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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6.1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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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예수께서는 법 위에(혹은 근저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법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공동체의 유익이라는 하나님의 근본 취지를 주목해야 법이 완성됨을 역설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5장 17~48절). 무릇 모든 일들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평가할 때면 비본질적인 데서 해방되어 본질적인 것을 주목해야 한다는 뜻으로 일반화시킬 수 있겠다.

마찬가지다. 국가와 신앙의 관계도 겉만 따지다보면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시대를 두고 국가의 형태는 변화되어 왔다. 고대 도시국가, 고대제국, 중세 봉건국가, 근세 전제군주국가, 근·현대의 민주적 국가체제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두고 달라졌다. 그러나 국가가 그 구성원들의 행복을 지향한다는 근본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을 부정하는 국가라면 이미 존립근거를 상실한 것이다. 국가는 구성원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며 그 구성원들은 그런 국가를 이루기 위해 정치에 관여한다.

그리스도 신앙인도 국가의 일원으로서 정치에 개입하는 존재다. 다만 신앙인에게 국가는 모든 국민이 행복할 수 있는 장치로서 그 존재가치가 인정되어야 하며, 그 기준에 따라 협조하거나 저항함으로써 국가존립의 근본취지를 살리려 노력해야 한다. 진리와 생명과 평화인 하나님 나라가 신앙인의 궁극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신앙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 그 본연의 임무를 썩 잘 해내지 못했다. 물론 난세마다 뛰어난 신앙인들의 눈부신 노력과 희생이 돋보였던 것이 사실이나,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기독교 신앙은 대체로 권력에의 아첨 도구가 되기 일쑤였다. 권력자는 신앙의 그런 약점을 교묘히 이용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신앙이 진리에의 투신이 아닌 이데올로기의 종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실례로 최근 한기총의 대표가 시국선언이라는 걸 내었다. 일부 적폐정치인들이 예전 민주투사들이 하였던 행동을 흉내 내어, 걸핏하면 단식이네 농성이네 장외집회 같은 것을 해대니 용기를 얻은 것일까. 하지만 말투는 흉내 내었을지 모르나 그 내용이 참으로 가관이다. 스스로 한국 기독교를 대표한다 자처하며 교회 이름으로 대통령 하야와 새로운 선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가 내세운 이유는 천박한 우상숭배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시대에 뒤떨어진 반공이념으로 평화통일 노력에 종북딱지를 붙이고, 검경·법조계·언론계 등등 사회 구석구석 잔존하는 적폐청산의 노력을 ‘국민의 이성적 생각을 마비시키는’ 고사정책이라 말했다. 생명 평화의 길을 제시하는 대신 돈의 논리를 앞세워 탈핵정책을 비방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노예이자 맘몬 숭배자임을 천명하고 말았다.

그는 매우 정치적이다. 현실 정치에 매우 구체적으로 개입하려 한다. 그런데 그 동기가 불순하다. 국가의 건전한 일원의 것도, 신앙인의 것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구현은커녕 국가 구성원들의 참된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는 모습이다. 그는 설교시간에 공공연히 특정인과 특정 정당을 찬양하며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이 장관자리를 할 수도 있다고 과시한다. 국가를 위해서도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국가에 예언함으로써 정치에 개입해야 하고, 국가는 신앙의 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바른 정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국가와 신앙은 만인의 행복이라는 거대담론 안에서 교류해야 한다. 신앙인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온전성이 어디에서 성취되는지 날마다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국가와 신앙의 관계가 건강해진다. 

/모퉁잇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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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정치에 개입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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