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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신촌교회서 학술대회 개최

"'재림신앙 ' 전파로 가장 먼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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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3.0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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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탄압과 교인들의 애국·신앙 연계해 소논문 제작

성결교회, 고난의 역사와 함께하며 순수복음 전했다


8확대.jpg▲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일제 강점기 당시 성결교회의 활동을 알아보는 학술대회를 갖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힘썼던 선배들의 신앙을 본받자고 다짐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장=윤성원목사)는 지난달 26일 신촌교회(담임=박노훈목사)에서 성결교회 3·1운동 100주년기념 일제의 식민통치와 한국성결교회란 주제로 학술대회를 갖고, 일제 강점기 당시 성결교회의 활동을 되짚었다


이날 학술대회에 앞서 열린 기념예배는 부총회장 류정호목사의 사회로 시작되어 부총회장 홍재오장로의 기도, 서기 조영래목사의 성경봉독, 윤성원총회장의 3·1정신과 성결정신이란 제하의 설교가 있었다. 윤총회장은 성결교회는 일제 식민 통치 아래서 강제 해산되는 아픔을 갖고 있다. 성결교회는 민족의 아픈 사건이 이어질 때 시작되어 민족의 고난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순수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전하고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사회 각 위치에서 성결한 삶을 살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가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며 소망이 없다는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지난 우리 민족의 죄악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옵소서 3·1운동과 성결의 정신을 계승하는 한국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이 땅의 희망이 되는 성결교회가 되게 하옵소서란 제목으로 함께 합심기도했다


이정익목사(기성 증경총회장)는 격려사에서 우리는 장로교나 감리교와 달리 후발주자로 주연이 되지 못하고 조연이 됐다. 민족대표 33인의 이름 속에 우리 교단이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빛나는 조연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재림신앙을 뜨겁게 펼쳤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가장 먼저 미움을 받는 타겟이 되어 핍박을 받았고, 교단이 해체가 되고 교회가 문을 닫는 수난을 당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이 영광이었고 십자가를 지는 사건이었으며, 선배 목회자들과 성도들 위대했다는 생각을 한다고 밝혔다. 이후 부서기 이봉조목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총회임원 및 평신도단체장이 나라사랑 실천 강령선포를 했다. 이후 만세삼창을 하고, 증경총회장 장자천목사의 축도로 예배가 마무리 됐다.


이후 정병식교수(서울신대)의 사회로 진행된 학술대회에서는 기독교성결교회 연구프로젝트인 일제의 식민통치와 한국성결교회가 발표됐다. 이 연구에는 성결교 소속인 역사학자 8명이 참여해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일본의 탄압과 성결교인들의 애국과 신앙을 연계해 8개의 소논문을 만들었다


박창훈교수(서울신대)일제의 무단통치와 성결교회의 3·1운동이란 주제로 “3·1운동 때 성결교인의 참여를 보여주는 것 가운데 최근 밝혀진 내용은 동양선교회 대표인 찰스 카우만과 경성성서학원의 원장 존 토마스의 활동이다, “이들은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3·1운동을 무저항 혁명으로 평가하고 있다.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내용을 분석하면서, 당시 한국의 상황을 식민체제를 넘어 시민의식이 표현되었다는 역사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특히 3·1운동을 탄압하는 일본의 만행을 미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세계에 알리고, 일본 정부에 압력을 행사할 것을 건의하였다고 밝혔다


이어 박교수는 성결교회의 독립운동 참여에 대해 한국성결교회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상준은 밀양으로 내려가 강시영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모의하였다. 이로 인해 김상준과 강시영은 일본 헌병보조들에게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곽진근은 전도부인으로 활동하던 철원에서 3·1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을 벌였다고 설명했다


박영범박사는 신사참배와 한국성결교회란 주제로 현대교회론적 관점에서 발표했다. 그는 신사참배는 일본의 고유한 민간종교인 신도의 사원, 즉 신사에 참배하라는 일본의 정책을 지칭하는 말이다 신사참배는 일본의 국체인 천황제를 지배체제로서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 종교를 수단으로 삼았던 일제의 교활한 통치도구였던 셈이다, “각 교단과 교파의 합동과 신민화 정책의 수용에 앞장서게 되었고, 모든 신문과 잡지에 황국신민서사를 수록해야만 했다. <활천>(성결교 잡지) 또한 이런 일제의 정책을 수용하여 따랐으며, 성결교회 지도자들의 친일적 글이 실리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박사는 물론 성결교회를 지키고 복음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한 타협이라 할지라도, 이는 교단의 아픈 역사로 분명히 남아 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에 교단이 굴복하자 성결교인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재림사상을 확고한 믿음으로 간직했던 유산들이 있다. 강경성결교회의 저항, 박봉진목사의 순교 등 사건이 적극적인 저항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또한 김성호박사(서울신대 강사)일제 말 한국성결교회와 일본의 식민통치 저항복종의 관점에서란 주제로 일제치하의 한국성결교회는 목회, 부흥, 복음 전도만을 목적으로 하는 복종일면만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고 신앙고백문제에 대해 저항해야 했던 순간에는 소극적이었던 아쉬운 면도 있었지만 대부분 적극적인 저항을 했다, “신사참배 문제와 성결교단 강제해산 과정에서 적극적 저항보다 소극적 저항을 보여준 선배들을 향해 왜 좀 더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느냐를 섣불리 책망하려 드는 것은 한국성결교회의 역사를 대하는 올바른 접근은 아니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특히 성결교회는 일제 치하에서 고난을 경험한 교회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견디고 이겨냈을 때 얻어지는 열매가 무엇인지 잘 아는 교회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여기에서의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타자의 고통과 고난의 현장을 찾아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일제 치하의 복종저항의 순간을 되짚어 보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한국성결교회의 저항복종의 대상과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지 찾기에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에 앞서 열린 간담회에서 윤성원총회장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가 맞는 3·1운동의 의미에 대해 성결교는 일제 강점기 말에 재림이라는 교리가 일본 국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강제 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성결교에 역사신학을 전공하신 8분이 논문을 써서 발간하게 됐다. 일제 식민 통치 시대에 큰 아픔을 겪었던 재림의 복음 때문에 성결인들이 한국교회 앞에 정체성과 자부심,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한다고 전했다.


또한 박명수교수(서울신대)“3·1운동 당시 성결교회는 출발부터 상당한 민족적인 정신을 가지고 출발했다. 성결교는 동양선교로 출발했는데, 그 정신으로 서울신학대학과 성결교회가 만들어지게 됐다, “당시 성결교 선교사 토마스가 일본군에게 구타를 당하게 되면서 이 사건이 기독교 내의 사건이 아니라 국제적인 사건으로 발전해 일본은 공식적으로 사과했다고 밝혔다


이어 박교수는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을 세계에 알려 세계가 주목하도록 했다. 미국에 있는 애즈베리 신학교에 이 사실이 퍼져 조선의 독립을 위한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경성성서학원 학생들이 참여해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충청남도, 강원도, 경상도, 평안남도 등에서 전국적인 곳에서 3·1운동을 도왔다. 한국성결교회는 당시 교세로 볼 때는 대규모로 하지 못했지만, 1907년에 시작한 신생교단으로서는 나라를 위해 기여를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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