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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3.1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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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23_8178_103.jpg▲ 전계헌목사
 
대한민국의 국민 뿐 아니라 온 지구촌이 집중하고 있었던 하노이 북미대화가 기대했던 큰 소득을 얻지 못하고 유산되고 말았다. 다시 만날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지만 북미 두 지도자는 상대가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쉽게 드러내지 않은 진실을 파악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북한은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적당한 선에서 북한 땅에서 가장 급선무인 경제제제를 풀어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속셈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미국은 북한의 구체적이고 완전한 핵 폐기 로드맵이 없이는 경제제제를 풀려는 일은 한 치의 양보도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축하연 같은 식사도 공동선언도 없이 양 정상은 기약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북한의 김정은은 베트남부터 북한까지 그 수천리 길을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예측 불가하다는 트럼프는 역시 사업가 기질로 협상의 대가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전문가들이 이미 분석하고 종합하여 예측한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새벽마다 기도하는 신실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대로 모든 일은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대화는 필요하다. 국가 간의 대화나 어느 집단의 대화 그리고 개인이나 구성원들 간의 대화는 항상 필요하다. 특히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한 구체적인 대화가 절실한 때다. 한기총과 한교연이 통합을 위해 대화를 하고 있다니 이는 일단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대화는 스킬이 필요하다. 청각 할 수 있고, 감각 가능한 대화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어야 대화는 가능하다. 즉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 진정성이 대화를 이룰 수 있고, 그 대화에서 결과물을 함께 얻어낼 수도 있다. 이번 북미 정상 간의 대화에서 크게 아쉬웠던 부분은 드러내지 않은 진정성이었다. 내 마음을 감추고 상대를 어리석게 보아 대충 얼버무리려는 방식은 어린아이들 세계에서도 통하지 않는 일이다.

더욱이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이 대화하여 연합체를 만들려고 한다면 더욱 힘들게 성육신적인 자세와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비하에 대해 강조하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한다. 또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씀에 순종해야만 한다. 자기를 낮추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진정성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 또 거기서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목적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만의 대화가 아니라 진솔하고 섬기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현대철학자 하버마스(J. Habermas)는 “대화는 인격적인 소통이다”고 정의했다. 그런 노고 끝에 결과를 도출해 낸 것이 평화의 선물이어야 한다.

엄마가 아들을 품에 안는 기쁨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10달의 수고와 인내 그리고 출산의 단말마적 고통을 겪어야 누리는 즐거움이다. 농부가 수확의 환희를 누리는 것이 어찌 그리 쉽겠는가. 이마에 땀을 흘리고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 않던가. 평화도 물론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을 거듭하여 쟁취하는 것이다. 대화의 기술이 소통을 가져오고, 그 노력의 열매가 평화를 이루도록 이 땅의 지도자를 위시한 모든 국민이 함께 지혜를 모아야한다.

/전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사)미래와 도약 이사장·익산동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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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와 소통 그리고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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