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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4.1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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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샷 2019-04-18 오후 2.58.14.png▲ 김근수목사
 
세상의 그 어떤 종교에도 부활절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죽음의 권세를 이긴 생명의 종교 기독교에는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인하여 부활절이 있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부활신앙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아울러 강조하는 말씀이다.

첫째, 예수의 부활은 우연한 사건이나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다. 성경은 ‘성경대로’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말씀한다. 이러한 예언의 성취는 죄의 부패와 오염으로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죽음이 끝이라면 인간은 얼마나 허무한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하게하심으로 또 그를 믿는 자들을 부활하게 하신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부활사건을 은폐시키려고 죽은 예수의 시체를 그의 제자들이 훔쳐가서 다시 살았다고 ‘조작설’을 퍼뜨렸다. 예수의 무덤을 지켰던 로마 군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 자신들이 받을 처벌이 두려워 예수는 사실은 기절했다가 돌무덤 속에 장사지냈을 때 다시 제정신이 들어 탈출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도한 것은 실상이 아니라 환상이었다고 역사적 사실을 부인했다.

오늘날 철학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몸이 다시 살아났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죽지 않은 그의 사랑의 사상이 진정한 의미의 부활의 의미라고 실존적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는 비역사가 될 수 없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에 두려워 도망갔었지만 다시 사신 예수를 뵙게 될 때에 생명을 잃어버리면서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다. 주님께서는 부활 후 세상에 40일을 더 계시면서 열한 차례나 오백여 명의 사람들에게 보이셨다. 그러므로 신앙은 부활의 복음 위에 견고히 서 있다.

셋째, 현재적 부활을 믿는 신앙이다.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에게 믿음으로 붙어있는 우리들의 부활을 현재적으로 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경적 부활을 믿는 사람은 그 역사성만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적 부활까지 믿는 신앙이다. 따라서 죽음의 공포와 절망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 1919년 3월 1일의 만세 사건은 부활신앙의 산물 이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의 잔인한 핍박과 고문,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은 것은 현재적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며, 생명의 미래가 지금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넷째, 미래적 부활을 믿는 신앙이다. 성경은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우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된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영화로운 부활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이다. 이 세상은 삶의 전부가 아니라 한 부분임을 확신한다. 잠시 잠깐 후에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 실성만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다시는 썩지 않는 산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을 믿는 것이다. 천국 소망, 부활 소망, 영생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부활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렇게나 막 살지 않는다. 세상이 어려워도 자학하거나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활신앙으로 겉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이다.
/칼빈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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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으로 새롭게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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