자베르가 말했다. “한번 도둑은 영원한 도둑이야. 나는 너를 끝까지 쫓아 다닐 거야” 만일 장발장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새롭게 살겠다고 하면 그의 죄책감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 같은 사람이 교회 다닌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말고 그냥 살아” 예수님은 정죄하는 분이 아니다. 용서하는 분이다. 믿음으로 이 죄책감의 벽을 넘어야 한다.

또 한 가지 벽은 사람의 벽이다. 그가 친구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사람들 때문에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다. 큰맘 먹고 교회 나올 때 사람들이 환영하고 손뼉 치면 얼마나 좋겠는가 때론 그 반대일 수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 만나러 교회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만나러 오기 때문이다.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마음을 다져 먹고 다른 길을 찾았다. 지붕으로 올라간 것이다.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렸다. 그들은 삼중 벽을 믿음으로 넘었다. 불치병을 고침을 받았다. 믿음은 벽을 넘는다. 생명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물은 멈추지 않는다. 벽 앞에 고인 물은 썩은 물이다. 죽음의 늪이 된다. 살아있는 물은 벽을 만났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간다.

살아있는 믿음은 벽을 넘어 주님이 계신 곳을 간다. 인생의 환란 고통이 그대의 희망의 가지를 자른다고 해도 낙심하지 마라. 나뭇가지가 잘린다고 끝난 게 아니다. 절망의 가지에서 희망의 싹이 돋아난다. 믿음에는 절망이 없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왜 낙심하고 절망하는가.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서 답을 찾기 때문이다. 중풍병자가 자신의 죄책감과 환경만 바라보았다면 절망이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주님을 바라보았다. 인생에 시선의 방향이 중요하다. 바라보는 대로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답이 없는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이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살길이 열린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처럼 하나의 벽을 넘어서면 또 다른 벽이 막아설 수 있다. 놀라거나 낙심해선 안 된다. 믿음의 시험지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강의〉로 유명한 미국 카네기 멜론대학의 랜디 포시 교수는 말했다. “벽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하는지 가르쳐 준다. 간절히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벽은 ‘스톱’이다” 그렇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벽은 절망이지만 믿음의 사람은 벽에서 희망을 본다. 벽을 넘는 믿음이 주님의 인정을 받는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이 나의 믿음을 인정하시면 사람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가 해결된다. 
/장유소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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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믿음은 벽을 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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